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이 태어난 지 몇 해 안되어 마성면 오천리(샘골)로 이주한 박열의 집안은 조부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많은 재산을 가진 지주 집안으로 상당한 가세를 유지하였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게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자 점차로 가세가 기울어지고 소작과 자작전 수입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박열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어린나이(3세)에 아버지를 여윈 박열은 유복자처럼 길러졌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범상치않았던 박열은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 한문을 배우다가 아홉 살 때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새벽밥을 먹고 통학했다. 박열이 소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어느 한국인 교사가 자기는 이때까지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 교육을 시켰노라고 울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박열은 이 선생님으로부터 반일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가난한 중에서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대구로 가서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관비로 공부할 수 있는 경성고보 사범과(지금 경기고)에 입학한다. 재학 중 박열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격문도 살포하는 등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이때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경성의 많은 학생들은 일본 경찰을 피해 숨어 있으면서 자진해서 학교 를 그만두거나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고 학교를 떠나고 있었다. 형식은 학교 내의 잘못된 제도에 항거하며 동맹 휴학을 하거나 자퇴하는 등의 형식을 취하였지만 일종의 반제국주의적 표현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 박열은 자퇴하고 드디어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경성역에서 부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김천역에서 선동에 사는 고종사촌 교근형을 만나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교근형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박열은 먼저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어머님과 오늘에 있기까지 뒷바라지 해주신 형님에게 한없는 정을 느끼며 부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잘 사시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기대와 관심으로 늘 보살펴 주신 누님과 자형, 고모님, 외갓집 식구들에게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지나온 18년 간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일렁거리는 갑판을 붙잡고 가슴을 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뼛속 깊은 곳까지 아려오는 몸 서림에 참을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이 두 뺨 위를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청년의 기약 없는 인생 역정을 싣고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많은 애국 독립지사와 청년학생 농민들은 상해와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독립운동의 근거지와 삶을 찾아서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3.1독립만세운동으로 말미암아 상해에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국내외 선포하고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최고기관으로서 외교활동과 독립전쟁을 지도 통할하게 되었다. 또한 간도와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에서는 비밀결사단체와 항일무장 독립군 단체들이 속속히 조직되어 치열한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내로 잠입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를 향해 끊임없는 암살과 파괴공작을 시도하여 그야말로 항일 독립투쟁을 줄기차게 이끌어왔던 이 시기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눈부신 독립전사(獨立戰史)를 남겼다
3.1독립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민족주의적 온건 노선으로는 조선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점차 고조되어 유학생들 사이에는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박열, 김약수, 백무, 최갑춘, 황석우, 정태성을 중심으로 고학생 동우회를 결성 친목단체로부터 점차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이념단체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유학생들은 요시노 사쿠조, 후쿠다 교지가 주도하는 여명회, 사카이 도시히코의 코스모스구락부, 다카츠 마시미치의 효민회, 가토 가즈오의 자유인연맹등에 가입 활동하였다.
특히 동경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있었던 일본사회주의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사회 운동에 진출한 김판권, 정우홍, 강인수와 다카츠 마시미치의 효민회에 참가하여 유학생들에게 급진사상을 전파한 권희국을 비롯하여 김약수, 박열등은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아나키즘의 지도자인 오스키 사카에와 이와사 사쿠타로에 출입하여 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다.
무정부주의(Anarchism)란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 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운동으로 국가나 정부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학생들에게는 민족독립을위한 행동방식으로 구원의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 출생과 성장
- 1902년 3월12일(음2월3일)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 (현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 에서 父 박지수 (朴之洙)와 母 정선동(鄭仙洞)의 1女3男 중 막내로 출생. 초명 혁식(赫植), 호적 준식(準植) -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샘골)로 이주하여 성장 - 1906년(5세) 父사망 兄 정식 호주상속 ― 논밭 10 두락씩 (1두락 150평 내외) 상속 받음. - 1908년(7세)~1910년(9세)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치감강목, 통감6권 수학 - 1909년(8세) 유명(幼名) 혁식(赫植), 민적법시행 준식(準植)으로 개명(改名), 一名 열(烈) - 1911년(10세)~1915년(14세) 함창공립보통학교(4년제) 다님 - 1916년(15세) 3월24일 함창공립보통학교 3회 졸업 4월8일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입학 - 1919년(18세) 경성고보 3년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 참여 ― 독립신문 발행, 격문배포 . 중퇴 - 1919년 10월 동경으로 건너감 - 1920년~1921년 兄 정식과 두식 등 가족들은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98번지에서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870번지로 이사. 이후 1936년에 형의 가족들이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 847번지로 이주해감.
□ 일본동경 유학과 항일독립운동
- 1919년(18세) 10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정칙영어학교에 다님 - 1920년(19세)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사카이 도시히코 (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와 교유(交遊) 11월 재동경 조선인 학생 15~16명 의거단(義擧團)결성, 이 단체는 의거단(義擧團) →철권단(鐵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撲殺團), 혈거단(血擧團 : 1921년 11월) 으로 명칭을 바꾸어 계속 활동 김약수, 원종린, 정태성 등과 고학생동우회 결성 회원50명 - 1921년(20세) 1월 박열, 정태성, 김천해, 최갑춘, 이기동, 유진걸, 박일병, 김약수 등 재일조선인고학생동우회 확대 개편 4월 박열, 경성에서 이강하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 흑로회(黑勞會) 조직 11월29 동경기독교청년회관 흑도회(黑濤會) 창립대회 개최 박열, 정태신, 김약수, 조봉암, 원종린, 김판국, 정태성, 서상일, 황석우등 조선인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동경 흑도회(黑濤會) 창립 박열―일본외항선원 스기모토(杉本貞一) 외국 폭탄입수의뢰 - 1922년(21세) 1월 박열, 정태성, 김약수등과 함께 재일조선인 고학생동우회에서“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 발표. 동우회가 고학생 및 노동자 구제기관임을 버리고 계급투쟁의 직접적 행동기관임을 선언 2월4일 박열, 원종린등 11명 연명 『조선일보』에「동우회 선언」 발표 2월 상해임시정부 一員 최혁진, 경성의 파괴계획 연락. 박열과 에도가와(江戶川)공원에서 밀회(密會) 2월 박열―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만남. 동경에서 가네코가 청년조선 잡지 교정중 정우영(鄭隅影)을 통하여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감동받음. 22년 5월부터 동거를 시작함. 5월1일 흑도회(黑濤會) 동경 노동절 참가 7월10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흑도회(黑濤會) 기관지 『黑濤』창간 7월 니이카다(新潟)현 탄광 조선인 노동자 100여명 살해사건 ―박열주도 흑도회 진상규명, 항의투쟁, 규탄연설회 개최 8월 시노가와(中津川)댐공사 조선인학살사건 현장조사. 조사위원 박열, 김약수, 라경석, 백무『黑濤』 2호간행 9월7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 조선인노동자학살문제연설회 개최 9월 경성, 니이카다(新潟)현 조선인학살사건 조사회 초청―경성 경운동천도교회당 연설― 조선 무산자 동맹위원 김한 면담 10월~11월 동경 오오시마(大島)제강소 쟁의 박열 지원 11월 재경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흑우회(黑友會) 조직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후도이 센징(太 鮮人)』창간 박열, 경성의 의열단원인 김 한에게 폭탄 입수 의뢰 동경 조선 노동자 동맹회 발족 12月末 『후도이 센징(太 鮮人)』 제2호 발간 - 1923년(22세) 1월12일 김한, 의열단원 김상옥사건 관계 혐의 체포―박열 폭탄 입수계획 좌절. 박열, 서울 도착 김한과 면담 3월1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現社會(太 鮮人 改題) 제3호 발행 4월중순 불령사(不逞社) 설립 박열외 5명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를 神田?亭에서 구타. 박열, 간다(神田)暑 에 검거 되어 이찌가야(市 谷)형무소에 투옥 간수와 대난투극을 벌임 4월26일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김중한 경성 → 동경 체류(박열 방문) 5월 후세 다츠시(布施辰治), 박열 관련 조선인 불법감금규탄연설회 동경 간다(神田)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 5월20일 박열, 김중한 폭탄입수계획 상해 연락 의뢰 6월30일 현사회(現社會) 제4호 간행 8월3일 흑우회(黑友會) 주최 「조선문제연설회」 간다(神田) 기독청년회관 개최
□ 관동대지진과 박열의 법정투쟁
- 1923년(22세) 9월1일 관동대지진 발생 조선인에게 누명을 씌워 6,000여명 학살 9월3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보호검속 9월4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경찰범처벌령 구류연장 10월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 치안경찰법위반용의 기소 被起訴者 :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외 14명 10월22일 동경지방재판소 예심판사, 불령사(不逞社) 전원에 대하여 예심 10월24일 대역죄혐의로 구속기소 재판회부(1925년6월6일까지 17회의 동경지방재판소 예심받음) 논문4편 저술 『일본 권력자계급에 전한다』 1924.2 『나의 선언』 1924.12.3 『無爲徒食論』 1924.12.29 『음모론』 1925.3 - 1925년(24세) 7월17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대역죄” 폭발물취제규칙 위반 용의 기소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 대하여 형법 제73조 대 역죄 적용 공판개시 결정 - 1926년(25세) 2월26일 대심원 대역사건 제1회 공판 (박열―조선예복, 金子文子―한복) 2월27일 제2회공판 2월28일 제3회공판 3월 1일 제4회공판 3월23일 우시꼬매(牛?)구역소(區役所)에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혼인계 제출 3월2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사형선고 4월 5일 무기 감형 4월 6일 박열, 이치가야(市谷)형무소→지바(千葉) 형무소 이감(移監) - 1936년 7월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코스게(小菅)형무소 이감(移監) - 1943년(42세) 8월 코스게(小菅)형무소에서 아끼다(秋田)형무소 이감(移監)
□ 일본의 패망과 출감
- 1945년(44세) 8월15일 정오 일본천황, 포츠담선언(무조건 항복) 수락. 한국해방 10월15일 동경 히비야(日比谷)공회당 재일조선인연맹 결성대회 박열석방청원」 데모 - 1945년(44세) 10월27일 아키다(秋田)형무소 오오다테(大?)지소에서 석방(22년 3개월) 朝鮮人連盟秋田縣本部 주최 大?驛前廣場에서 박열출옥환영회 개최 11월16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결성 12월8일 동경 히비야(日比谷)음악당에서 “박열환영회” 개최 - 1946년(45세) 1월20일 신조선건설동맹 결성 (위원장 박열, 부위원장 이강훈 원심창) 2월19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주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열사 추도회 개최 3월25일 박열후원회 일본총본부주최 “박열선생부인 故 금자문자 여사추도회” 동경 神田一橋 공립강당 개최 2월~6월 백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아 3의사(윤봉길,이봉창,백정기) 유해 봉환 추진위원장으로 세분 열사의 유해를 발굴, 본국으로 보냄 10월3일 재일조선거류민단 창단(단장 박열. 부단장 이강훈, 사무총장 원심창) 1대(46.10.3~47.5.23) 2대(47.5.24~47.10.1) 3대(47.10.1~48.2.20) 4대(48.2.20~48.10.4) 5대(48.10.4~49.4.1) 12월10일, 1947년4월8일 일본 동경을 거쳐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박사와 동경 제국호텔에서 2차례 회담 - 1947년(46세) 2월15일 동경 청년회관에서 장의숙(張義淑)과 결혼 장의숙 : 황해도 진남포면 출생. 서울여상졸업. 동경청산사범대학 속성과 졸업. 본국제신문기자 - 광음사(光音社)에 근무하면서 '붉은 서울의 3개월'기고 6월30일 박열,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발표 10월1일 박열, 민단정기대회에서 이승만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 - 1948년(47세) 2월10일 박열, 재일조선인거류민단 단장직 사임 발표 4월 박열, 사설기관「박열장학회」「박열문화연구소」설치 7월1일 이승만 초대대통령으로 부터「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명 받음 8월10일 『신조선혁명론』저술 출판 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및 광복축전에 박열외 13명 참석 10월8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개칭(改稱) - 1949년(48세) 4월1일 민단 제6회 대회에서 단장 사임 5월4일 영구귀국 서울도착. 재단법인 박열장학회 설립 8월5일 대구방문(2박3일) 8월7일 문경방문(2박3일) - 1950년(49세)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勃發) 6월28일 서울 모처에서 피랍(被拉), 납북 - 1974년(73세) 1월17일 북한에서 사망―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향년 73세) 2월8일 서울 명동YWCA강당에서 곽상훈 추도위원장 외 1,000명 참석한 가운데 박열의사 추도식 거행 - 1976년2월12일 부인 장의숙여사 사망(58세). 경기도 파주시 금촌공원묘지. 아들 영일, 딸 경희 - 1989년3월1일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제85호) 추서 - 1991년11월21일 박열등 15명 납북독립유공민족지도자추모제 거행(국립묘지 현충관) - 1993년 6월 1일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지정(12-181호) - 2001년 10월 10일 법인설립 허가(국가보훈처 2001-34호) - 2001년 10월 30일 사단법인 박열의사 기념사업회 설립 - 2004년 6월 28일 박열의사 생가 문화재 지정(경북지방문화재 148호)
함양박씨 종중이 자랑하는 조선조 중기 향오린(鄕五鱗)이 있다. 향오린(鄕五鱗)이란 고려 말 재상(宰相)의 지위에 올라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후(死後)에 예천 금당실 금곡서원(金谷書院)에 배향된 문제공(文齊公) 치암(恥庵) 박충좌(朴忠佐)의 7세손인 찰방(察訪) 訥(눌)의 아들 거인(巨鱗, 掌令), 형린(亨鱗, 吏曹參議), 홍인(洪鱗, 大司憲), 붕인(鵬鱗, 翰林司書), 종인(從鱗, 吏曹正郞) 5형제를 말한다. 이를 후세(後世) 사람들은 삼난가(三難家: 生五子, 難五子, 登科難 또는 登科俱文難)라 부르기도 하였다.
의사는 치암공의 7세 손인 눌(訥 : 1448년~1528년)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대과(大科)를 거쳐 예천 금당실에 터를 잡은 막내 종린(從鱗 : 1496년~1553년)의 셋째아들 운(蕓 : 1535년~1596년)의 13세손이며 이때부터 이 지방의 함양박문의 세(勢)를 이루게 되었다.
1880년대에 이르러 가세(家勢)가 기울어 가고 동학을 통해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세상 물정에 밝은 조부는 증조부가 사망하자 외아들 지수(之洙)를 선동의 동래정씨와 혼인을 시키고 윗대 어른들의 행적과 가르침을 따라 대대로 물려받아 이어져 내려왔던 정든 고향땅 예천 금당실 선동을 떠나 함창 인근의 모전(음지마)으로 이주, 의사는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현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에서 아버지(족보에는 朴之洙, 호적에는 朴英洙로 되어 있다)와 어머니(정선동, 鄭仙洞)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初名)은 혁식(赫植)으로 어려서부터 열(烈)이라 불렀지만 호적에는 준식(準植)으로 되어 있다
1919년 10월 3.1독립만세운동으로 모든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앞장서서 활발히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주동학생들은 검거 투옥되었다. 그 외 적극 가담 학생들은 퇴학당하거나 자진해서 학교를 그만 둔 학생들도 많았다. 이 무렵 국내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찾아 중국 상해, 만주, 시베리아, 연해주, 미주, 일본 동경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또한 독립운동 계열에 있던 학생들도 고향을 떠나 상해로 동경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생들은 동경 조선 기독청년회 (YMCA)를 중심으로 학우회 활동을 하며 민족적 독립심과 학문적 욕구를 통해 사상적으로 성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박열은 동경의 간다(神田)에 있는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신문배달, 제빙공장직공, 막노동꾼, 우편배달부, 인력거 인부, 중국 요릿집 배달, 야경수, 점원, 인삼행상, 조선엿장수 등 온갖 모든 밑 바닥의 직업을 두루 겪는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속에서도 박열은 여러 유학생 단체에 가입하여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자주접촉하면서 1920년 11월 김약수, 원종린, 정태성 등과 같이 고학생동우회를 결성(회원 50여명), 간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2년 2월 동경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유라쿠(有樂)정 스끼야바시(數崎屋橋) 근처에 있는 이와사끼(岩崎)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오전의 한가한 틈을 이용해 세이코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와사키(岩崎)라는 사회주의자가 경영하는 오뎅집으로 주로 지식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의 집합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정우영을 만나 알게되어 세이코쿠 영어학교 가는 도중 정우영의 하숙집에 들러 조선청년이라는 제목의 잡지 교정 인쇄를 보게 되었다. 그 책에는 “개새끼”라는 박열의 시가 게재되어 있었다. 그때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박열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 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이 시를 읽고 강한 감동을 느꼈었다. 뭔가 힘이 강한 시였다. 한구 한구마다 나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갔다. 그리고 이 시를 다 읽었을 때 마치 황홀에 젖어 있을 정도였다. 나의 가슴에 피는 들끓고 어떤 힘이 나의 전 생명을 떠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정우영에게 “지금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을 이 시속에서 찾은 느낌이 듭니다”라고 말하였다. 박열의 강열함에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한층 더 이끌려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그야말로 나의 일을 갖고 있다”라고 느꼈다.
이 때 박열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친한 친구집을 전전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얼마가지 않아 1922년 5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박열과 만나서 박열의 사상과 행동 생활방식 속에서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평생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게 된 박열의사는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흑우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흑도회 기관지인《흑도》·《민중운동(民衆運動)》·《후토이센징(太い鮮人》·《현사회(現社會)》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회운동가와 재일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사회의 개조와 변혁을 통한 조선독립을 쟁취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이고 강력한 방안을 찾고자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강연회와 사상 잡지 발행단체 규합 등으로 행동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선두에는 항상 박열이 나섰던 것이다. 1923년 4월 의사는 불령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 투쟁을 추진하였다. 그해 가을 일본 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관동에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일본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때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되었고, 경찰의 취조 도중에 일왕 폭살을 위해 추진한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에 이르러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외 불령사 회원 14명을 차례로 검거 검속 취조하여 박열을 비롯한 불령사 동지 16명을 치안경찰법 제10조 툌비밀결사는 이를 금(禁)함을 적용 10월 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의해 치안경찰법 위반용의로 기소 이찌가야형무소에 수감시켰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박열에게 대역죄 혐의를 적용, 구속 기소하고 1923년 10월 24일 이찌가야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에 회부 1925년 6월 6일까지 2년반 동안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려 17회에 걸친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예심을 받았다.
박열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 회장이던 조헌영(1901~1988. 조지훈시인의 아버지)이 조선시대의 관복과, 신랑이 혼례 때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를 지입하여 관복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한다. 또 재판장은 박열을 피고라고 하지 않고 ‘그편’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관을 ‘그대’라고 호칭했다. 실로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박열 의사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나자 의사는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하였다. 대심원은 1926년 3월 25일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어 10일 뒤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세력과 군부는 이를 극렬히 반대하면서 내각에 대한 탄핵 움직임까지 보였다. 이에 더해 이른바 괴사진 춘화(春畵)사건마저 일어나 정국(政局)을 뒤흔들었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일본 당국은 가네코씨가 그 해 7월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가네코후미코가 자결한 후 그녀의 소원대로 그녀의 유골은 형 박정식과 헌병들의 호위속에 문경으로 옮겨져 주흘산 자락 팔령 중턱 아무도 찾지않는 박열의 선대들이 잠들어 있는 선산에 봉분도 없이 묻히고 철저히 통제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역사 속에 사라졌다.
박열의사는 1945년 해방이되고도 출옥하지 못하다가 겨우 그 해 10월에 아키타 형무소 오오다테 지소에서 출옥하고 전 재일교포와 조국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재일 교포의 새로운 지도자로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 동맹을 결성한다.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거류민단의 초대부터 5대회장을 역임하고 1949년 조국에 귀국하여 모든 정치적 유혹을 뿌리치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결성하여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보내기 시작하였으나 1950년 6. 25 동란으로 납북되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고있다가 1974년 1월 17일에 7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타계후 1989년 삼일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03년 12월 팔령의 깊은 산속에 있던 가네코후미코 묘소는 박열의사기념사업회에 의해 오천리의 박열의사 기념공원 경내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가네코 여사는 ‘일본을 움직인 10대 여장부’라고 하여 그분에 대한 일본인들의 추모 열기는 대단하다. 문경의 기념관 옆 묘소에는 지금도 매년 500여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다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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