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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동(仙岩洞)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신선이 머물까. 오랜 옛날부터 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기록으로 흔하게 남기지 않음은 속인들의 범접을 막는 선계의 속성이 있어 그저 이름만 남길 따름이다.
신선바위산을 북쪽머리에 이고 동서로 길게 펼친 지형을 두고 마치 누에 같다고 했다. 옛날부터 잘사는 동네, 양반동네라고 했지만 울산이 공업도시로 변하면서 선암동의 동쪽은 피폐하기 시작했다. 공단에서 날아오는 공해로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있는 사람들은 이삿짐을 쌌다. 그러나 깊이 있는 마을은 금방 생채기를 털어내고 옛 신선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아니, 아픔까지 품에 안고 울창한 선계를 다시 만들고 있다. 법정 선암동의 면적은 3.43㎢이지만 주민이 급격히 줄어 미미한 인근 용잠동, 남화동, 용연동, 황성동, 성암동, 부곡동, 고사동, 상개동 등 8개 법정동을 통합하므로 행정구역이 울산광역시 남구 전체면적의 36%를 차지한다.
울산의 으뜸명소 선암수변공원이 태어나고, 공해차단녹지를 울타리삼은 안쪽은 산과 물이 과연 빼어나다..
□ 마을변천사
‘仙岩’이란 땅이름은 비교적 늦게 나타난다. 조선 고종31년인 1894년에 편찬된 읍지 영남 울산부사례(邑誌 嶺南 蔚山附事例)에 仙巖이란 지명이 보이는데, 이와 같이 명동(明洞)이 같이 나타나다가 일제때인 1911년 명동을 선암동에 통합시켰다. 이때는 대현면(大峴面) 선암리였는데, 1962년 울산이 시로 승격하면서 선암동이 된다.
1985년 울산시가 구제(區制)를 도입할 때 이웃 법정 상개동을 흡수하더니 1998년까지 위에 적은 법정동을 모두 통합하므로 행정동 단위 면적이 매우 넓어졌다.
본고에서는 법정동 선암동만 다룬다.
□ 선암본동(仙岩本洞)
1962년 현재의 SK Complex인 당시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이 착공되면서 고사동에 있던 대현초등학교와 대현중학교가 모살미산 동쪽에 임시 천막교사를 지어 이전하였고 1963년 태광산업 울산공장의 전신인 동양합섬이 염붓개마을에 건설되면서 역시 이곳 철거주민들도 터를 잡아 큰 마을을 이루었다. 이 터에 공영주택(公營住宅)과 시영주택(市營住宅)을 짓고 대규모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지금의 선암동주민자치센터와 선암초등학교 일대다.
□ 명동(明洞)
본래 鳴洞이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明洞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청송심씨의 집성촌으로 타성은 몇 집 되지 않았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당당하게 울리고 살았으므로 울명(鳴)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동(鳴洞)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다.1)
「鳴洞」은 우리말이니 이것 역시 밝은 마을의 뜻을 가진 것인데 「밝(光明)」이 「우리․어리․오리․아리」로 음전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마을 앞에 큰 도로가 생기더니 다시 동해남부선 철도가 가로질러 지나가므로 소음방지판을 설치하여 몰골이 상했다.
명동마을 앞의 골짜기를 ‘명동골’이라 한다.
□ 속등
명동마을의 서쪽에 있는 등성이로 마을 속에 들어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 염붓개
고사동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그 물을 끌어다 천일염을 생산하였다. 농도가 진해진 소금물을 퍼다 큰가마에 넣고 끓여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가마(鹽釜)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금은 광복이후에도 생산했고, 이후 마을만 있다가 태광산업울산공장이 건설되면서 철거되었다.
□ 불매골
선암동 ․ 상개동 ․ 부곡동의 경계에 있었던 골짜기.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불매’는 풀무의 울산말이다.
□ 들갓
태광산업 남쪽에 있었던 야산인데, ‘들’은 들판, ‘갓’은 숲이 있는 야산을 가리키므로 약간의 경작이 있었지만 척박했다.
□ 밤밭
들갓에 인접해 있었던 밤나무 밭을 일컽는다.
□ 사태불(沙汰弗)
명동의 남쪽에 있었던 마을인데, 지금은 한진택배 등 물류회사가 입주해 있다. 옛날 이곳에 사태가 나 붙여진 이름이다.
□ 큰마실 ․ 큰마을 ․ 대리(大里)
지금의 선암저수지 둑 부근에 있었던 마을이다. 선암저수지가 생기면서 대부분 수몰되고 지금은 몇 집만 남아있다. 울산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선암동 하면 이곳 큰마실을 지칭했다고 할 만큼 선암동의 중심이었다.
□ 대나리 ․ 대일(大日 ․ 大津)
상개동 함월산과 산선바우 서쪽 사이로 길게 이어진 마을이다. 옛날 외황강(外隍江)의 상류에 아홉 개의 나루가 있을 때 이곳도 나루(津)였다고 구전하여 오는 곳이다. 그러나 지세로 본다면 수긍하기 어려운데, 「大」의 본 뜻은 산(山)이며, 「나리」는 내(川)를 일컬음이니 사람이 사는 터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
1970년대 후반 풍산금속 사택이 입주한 이래 많은 아파트가 건립되어 지금은 정애골과 함께 선암동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선암수변공원에서 대나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나리만디 ․ 대나리말랑 혹은 대날고개’로 불렀으며, 두왕로에서 대나리로 들어서는 골짜기를 ‘대나리골’이라 했다.
□ 멀낭들
대나리만디에서 끝바우로 넘어가면 바로 나타나는 작은 들을 말한다. ‘멀’은 멀다의 의미며, ‘낭’은 낭떠러지의 옛말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경사진 들판을 말한다고 한다. 지금은 삭평과 평탄작업을 거쳤으므로 옛 모습을 잃었다.
□ 정애골(亭愛谷)
두왕동과 접경하고 있는데, 옛날 정각(亭閣)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개운초등학교가 있고, 택지개발과 대단위 아파트가 입주해 있어 옛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정애골의 서쪽으로 난 골짜기를 ‘백양골’이라 했는데, 이 역시 택지개발과 도로(두왕로)에 편입되어 옛모습이 없다.
□ 끝바우
신선바위 아래 선암수변공원관리사무소 부근의 마을이다. 신선바위 끝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해왕바우
신선바위산 에 붙어있는 이 바위는 신선암의 선녀 해산(解産) 전설과 결부되어 있는 듯 하다.
□ 새터(新基)
선암저수지 둑 아래 있었던 마을로 지금은 수몰되어버렸지만 청송심씨 집성촌으로 새로 이룬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모살미산
선암초등학교 서쪽에 있는 산으로 선암동의 대표산이다. 모살미는 어미산(母山)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선바위산을 낳은 산이라고 보는데, 선선산이 신령스러운 산이지만 이 산을 낳은 산이 필요했겠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자연에게도 생성의 생명을 불어 넣었다. ‘미’는 ‘뫼’이므로 산을 중첩시키고 있다.
최근 일부 사람들이 「옛날 큰물이 났을 때 산꼭대기가 모춤만하게 남아 모를 살린 산이므로 모살미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전혀 모르는 말이다.
동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기와지붕 형태인데, 이 지붕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가운데 큰 인물이 세 명 난다고 구전되고 있다.
그러나 남쪽으로 큰길(산업로)이 생기고, 산 속으로 굴을 파서 동해남부선을 통과시키므로 산의 정기가 크게 훼손되었다.
□ 선암저수지
선암댐이라고도 하는데, 1964년 공업용수 확보용으로 축조되었다. 이후 상수도용으로 전환되었고, 지금은 ‘선암수변공원’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2006년 6월 준공된 이 공원은 울산 남구청이 의욕적으로 조성하였는데, 총연장 3.8㎞의 산책로를 3구간으로 나누어 각종 환경시설을 설치하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바래미산 ․ 발암산 ․ 발음산
선암저수지에 상당부분 수몰되고 지금은 산책로를 허리에 내고 있는 산이다. 신선바위와 모살미산 사이에 끼어 튀어나왔으므로 여성기를 비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산에 난 골짜기가 ‘바래미골’이다.
□ 신선바우 ․ 산선산(神仙山) ․ 산선바우산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울산발전 2006. 제14호 74쪽 ‘수암’ 참조) 이 신선바우로 해서 선암동이란 땅이름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신선바위는 양면성을 갖는다. 북쪽을 바라보는 바위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노출을 꺼리지만, 남쪽면은 어미산인 모살미산과 마주보고 있음인지 순후한 자태를 보이고 있어 선암동 토박이는 그저 경외감으로 다가갈 뿐이다.
□ 생바우
선암저수지 둑에서 야음초등학교로 가는 길 왼쪽에 우뚝하던 바위가 있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고 해서 생바우라고 했다. 지금은 길을 내면서 없어졌지만 그 위 산에는 이와 같은 바위가 명맥을 잇고 있다.
생바우에서 야음4거리쪽으로 난 골짜기를 ‘생바우골’이라 했다.
□ 구북이고개
끝바우에서 수암으로 넘어가는 고개였는데, 지금은 형상이 많이 변했다. 개가 엎드린 모습이라고 구복(狗伏)이라 했다.
이 고개가 있는 골짜기를 ‘구복이골’이라 했다.
□ 극락못(極樂池)
생바우의 북쪽, 지금의 야음초등학교 못미쳐 있었던 조그만 못인데, 인근의 주민들이 비손하여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지형이 전혀 없다. 이 못이 있는 골짜기를 ‘극락골’, 생바우에서 여기에 다다르는 고개를 ‘극락고개’라고 했다.
□ 당미기재 ․ 당고개
두왕로 활고개교차로 부근으로 옛날 서낭당이 있어 부쳐진 이름이다.
□ 담배밭골
현재 대산골프연습장이 들어선 자리다. 담배 재료인 엽연초를 재배하여 얻은 이름이다.
□ 새미골
선암초등학교 뒤쪽에서 SK정문쪽으로 뻗은 골짜기로 논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얻은 이름이다. 지금은 성토하여 물류회사와 자동차정비공장 등이 들어서 옛모습을 감추고 있다.
□ 서당고개
큰동네에서 상개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서당이 있어 얻은 이름이며, 골짜기를 서당골(書堂谷)이라 한다.
□ 예수바우
상개못에서 선암저수지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던 바위인데, 여우가 자주 출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팔밭골
선암수변공원 물레방아 주변을 일컽는다.
□ 허재비골
끝바우에서 대나리로 넘어가는 중간지점으로 허깨비가 자주 나타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바가지골
태광산업 체육관이 있는 부근으로 골짜기가 바가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옛모습이 없다.
□ 화리골
활고개의 동쪽으로 난 골짜기다.
□ 밀개등
선암저수지 여수로쪽의 모살미산 자락으로 모양이 밀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밀대를 울산에서는 밀개라고 하는데, 물건을 밀어 넓히는 나무막대로 이 등성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양택지를 정하면 재산이 늘어난다고 했다. 실제 1970년 당시 심상식이란 사람이 천석의 부를 일구었다.
1) 울산지명사. 이유수. 1986. 울산문화원. p.127
2) 위의 책. 같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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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사진은 어떻게 찍었는 사진인지??? 위성 사진이야??
그래 위성사진이다. 내가 위성이거든-_- 산위에 올라가고, 남의 아파드에 침입하고-정애골 사진은 9층인가 빌라 계단에서 사진을 찍는데 누군가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라. 특히 서광인가 하는 아파트에 올라가면 더 좋은 사진이 나오겠는데, 일요일이라 관리소장의 승인이 없으면 옥상문을 열어줄 수 앖다는 막힌 관리인과 언쟁만 벌였다.
상도친구!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덕분에 지척에 두고도 못 가 보았던 정수장 구경도 다 하고, 참 심상석 이 분 난 어려서 부터 39심정심이 조부로 심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정심이가 잘 알겠지만......^^
이런, 귀한 분의 휘자(諱字)를 틀리게 하였구나. 그 마을사람들이 불러준 그대로 적었는데, 심정심이에게 확인하였더니 '석'자가 아니고 '植'자라는구나. 바로 고치마. 이래서 많은 사람 특히 우리 동무들을 만나야 바른 기록이 나오지. 고맙다.
맞아 우리 사둔어른이라서 기억해 얼굴 모습조차도 선명이 남아 있는걸. 심자 상자 식자 셔 그 집에서 숨박꼭질했는데 너무 넓어서 안채만 아니면 사랑채만 제한을 했어 숨었다니깐 아까워 그런 문화유산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니.....
오~그래 길순아, 네 말이 맞다.^^ 학교길에 어쩌다가 웅장하리 만큼 큰 대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쏜살같이 달려가 빼꼼히 들여다 보면 또 하나의 담장을 거쳐 사람들이 드나듦을 볼 수 있었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마음에는 지금 우리가 경복궁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 것 같다. 바로 위 사진 양쪽의 큰 소나무 앞 저수짓둑 그 자리인 것 같네.^^
아, 또 하나 있다. 소똥비알. 신선바우산에서 선암저수지쪽으로 내려오면 펑퍼짐했던 등성이. 소먹이는 아이들이 소나무에 소를 묶었으니 똥이나 갈겼지. 그래서 소똥이 많아 소똥비알
비알은 골짜기 비탈진 언덕배기를 말하는 거제? 그냥 무심코 넘겼던 말이였는데, 새삼스럽네. 우리동네 안골새, 뒤께 ,똥골동네, 참 생각해 보니 다 우리말이 정말 정겹다.
예수,비알...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친구야 항상 울산에 대한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수집해서 전달해주어 너무고맙다 내가 선암동 출생이라 어닐적에 많이 들어보고 사용하던 지명이 향수를 느끼게 되는것 같다 항상 고마워워워...
그래서 연붓개구나 .....많이알고갑니다 상도씨가 우리들의 친구라는게 자랑스러워
"들간"이라는 명은 엄네 그곳은 지금 물이 낙차 하는 그쯤인데 오리목나무 칭딤이가 아주 가파르게 한 6,70m되는벼랑이 있고 그밑에 폭 2-3m되는 또랑이 흐르고 있었지 ... 그곳이 들간이여 아주 쇠음달 이었고, 겨울엔 어슬프게 얼은 얼음위에서 얼음지치기로 왁자지껄했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곳이 선하게 느겨져...
상도 친구 지명 한개 갈캬 드렸어".돌 틈"도 있고 "골새"도 있고
참 그렇네~ 우리 밭이 '골새' 있었지. 수변 공원 수암으로 가는 입구에서 수암 고개까지 골짜기를 일컬었지. '돌틈'이는 정심이 조부댁 지나와서 문산댁에서 학산댁 그 사잇길을 말했던거 맞제?
정심아짐 !영자 고모 가 거쳐하시던 연당을 좀 서술 혀 봐요
야--순희야 우리 고모가 거처 하든방을 어떻게 기억해? 방 뒤끝에는 목깐통이 있었는 데 그기서 목욕한 기억이 나고 할아버지의 큰 위업이 계승되지 못함이 다만 아쉽고 며칠후면 할아버님의 기일인데 참여 할지는 아직 미정이다.
사랑채에 있던 목욕탕의 그 까만 차돌이 지금 어느 것의 내장품과 비교하리요? 그 연당아씨도 세파에 찌던 허리굽은 노파가 되었다네.
내가 아는 영자 고 모 별당은 내가 토지 드라마에서 본 별당보다 더 정취가 나는 죽담 밑에 물이 고여있어 연당 이라고 했고 몸종겸 시중을 드는 시종, 여느공주는 그른 공주가 없었다. 아무도 그징금 다리를 건너 연당 안으로 진입 하지는 몼했지 .. 그리고 솥을 대문 간에는 대문지기 만봉의네가 살고 있었고 그의딸이 대를 이어 시종을 하다가 종 개념의 그것에서 벗ㅇ어나 연이네는 아이도 많이 낳아 지금은 어 디서 사는지... 그즈음 집안 처녀들이 시집을가면 그 만봉으네를 데리고 시집을 가서 근행 올때 돌아 오기도 하고 한 열흘 새댁 대신 험한 일을 거들기도 했지...
순희야! 그 딸인지 모르겠는데 울올캐 시집올 때 데리고온 종 이름이 사월인데, 그 외손녀가 또 울집에 식모로 온 적이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적이 있었다네
그사월네가 만봉으네이고,그의 딸 연이네 또는(갑이네)가 낳은 즉 갑이 여동생일걸세...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담은 그시절의 타일인데 담장의 중허리에 아자 문양 이종 연속 문늬가 담장 끝까지 연당 까지 펼쳐져 있고,그 안 쪽은 난 본 일이 없어 피력을 삼가 해야해 그냥 겉 보기에 키큰 전나무들이 높고 쏱아 있고 가끔 100년은넘게 살음직한 소나무도 섞여서 있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