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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동우회 멤버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베트남 여행
5일차(2017. 1. 9 월요일)
오전 호치민 묘와 대통령궁과 숙소 등을 둘러본 후, 미국 오바마 태통령이 쌀국수를 먹었다는 Huong LIEN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곧 승합차로 '문묘'로 향했습니다.
공자와 베트남 최고의 학자들을 모신 곳
문묘를 향하여 이동
♣ Pm 13시 20분, 승합차에 올라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문묘’로 향했습니다. 문묘는 공자와 베트남 최고의 학자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베트남人들의 교육의 요람지입니다.
♣ 문묘로 향하는 길은 도심이라 다소 혼잡했습니다. 도심을 달리는 차량중에는 일본 도요다 차량이 많았으나 우리 한국의 현대차, 기아차 로고를 단 차량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내의 택시중에 상당수가 현대 모닝 소형차라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혼잡한 도로에 결혼식 웨딩카도 보였고 또 관광객을 태운 인력거(스쿨러)까지 많아 우리가 탄 승합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으나, 약 30여분쯔음인 Pm 13시 50분경, 목적지인 문묘에 잘 도착했습니다.
♣ 문묘는 공자와 베트남 최고의 학자들을 기리 위한 교육의 요람지로서 이곳을 공자묘라고도 합니다만, 실제 공자의 묘(墓 : 무덤)는 그가 태어난 고향인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있지만, 이곳 베트남 하노이에 공자의 묘를 지칭하는 문묘(文廟 : 孔子의 神位를 모신 사당)가 있다는 것은 공자의 학문을 그만큼 중히 여기는 학문의 전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문묘 국자감 (文廟 國子監 : Van Mieu Quoc Tu Giam)
♣ Ly Thanh Tong(리탄똥)황제가 1070년 공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유교 사원으로 1076년에는 문묘 경내에 베트남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 Quoc Tu Giam)이 세워졌습니다. 문묘에는 중앙에 공자가 있고 양쪽에는 증자, 장자, 맹자 등이 모셔져 있으며 5개의 장소로 분리되어 있는데 각기 연못 등 아름다원 정원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베트남의 화폐 100,000동에는 문묘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 국자감에서는 수백년 동안 수천명의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대학 건물로 사용하던 규문각은 하노이의 상징적인 건물로 응웬(Nguyen)왕조 때인 1833년에 세워졌으며 베트남의 전통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목재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며 문묘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담장도 이때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베트남의 화폐 100,000동에는 위 문묘의 전경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 Le 왕조의 레탄똥(Le Than Tong)황제가 1484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비석을 세우게하여 1442년 이후 300여년간 116회의 과거가 있었으며 이중 82회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82개가 남아 있으며, 비석들은 거북등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베트남 전통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는데 문묘와 국자감에서는 베트남 전통 건축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 문묘는 5개의 문과 더불어 5개의 안마당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안마당에는 각기 다른 시대의 베트남 건축 양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규문각은 비석의 정원으로 알려진 세 번째 안마당으로 이어집니다. 이곳에는 과거 시험 합격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 우리 일행은 도로의 보도블럭을 지나 문묘 입구의 넓은 공터에서 바라본 문묘의 위용이 우선 우리를 압도했습니다. 마치 성문을 들어가듯 첫 출입문을 막 지났는데, 이어 또하나의 거창한 성벽 같은 2차의 문(門)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안마당으로 향하면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규문각이 서 있습니다.
♣ 위 규문각은 부처님을 모신 사찰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부처님이 오신 초파일의 연등처럼 규문각에는 연꽃 연등이 주렁 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규문각은 비석의 정원으로 알려진 세 번째 안마당으로 이어집니다. 이곳에는 과거 시험 합격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 문묘의 3번째 출입구 문(門) 앞에는 아주 큰 연못을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못을 연지라고 부르는데, 우리 일행은 연지 앞에서 잠시 쉬면서 이곳의 방문을 인정샆하고자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베트남의 선각자들은 공자를 학문의 신(神)으로 여겼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학문의 神을 정중하게 모시기 위해 주변 환경을 이렇게 위엄있는 분위기로 조성한 것 같았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전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사상가 孔子(BC 551 ~ 479년)의 학문이 이곳 베트남에 까지 전파되었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학문의 神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베트남인들의 학문에 대한 깊은 문화 의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이런 규모의 큰 문묘(文廟)가 없는데 비해 베트남에 이런 역사를 아주 잘 간직하고 관리하고 있는 훌륭한 문묘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 문묘의 3번째 출구로 들어서자 마자 수없이 많은 비석들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비석들은 베트남의 과거급제자들에 대한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로서 문묘로 들어가는 입구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1442년부터 1779년에 치러진 82번 과거 시험에 합격한 1,307명 급제자들의 이름과 출생지 등을 기록한 것이랍니다.
♣ 그러나 베트남이 공산화된 직후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으로 비석에 기록된 글을 마모시켜 훼손한채 방치된 것이 많았으나 뒤늦게 이들 문화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고려해 이렇게 전시보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석들을 자세히 살며보면 비석의 크기도 각양각색이고 또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의 머리 형태가 일정치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위 과거급제자들이 급제할 당시의 여러 정황을 반영한 것이라 합니다. 이 비석의 글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생활을 하면서 현재는 새로운 형태의 베트남어와 글자가 만들어졌지만 옛날에는 주로 한문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더욱 친숙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 문묘의 4번째 문(門)으로 입장하자마자 아주 큰 사원이 있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문묘의 본거지인 공자의 사당이었습니다. 이 공자 사당에는 공자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명한 스승이었던 쭈 반 안의 위패도 봉안되어 있으며 72명의 제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공자의 사당은 수세기 동안 이어진 베트남 지성의 전당입니다. 원래 공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세워진 사원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원은 베트남의 학술 문화구축에 기여한 철학자와 여러 지식인들의 학덕을 기리는 곳입니다. 경내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 사원의 입구 정면에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큰 편액이 걸려있었습니다. 이 ‘萬世師表’라는 뜻은 만인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뜻인데, 바로 孔子를 말하는 것으로 사료되었습니다. 커다란 편액에는 강희제(康熙宰) 書라는 ‘만세사표’를 쓴이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액은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재가 하사한 편액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 공자가 태어나 죽은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의 묘와 사당에도 똑같은 글씨인 “萬世師表”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 편액도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하사한 편액이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 청나라(1616~1912)는 17세기 초 누루하치(청태조)가 세워 약 300년간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나라인데, 가장 번성했던 시기가 4대 성조(강희재) 현염(1661~1722) 시기였지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61년간 재임한 청나라 황재 강희재의 힘이 이곳 베트남까지 미친 것임을 알 것 같았습니다.
♣ 베트남인의 선조들은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공자를 사당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孔子의 사당 좌우편에는 孔子가 가장 아끼는 제자들의 형상과 함께 신위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 공자를 모신 사당 우측에는 안자신위(複聖顔子神位)와 자사신위(迷聖子思神位) 그리고 좌측에는 증자신위(宗聖曾子神位)와 맹자신위(亞聖孟子神位)라는 위패였습니다. 이는 공자뿐만 아니라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서 그의 애제자들까지 숭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공자의 제자가 아닌 즉 공자보다 200년 후에 태어난 인물이지만, 그는 공자의 유학을 잘 이어받은 유학자라서 여기에 사당과 위패를 모셨나 봅니다.
♣ 그리고 공자님을 모시는 사당 안에는 아주 큰 길이가 1m 이상은 됨직한 황금거북이가 장식장 안에 있었습니다. 문묘 입구에 전시된 과거급제자들의 비석 받침대도 모두 거북이었듯이 학문의 신을 모시는 곳은 최정점이기에 황금 거북이의 모형을 여기에 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베트남은 거북이와 얽힌 전설이 참 많은 나라인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호수와 강이 유난히 많고 또 국토의 3면이 바다이기에 거북이가 많기에 더욱 친숙한가 봅니다.
♣ 베트남 사람들이 특히 거북이를 매우 좋아하는 이유는 거북이와 얽힌 아름다운 전설 때문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전설은, 베트남이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로 올라 가는데, 베트남의 독림을 꿈꾸던 레러이 장군(1384년~ 1433년)이 하노이의 중심에 있는 호수를 거닐고 있을 때 였습니다. 호수에서 유유히 나타난 거북이 한 마리가 신성한 검 한자루를 중국을 물리치면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며 장군에게 주었답니다.
♣ 그 검과 함께 중국과 싸운지 10년, 레러이 장군은 끝내 중국을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전쟁에서 이긴 레러이 장군의 검을 거북이가 다시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후 레러이 장군은 레왕조를 만들어 왕의 자링 올랐고, 호수는 그때부터 “호안끼엠”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호안끼엠이란 말은 즉 ‘검을 돌려주었다’라는 뜻이랍니다. 이렇듯 베트남인들은 거북이와 얽힌 아름다운 전설을 늘 가슴에 갖고 있나봅니다.
♣ 사원 모형과 역사적인 사진들은 다섯 번째 안마당이 있었고 유생들이 공부를 한 최초의 베트남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국자감의 본거지인 유생들이 교육받는 교실과 또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이 기숙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숙사 같은 시설과 있었습니다.
♣ 국자감은 송, 고려, 베트남 등의 중앙에 있었던 최고 교육 기관입니다. 중국 수에서 과거제가 시작되어 당 대에 정비되었고, 송 대에 이르러 중요한 관료 선발 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학문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교육이 더욱 강조되었고, 교육 기관이 정비되었지요. 송, 고려, 베트남 등에서는 중앙에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설치하였고, 지방에도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중국과 수차례 전쟁을 치루기도 한 국경을 접한 나라이므로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로 여겨졌습니다.
♣ 국자감은 귀족의 자제들만 다니는 대학이라는 뜻이었습니다만, 베트남에서는 국자감이 본래 왕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지만, 이후 관리들과 일반 평민의 자녀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고려에서는 국자감의 이름이 몇 차례 바뀌었는데, 충선왕 대에 성균관으로 바뀌어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 베트남의 최초 국림대학인 국자감의 앞서 공자사원의 건물과는 또다른 아주 특히한 형태의 목조 건물로 이곳 베트남의 기후 조건을 고려하여 아주 실용성 있게 축조되어 있었습니다. 무게있는 육중한 목조건물의 마루에 는 큰 잉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목형이 눈에 띄었습니다.
♣ 베트남의 유생들에게 있어선 국자감의 입학은 곧 등용문을 상징했나 봅니다. 국자감(國子感, Imperial Academy)은 목조건물의 나무로 만든 잉어와 용의 홉합동물 장식은 용문(龍門)에 오른다는 뜻으로 입신출세의 관문을 일컫는 ‘등용문(登龍門)의 뜻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습니다. ‘((登龍門)’은 후한(後漢) 때 관리인 이응(李膺)은 퇴폐한 환관들과 맞서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정의파 관료의 영수(領袖) 몸가짐이 고결하고 청백하여 당시 청년관리들은 그와 알게 되는 것을 등용문이라하여 몹시 자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후한서(後漢書)”이응전(李膺傳)을 보면‘선비로서 그의 용접을 받는 사람을 이름하여 등용문이라 하였답니다. 즉, (士有被基容接者 名爲登龍門)’고 적혀있답니다.
♣ 여기에 나오는 등용문은“이응전”의 주해(註解)에 따르면 황하 상류에 용문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 근처에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그 밑으로 큰 고기들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나 오르지 못하였는데 만일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이 말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의 문턱에 서는 일을 말합니다.
국자감 역사자료 전시실
국자감 입구에 들어가자 마자 국자감의 역사를 담은 전시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 국자감에는 역사자료실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목조건물로 기둥도 목조였습니다. 고급 티크 나무로 장식된 실내에는 국자감에 입학한 유생들의 모든 학습자료를 비롯한 역사자료가 모두 전시되어 있고 또 잘 보관관리하는 것에 많이 놀랐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서 오랜 전쟁으로 인해 피폐된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하에 선입견을 갖고 자신도 모르게 폄하애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곳 문묘를 방문하면서 그들이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보았고 또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나라보다 더 잘 보존관리하는 선진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인식을 갖었던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의 공적비에 대한 탁본을 비롯하여 유생들이 공부한 학습자료, 교훈과 지침서, 표창장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때(958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는 기록이있습니다. 그런데, 1170년 무인들의 반란인 정중부의 난으로 인해 무인시대가 열리면서 이과거제도는 폐지됩니다. 우리는 당시의 과거제도는 어떠했는지? 어디서, 무엇을 가르켰는지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수없는 전란을 겪으면서도 과거시험을 보던 현장과 시설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075년 이 건물을 세운 당시의 임금이 누구이고, 1919년까지 이 과거제도가 존속되어 오면서 이곳에서 무엇을 가르쳤으며, 그동안 몇 번의 과거시험을 치루었고, 몇명의 인재를 길러냈는가? 하는 그러한 기록까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전시실에는 국자감 학생들의 교복을 비롯한 신발, 학습도구 그리고 1376년 과거 급제자 ““띠엔시(tien si)’ 즉, 진사(進士)’의 옷과 1853년 급제한 “띠엔시(tien si)’의 모자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 일본의 경우에는 유교적인 가묘는 설치되지 않았고, 왕실에도 조상신을 모신 신궁이나 위패를 모신 사찰이 있었을 뿐 종묘를 따로 두지는 않았습니다. 에도 막부 시대에 문묘로서 유시마 성당이 세워졌으나, 이 또한 국가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는 못하였습니다. 결혼과 같은 각종 의례는 신토에 따랐고, 장례와 제례는 불교식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15세기 중엽에 레 왕조의 성종이 사서 중심의 성리학 사상을 보급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문묘를 세우고 과거제를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불교의 영향도 이전 시기에 비해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리학은 동아시아 각국에 충·효·예의 가치관을 전파하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심화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국자감의 전당(前堂)과 후당(後堂)에 모셔진 인물들...
♣ 국자감 전시실 앞의 정면에 있는 건물은 “전당(前堂)”이라 하는데 문화 행사를 하던 곳으로 현재는 왼쪽 절반을 베트남 전통 음악연주를 하며 악기들을 전시하고 CD를 판매하고 있었고 뒷면의 전달을 통해 2층 구조의 후당(후당)으로 연결되는데, 후당 1층 중앙에는 국자감의 교수였던 베트남의 대 유학자 ‘쯔 반 안(Chu Van An, 주문안(周文安, 1292 ~ 1370)’의 큰 목조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 유학자 쯔 반 안(Chu Van An, 주문안(周文安)은 국자감 교수이고 또 의사이며 ‘다이비엣(大越, Dai Viet)’ 시대 ‘ 진조(陳朝, Tran Dynasty, 1225 ~ 1400)’ 때의 고위관료였습니다. 그는 하노이의 이전에‘탄 트리 구(Thanh Tri district)’였던‘광 리엣 코문(Quang Liet commune)’ 반통마을(Van Thon Villag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타이 홈 신(Thai Hoc Sinh / 太學生)’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나 유명하였다 합니다.
♣ 그러나 그는 관료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하노이 ‘탄 트리(Thanh Tri)’호원 꿍 마을(Huynh Cung Village)’에 유교 학당을 열고 유생들을 모아 유교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유생들을 모아 유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 것은 불교국가였던 베트남에서 유교가 확산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쯔 반 안(周文安, Chu Van An, 1292 ~ 1370)’의 목조상
♣‘쩐 명종(Tran Minh Tong(1314 ~ 1329)’ 시기에 그는 ‘국자감(國子監) 교수가 된다. 그리고 훗날 쩐 왕조의 6대왕 ‘쩐 히엔똥(Tran Hien Tong, 陳憲宗, 1329 ~1341)’이 되는 왕세자 ‘브엉(Vuong)’의 스승이 됩다. 쩐 왕조의 제7대 왕 “쩐주똥(裕王, Tran Du Tong 재위 1341 ~ 1369.)’ 대에는 고위 관료로 임명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사직하고 낙향하는데, 부패한 현실을 지적하는 8명의 신하들이 충언을‘쩐주똥 (裕王, Tran Du Tong)’이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참수하자, 이에 실망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유생들을 가르키고 서적을 집필하다가 1370년 병사하였습니다. 그는 베트남 역사상 최고의 교수이며 유학자로 추앙 받고 있으며, 이곳 뀍 뜨 쟘(Quoc Tu Giam)’국자감(國子監)’후당(後堂) 1층 중앙에 제단이 세워져 있고 아직도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가 나라의 근본적인 힘이다.”라는 뜻의 현재국가지원기(賢才國家之元氣),라는 현판이 후당(後堂) 건물 1층 출입구 상단에 걸려 있습니다.
♣ 그리고 후당(後堂) 건물 1층의 벽면에는 1442년 진사(進士)에 급제한 ‘턴 년 쭝(申仁忠, Than Nhan Tung, 1419~ 1499)’의‘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 Bia tien si)’의 공적글과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가 나라의 근본적인 힘이다’라는 뜻의 “현재국가지원기(賢才國家之元氣)”가 써있습니다.
♣ 그리고 후당(後堂) 1층의 벽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으로 금의환향하여 가는 모습의 액자가 걸려있었습니다. 국자감에서는 유생들을 교육시키는 최초의 국립대학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과거시험에 합격을 독려하고 합격자의 이름과 출신지 및 가문을 빛내어 줌으로써 유생들이 학문성취 목적을 달성하도록 독려했다고 생각됩니다.
♣ 후당(後堂)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그 주변일대는 최고급의 티크나무로 장식되어 있어서 더 품격이 높았습니다.
♣ 후당(後堂) 2층에는 베트남에서 유교를 숭상시킨 3명의 임금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 중앙에는 리왕조(李, Le Dynasty)의‘리 탄 통(李仁宗, Le Thanh Tong, 재위 1054 ~ 1072)’황제이고, 우측은‘리 턴 똥(李聖宗, Ly Than Tong)’ 황제 그리고 좌측은 레왕조(黎王朝, Le Dynastry) 제5대 ‘레 탄 똥(Le Thanh Tong, 黎聖宗 1442~1497)’ 황제를 모신 사당과 위패가 있었습니다.
♣ 후당(後堂) 2층 중앙에는 1070년 ‘리왕조(李, Le Dynasty)’의 리 탄 통(李仁宗, Le Thanh Tong, 재위 1054~1072)’황제가 공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사원을 건립하였습니다. 황제는 문묘의 기본목표를 국학라기(國學拏基)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國 나라 국 / 學 배울학 / 拏 붙잡을라 / 基 터기 입니다.
♣ 후당(後堂) 2층 오른쪽에는 ‘1076년 국자감(國子監, lmperial Academy)’을 세운 ‘리 턴 똥(李聖宗, Ly Than Tong) 황제의 사당이 있습니다. 당시의 황제는 문묘의 기본목표를 흥학임현(興學任賢)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興 일어날 흥 / 學 배울학 / 任 맡길 임 / 賢 어질현 입니다.
♣ 후당(後堂) 2층 왼쪽에는 과거에 급제한 진사(進士)를 축하하기 위해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 bia tien si)’를 세운 레왕조(黎王朝, Le Dynasty)의 제5대 레 탄 통(Le Thanih Tong, 黎聖宗 ; 1442~1497)’ 황제의 사당이 있습니다. 당시의 황제는 문묘의 기본목표를 문교탄부(文敎誕敷)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文 글월 문 / 敎 가르칠교 / 誕 태어날탄 / 敷 펼부입니다.
♣ 후당(後堂) 2층 난간에서 내려다본 국자감 목조 건물의 지붕은 참 과학적으로 건축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사도가 비교적 가파른 것은 폭우가 쏟아질 경우 급방 내려가도록 한 것 같았고, 천정이 비교적 높고 문이 많은 것은 이 지역의 기후와 풍토를 고려하여 공기순환이 잘되고 습기가 차지 않토록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베트남 하노이 지역은 여름과 겨울의 냉난방 장치나 시설이 필요하지 않토록 자연에 적응하는 가운데 예술성을 지닌 건축을 한 것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 국자감 건물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목엔 큰 북탑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수업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학교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강한 국가 그리고 국가의 미래 발전을 위해 인재양성에 최우선했던 옛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가 나라의 근본적인 힘이다.”라는 뜻의 현재국가지원기(賢才國家之元氣),라는 국자감의 현판의 글귀가 가슴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 이곳 첫 출입구인 文廟門에 입장한 시각이 Pm 1시 40분이었는데, 약 1시간 동안 문묘와 국자감 일대를 둘러 본 Pm 2시 40분경, 문밖 도로에 대기중이던 승합차에 올라 다음 견학지인 “서호”로 향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여기서 글을 총총 맺습니다.
다음편에서는 서호와 호안끼엠 호수 근처의 관광지를 탐방한 감상문을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