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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 - 해제면 유월리 (오류 용산 물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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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전주 이씨 이장길(1568-1638, 호-漁隱)이다. 이장길은 경기도 포천 운담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왜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그 전공으로 통훈대부 행 全義현감을 지냈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사 原勳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나라가 어지러움에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이 마을에 터를 정하고 尼城山 아래에 강학소를 지어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고 주변의 선비들과 더불어 경전을 읽고 토론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화친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여 밤낮을 통곡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이 마을에 인동 장씨 장덕화가 1830년경 함평에서, 그리고 광산김씨 등이 차례로 입향하여 마을이 더욱 더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과 아랫 마을인 월암 마을에는 스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월암 마을 뒤편에 5개의 반달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현재는 찾을 수 없음) 이곳을 지나던 한 스님이 마을 이름을 ‘월암’이라 부르면 마을에 귀인과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30여년 전까지 마을 앞에는 똥섬(논에서 일하다가 뒤가 급하면 들어가서 볼일을 본다는 섬)이라 부르는 섬이 있었으나 지금은 논이 되어 있었고 마을 쪽으로 수로가 있어 그 주위에 많은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다. 이 마을에는 해제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니성산이 있다. 이 산에는 일제 시대에 금광이 개설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금을 채취했다. 니성산에는 약수터가 있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약수터 위에 절터가 있어 약수터의 물을 떠다가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고 하나 사찰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서 동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다른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 마을 출신의 배종열님의 증언에 따르면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라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이 마을에는 장사(壯士)가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面에서나 郡에서 공사를 할 때 오류 마을 사람이 들어오면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큰 장사 작은 장사의 이야기(무안의 전설에서 자세히 소개)가 전해지고 있어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힘이 센 사람들이 많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 갯벌생태체험관이 있는 고성이씨 집성촌의 마을-유월2리 용산
용산은 유월2리에 속한 마을로 현경면에서 해제쪽으로 24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해맞이길로 접어들면 만나는 마을이다. 낮은 구릉을 등지고 함해만을 앞에 두고 있으며 야산 개발과 간척 사업으로 논과 밭이 많은 지역이다. 이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성씨는 풍산 홍씨이나 현재 후손들은 살고 있지 않다. 마을 뒤에 홍씨들 선산이 있어 이곳에서 홍씨들이 살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지만 홍씨들이 이 마을을 떠난 이유가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즉 마을 뒤에 있는 조심머리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발생한 사고 때문에 홍씨들이 마을을 떠난 것이다. 조심머리는 가마골(사기점)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개웅의 입구인데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를 만날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최초 입향조는 1870년에 들어온 고성 이씨 李在燮(1838-1918, 초휘-재삼, 자-경춘)이다. 그의 先代는 강원도 고성에서 세거하였으나 이괄의 난을 피해 함평으로 내려 와 살게 되었다. 이후 흉년이 들어 살기 어려워지자 입향조가 식솔을 데리고 살 곳을 물색하던 중 해제 천장리 보천을 거쳐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재섭 공은 고성이씨 족보에 의하면 임인년에 당상관 통정대부에 올랐던 사람이다. 龍山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뒤 산의 이름인 용산에서 비롯되었다. 니성산의 한 줄기인 용산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소유자의 이름을 따 구본산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실지로 이 마을의 주민들도 마을 뒷산의 맥이 용의 형상을 하고 함해만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용꼬리는 물암 쪽이며 용머리는 니성산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사기점, 작은 용산, 큰 용산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용산 뒤에는 가마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서 구운 가마를 사기점으로 옮겨서 배로 운송했다고 한다. 지금도 가마골 주변에서는 가마터가 있었으며 백자와 접시 등이 발견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엄섬과 대섬이 있다. 2011년 5월 개관한 마을 앞 白頭라는 곳에 세워진 ‘무안생태갯벌센타’는 황해 생태계 보전사업의 일환으로 습지환경과 갯벌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자연생태학습장이다. 또한 이 마을 주민들에게도 새로운 소득 창출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민들은 센타가 들어오고 나서 마을에 도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 망부의 애절함이 깃든 물바위의 마을-유월3리 물암
물암은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방면으로 3㎞ 정도 떨어져 있으며 유월3리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당난구지와 한뿌리[一根]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24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다. 當難求地 또는 唐難求地는 24번 도로 오른쪽의 함해만 쪽으로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當難求地는 마땅히 어려움을 구할 수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알려졌다. 먹고 살 수 있는 길지라는 것이다. 唐難求地는 당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구함을 받았다는 땅이다. 한뿌리는 서해안을 바라보고 위치해 있다. 예전에 마을 뒤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잿등이라는 고개가 24번 도로를 가로질러 있었는데 그 잿등의 맥이 서해안을 향해 하나로 쭉 뻗어 있었다. 이 마을은 그 맥을 등지고 형성되었는데 한뿌리라는 마을 이름은 그곳에서 유래했다. 이 마을은 현경과 해제면의 경계지점에 있다. 또한 지리적으로 자라목 지형으로 동서로 바다가 접해 있어 육지면이 가장 좁은 지역이다. 해서 후일 운하로 함해만과 서해안이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마을 앞산을 안산이라 하는데 이 산은 이른바 해제 8명당 중의 하나인 花蟹弄珠(화해롱주-게가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의 명당이다. 이 명당은 長城 출신으로 황주 변씨인 망암 변이중의 선산으로도 유명하며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이다. 한뿌리 마을 앞에 물바위가 있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부인이 애기를 업은 채 돌이 되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바위다. 망부석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하여 주민들은 이 바위를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혼이 바위가 되었다 해서 넋바위[魂巖] 또는 물바위[水巖]이라 불렀다. | ||||||||||||||||||||||||
첫댓글 유월리 오류마을에 사는아가시가있었는데 나를 엄청좋아했어도 결혼을 못했네 나에 첫사랑이였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