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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라벌 문예 원문보기 글쓴이: 이유식
청다 이유식박사의 문학창작특강
[2] 수필의 벽과 그 극복의 길
Ⅰ.머리말
오늘의 수필문단은 괄목할 정도로 수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70년대만 해도 시나 소설 장르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수필가들이 배출되어 수적 팽창세는 물론 수필집도 가히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수필의 벽'이라면 우선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외부의 벽'과 '내부의 벽'이 바로 그것이다. '외부의 벽'이라면 외부에서 수필을 보는 시각(잡문시 경향)과 누구나 수필을 쓸 수 있다고 쉽게 넘보는 태도일 것이다. '내부의 벽'이라면 실제로 창작과정에서 부딪칠 수 있는 벽을 뜻한다 하겠는데 취약점이나 애로점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귀착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논의의 방향을 '내부의 벽'에만 한정시키면서 그 벽을 극복하는 방법을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Ⅱ. 창작과정에서 만나는 수필의 벽
수필가들이 직접 수필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벽이라면 첫째가 신변잡기 식 경향으로 빠지기 쉬운 점과 소 논문이나 논설문 식으로 둔갑되기 쉬운 취약점이라 하겠다. 그 둘째의 벽은 참신한 주제를 찾는데 따른 어려움과 사실에만 충실하느냐 아니면 허구를 얼마쯤 도입해도 무방하느냐에 따른 망설임일 것이다.
1) 경수필의 경우-신변잡기로의 위험성
수필을 관례대로 경수필과 중수필로 크게 분류해 놓고 보면 경수필의 경우는 소재론적 입장에서는 자연히 신변수필이니 생활수필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특히 신변수필을 쓰다보면 자칫 신변잡기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신변잡기란 문자 그대로 자기나 자기주변의 이야기를 단순히 늘어놓는 식이라 하겠는데 이런 수필은 의미성이 거의 없다. 신변수필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변잡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체험이 고도의 예술적 여과를 거쳐 질서화 내지 의미화 된다면 거기서 우리는 인생의 어떤 보편적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감동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경수필을 쓰는 경우라면 신변수필이 신변잡기가 되지 않도록 각별한 조심과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중수필의 경우-소 논문이나 논설문으로의 위험성
중수필을 쓰다보면 고도한 작법훈련이나 발상법이 없으면 무미건조한 소 논문 식이거나 논설문 식으로 끝날 위험이 높다. 이런 함정을 극복하려면 첫째로 소재를 수필의 제재(題材)에 과부족이 없는 '단소경박'(短所輕薄) 형을 찾아내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어느 누가 '장대중후'(長大重厚) 형의 제재를 가지고 글을 쓴다면 십중팔구 소 논문 식이거나 논설문 식으로 끝나기 마련일 것이다. 그런 만큼 중수필의 제재라면 가령 정치학. 경제학.사회학. 역사학. 심리학. 생활과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철학. 윤리학 등의 인문과학과 나아가 자연과학의 연구대상 그물에서 빠져 나온 사금(砂金)과 같은 제재가 가장 이상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제재에 대해서는 정면접근을 피하고 오히려 측면이나 후면접근을 하는 것이 수필적 접근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낙수'(落穗)요 '여적'(餘滴)의 성격으로 접근해야 된다는 뜻이다.
이런 형의 중수필에서 인생의 진실이나 어떤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적 수필다운 효과요, 그 멋과 맛이라 하겠다. 중수필이라고 해서 '장대중후'한 큰 창문 식 제재를 통해 인간사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단소경박'한 제재 즉 바늘구멍이나 열쇠구멍 또는 문구멍을 통해 인간사를 바라보는 것이 긴장과 짜릿함의 멋이 있다는 뜻이다. 또 이렇게 되어야 소 논문이나 논설문 식의 무미건조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라서 중수필의 집은 대형 간판이 거창하게 붙은 '불고기 집'이나 '불갈비 집'이 아니라 골목 어귀에 있음직한 '꼬리곰탕 집'이거나 '족발 집'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만약 여성의 남녀동등화 문제를 수필로 다룬다고 하자. '장대중후'한 제재를 피한다면 가령 여성의상을 통해서도 그런 주제를 얼마든지 형상화 할 수 있다. 아니 진정 '바늘구멍' 식 관찰이라면 의상에 부착된 단추나 지퍼의 위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해석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아시다시피 여권신장이 안 됐던 지난 시절에는 블라우스나 바지 그리고 스커트나 원피스의 단추나 지퍼가 불편스럽게도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복고풍이 아닌 이상 남자복식과 마찬가지로 그 위치가 모두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3) 참신한 주제 찾기의 어려움
소재에서 주제를 찾아내건, 주제를 정하고 그에 알맞는 소재를 찾건 수필창작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참신한 주제 찾기에 있다고 하겠다. 특히 경수필만 써 온 수필가라면 한두 권의 수필집을 내고 보면 소재나 주제의 고갈을 실감할 것이다. 비슷한 소재나 비슷한 주제에 스스로 싫증도 느낄 것이고, 때로는 참신한 주제가 없을까 많은 고심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발상법의 전환'이나 '착상법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이 점은 수필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4) 허구도입(虛構導入)의 망설임 문제
수필가라면 때로 허구의 도입이 허용되는지 안 되는지 꽤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필평론에 있어서도 이미 이런 점은 공개적으로 쟁점화 된 바 있다. 구성화 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사실 그대로여야 한다는 논리와 필요시엔 허구의 도입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맞서 있다. 허구를 일체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자들의 논리는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요,'사실의 문학'인 만큼 어디까지나 체험이나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필을 소설과 대비해서 본다면 우선 그 논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허구의 문학'이라고 해서 일체의 어떤 사실이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어다까지나 100% 허구이어야 한다고만 주장하면 그것은 개념적 정의에만 지나치게 속박시키는 폭력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필이 '사실의 문학'이라고 하여 허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사실의 문학'이란 개념적 정의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직된 논리라고 하겠다.
나는 무조건적인 허구의 도입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적 효과나 감동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부분적 허구는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한 편의 수필에 있어서 뼈대가 되는 사건이나 사실 자체를 허구화시켜 사실인 양 내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수필가 이철호 씨가「수필창작에 있어서의 구성과 그 전개」란 글에서 밝힌 바도 있는데 나도 상당부분 공감을 한 바 있다.
수필은 비록 '사실'에 충실한다 해도 100% 사실위주의 글이어야만 하는 일기문이나 르뽀르타쥬 그리고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만큼 '사실의 문학'이란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이 있듯이 '선의의 허구'는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도 아니며, 단순한 작문가가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Ⅲ. 참신한 주제 찾기를 위한 10가지 착상법
훌륭한 수필가가 되려면 일차적으로 풍부한 인생경험과 폭넓은 독서를 통해 다양한 교양체험을 쌓아야 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리고 이런 바탕 위에 7가지의 자질이나 능력도 소유해야 할 것이다. 상상력. 연상력. 직감력. 분석력. 추리력. 창조력. 유머 감각. 위트 정신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런 바탕과 자질이 겸비되어 있어야 다음 10가지의 착상법을 능수능란하게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가설(假說)에 입각한 착상
가령 석굴암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대불(大佛)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왜 대불은 가냘픈 심성질(心性質)이 아니고 비만형의 영양질(營養質)일까? 만약 대불이 심성질이라면? 이런 가설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당시의 유행적이고 전형적인 불상의 체형이 비만형이라면 후덕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둘째 그것을 조각한 석공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천민계급이던 석공이 빼빼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석공이 평소 자기도 비만형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면 그 욕망이 그 조각에 반영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가설을 통해 상상과 추리를 해 나가다 보면 거기에 걸맞는 참신한 주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유사(類似) 착상
자연계를 잘 살펴보면 그럴듯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자연계 이외에도 습관이나 사고방식이 다른 유럽의 예 또는 다른 소재에서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공작과 노고지리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어떤 특성을 유추해 낼 수도 있다. 공작은 깃털이 아름답지만 날 수도 없고, 노래도 할 줄 모르는 반면 노고지리는 깃털은 볼품이 없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멋진 노래를 한다는 사실을 통해 사람도 신이 부여한 각자 나름의 능력의 한계와 그 장점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문명의 한 현상을 맥루한이란 학자는 '인체 확장설'로 설명하면서 <눈-망원경. 다리-비행기. 귀- 음파탐지기> 등으로 확장되었다고 했는데, 이 이야기도 결국은 유추발상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하겠다.
3) 대비(對比) 착상
세계의 4대 성인들의 공통점을 비교법을 통해 찾아보아도 흥미로운 수필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고, 반대로 대조법을 통해서 찾아도 좋을 것이다. 또 아시아에서는 톱을 당기면서 나무를 자르는데 미국에서는 톱니가 반대방향으로 되어 있어서 밀어내면서 나무를 자른다는 사실과 더불어 스푼을 사용하는 데도 미국에서는 밀어내면서 떠올리는데 우리는 앞으로 당기면서 떠먹는다. 이런 차이점을 대비하여 두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4) 의문을 품어보는 착상
왜 예수의 제자는 12명인가에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는 유대민족의 12지파의 대표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정대표, 부대표를 두었다면 24명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왜 여자는 한 사람도 없을까란 의문을 품어본다면 흥미로운 수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5) 역(逆) 사고의 착상
기존의 개념이나 가치를 정 반대로 생각해보는 착상법이다. 수필의 묘미가 역설에도 있는 만큼 이런 착상법의 훈련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자가용의 편리성 때문에 요즘은 자가용 홍수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자가용의 불편이나 위험에 초점을 맞추면 '무 자가용 상팔자'란 수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 '돈이 많으면 좋다' 라는 황금만능시대의 병폐를 꼬집고 강도나 도둑의 침입에 불안해하는 걱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돈 없음의 행복'이란 글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역사고 방식으로 이미 '흥부 격하론'이나 '놀부 변호론'이란 수필이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악처를 위하여 '크산티페 변호론'이 나오기도 했다.
6) 상식을 뒤엎어서 생각해보는 착상
이는 역사고의 착상과 비슷하다 하겠는데 상식 선에서 노상 사물이나 어떤 현상을 바라다보면 신선한 착상은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다.따라서 상식을 뒤엎어서 다시 생각해보는 노력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7) 고정관념에서 탈피해보는 착상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새로운 것을 창안해낼 수 없다. 가령 가을에 관한 수필을 쓴다고 하자. 고정관념에 매달리면 '슬픈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결실의 계절' '독서의 계절'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진부해지기 쉽다. 그러나 반대로 '기쁨과 희망의 계절'에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참신한 착상이란 평을 받게 될 것이다.
8) 관점(觀點)을 바꾸어보는 착상
사물을 관찰할 때 정면관찰과 측면. 후면. 수직. 수평. 입체관찰이 있을 수 있듯이 어떤 소재를 택하여 합당한 주제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꾸어서 다각적이고 다양한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한 우물을 계속 깊게만 파는 것이 수직적 사고라면 동시에 여러 개의 우물을 파는 것은 수평적 사고라고 하겠다. 그런 방식이 오히려 물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일 수도 있다.
9)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착상
낡은 지식이나 낡았다고 생각되는 전통사고나 사상 그리고 낡았다 싶은 민속이나 풍속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가령 분만시 총각의 붉은 머리댕기를 복부에 얹어 놓으면 순산한다는 속신을 단순히 속신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심리적 무통분만설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는 해석이 그 예일 수도 있다.
10) 하이브리드(Hybrid)에 의한 착상
이런 사고법은 이것 저것 서로 다른 이질(異質)의 것들을 서로 결합시켜 보는 사고법을 말한다.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다 전혀 관계가 없거나 혹은 인연이 먼 서로 다른 것들을 끌어들여 둘러 맞추다 보면 새로운 착상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위에서 열거해 본 10가지의 착상법으로 비록 참신한 주제가 설정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기발하거나 괴벽스러워 보편타당성을 얻지 못한다면 주제로서 가치성이 없다 하겠다. 참신한 주제일수록 가치성․시대(시기)적인 필요성․보편타당성․독창성․개성미가 있어야 함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Ⅳ. 끝맺음을 하면서
지금까지 나는 수필창작과정에서 부딪칠 만한 몇 가지의 ‘벽’(취약점이나 애로사랑) 문제를 언급해 보았고 또 미비하나마 그 극복방법도 언급해 보았다. 만약 오늘의 수필작단이 이를 말끔히 극복만 할 수 있다면 수필계는 거듭 날 수 있을 것이고 또 질적으로 한 차원 높이 도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지금까지 언급해 온 ‘내부의 벽’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수필발전에 저해(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외부의 벽’도 쉽게 허물어질 것이다. 바꾸어 말해 아직도 문단 일각에서는 수필을 잡문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점도 쉽게 없어질 것이고 또 한편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다고 수필을 얕잡아 보는 도전적인 자세에도 수정이 있게 될 것이다.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수필생산을 위해 모든 수필가들은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
(제3회 대표에세이동인회 세미나 주제발표문, 1990년 8월)
첫댓글 주제가 수필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합니다. 좋은 소재가 있으면 그에 맞는 주제가 뜨오르기도 하지만 새로운 주제, 신선함을 추구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청다선생님은 수필가이면서 평론가로 이 부분에서 명쾌한 답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 드립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야, 이름을 보니 반갑네요. 주말을 함께 못해서인지 상당히 오랫만인것 같네요. 언젠가 내가 말했지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감사합니다. 뭔지...정신 없이 바쁘네요!! 좋은 여행 같이 못 하여 넘 애석. 제 마음 아시죠??!!
주제찾기에 활용해 보아야 겠습니다.
눈이 아파서 이 글을 가져가서 읽어야 겠습니다. 속눈섭이 또 찌르기 시작해서...대충 읽었는데 한 번 보고 말아서는 안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몇번이고 읽어 보면서 공부하겠습니다. 참 좋은 내용의 '수필 특강'이군요.
좋은 소재를 가지고도 주제가 글 속에 잘 스며들어있지 못한 경우, 주제가 단지 설명형식으로 펼쳐진 경우는 수필의 맛을 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참신한 주제 찾기를 위한 10가지 착상법 감사합니다. '선의의 허구'는 용납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변잡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는 아무래도 어렵기만 합니다.
그 동안 많은 토론이 있었던 수필에서의 허구성 문제는 이제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청다선생님 말씀대로 허구의 한계성이 있긴하지만... . 원래 신변잡기가 수필의 주소인데 별말씀을... .
주제 찾기의 열가지 방법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강의를 듣고나면 글을 쓰는데 자신이 없어집니다. 특히 허구도입문제에 대하여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선의의 허구' 하는데 그 경계를 찾기가 애매합니다. 제가 전에 '동전 세 닢'을 발표할 때에 같은 방에 계시던 어느 작가가 그러시더군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동전과 합쳐서 만원을 자선남비에 넣고 끝내라구요" 그 후로 저는 그분의 글을 잘 안봅니다. 그 분의 글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중수필과 경수필도 구분이 안되어요. 걱정이네요. 저는 구분없이 편하게 쓰고 싶은데...
그냥 만원이면 어떻고 동 전 세 잎이면 어떠하겠습니까만은, 동 전 세 잎이 마음에 드신다면 소박한 마음을 내 비친 것이라고 봅니다. 만원은 허구라기보다 허세같네요. 중수필과 경수필은 맛이 다르지만 쓰는 분 입장에서는 굳이 구분하실 필요도, 펜을 놓기까지는 느껴지지도 않을거라고 봅니다. 중.경이 무게를 말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쯤에서 허구이야기는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