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중국의 국가원수는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었다. 장쭤린은 국제무대에서 보여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능력을 높이 샀다. 무슨 자리건 맡아 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번번히 거절 당하자 꾀를 냈다. “외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고 들었다. 나는 이런 전쟁은 할 줄 모른다. 외교사절과 접견하는 자리에는 참석해 주기 바란다. 국가의 이익이 걸린 문제다.” 구웨이쥔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장쭤린이 동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장쭤린과의 왕래가 빈번하다 보니,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도 저절로 알게 됐다. 장쉐량은 열두살 위인 구웨이쥔을 잘 따랐다. 골프장은 물론이고 여자 친구 만날 때도 같이 가곤 했다. 여자 취향이 제 각각이라 마찰은 없었지만,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만은 예외였다. 장쉐량의 호기심과 황후이란의 끼가 화근이었다. 구웨이쥔은 모른 체했다. “부인들이 뭐하고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세상 천지에 없다. 나는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장쭤린이 일본군에게 폭사 당한 후 아들 장쉐량이 동북의 대권을 장악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연합해 전국의 2인자로 부상한 장쉐량은 캐나다에 정착한 구웨이쥔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체포령은 형식에 불과하다. 돌아올 준비를 해라. 부인도 꼭 데리고 와라.”
장제스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외교관을 물색할 때였다. 장쭤린·장쉐량 부자와 구웨이쥔의 관계도 잘 알고 있었다. 장쉐량의 청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외교문제가 산적해 있다. 정부를 위해 일할 생각이 있다면, 명예회복을 책임지겠다.” 구웨이쥔은 장쉐량의 통치 지역인 베이징으로 귀국했다. 장제스의 중앙정부가 있는 난징(南京)엔 갈 생각도 안 했다. 선양(瀋陽)과 베이다이허(北戴河)를 오가며 자문에만 응했다.
구웨이쥔의 생모가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내려온 구웨이쥔은 상하이 시장이 빈소를 지키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장제스 위원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말을 듣자 머리가 복잡했다. 장례를 마치자 시장이 설득에 나섰다. “나와 함께 난징으로 가자. 체포령도 이미 철회했다.” 구웨이쥔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징에서 달려온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쑹쯔원(宋子文·송자문) 남매도 외교와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는 외교 귀재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나는 외교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외교는 국가의 이익만 염두에 두면 된다. 정치는 당파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뭐랄 사람이 없다. 정치에는 흥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 외교가 각 정파의 이익에 휘둘리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더 이상 끼어들고 싶지 않다.”
이 무렵, 상하이의 다화호텔(大華飯店)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하객의 면면이나 규모가 2년 전 같은 곳에서 열린,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식에 버금갈 정도였다. 청년 시절, 신부 할아버지에게 도움 받은 적이 있던 구웨이쥔도 초청을 받았다.
신랑 양광성(楊光泩·양광생)은 국민정부의 외교부 상하이 특파원, 2년 전인 스물 일곱 살 때 칭화대학 국제법 교수와 외교부 고문을 역임한 당대의 준재였다. 삐쩍 말라 보였지만, 프린스턴대학 유학 시절 골프와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할 정도로 건장했고, 성격도 좋았다. 사교성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대형 비단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이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릴 때부터 입만 열면 아들에게 일렀다. “자라서 구웨이쥔 같은 외교관이 되라. 외교는 별 게 아니다. 남녀관계와 흡사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외교관들은 한결같이 여자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고 뒤처리가 깔끔했다. 플레이보이 기질이 없는 사람은 외교관 자질이 없다. 구웨이쥔을 본 받아라. 돈은 내가 대마.”
신부 옌유윈(嚴幼韵·엄유운)은 옌신허우(嚴信厚·엄신후)의 손녀였다.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출신인 옌신허우는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강했다. 고향의 전당포 점원을 거쳐, 열일곱 살 때 상하이에 나와 금은방에 일자리를 구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옌신허우가 직례총독 리훙장(李鴻章·이홍장)에 발탁된 배경은 미궁 투성이다.
당대의 권력자에게 신임을 받은 시골 청년은 부동산과 무역에 눈을 떴다.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의 요충지에 닥치는 대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상하이에 눌러 앉았다.
옌신허우는 방직과 제분에도 손을 댔다. 현대식 기계를 갖춘 중국최초의 기업인이기도 했다. 중국 최대의 금융기관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의 초대 총장도 옌신허우외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상하이 상공회의소 초대 주석도 마찬가지였다.
옌신허우는 자손이 귀했다. 옌유윈의 아버지 옌쯔쥔(嚴子均·엄자균)은 버는 것보다 쓰기를 좋아했다. 자선사업가로 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였다. 결벽증도 심했다. 자녀들에게 한번 입은 옷은 다시 못 입게 했다. 친구도 적었다. 훗날 사위가 되는 구웨이쥔과 장쉐량 외에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계속>
김명호
손금 탓에 남친에게 딱지 맞은 갑부의 손녀 옌유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2-
1923년 가을, 상하이의 유명 출판사에 준수한 광둥(廣東)청년이 입사했다. 나이는 23세. 워낙 말단이다 보니 제대로 된 책 편집에는 끼어들 엄두도 못 냈다. 그림에는 소질이 있었다. 아동도서 편집실에서 온갖 눈치를 보며 도안에만 매달렸다. 만드는 책마다 실패했다.
여직원들 사이에는 인기가 좋았다. 경리 직원은 은행에 갈 때마다 이 청년을 데리고 다녔다. 상하이 여자상업은행 이사회 회장은 애들 책을 좋아하는 40대 초반의 과부였다. 우연히 은행에 나왔다가 탐스러운 청년을 발견했다. 먼저 말을 걸었다. 청년은 여인이 들고 있는 책을 보자 얼굴이 빨개졌다. 몇 달 전, 자신이 직접 만든 책이었다.
은행 이사장과 젊은 출판사 직원은 취향이 비슷했다. 같이 차 마시고, 산책도 자주했다. 청년은 화보(畵報)에 관심이 많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 회장은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다. “자금을 댈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네가 뭘 하건 입도 벙긋 안 하겠다.”
1926년 2월에 첫 선을 보인 양우화보(良友畵報)는 찍기가 무서웠다. 3일만에 초판이 매진되고, 재판·3판도 순식간에 가판대에서 모습을 감췄다. 1945년 10월 정간되기까지 단 한 번도 재고가 남은 적이 없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화보를 멀리했다. 양우화보만은 예외였다. 겨드랑이에 끼고 거리를 활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자들은 화보의 품격에 만족했다. 화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남녀불문, 가는 곳마다 얘깃거리를 몰고 다녔다. 실린 인물들에 관한 반응도 “실릴만한 사람이 실렸다”며 한결같았다. 옌신허우(嚴信厚·엄신후)의 손녀 옌유윈(嚴幼韵·엄유운)과 젊은 외교관 양광성(楊光泩·양광생)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옌유윈은 1919년, 열네 살 때 톈진(天津)의 외국인학교에 입학했다. 4년 후, 집안이 상하이로 이사한 후에도 톈진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교회학교이다 보니 규율이 엄했다. 주말만 되면 엄마가 프랑스 요리사를 데리고 톈진으로 왔다. 2014년 가을, 109세 생일을 앞둔 옌유윈은 당시를 회상했다. “엄마는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움직일 때마다 일꾼 수십명을 몰고 다녔다. 파티라면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엄마 따라 파티에 간 적이 있었다. 요란한 파티였다. 상석에 앉아 있던 외교부장 구웨이쥔(顧幼鈞·고유균)과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아버지와 친구 사이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구웨이쥔은 그저 그랬고, 장쉐량은 총기가 넘쳐 보였지만, 피차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훗날 나의 좋은 친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어울리고, 애들은 애들끼리 어울렸다. 외교관 장뤼푸(蔣履復·장이복)의 넷째 딸 장스윈(蔣士雲·장사운)도 이날 처음 만났다. 나보다 일곱살 어린 장스윈은 나를 친언니 이상으로 따랐다. 장쉐량이 평생 만난 여인 중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였다는 회고를 남길 정도로 지혜와 애교를 겸한 재원이었다.”
1925년 여름, 상하이의 후장(滬江)대학이 여학생 모집 공고를 냈다. 옌유윈은 엄마의 미국유학 권고를 뿌리쳤다. 후장대학 여학생 기숙사는 악명이 높았다. 해만 지면 외출을 금지하고, 남학생 방문은 어느 시간이건 허락하지 않았다. 집에도 한 달에 한 번만 갈 수 있었다.
옌유윈은 집에 갈 때마다 부모의 입학 선물인 자동차를 직접 몰았다. “남학생들은 내 이름을 몰랐다. 다들 ‘Eighty Four’라고 불렀다. 내 차 번호가 84였다. 2년 후, 푸단(復旦)대학으로 전학했다. 유일한 여학생이다 보니 기숙사 입주가 불가능했다. 집에서 학교를 다니니 살 것 같았다. 언니와 오빠들은 모두 영국과 미국에 유학 중이었다.”
당시 상하이의 공원이나 찻집에는 점쟁이들이 죽치고 앉아 있었다. 고객은 남자 친구와 함께 온 젊은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옌유윈도 축구 선수로 명성을 떨치던 남자친구와 함께 손금을 봤다. 점쟁이는 주책바가지 늙은이였다. 옌유윈에게 두 명의 남편이 있을 거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날 이후 건장하고 잘생긴 남자 친구는 옌유윈을 피했다.
엄마에게 하소연했더니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나왔다. 엄마가 엄숙한 표정부터 짓기에 말을 가로챘다. “다른 건 보지 않겠다. 내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가난뱅이라도 좋다. 내 맘에만 드는 사람이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하자 엄마는 의아해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온갖 호사를 다 누린 애다. 돈 없는 사람과는 하루도 못 산다”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옌유윈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옌유윈과 양광성은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토요일 오후, 천천히 차를 몰던 옌유윈은 백미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기를 쓰고 따라오는 청년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차를 세웠더니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지적인 용모에 키가 훤칠하고 당당했다. “네가 누군지 안다. 전부터 한번 만나고 싶었다. 같이 커피를 한 잔 하고 싶어서 달려왔다.” 온 몸이 땀 투성이였다. 옌유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김명호
‘차기 남편’ 된 구웨이쥔, 남편에게 소개 받은 옌유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3-
1928년 초,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전국을 석권했다. 상하이에 상주시킬 주재원을 물색하자 외교부가 나섰다. 칭화대학 국제법 강사 양광성(楊光泩·양광생)을 추천했다. “남과 다투는 법이 없고, 친화력이 뛰어나다. 양보를 잘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결과를 이끌어내는 재능이 있다. 미국 유학 시절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고, 골프에 능하다. 플레이보이 기질이 농후하지만, 여자 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다. 춤도 잘 춘다. 외교관으로 적격이다. 동갑인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는 못 가는 곳이 없는 사이다. 여자 취향이 달라, 티격태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장쉐량은 양광성이 미혼인 것을 제일 부러워한다.”
옌유윈(嚴幼韵·엄유운)의 부모는 딸이 외교부 상하이 주재원과 만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모른 체하며 젊은 외교관이 찾아오기만 기다렸다. 명분은 만들면 되는 것, 옌유윈과 결혼을 결심한 양광성은 외교부의 판단에 걸맞게 행동했다. 하루는 옌유윈을 찻집으로 불러냈다. 헤어지기 전 10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옌유윈은 별 생각 없이 손가방을 열었다. 다음날 해질 무렵, 말쑥한 청년이 옌유윈의 집을 찾아왔다. “빌린 돈을 갚으러 왔습니다.” 기습당한 옌유윈의 부모와 언니들은 양광성을 정중히 대접했다.
저녁까지 얻어먹은 양광성은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리를 뜨며 옌유윈은 본체만체, 미래의 장인과 장모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결혼식 날 따님에게 흰 드레스를 입히겠습니다. 신혼여행은 유럽과 미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외교부장(장관)도 3개월 간 휴가를 허락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흰색은 효(孝)를 의미했다. 부모의 장례식 외에는 백색 옷을 입지 않을 때였다. 옌유윈의 아버지도 양광성 못지 않았다. 한 차례 웃더니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결정할 문제”라며 응수했다. 옆에 있던 옌유윈의 언니들이 “와” 하며 박수를 보냈다.
양광성은 외교부 정보국 부국장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931년 봄, 런던 총영사 임명장을 받았다.
이듬해 1월, 파리에서 열린 유럽주재 공관장 신년 모임에 옌유윈과 함께 참석했다. 외교계에 복귀한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이 프랑스 주재 공사(지금의 대사)로 부임한 직후였다. 옌유윈의 회상을 소개한다. “광성에게 구웨이쥔을 정식으로 소개 받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 부부는 파리에 머무르며 손님 접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탈리아 공사의 딸 장스윈(蔣士雲·장사운)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장스윈은 여전히 귀엽고 예뻤다. 장쉐량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며 훌쩍거렸다. 일본의 침략으로 동북에서 철수한 장쉐량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 구웨이쥔이 국제연맹의 ‘리튼(Lytton)조사단’의 일원으로 동북에 가게 됐다고 하자 만세를 부르던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구웨이쥔의 부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에 관한 얘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황후이란은 개를 좋아했다. 가는 곳마다 애완견을 안고 다녔다. 사람들과 있는 것보다 더 어울렸다. 중국 외교관들은 몰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휴가도 같이 갈 때가 많았다. 몬테카를로에 갔을 때 황후이란은 구웨이쥔과 같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개와 외국인들하고만 놀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구웨이쥔은 황후이란보다는 같이 온 부인네들과 산책하기를 즐겼다. 황후이란의 질투는 품위가 있었다. 남의 부인과 마작을 하는 구웨이쥔의 머리에 찻물을 천천히 붓는 것을 보고 놀랐다. 구웨이쥔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미동도 않고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황후이란이 나가자 같이 있던 남의 부인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1933년 가을, 중국 정부는 양광성에게 귀국을 명령했다.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쓰촨(四川) 5개성의 외교 업무를 총괄해라.” 양광성은 상하이에 설립한 중국신문사 사장직도 겸했다.
장쉐량은 시도 때도 없이 양광성의 집을 찾았다. 옌유윈은 100세가 넘어서도 60여년 전 장쉐량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광성과 장쉐량은 새벽마다 골프를 치러갔다. 나는 늦잠꾸러기였다. 두 사람이 18홀을 돌고 올 때까지 침대에 있을 때가 많았다. 광성이 나를 깨우러 들어오면 장쉐량도 신발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빨리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보챘다. 3년 후 장쉐량은 청사에 남을 사고를 쳤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감금해 항일전쟁을 촉구했다. 장쉐량은 국공(國共)합작을 이루게 했지만, 60여년 간 자유를 상실했다. 내전도 그치지 않았다. 광성은 장쉐량의 몰락에 분통을 터뜨렸다. 허구한 날 술만 마셔댔다.”
옌유윈은 장제스의 동서인 재정부장 쿵샹시(孔祥熙·공상희)에게 하소연했다. 쿵샹시는 영국 왕 조지6세의 대관식 참석자 명단에 양광성을 추가했다.
공사로 승진한 양광성의 새로운 임지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전시 재정을 담당하던 쿵샹시는 필리핀 공사를 권했다. “필리핀에 부유한 화교들이 몰려 있다. 이들에게 모국의 전쟁자금을 모금할 생각이다. 너 외에는 적합한 인물이 없다.” <계속>
김명호
군자금 지키려다 일본군에 총살당한 양광성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4-
중일전쟁 발발 초기인 1937년 11월, 양광성(楊光泩·양광생)은 필리핀에 부임했다. 직급은 공사였지만 공식 직함은 마닐라 총영사였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이 관할권을 쥐고 있었다. 대사관 설치가 불가능했다.
프랑스에 머물던 옌유윈(嚴幼韻·엄유운)도 파리를 떠났다. 중도에 홍콩에서 장스윈(蔣士運·장사운)을 만났다. 연금중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생각하며 대성통곡했다. 옌유윈이 마닐라에 도착하기 전부터 중국 총영사의 부인이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류 도둑들은 옌유윈이 오기만 기다렸다.
70여년 후 옌유윈은 재미있는 구술을 남겼다. “도착 며칠 후 남편과 함께 맥아더가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왔다. 집안에는 금고가 없었다. 착용했던 패물들을 옷장에 넣고 잠들었다. 깨어보니 흔적도 없었다. 경찰에 신고했다.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답을 들었다.”
미국인 사회에 떠돌던 얘기도 곁들였다. “경찰국장이 내 패물들을 대통령 부인에게 선물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국장은 도둑질에 동원한 부하들을 해외로 내보냈다. 보석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명품들이었다. 내가 파리와 몬테카를로·이탈리아 등에서 구입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와 반지는 당대 최고 디자이너들의 작품이었다. 나는 재물은 잃었지만, 가장 소중한 생명과 건강, 가정은 잃지 않았다며 자신을 달랬다. 평정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리핀에는 10만여명의 화교가 있었다. 화교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렸다. 양광성은 우수한 화교들을 미국인 사회에 끌어들였다. 필리핀 고관들과도 연결시켰다. 필리핀 사람들은 화교들을 싫어했다. 혐오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툭하면 화교가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들을 습격했다.
양광성은 화교 상인들에게 3일간 파업을 종용했다. 식자재 구입에 불편을 느낀 필리핀 사람들이 화교의 중요성을 깨닫자 성장과 시장들을 관저로 초청했다. “중국은 예전부터 지방 수뇌들을 부모관(父母官)이라고 불렀다. 필리핀에는 중국인이 없는 곳이 없다. 이들의 근면과 노동력은 필리핀 사람들의 생활 개선에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부디 자식처럼 대해주기 바란다.”
양광성이 필리핀에 온 주요 목적은 전쟁자금 모금이었다. 산재해 있는 도서(島嶼)와 도시에 발자취를 남겼다. 필리핀 사람 중 40%가 중국 혈통이었다. 4년간 미화 6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은 옌유윈을 중국부녀위문단 필리핀지부 명예주석에 위촉했다. 옌유윈은 돈 많은 화교 70여 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활절 예배를 마친 후 부인들과 조촐한 다과회를 갖고 싶다. 참석을 권유하기 바란다.” 부호 부인 6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갖고 있던 황금을 쾌척하자 다들 얼떨결에 따라 했다. 이날 모금한 금품으로 의료품 100만 상자를 중국전선에 보냈다.
41년 12월 8일,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했다.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일본은 미군 관할지역인 필리핀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튿날 마닐라의 상업지역이 불구덩이로 변했다. 양광성은 전쟁 의연금을 낸 화교 명단을 소각했다.
미군은 마닐라가 파괴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일본군에게 저항할 뜻이 없다며 개방도시를 선포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총독이나 다름없던 맥아더는 마닐라 철수를 결정했다. 양광성에게 가족과 함께 떠나자고 재촉했다. 양광성은 맥아더의 청을 거절했다. “이곳에 남겠다. 화교들을 보호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42년 1월 2일, 일본군이 마닐라에 진입했다. 미군은 유류창고를 폭파하고 철수했다. 도시 전체가 시꺼먼 연기로 뒤덮였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튿날, 대통령궁과 미군 사령부에 일장기가 나부꼈다.
마닐라를 점령한 일본군은 영국인과 미국인 체포에 나섰다. 양광성도 무사하지 못했다. 영사관 직원 7명과 함께 일본군들에게 끌려갔다. 지켜본 큰 딸이 구술을 남겼다. “우리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앳된 일본군이 아버지를 체포하러 왔다. 사병들은 예의 바르고 신속했다.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옷 보따리를 들고 따라갔다. 엄마 따라 몇 차례 면회도 갔다. 한번은 아버지가 ‘빨리 자라서 내 대신 엄마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버지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화교 10만여명을 구금할 계획이었지만, 경비가 문제였다. 대신 양광성과 화교 영수들을 회유했다. “모금한 돈을 내놔라. 일본군 2000명이 기관총을 뿜어대면, 1분 내에 화교 10만을 몰살시킬 수 있다.”
양광성은 거절했다. 4월 17일, 일본군은 비밀리에 양광성과 영사관원 7명을 총살했다. 남편이 죽은 줄 모르던 옌유윈은 영사관 직원 가족들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봤다.
45년 2월 3일,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이 마닐라에 돌아왔다. 함께 온 윌리엄 도널드가 맥아더의 부인과 함께 옌유윈을 찾았다. “양광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중국은 내전이 멀지 않았다. 애들 데리고 미국으로 가라.” <계속>
김명호
남편 잃은 옌유윈 앞에 ‘백기사’로 나타난 구웨이쥔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5-
1945년 4월 12일, 옌유윈(嚴幼韵·엄유운)은 딸들과 함께 마닐라를 떠났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그의 남편 양광성(楊光泩·양광생)과 친분이 두터웠다.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광성은 훌륭한 외교관이었다. 시신을 찾기 전 까지는 죽음을 믿을 수 없다. 발견 즉시 중국으로 운구하겠다.”
맥아더의 배려는 극진했다. 배 안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에 도착해서도 국빈 대우를 받았다. 여권이 없다 보니 비자가 있을 리 없었다. 미 국무부 직원이 세관과 이민국으로 안내했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국무부 대표가 옌유윈을 방문했다. 양광성이 일본군에게 참살 당했다는 소식을 정식으로 통보했다. 그날 밤 옌유윈은 난생 처음 통곡했다.
5월 8일, 유럽 전선에서 포성이 그쳤다. 50개국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목적은 ‘연합국 헌장’ 기초(起草)였다. 소식을 접한 옌유윈은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있던 중국 대표단은 옌유윈을 환대했다. 단장 쑹쯔원(宋子文·송자문)과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은 양광성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구웨이쥔이 가는 곳마다 붙어 다니던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자 쑹쯔원이 넌지시 일러줬다. “황후이란과는 남이나 마찬가지다. 구웨이쥔은 젊을 때부터 장모의 총애를 받았다. 장모에게 상처를 줄까 봐 이혼을 못하고 있다. 머지않아 워싱턴에 부임할지도 모른다.”
구웨이쥔은 심할 정도로 옌유윈을 보살폈다. 큰 딸이 복통으로 고생할 때 들쳐 업고 병원까지 달려갈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끝나자 중국 대표단은 귀국을 서둘렀다. 구웨이쥔은 미국을 떠나기 전날 옌유윈을 불러냈다. “뉴욕으로 가라. 너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다.”
옌유윈은 구웨이쥔이 시키는 대로 했다.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국 정부가 남편의 밀린 봉급이라며 돈을 보내왔다. 액수가 적지 않았다. 마땅한 일자리를 찾았다. 오라는 곳은 많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유엔 의전관이 공석이라는 말을 듣고 지원서를 냈다. ‘돈은 얼마를 줘도 상관 않겠다. 방값 정도면 된다’는 말을 첨가했다. 당장 근무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다. 구웨이쥔이 미국 대사로 왔다는 말을 듣고 반가웠다.
유엔 근무 1년이 채 못됐을 무렵, 양광성의 국장(國葬)이 난징(南京)에서 열렸다. 엔유윈도 귀국했다. 장례를 마치고 잠시 상하이의 옛집을 찾았다. 오빠들이 마닐라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난 엄마의 유산이라며 뭉칫돈을 줬다. 옌유윈은 난징의 진링(金陵)여자대학에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기증했다.
유엔은 박봉이었다. 근무 환경은 좋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수준 덕이었다. 하루 하루가 즐거웠다. 유엔 양농(粮農)조직회의 대표단 단장을 겸하던 구웨이쥔은 유엔에 올 일이 많았다. 옌유윈과 접촉할 기회가 빈번했다. 구웨이쥔의 큰딸도 유엔의 일원으로 합세했다.
1948년 겨울, 둥베이(東北)과 화베이(華北)을 석권한 중공은 승리를 확신했다. 특급 전범 명단을 발표했다. 43명 중 구웨이쥔의 이름이 빠질 리 없었다.
1년 후, 타이완으로 천도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외국주재 대사들을 갈아치웠다. 주미대사 구웨이쥔은 예외였다. “구웨이쥔은 중국의 외교를 상징하는 사람이다. 수십 년간 자신의 영역에 확실한 흔적을 남겼다. 담판에는 따라갈 사람이 없다. 남자가 분명하지만, 사고가 중성적이고, 정치에 관심이 없다. 청말 서구 열강과 외교무대에서 맞섰던 리훙장(李鴻章·이홍장) 이후에는, 누가 뭐래도 구웨이쥔이다.”
장제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구웨이쥔은 확고한 담판 원칙이 있었다. 완전한 승리, 전승론(全勝論)을 주장하는 외교관들을 경멸했다. “외교는 담판이다. 중국인들은 툭하면 ‘寧爲玉碎 不爲瓦全(녕위옥쇄 불위와전·산산조각 난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는 되지 않겠다)’을 부르짖는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것보다 원칙을 견지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러고 싶다. 단, 외교문제는 별개다. 이런 사람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국가는 영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칙만 고집하는 사람을 외교무대에 내보냈다간 나라가 절단 난다. 담판은 타협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다. 목적했던 것의 50%에서 1%만 더 얻어내도 대성공이다.”
구웨이쥔은 외교와 내정(內政)은 다르다고 봤다. 담판 원칙을 말할 때마다 여지(余地)를 강조했다. “내정의 대상은 국민이다. 외교는 국가가 대상이다. 내정은 돈만 풀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 국민은 무지하고 무기력하다. 공수표 남발해도 금방 망각한다. 외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확답 보다는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구웨이쥔은 주말마다 뉴욕으로 왔다. 딸 보러 온 건지, 옌유윈을 만나러 온 건지, 공무 때문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애건 어른이건, 자주 만나다 보면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새벽에 산책하는 모습 봤다는 사람이 한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남들이 뭐라건 말건 끄떡도 안 했다. 내놓고 동거를 시작했다. <계속>
김명호
정치와 ‘불가근 불가원’… 구웨이쥔, 뼛속까지 외교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6-
두 번째 주미대사 시절,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은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황후이란도 현실을 인정했다. “구웨이쥔은 날이 갈수록 변해갔다. 한 집에 살며 같은 밥만 먹을 뿐, 의견도 나누지 않았다. 각자 따로 놀았다. 그러나 같이 사는 원인은 친정 엄마 때문이었다. 평소 엄마는 구웨이쥔을 극진히 챙겼다. 구웨이쥔도 사위 노릇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노년의 장모를 워싱턴으로 모셔다 함께 살았다.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렀다. 나는 감격했다. 1956년 편안한 마음으로 37년에 걸친 부부관계를 청산했다.”
홀가분해진 구웨이쥔은 대사직에서 물러났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절세의 외교관을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에 임명했다. 임지인 헤이그에 부임한 구웨이쥔은 동거 중이던 옌유윈(嚴幼韻·엄유운)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마지막 직함은 국제사법재판소 부소장이었다. 은퇴 후에는 뉴욕에 정착했다.
중국의 20세기는 격변의 연속이었다. 난징의 국민정부가 베이징의 북양군벌을 제압했지만, 중공에게 대륙을 내줬다. 그 와중에서 구웨이쥔의 처신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 차례 실패자 편에 섰고, 두 번 수배자 신세로 전락했지만 승리자들은 그 때마다 관용을 베풀었다. 1926년, 국민정부의 북벌군이 중국의 배꼽 우창(武昌)을 점령했다. 베이징 정부의 국무총리였던 구웨이쥔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하지만 국민정부 2인자 장쉐량(張學良·장학량)덕에 수배령이 풀렸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구웨이쥔은 국제연맹 리튼 조사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침략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국·공 양당이 정권을 놓고 온갖 연출을 할 때 구웨이쥔은 미국의 조야에 국민당 지원을 호소하고 다녔다. 승리자 중공은 해외 사절 중에서 구웨이쥔에게만 체포령을 내렸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1972년 9월, 마오쩌둥은 유엔 대표단으로 떠나는 장한즈(張含之·장함지)에게 당부했다. “미국에 가면 구웨이쥔을 만나라. 내 안부 전하고, 적당한 시기에 대륙을 방문하라고 일러라.”
구웨이쥔이 국·공 양당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기까지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50여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 상부의 지시를 받거나, 건의를 할 때마다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을지를 스스로 고민했다. 나는 평생 당파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권력투쟁에 말려 들다 보면 국가의 이익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외교 문제를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정치적 득실이나 야심을 실현시키려 한다면, 담판은 파열되기 마련이다. 정치와 외교는 구분돼야 한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은 외교관 자격이 없다. 정치가가 외교에 나서는 것도 위험하다.”
구웨이쥔은 일반 중국인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학설이나 주의(主義)를 존중하지 않았다. “미국의 민주당이나 공화당은 명확한 사상체계가 없다. 그러다 보니 양당간에 소통이 가능하다. 중국의 정당은 노동자나 농민·상인 등 각 분야에서 기반도 약하고 이익도 대변하지 못하면서 학설과 주의를 너무 중요시 여긴다. 정당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간단하다. 국가를 이끌고 나갈 고민의 충돌이 아니라 개인의 지위 때문이다. 정견의 차이는 국내 문제에 한정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해외에서 정부의 체면을 유지하기 힘들다. 정확하고 모든 것을 초월한 정치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념과 학설이 비슷하다. 왜 싸우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구웨이쥔은 평생 독자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정파에 소속된 적이 없다 보니, 정치투쟁이나 군사문제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정치적인 두뇌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즐거웠다. 국가 이익과 민족의 존엄을 위해 외교문제를 처리했다. 중국은 재미있는 나라다. 정부의 명령은 통일된 적이 없고, 군벌들은 분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럴 때 일수록 무지한 통치자가 편했다. 뇌물로 총통이 된 차오쿤(曹錕·조곤)도 외교문제는 내게 일임했다.”
구웨이쥔은 장제스와도 별 인연이 없었다. 장제스의 권유로 국민당에 입당했고, 중앙위원에 피선 됐지만 이름뿐이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공산당과도 국제회의에 동행했던 몇 명과 간단한 안부를 주고 받는 게 고작이었다.
구웨이쥔은 1985년 11월, 옌유윈의 침실에 붙어 있는 욕조에서 세상을 떠났다. 황후이란은 1993년 겨울, 100번째 생일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구웨이쥔의 부인이었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남편은 중국의 1세대 외교관으로 손색이 없었다. 오랜 세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정이 더 깊었다.”
옌유윈은 지금도 건재하다. 2014년 9월, 109번째 생일날 장수 비결을 털어놨다. “평생 보약 먹은 적이 없고, 운동도 하지 않았다. 지난 일은 금새 까먹고, 오늘 일만 생각했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