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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성(兵營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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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국가) 사적 제320호 - 소재지 울산 중구 서동 149-8외 - 지정일 1987.07.18 - 시 대 조선시대 - 소유자 국 유 - 관리자 중구청
병영성(兵營城)의 연혁
1) 고려말
고려말에서 조선초기까지 바다 건너 왜구의 침입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해안지방 전체에 걸쳐 있었는데, 울산 지방도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울산에 침입한 왜구의 횟수는 고려 공민왕 3회, 우왕 6회, 조선 태조 3회, 태종 1회, 세종 1회, 명종 2회였다.
고려말 관리였던 이첨(李詹)의 고읍성기(古邑城記)에 우왕 10년(1384) 울산은 "풀숲만이 눈에 띄었고 사슴들이 떼지어 놀았으므로 도둑이 마치 다람쥐처럼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하나 살지 않는 황폐화된 상태였다. 그래서 우왕 11년(1385) 봄에 도순문사 박위, 지울주사(知蔚州事) 김급이 왜구를 막기 위해 최초로 (울산)읍성을 쌓았다.
2) 조선초 축성
* 조선초기 남해연안 성곽 축조
우리 나라의 외적방어를 위한 전통적인 전략 전술은 평상시에는 일정지역에 거주하다가 유사시 집과 전답을 깨끗이 정리하고<淸野>, 미리 준비된 험한 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는<入保> 것이었다.
고려말에는 해안지대에 거주하는 백성이 없어 왜구가 오히려 육지 깊숙이 침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해안지대의 백성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이들 백성들을 보호하고 아울러 왜구가 육지 깊숙이 침입함을 방지키 위한 시설로 남해안 지방에는 왜구방어용의 읍성, 또는 관방성을 많이 축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울산지방에는 울산읍성, 좌도영성(내상성, 병영성), 언양읍성, 염포영성, 개운포성, 유포석보, 서생포진성 등이 축조되었다.
* 좌병영(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 군영)의 설치와 병영성 축조
울산에 병영성을 축성하게 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태조 6년(1397) 5월 도절제사(병사)가 경상도 4진(합포, 강주, 영해, 동래)의 첨절제사(첨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2- 태종 13년(1413) 7월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도를 좌 우도로 나누어 각각 병사를 배치하였는데, 태종 15년(1415) 좌병영의 위치는 경주 동남 20여 리 즉 경주 동면(東面) 토을마리(吐乙磨里)라 하였다.
토을마리는 지금의 모화(毛火 〓 털 + 불 ⇒ 톨말)인데 좌병영이 기박산성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울산에 전해오는 전설에, 좌병영이 기박산성에 있을 때 성을 쌓는데 동해쪽에서 큰 바람이 불어 깃발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남으로 날아가 지금의 병영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하여 좌병영을 울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3- 태종 17년(1417) 2월 좌병영을 울산군으로 옮기고, 이 해 울산의 거마곡(巨磨谷)에 병영성을 쌓았다.
4- 세종 즉위 원년(1419) 울산은 바다와 접하는 후미진 곳에 있어 사람과 물산이 희소하고, 또한 염포 근처에 있어 왜인들이 늘 왕래하며 염탐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좌도도절제사영을 내상(內廂)에 설치하였는데 군사가 불과 1백명이라 왜구들의 멸시를 당하는 바가 되었다.
5- 세종 7년(1425) 울산군 치소를 내상신성(병영성)으로 옮기게 하려는 계획이 다음 해 2월에 이루워졌다.
6- 세종 8년(1426) 10월 좌병사직을 혁파하여 병영을 우도 병영과 합쳐 (창원의) 합포성이 경상도 병영이 되었다. 이때 울산은 군수가 첨절제사의 직을 겸하고 울산진을 설치하였다.
7- 세종 18년(1436) 12월 다시 좌병영을 울산에 두기로 결정하여 다음해 1월에 병영성에 좌병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좌병영은 구한말 진위대로 바뀔 때까지 병영성에 두게 되었다.
* 기록을 통해 본 병영성
1- 경상도지리지(1425) : 좌도영성 둘레 622보, 내부면적 26결 4부 5속, 우물 3개
2- 세종실록지리지(1454) : 좌도영성은 군의 북쪽 바다입구로부터 3리 떨어져 있고, 둘레 622보, 병오(1426) 2월 군치를 성중으로 옮겼고, 우물 3개
3- 문종실록(1455) : 둘레 3732자, 높이 8자, 여장높이 3자, 적대(치성) 21개, 미축3개, 문4개, 옹성 4개, 해자 굴착 미완성, 여장 908, 우물 11개, 샘 3개
4-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 내상성 군의 동쪽 7리에 있으며, 둘레 3732자, 높이 9자, 영락정유(1417)석축, 유군창, 우물 7개, 도랑 2개, 호지 3개, 겨울 여름에도 가물지 않는다. [관방조]에 내상성은 군의 동쪽 거마곡리에 있으며 관문으로부터 7리이다.
5-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 석성, 둘레 3732자, 높이 12자, 우물 7개, 도랑 2개, 군창, 동융루, 조련고, 선위각 등의 건물
6- 대동지지(1864) : 좌병영은 태종 15년(1415)에 병마절제사영을 경주 동남 20여 리에 설치하였다가 17년에 계변성 북쪽, 곧 옛 군치로 옮겨 설치하였다. 선조 37년(1604)에 내상면, 곧 옛날 영을 설치하였던 곳으로 옮기어 설치하였다. 석성으로 둘레가 9316자, 우물 7개, 도랑 2개, 못이 있다.
3) 임진왜란과 조선후기 때의 병영성
* 임진왜란과 병영성
선조 25년(1592) 4월에 왜군의 침략을 당해 울산에서는 서생포 만호진성이 가장 먼저 함락되었다. 이때 울산 병영의 좌병사 이각은 울산군수 이언함과 같이 동래성으로 가다, 동래 근처의 소산역에서 언양으로 거꾸로 도망쳐 울산 병영성으로 돌아왔다.
당시 병영성에는 13개 고을 군사들이 다 모여 있었고, 안동판관 윤안성은 동문을 지키고 있어서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전의를 잃은 이각은 성을 비워놓고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치려하자 윤안성이 이를 반대하니, 그는 "서산에 출전하여 적이 성 밑으로 당도하면 성 내외가 서로 호응 협공함이 좋으리라" 하고 그의 첩을 먼저 성밖으로 탈출시켰다. 그도 성문을 빠져나간 뒤에 손으로 태화강 쪽을 가르키며 윤안성 등을 바라보고 "너희들은 적의 선봉이 이미 저쪽 들판에 가득차 있는 것을 모르는가" 하고 달아났다. 이 때 좌병영 병마우후 원응두도 또한 밖으로 도망치려 하니 윤안성이 소리 높여 "내가 이각을 베지 못한 것에 한하는 바 공 또한 그의 본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오"하니 감히 달아나지 못하다가 뒤에 또한 도망치고 말았다.
병영성의 사정이 이렇게 되고보니 장졸들은 모두 다 싸움에 뜻을 잃고 밤 사이에 달아나는 자가 늘어나서 싸우기에 앞서 흩어지고 말았다.
결국 병영성은 텅빈 성이 되고 4월 17일 ∼ 21일 사이에 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각은 나중에 임진강변에서 도원수 김원명에 의해 주살되었다.
울산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는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매우 치열한 의병활동(교과서에는 표시도 안 되어 있다)이 이뤄진 곳이었다(1592년 왜군과의 접전이 21회).
병영성에 대한 울산의병들의 최초의 기습공격이 5월 7일(일설 5월 5일)에 있었고, 7월 이후 태화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선조 26년(1593) 1월경 병영성과 울산읍성에는 좌병사 박 진 의 군 약 2만 5천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4월 18일경 왜의 대군이 침입하여 울산이 다시 왜의 수중에 떨어졌다가 7월 8일경 아군이 재탈환하여 8월경 성을 보수하였다 한다.
이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날 때까지 왜군은 약 6천명의 수성군을 서생포에 두고 주둔하였다.
선조 30년(1597) 3월 중순부터 왜군은 강화교섭에 실패하자 재침략(정유재란)을 자행하였는데, 이 또한 실패하자 전남 순천에서 울산에 이르는 해안에 본성 11개와 지성 7개를 쌓고 농성을 획책하였다.
울산에는 서생포왜성을 본성으로, 지성으로는 지금의 학성공원에 도산성을 쌓았다.
도산성은 가토(加藤淸正)가 설계하고, 부장 등 1만 6천 명이 오오다(太田一吉)의 감독으로 8월 20일경 축성을 시작하였다.
도산성은 전형적인 일본식 성으로 본성, 제 2본성, 제 3본성으로 되어 있으며, 이 성을 쌓으면서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고 그 돌을 가져다 성벽을 쌓은 것이 길이 1300여m, 높이 10∼15m였다.
이 도산성을 둘러싸고 조 명연합군과 왜군과의 격전이 이 해(1597) 12월 22일∼다음 해(1598) 1월 4일까지, 그리고 선조 31년(1598) 9월 21일∼25일까지 벌어졌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 조선후기 병영성
조선후기 병영성에 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하여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1-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때 울산의병들이 왜적을 무찌른 공이 크다 하여 도호부로 승격하였는데 병마절도사로서 부사를 겸하였다(광해군 때 분리됨)
2- 선조 37년(1604) 좌병영을 내상면, 곧 옛날 영(營)을 설치하였던 곳으로 옮기어 설치하였다.
병영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9316자, 우물 7개, 도랑 2개, 못이 있다.(대동지지)
3- 병영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9316자, 여장(첩) 851, 성문 4개, 우물 7개, 도랑 2개, 호지 3개(여도비지) 재부 동10리, 둘레 3720보(자의 오자), 높이 12자, 기미년(1859, 철종 10년)에 병사 이원희가 남문 밖으로 성을 쌓아 밖에 있던 장시(場市), 못, 정(亭) 모두가 성안에 들어 왔다 (영남읍지 울산부사례, 1895)
4- 청구도, 대동여지도 영남읍지 중 1832년, 1871년 울산부사례에 실린 지도를 보면 울산의 좌병영에 성곽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4) 임술농민항쟁과 병영성
철종 13년(1862) 임술년은 삼남지방(경상, 전라, 충청)의 농민항쟁으로 봉건체제가 무너져가는 것을 증명한 해였다. 울산에서는 1862년과 1875년 두 차례에 걸쳐 농민항쟁이 있었다. 1862년 임술농민항쟁의 기록에 병영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19세기 울산의 호구 수는 8586호에 인구 32,376명으로 중읍에 속한다. 농민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좌병영의 환곡(삼정문란 중의 하나) 때문이며 그밖에 수령의 불법적인 탐학이 문제였다.
1862년 외(外) 5면의 농민들은 먼저 향회를 열어 논의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는 집단시위를 결정하고 4월 1일 읍 근처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먼저 울산본부(本府)를 향하여 나아갔다. 그러자 부사 서 긍순은 이들에게 '관이 어찌 농민들의 바램을 따르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농민들의 요구에 쉽게 굴복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기세를 올리며 자신들에게 직접 피해를 준 당사자인 병영성을 향하여 나아갔다.
가는 과정에 평소 행실이 나쁜 서리의 집 8채가 부숴졌다.
자신의 실책으로 야기된 농민들의 시위에 위협을 느낀 병사 정 주응은 즉시 관군을 동원하여 네 개의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농민들은 옆으로 돌아 동야문(東野門) 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러자 병사는 이들에게 발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총에 맞아 죽은 자 2명, 창에 찔려 죽은 자 2명, 사로잡혀 형을 받아 죽은 자 5명 등 사망자만 9명이고 보면 그외 많은 사람들이 다쳤으리라 여겨진다.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모여, 향회를 열어 죽은 동료들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후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더 이상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울산농민항쟁은 관에서 무력으로 시위농민을 바로 공격하여 숱한 인명을 학살하면서 항쟁의 전개를 봉쇄한 사례로서 주목된다.
5) 구한말의 병영성
1895년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되었는데, 7월 15일 각 도의 병영 및 진영, 진보가 폐지되어 울산의 병영도 470여 년만에 없어지게 되었다.
1900년 7월 29일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하면서 울산에는 진위 제 3연대 제 3대대가 배치되었다가 1902년 1월 9일 제 3대대를 경주로 옮겼다(대대 병력은 장교, 하사 108명, 병졸 900명으로 합 1008명).
1905년 4월 일제의 내정간섭으로 진위연대가 진위대대로 축소되고 경주에 있던 제 3대대가 분견대로 축소되어 주둔하였다가,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었다.
울산에 남아 있던 위관(尉官) 2명이 이끄는 100명이 8월 17일에, 19일에는 경주의 분견대가 해산되었다.
최현배 선생의 [내 고향의 자랑(울산풍물)]이라는 유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병영에는 광무 11년(1907)까지 병대가 주둔하였으니 내가 어릴 적 장대(將臺)마당에서 그 조련하는 것을 구경하였고, 망월루터(현 남외동 동쪽)에서 군대의 해산식을 바라보았다"라고 하여 1907년까지 병영에 군대가 주둔하였던 것을 증명해 준다.
병영성의 역사문화 환경
1) 병영성의 위치와 환경
우리나라는 신라말 이후 풍수지리적 사고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성곽도시, 자연취락을 막론하고 절대적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산을 숭상(산악숭배)하여 산을 등져야 방풍이 되므로 뒷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이것이 풍수지리와 결합되어 조선시대 모든 성곽과 취락이 진산(주산)을 갖게 되었고, 바로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풍수해석으로 진산은 도시계획의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성곽도시의 형태는 4각형과 원형이 많았고 4개의 성문이 일반적이었다.
성 안은 4개의 성문을 연결하는 십자형 가로망이 정론(定論)이었다. 병영성도 북쪽 장현동의 황방산(黃坊山, 142m)을 주산으로 하고 동천을 성 앞에 두는 배산임수와 4개의 성문, 그리고 십자형 가로망을 갖추고 있었다.
병영성은 행정구역상으로 중구 동동과 서동 및 남외동 세 개의 동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영면, 병영동 등의 지명으로 불리웠으나, 최근 10여년 동안 성 안밖으로 주택이 밀집되면서 동 서 남외동으로 나뉘게 되었다.
현재 병영성이 외관상 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독립 구릉처럼 보여지지만, 병영성이 축조될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의 주위 평야(울산공설운동장 주변의 넓은 들 - 정지말)는 모두 바닷물로 가득찬 바다였고, 특히 성 동쪽에 흐르는 동천을 통해 성 북문 아래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남해안에 위치한 대부분의 성곽이 그렇듯이 병영성의 입지조건 중의 하나인 동천과 연결된 바다가 성 아래에 위치하였다는 지리적 환경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2) 병영성의 유적 현황
병영성은 "人"자 모양의 남북으로 뻗어 가지벌린 구릉 사이의 계곡을 성 안으로 하고, 양쪽 구릉 정상부에 석축을 쌓은 포곡성(包谷城:계곡을 안에 두고 쌓은 성)이다.
성곽은 남북축이 긴 타원형으로 현재 남문 쪽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고, 북문 쪽은 어느 정도 민가 담장이나 경작지의 축대에서 조금 알아 볼 수 있는 상태이다.
동 서 북문 터의 경우 주변에 옹성(甕城)형태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동문-북쪽부분, 북문-동쪽부분, 서문-북쪽부분) 또 성곽 곳곳의 요지에는 성 바깥 벽에 덧대어 사방 8m 규모 대지의 곡성(曲城 = 치성) 또는 누각(樓閣 = 포루)터가 있는데 기단부만 남아 있다.
성벽은 구릉 정상부분을 안 벽의 끝으로 삼고, 바깥 벽 끝은 경사진 부분에 7m 폭을 두고 기단을 설치하였으며, 기단 위의 성 돌은 50㎝ 정도 안으로 들여 쌓아 계단의 형태를 이루었다.
안과 밖의 벽 사이에는 잡석을 이용하여 속을 채운 협축수법으로 축조하였다.
성곽 바깥에 위치한 황(隍 = 마른 해자)은 북쪽에 50m 정도 확인되었는데 성벽에서 10m 떨어진 거리에 폭 8m, 깊이 2m 정도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경작지로 변해 있다.
성안의 건물 배치는 확인되지 않으나 병영초등학교 자리가 영청이었고, 신축 때 많은 석조 유구가 나왔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운동장에 그 석조 유구 일부가 방치되어 있다.
또 병영초등학교 뒤에 있는 삼일사의 사당이 원래 병영의 부속건물이었던 영모각을 1955년 개수한 것이라 한다.
병영초등학교 정문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높다란 50∼60m 정도의 담벽이 영청의 석벽이라고 하며, 정문의 하마비(下馬碑)는 원래 남문 입구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병영사무소 뜰에 병영을 거쳐간 병마절도사들의 선정비, 불망비 등 20여 기의 유허비가 서있다.
원래 50여 기의 각종 유허비가 있었는데 보존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일부는 없어지고, 일부는 학성공원에, 일부는 병영동사무소에 보존하고 있다.
<자료출처> "다같이 돌자 울산 한 바퀴" 도서출판 '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