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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례 ----
11. 체포
12. 구만리 장천을 떠도는 구름
13. 냉철한 비판을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14. 까마귀떼
15. 기습이다!
16. 감꽃은 먹을 수 있는 꽃
17. 배고픔과 동물과 인간
18. 수혈
19. 새가 창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20. 토벌대 물러가라!
11. 체포
최익승은 연거푸 두 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숨을 씩씩거리며 담배연기를 푸푸 소리 나게 뿜어냈다. 그러나 화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국회의원 최익승을 감히 뭘로 보고 새파란 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턱주가리 치켜들고 주둥아릴 놀려대. 이놈을 당장 그냥 ……
최익승은 생각할수록 분이 치솟아 견딜 수가 없었다.
최익승은 반 넘어 탄 담배를 잉끄려 끄며, 이렇게 화만 내고 있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놈이 더 나대지 못하도록 근본적인 방안을 강구할 필요를 느꼈다. 일단 생각의 방향을 정하자 그의 두뇌는 그쪽으로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됐어, 그 방법이 최고야!"
그는 앉은뱅이책상을 칠 만큼 자신의 생각에 만족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책상 위의 전화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칠게 발신 손잡이를 돌려댔다.
"교환, 나 국회의원 최익승인데 빨리 경찰서장 바꿔."
"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바꾸겠습니다, 의원 각하."
수화기 속에서는 꾸벅꾸벅 절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의 음성이 황급하게 울렸다.
수동식 전화기가 사십 대에 불과한 읍내에서 교환이 대하는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것은 고작 읍장이나 경찰서장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국회의원 최익승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당황할 만도 했다.
"의원 각하, 서장님 나오셨습니다."
교환의 말을 듣고 최익승은 크음크음 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소리를 듣고 저쪽에서 먼저 말을 해왔다.
"의원 각하십니까, 저 남인태입니다."
"아, 서장이오? 나 최익승이오."
"예, 편히 주무셨습니까. 아침 일찍 어쩐 일이십니까?"
서장은 부동자세라도 취하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의논할 일이 있소."
"예, 곧 가 뵙겠습니다.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익승은 담배를 뽑아들었다. 연기를 느리게 뿜어내며, 내친 김에 그 일들을 다 처리해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을 오래 비워둘 수 없는 처지에 시간이 촉박했다.
경찰서장 남인태는 금방 들이닥쳤다.
"의원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남인태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말하는 숨결이 가빴다.
"앉기부터 하시오."
최익승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어허, 서서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니까."
최익승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인태는 그때서야 자신의 예절이 빗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주저앉았다.
최익승은 어떤 건부터 말을 꺼낼까 잠시 생각했다.
아까 전화를 걸 때만 같았어도 그놈에 관한 문제를 제일 먼저 꺼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다소 감정의 고삐를 잡게 된 그는 빠르게 손익계산을 해나가고 있었다. 이익이 작은 것을 앞으로 내세우고 이익이 큰 것을 뒤로 미뤄 역순으로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정했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도를 어느만큼 은폐시킬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남 서장, 현재 청년단장직은 어찌 되었소?"
마침내 최익승의 목소리가 무겁게 흘러나왔다.
"예에, 아시다시피 공석 중에 있습니다."
남인태는 상대방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쯧쯧쯧, 그거야 누가 모르오. 이 비상시국에 처해서 언제까지 그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둘 거냐를 묻는 것이오."
남인태는 가슴이 찔끔해졌다. 벌써 한 수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상대방은 적임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데, 며칠을 정신없이 돌아치다 보니 거기까지는 미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그 말을 해서 가뜩이나 간당간당해진 목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찰서장 자리가 사랑방의 하룻밤 화투놀이로 따낸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예에, 계속 물색 중입니다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선뜻 나서는 사람도 없고 해서, 곧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시국이 시국이라니, 위험시국이라 또 빨갱이 손에 죽을까봐 무서워 그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이 없단 말이오?"
최익승은 말꼬리를 낚아채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남인태는 가슴이 찔끔이 아니라 철렁 내려앉았다. 거짓말이 꼬투리를 잡혔으니 빨리 또 다른 거짓말을 꾸며대야 할 판이었다.
"예에, 할 만한 사람은 그런 눈치인데다가 감찰부장 염상구가 워낙 일을 야무지게 해내고 있어서 별다른 불편이 없어 그만, 곧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손 안 대고 코 푼다는 말은 꼭 이런 경우를 이르는 것이라고 최익승은 내밀하게 웃고 있었다.
"감찰부장이 일을 잘하오?"
"예, 아주 기막히게 잘합니다. 전에도 단장이야 명예직 같은 것이었고 실질적인 일은 감찰부장이 다 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럼 잘됐소. 감찰부장을 단장자리에 앉히면 되겠구만. 이 비상시국에 제 목숨 위태로울까봐 그 자리에 앉기 싫어하는 비애국자들을 억지로 앉히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렇게 솔선수범하는 애국자를 그 자리에 앉히면 얼마나 일을 더 잘하겠소?"
"예에, 예에 ……"
남인태는 꽁꽁 힘만 쓸 뿐 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판 거짓말의 함정에 꼼짝없이 빠지고 만 꼴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염상구를 단장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남인태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염상구가 청년단장이 되다니 ……
상상만 해도 정나미가 떨어지고 속이 뒤집히려 했다.
그 무식하고 앞뒤가 없는 불한당 같은 놈, 지금까지 감찰부장 자리를 차고앉아 부린 횡포도 얼만데 단장 자리에 앉으면 얼마나 더 기고만장일 것인가.
남인태는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서장이 천거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그리 표정이 시원칠 않소?"
최익승은 마무리 수를 놓고 있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염상구는 단장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인태는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을 해대고 있었다.
최익승은 담배를 댕겨 물었다. 첫 번째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순조롭게 풀렸다.
두 번째 일은 오히려 서장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서장은 혹시 김범우라는 사람을 아시오?"
"예에, 봉림 사는 김사용 어른 둘째아들입니다. 순천중학 선생이구요"
남인태는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대로 알고는 있구만. 헌데, 그 사람 사상이 어떤지 파악하고 있소?"
사상?
남인태 서장은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사상이라는 말만 들으면 빨갱이로 직결되는 직업적 노이로제거나 조건반사 같은 현상이었다.
김범우도 빨갱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국회의원 나리님이 묻고 있는 말투는 꼭 그런 것처럼 들렸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지, 남인태는 마음을 다집았다.
"그 사람 사상은 건전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사상이 건전하다? 서장이 자신할 수 있소?"
남인태는 금방 자신감이 흔들리며 궁지에 몰렸다. 국회의원의 추궁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사상이라는 것, 그것처럼 파악이 어렵고 자신감을 갖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그 놈의 사상이라는 것은 형체도 모양도 없는 것이 꼭 바람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행동으로 내보이지 않고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한 제아무리 수사능력이 뛰어난 형사라도 적발해 낼 재간이 없는 일이었다.
"아, 서장이 자신할 수 있느냐니까!"
노련한 백정이 소의 급소를 가격하듯 최익승은 서장의 약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저희들이 파악하는 바로는 ……"
"파악하는 바로는 애국자다 그런 말이오?"
"아닙니다, 애국자는 아닙니다."
"그럼 뭐요. 빨갱이도 아니고 애국자도 아니면, 회색분자란 말이오?"
회색분자?
남인태는 정신이 아리송해졌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회색분자인 것은 분명한데, 그것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더 가깝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말이었다.
김범우를 자신 있게 회색분자라고 점찍을 수 있을 것인가. 남인태는 전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저 사람이 김범우에게 무슨 짓을 하고 싶어 하는가, 남인태는 또 함정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왜 아무 말이 없소."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 ……"
"어허, 경찰서장이란 사람의 태도가 어찌 그리 모호하오. 그놈을 당장 잡아들이시오!"
"네에?"
남인태는 이미 나타내버린 놀라움을 수습하느라고 급급했다.
"그놈은 아주 새빨갛지는 않지만 불그죽죽하게 물이 든 놈이오. 그놈이 새벽같이 날 찾아왔는데, 빨갱이 편을 드는 언동을 계속했단 말이오. 그놈을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돼 있소. 당분간 유치장에 처박아 두는 수밖에 없소."
"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했습니까?"
"그야 취조를 하면 다 알 수 있는 일이니 내가 되씹을 건 없고. 우선 잡아넣는 일부터 하시오."
"하지만 무슨 명목으로 ……"
남인태는 상대가 만만찮은 김범우라서 선뜻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남 서장! 당신은 서장 자격이 있는 사람이오, 없는 사람이오? 뭐가 무서워 우물거리는 게야. 국회의원이 잡아넣으라는데 잡아넣는 거지. 그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잡아넣으라는 거 아닌가."
최익승은 아까 김범우 그놈이 다녀간 직후처럼 화가 치밀어 올라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아,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남인태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남 서장,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오. 김범우 같은 놈이 남서장 수명 단축시킬 수 있는 일이니까. 그놈이 나한테 뭐랬는지 한 마디만 해주겠소. 아무리 공산주의 활동을 한 자라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은 있을 수 없고, 피해자 가족의 감정이 개입된 보복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떠들었소. 용공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남서장 생각은 어떻소?"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확실히 위험한 데가 있습니다."
남인태는 어디선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일단 잡아들일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김범우는 역시 만만찮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잡아들여서 세세히 조사를 하시오. 그러다보면 시일은 흐르고 그놈 발이 묶인 상태에서 검거는 일단락될 테니까. 서장은 시간만 끌면 되오."
"알겠습니다."
남인태는 비로소 최익승의 심중을 알게 되어 자신 있게 고개를 꺾었다.
"그러고 말이지 ……"
최익승이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뜸을 들였다.
"거 김씨 문중 사람들이 보고만 있지 않을 거요. 서장은 나를 믿고 버티라고. 그러고 말이야, 서장은 눈치껏 김사용 영감에게 귀띰을 하시오. 일을 순조롭게 해결하려면 서울에 가서 최 의원님을 만나라고. 무사히 풀려나는 길은 최 의원님이 신원보증을 서는 방법밖에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소?"
"네에, 알겠습니다."
최익승은 자신의 명민한 머리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 계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지난 선거 때 김씨 문중의 지지는 거의 얻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김사용은 김씨 문중을 이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 일만 잘해내면 남 서장은 ……"
최익승은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담배갑을 남인태 앞에 내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남인태는 황송한 몸짓으로 사양했다.
"아직 이야기가 남았으니 한 대 뽑으시오. 허고, 편히 앉아요."
남인태는 두 손을 받혀 담배 한 개비를 뽑았다.
'이 일만 잘해내면 남 서장은 ……'
그는 새로운 서광이 비치려 하는 것을 느꼈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실낱처럼 가늘어져 있는 목을 동아줄처럼 굵게 만들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최익승은 기분이 썩 좋았다. 이제 마지막인 세 번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제일 신중을 기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말이오, 술도가 정사장 얘긴데, 어찌 처리할 작정이오?"
남인태는 바짝 긴장했다. 태연하려고 했지만 가슴이 벌떡거렸다. 이틀 전에 정사장 부인이 가져왔던 돈뭉치가 눈앞에서 어릿거렸다.
"예, 마땅히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의원 각하께 여쭈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최익승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 눈치여서 남인태는 재빨리 말을 지어냈다. 받아놓고 있는 돈은 돌려주면 그만이라 싶었다.
"나한테 물으려고 했었다아 ……"
최익승은 상아물부리로 왼쪽 손바닥을 느린 간격으로 쳐대며 생각에 잠겼다.
"정 사장 아들이 자금조달을 하려 나타나면 장본인을 체포하는 동시에 정 사장을 자금조달책으로 얽으려고 매일 잠복을 시켰는데, 아들 정하섭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정 사장을 얽을 죄목이 없어 조처를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요?"
최익승은 안색이 달라졌다.
"예, 지금으로서는 ……"
"정신 차리시오, 남 서장. 읍내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은 다 죽어간 판에 정 사장만 살아난 건 뭐요. 그것 이상 확실하고 분명한 죄목이 또 어디 있소. 남 서장은 지금 잠꼬대를 하는 게요 뭐요?"
남인태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빨갱이 아들 덕을 보고 살아난 것이 무슨 죄가 되랴. 며칠 경찰서에 가둬 두었다가 뒤로 돈이나 챙기고 풀어주면 되겠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남인태는 등골에 찬바람이 일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는지요?"
남인태는 자신의 결백을 내보이기 위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남 서장!"
"예에 ……"
"그 자를 오늘밤 당장 총살시키시오."
"아니, 의원 각하 ……"
남인태는 뻣뻣이 굳어졌다.
"왜, 못 죽일 이유라도 있소?"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나 ……"
"그러나, 어쨌단 말이오?"
"정 사장은 유지입니다. 읍내 발전에도 공이 적잖습니다. 아들이 빨갱이질하는 걸 막으려고 애쓴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총살 말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주시길 바랍니다. 의원 각하께서 이번에 덕을 베풀어 주시면 다음번에 ……"
남인태는 삐질삐질 진땀을 흘렸다. 정 사장을 총살시키고 나면 서장자리도 끝장이 날 것 같은 예감에 몰리고 있었다.
최익승은 그런 남인태를 옆 눈길로 보며, 저것이 판단은 제대로 하는군, 생각하고 있었다.
"덕을 베풀라니, 어찌하라는 거요?"
최익승은 한 발 물러서는 척하며 남인태의 입으로 방법을 제시하게 했다.
"예, 제가 강력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하고, 의원 각하께서 특별 선처를 하시는 것으로 하면 정 사장이 그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최익승은, 녀석이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글쎄, 세상을 살면서 덕을 베푸는 건 나쁠 것이 없는 일이지만 말야 …… 그자가 선처를 하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내가 죄인을 찾아 경찰서로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최익승은 마지막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찌 그러실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바로 돌아가서 하루 종일 호되게 취조를 하고나서 날이 어두워지면 각하 앞에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선처를 내려 주십시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최익승은 슬쩍 딴전을 피우며 고개를 저었다.
"의원 각하, 그렇게 해주시면 각하의 덕망이 온 읍내에 퍼질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일입니다."
"글쎄에, 서장이 그리 바라는 바라면 내 뜻을 못 바꿀 것도 아니지만 ……"
"고맙습니다, 의원 각하."
남인태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최익승은 그런 남인태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엷은 웃음을 피우고 있었다.
네놈 같은 새대가리는 열 번 죽었다 깨서도 내 깊은 생각을 땅띔이나 하겠느냐 ……
그는 통쾌함을 어금니 사이에 지그시 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출귀몰한 두뇌회전으로 얻게 된 이익을 만족스럽게 음미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만족감이라는 것은 해방직후부터 국회의원이 될 때까지의 성취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논바닥에서 이삭 줍는 것 정도밖에 안 되는 하찮고 하품 나는 것이었다.
그에게 해방이라는 것은 참으로 느닷없이 떨어진 벼락이었고, 상상도 못했던 불길이었다.
대일본제국이 망하다니……
그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 판세 돌아가는 것을 빈틈없이 읽어낸다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일본이 적어도 200년 동안은 조선 땅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했고,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믿지 않았던가.
200년, 그 까마득한 세월 다음에 조선은 어찌 되느냐를 묻는 것은 천치가 아니면 정신병자일 뿐이었다. 200년은 곧 영원이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지게 되어있는 운명에서 고작 60평생을 살다 가는 인생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너무나 자명한 결론이었다.
내선일체에 앞장서며 살아온 인생에 예고 없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죽음과 맞닥뜨리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 암담한 절망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이 몰아온 그 거센 바람을 요령껏 피하고, 그 성난 물결을 눈치껏 타넘을 수 있는 기회가 뒤따라왔던 것이다. 그 결과 어둠으로 앞을 가로막았던 해방이라는 흉물은 정반대의 광명을 가져다준 보물로 둔갑했다. 일정시대의 사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드리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란 권력까지 손에 쥐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두 자신의 빠른 판단력과 기민한 행동력의 결과라고 그는 스스로의 능력을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그러나 그 확신 뒤에는 또 하나의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의 대상은 다름아닌 미국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미군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확신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보다 몇 갑절 컸다.
군정이 베풀어준 두 가지 은혜에 대해서 그는 그저 감읍하고 감읍할 따름이었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자마자 민심을 선동해대고 있던 공산당을 외면하고 한민당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일본식의 통치방법을 전면 폐지하고 미국식의 '자유시장' 체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기부금을 내고 한민당원이 됨으로써 정치적 신분을 확보했고, 자유시장체제의 허점을 신속히 파악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나갔다. 보성군 일대를 정치발판으로 삼아 한민당 조직을 지주 중심으로 짜 나가는 한편, 그 조직을 이용해서 무작정 쌀을 사들였다.
해방이 되고 서너 달이 지나는 동안 역 건너편에 늘어선 동척의 쌀 창고는 텅텅 비게 되었다. 그 쌀 창고들이 그가 사들인 쌀가마니들로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쌀들을 기차에 실어 서울로 뽑아 올렸다. 쌀가마니들이 용산역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만큼의 쌀이 벌교의 쌀 창고를 다시 채우고 있었다. 용산역에 내려진 쌀가마니들은 그 주변의 창고 속에서 느긋하게 잠을 잤다. 이런 식의 행위는 물론 그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시대부터 사업을 해온 손 큰 사람들은 뒤늦게 자유시장체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서로 다투어 매점매석에 뛰어들게 되었다. 다만 그는 남들보다 서너 달이 빨랐을 뿐이다. 시장마다 쌀이 동났고, 쌀값은 날마다 치솟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에 세배로 오르다가, 두 달 사이에 여덟 배로 뛰어올랐다. 쌀을 창고에서 잠을 재울수록 돈은 불어나고 있었다.
그는 보성군 일대의 쌀로 만족할 수 없어 나주와 고창까지 직접 나섰다. 벌교에서도 몇몇 눈치 빠른 것들이 나서서 쌀을 여주로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훼방꾼이 윤삼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왔던 집안의 동생 익달이도 그 금을 캐는 것과 마찬가지인 내막을 알아내고는 슬그머니 등을 돌려 제 배를 채우겠다고 나서고 말았던 것이다. 장사는 어차피 돈 놓고 돈 먹는 것, 그 훼방꾼들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많은 쌀을 구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곡창으로 뛰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윤삼걸이나 동생 익달이가 여수로 쌀을 빼돌리는 것은 일본 상인들과 뒷거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신은 그 방법을 미련 없이 외면했다. 허술한 단속으로 일본배들이 일정시대나 별다를 것 없이 항구마다 드나들고 있다고는 해도 지방당직이나마 당직을 가진 몸으로 밀수행위를 하기가 어딘지 꺼림칙했고, 더구나 이익이 더 남는 것도 아니었다.
고창, 김제를 중심으로 한 호남평야로 손을 뻗친 그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서울의 돈줄만이 아니라 부산이나 마산 등지에서 돈 보따리를 짊어지고 온 사람들까지 설쳐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일본을 상대로 한 장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전문적인 사업가들만 몰려든 것이 아니었다. 돈푼깨나 가진 관리들이 거간꾼을 앞세워 돈을 풀어대고 있었고, 장사물리를 어느만큼 아는 지주나 부자들도 돈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자극받아 그의 열기는 더욱 가열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출렁거리는 쌀값은 상상보다도 훨씬 무서운 기세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네댓 달 만에 100배를 넘어섰고, 반년이 지나면서 150배가 되었다. 쌀값 오르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입장에서도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쌀은 품귀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품귀현상은 값을 오르게 했고, 멈춤이 없는 오름세는 새로운 품귀현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군정은 6개월 만인 46년 2월에 쌀의 자유거래를 중단시키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쌀값의 폭등과 품귀현상을 막기 위해 내려진 조처였다. 그 대안으로 군정은 배급제를 내놓았다. 그건 일정 말기 방법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는 군정의 그런 조처에 놀라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한민당의 조직을 통해서 그런 조처가 내려지리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동안 재산을 막대하게 불려놓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조처가 내려졌다고 해서 쌀값이 올랐으면 올랐지 떨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배급제를 실시하자면 일정 때처럼 쌀을 공출시켜야 하는데 2월 농촌에 쌀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배급제는 쌀이 나오는 10월까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었고, 쌀값은 그때까지 계속 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배급제를 실시하기 위해 군정은 미국에서 곡식을 들여온다고 했다. 그는 예상이 깨져나가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충격도 별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 쌀이며 옥수수 같은 곡식을 들여왔다고는 하지만 시루에 물 붓기로 쌀 부족사태가 계속되는 속에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에서는 쌀을 달라는 군중시위가 매일이다 싶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 외침을 기분 좋게 들으며 느긋한 마음이었다. 그 외침은 바로 자신의 재산이 불어나고 있는 감미롭기 그지없는 노랫소리였던 것이다. 쌀값은 9월까지 줄기차게 올라 자유거래를 실시할 당시보다 300배가 넘어 있었다. 그건 다른 말이 아니고 자신의 재산이 1년 사이에 300배로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1년 동안에야말로 그에게는 말로 표현이 안 되는 황홀하고도 꿈만 같은 시기였다.
해방 직후 한 달 가까운 동안 풍전등화 같던 신세가 가장 위력 있는 정당인 한민당의 지구당위원장으로 발판이 확고해졌고, 거기다가 재산까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이룰 수가 없는 은혜로움이었고, 보살핌이었다. 미국이야말로 생명의 나라요, 은혜의 나라요, 부모의 나라가 아닐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하늘을 우러러 받들어도 그 은혜갚음이 모자랄 것만 같은 황공하고 또 황공한 대국이라고 그는 마음 속 깊이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국회의원까지 되고나자 그런 그의 감읍하는 마음은 더욱 진하고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익승의 집을 나온 김범우는 그 시간에 장터거리로 이어진 길을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발뿌리께를 내려다보며 걷고 있는 그의 의식 속에는 최익승의 흥분된 고함 소리만 가득했다.
"자네가 바로 빨갱이구만, 시뻘건 빨갱이야. 빨갱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따위 소릴 지껄일 수가 있단 말야. 당장 나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
최익승은 반주라도 넣듯이 책상을 연거푸 내리쳤다. 김범우는 뚫릴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며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김범우는 최익승을 찾아갔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실망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어떤 큰 기대 같은 것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예상도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굳이 최익승을 만나고자 했던 것은 감정으로 치우칠지 모르는 행동에 다소나마 제동을 걸 수 있기를 바랐고, 사후처리를 주시하고 있는 존재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해서였던 것이다.
최익승은 '빨갱이'란 말을 무수히 되풀이했다. 그 말은 지칭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공격의 무기였다. 지칭이든 호칭이든 상관없이 그 말은 되풀이될수록 기묘한 마력으로 육박해왔다. 김범우는 그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자신의 의식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위축감을 느껴야 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는 말과는 그 색깔이나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극악한 범죄자의 대명사였고 극형의 죄목이었다. 그 말은 해방이후 수삼 년에 걸쳐 그 어떤 말보다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느낌이 그렇게 살벌하거나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익승의 입에 오른 그 말은 처형의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 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선택의 자유권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생존권까지 좌우하게 된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겨놓고 있는 김범우는 자애병원 앞을 지나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무엇을 체계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식의 공백상태로 그저 걸음만 옮겨놓고 있었다.
"말도 마소, 그 젊은 것들이 밤마동 좌익헌 사람덜 집 찾아댕김서 원수갚음을 허는디, 순사덜보담도 더 무섭드랑께."
"워찌 안 그러겄소. 순사덜 손에서 보돕시 살아나와갖고 그 젊은 것덜헌테 또 매타작을 당허잔께 을매나 징하겄소."
김범우의 청각은 문득 곤두섰다. 빠르게 눈길을 돌렸다. 물감상점 앞에서 오십줄에 가까운 두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나저나 안 선상님 어무니가 큰일이시. 나이가 많은디다가 병구완 할 사람도 옆에 옶응께."
"참말로 저 일얼 워째야 쓸께라? 그 음전허신 양반 팔자가 워찌 그리 사내끼 꾀디끼 비비 틀리는지 몰르것소. 남정네 복 못타고 났으먼 자석 복이라도 타고 났어야 허는디, 안 선상도 선상질이나 얌전허니 허셨으면 엄니 말년 편코 자기 신세 늘어졌을 것인디, 머 묵자고 빨갱이질언 해갖고 자기 신세 망치고 늙은 엄니꺼정 매타작 당허게 허는 불효럴 저질르는지 몰르것소이."
"금메 말이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 속잉꼐."
김범우는 어느덧 걸음을 멈춰 서 있었다. 그러나 눈길만은 의식적으로 여자들 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워쨌거나 고만허기 다행이요. 칠동리 영감맨키로 맞어 죽오뿌렀으먼 워쩔 뻔혔을 것이요."
"그리 말허먼 그렇네. 그 영감도 참 복쪼가리 웂는 영감이시."
"아는 사람이요?"
"알기는 무신. 소문으로 들어봉꼐 찢어지게 가난허디 살다가 아들 땜시 그리 죽은 신세가 짠혀서 허는 소리시."
"참말로, 해방이 되먼 살기 존 세상이 올랑갑다 혔는디 갈수록 시국은 어지럽고 인심은 팍팍하게 변해가니 워찌 살아야 쓸랑가 몰르겄소웨."
"문딩이 같은 시상이시."
"두 여자의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멈추었다. 김범우는 여자들 쪽으로 돌아설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머릿속에는 이미 여자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건으로 엮어져 정리되어 있었다. 두 여자에게 물어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염상구에게로 치닫고 있었다. 어차피 염상구를 만날 바에는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김범우는 왔던 길을 되돌아섰다. 청년단을 향해서 빠른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김범우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있었다. 벌써 사적인 보복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는데 자신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어정거리며 최익승이나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그리고, 염상구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 사실을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젊은 것들'의 행위가 염상구와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확실한 심증 탓이었다. 계엄령하의 통행금지가 발효되는 밤 시간에 어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가. 염상구가 그들을 직접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속단이라면, 최소한 염상구의 비호는 받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암호가 필요한 경계의 시간대를 그들이 활보할 수가 없는 일이고, 더구나 폭력행위를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김범우는 청년단 문을 거칠게 밀었다.
두 다리를 책상 위에 포개 뻗친 자세로 담배를 빨아대고 있던 염상구는 느닷없이 들어서는 김범우를 보고 재빨리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동작에 따르기라도 하듯 네 명의 부하들이 경계의 눈초리를 세우며 일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니 성님, 아침 일찍허니 워쩐 일이시오?"
염상구가 반가운 목소리로 김범우를 맞았다. 그러나 그의 눈초리는 김범우의 표정을 재빨리 훑고 있었다.
"마침 있었군. 나하고 얘기 좀 하세."
김범우는 말을 해놓고 네 명의 사내들을 한 눈길로 휘둘러보았다. 그 눈길이 맵고 차가웠다.
"느그덜 나가 있어."
염상구가 눈치 빠르게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사내들은 지체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일로 앉으씨요. 아칙언 묵었는게라?"
염상구가 자리를 권하며 김범우의 눈치를 살폈다. 잔뜩 성깔이 돋은 것처럼 싸늘하게 굳어진 김범우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자네 나한테 솔직하게 말할 게 있네."
의자에 앉은 김범우는 느리게 담배를 꺼내며,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약속하게." 염상구의 눈을 응시했다.
"참 성님도, 무신 말인지 허보기나 허씨요. 성님헌테 죄진 일 웂응께 거짓말이사 허겄소?"
염상구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싸악 비위가 뒤틀리는 것이었다. 덕을 본 것 없고 기죽을 것 없는 처지에 사람을 대하는 김범우의 태도가 마땅찮았던 것이다.
"밤마다 테러를 하는 젊은 놈들하고 자네하곤 어떤 사인가?"
김범우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염상구는 가슴이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태연하게 빙긋 웃었다.
"섭섭한 소리 마씨요. 고런 대강이에 피도 안 몰른 어린것덜허고 나허고 무슨 사이겄소."
염상구는 담배를 빼들었다.
"자네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럼 경찰하고 관계를 맺고 있단 말인가?"
"고건 또 무신 새 날아가는 소리다요?"
"이 사람아, 새 날아가는 소리는 자네가 하고 있어. 자네 청년단하고도 관계가 없고, 경찰하고도 관계가 없다면 그놈들이 어떻게 암호가 필요한 통행금지 시간에 맘대로 쏘다니며 테러를 할 수 있느냔 말야. 자네 입으로 나한테 말했었지. 통금시간에 암호를 못 대면 무조건 발포한다고. 그놈들이 맘 놓고 마음껏 테러를 하러 다닌다는 건 매일 밤 바뀌는 암호를 알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그 암호를 그놈들한테 알려주는 게 누구냔 말야. 자네야, 아니면 경찰서야? 암호를 취급하는 덴 두 군데밖에 더 있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꼼짝없이 실토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염상구는 심하게 배알이 뒤틀려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뭔데 내 앞에서 저따위로 큰소리를 치는가. 내가 왜 저것한테 취조 받듯이 해야 하는가. 니기미, 사람대접 해줬더니 상투 뽑겠다고 덤비네.
"고런 건 성님이 알 일이 아니요."
염상구는 냉정하게 대답을 거부했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에도 거부의 뜻이 역연하게 드러났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김범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허, 흥분허지 마씨요. 성님은 선상님이신께 선상님 노릇이나 잘 허시고, 고런 일에는 간섭허지 마시라 고런 말인디, 워찌 내 말이 틀렸는게라?"
염상구는 완연하게 야유조였다.
염상구의 돌변한 태도 앞에서 김범우는 약간 당황스런 기분이 되었다.
염상구는 교활하게도 선생의 위치 정도로는 그런 문제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었다. 김범우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 교활에 가증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염상구의 머리 돌아가는 것이 단순한 주먹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김범우는 잠시 생각했다. 목적은 테러를 막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역시 염상구의 손을 빌려야 직효가 날 것이었다. 정면 추궁을 피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구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소 비위가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상구 자네 말이 맞네. 나는 선생 노릇이나 착실히 하고, 자네 같은 사람은 치안을 야무지게 해야지. 그래야 세상이 편안하게 되는 법이네. 요즘처럼 불안한 시기일수록 자네 같은 사람의 역할이 중한 것이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젊은 놈들이 밤마다 테러를 일삼고 있으니. 자네, 지금 읍내 소문이나 인심이 어떤지 아나? 그 젊은 놈들을 욕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경찰이나 청년단은 있으나마나라는 것이네. 이런 시국에 경찰이나 청년단이 사람들한테 원망을 듣고 인심을 잃어 되겠나. 그런 소문이 얼마나 퍼졌으면 내 귀에까지 들어왔겠나. 자네도 이런 때 인심을 얻어둬야 앞길이 열리지 인심을 잃어 좋을 게 뭐 잇겠나. 자넨 내 뜻을 빨리 알아야 하네. 물론 나 혼자 힘으로도 젊은 놈 네댓쯤 혼쭐을 낼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건 엄연히 자네 소관이라 이리 찾아온 게 아닌가."
염상구의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확실하게 떠올랐다.
"헌디 말이요, 갸들도 헐 소리가 있당께요. 빨갱이 손에 각단지게 아부지럴 잃어뿔고 그 분풀이럴 허겄다는 것인디, 고것꺼정 워쩌크롬 못허게 헐 것이요."
염상구는 자기와의 관계를 실토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말을 쏟아 놓았다.
"지금까지 한 분풀이로도 충분하네. 사람까지 하나 죽였으면 됐지, 더 계속하다간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이네."
"그 일꺼정 소문이 났습디여?"
염상구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발 없는 소문이 몇 리를 간다고 하던가?"
"고건 헛소문이구만요. 우리도 조사를 혔는디, 그 영감은 갸들한테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지가 고꾸라짐스로 토방 댓돌에 머리를 찧어 지물에 죽은 것이요. 영감 며느리도 그렇다고 조서에 지장을 찍었응께요."
김범우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 영감이 댓돌에 머리를 부딪혀 죽게 된 건 몰매를 못 견뎌 쓰러졌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건 엄연히 살인이야. 조서를 어찌 꾸며놓았건 간에 소문은 때려죽인 것으로 나 있고, 사건화가 돼서 법정에 가더라도 살인죄를 면할 수가 없어. 어쨌거나 이 단계에서 그놈들 짓을 막게. 또 사람이 죽는 꼴 생기기 전에."
"알겄구만이라. 오늘 밤서부텀은 꼼지락 못허게 닥달을 혀야 쓰겄구만이라."
염상구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앉아 있었다. 김범우의 말이 백번 옳다 싶었던 것이다. 그놈들 분풀이를 시켜주려고 괜히 인심을 잃을 필요가 없었고, 또 사람이라도 하나 더 죽이게 된다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 것인가.
"자네 말 믿고 그만 가보겠네."
김범우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님, 고맙구만이라. 존 말 혀주셔서."
염상구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단순해서 다루기 편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김범우는 염상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얼굴 위에 형 염상진의 얼굴이 겹쳐졌다. 형이 좌익이니까, 그것도 대장이어서 염상구의 단순성은 더욱 열성적인 우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청년단 사무실을 나온 김범우는 길가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안창민의 집으로 먼저 가야 할지, 병원에 먼저 들러 전 원장의 왕진을 청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안창민의 집부터 먼저 찾아가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환자의 상태도 모르고 왕진부터 청한다는 것이 의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고 경솔한 행동이 될 염려가 있었다.
김범우는 담배를 꺼내 물며 남국민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두 여자의 이야기에 오른 '안 선상님'이 안창민인 것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으로 가담한 것은 안창민뿐이었던 것이다.
안창민이 어항 속에서 잠든 금붕어처럼 국민학교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이들 사이에 묻혀 있었지만 김범우는 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손승호와는 달랐다. 가냘픈 체구와는 달리 의지적인 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이 양반의 피를 타고났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했고, 자기 아버지의 난봉으로 몰락한 지주 집안이 된 사실을 더없이 부끄러워했다. 그의 부끄러움은 자기 아버지의 방탕한 삶에 대한 비판이었고, 자기 집안에 매달려 있던 가난한 소작인들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그의 뛰어난 머릿속에는 봉건 계급사회를 질타하는 견고하고도 정연한 논리들이 끝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이론적 사회주의자였다. 김범우는 어쩌다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에도 사상적인 화제 같은 것은 서로가 의식적으로 피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가 어딘가로 쫓겨 다니고 있는 염상진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안창민의 집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김범우는 낮은 기침으로 인기척을 내며 대문을 들어섰다.
농가가 아닌 조그만 규모의 초가는 말끔한 느낌을 주었다. 전에 서너 차례 들렀을 때도 집안은 언제나 정결했었다. 집안의 그런 분위기는 안창민의 어머니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어머니는 항시 풀기가 선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쪽머리도 언제나 단정했다. 그분의 작은 체구에서는 변함없는 기품이 풍겨 나왔다. 그런 그분의 모습에서 아들이 돈벌이를 하기 전까지 농사일을 살피고 거들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분은 양반가문의 기풍을 뼛속까지 익힌 전형적인 여인이었다. 안창민의 작은 체구는 어머니의 내림 같았다.
"실례합니다."
토방 가까이 다가선 김범우는 인기척을 대신해서 말했다. 그런데 곧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토방으로 올라서던 김범우는 주춤했다.
"누구신지요?"
안면이 없는 젊은 여자가 쪽마루로 나오며 목례를 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자는 배움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안 선생 친구인 김범우라고 합니다. 어머님께서 변을 당하셨단 말을 듣고 이렇게 ……"
"네에, 김 선생님이시군요."
젊은 여자는 불안스럽던 얼굴을 금방 반가움으로 바꾸고는,
"저는 남국민학교에 근무하는 이지숙이라고 합니다." 주저 없이 인사를 했다.
"아아, 네에 ……"
김범우는 약간 고개를 숙여 맞인사를 하며, 그 여자와 안창민과의 관계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예감에 부딪혔다.
"김 선생님께서는 저를 아실 리가 없지만, 저는 김 선생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지숙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답게 스스럼없이 말했다.
"네에, 그런데 어머님께선 좀 어떠신지 ……"
"지금 주무십니다. 들어가 보시죠."
"아닙니다. 잠을 깨워선 …… 상태는 어떠신지요?"
"타박상을 입으셨구요, 열이 심한 편입니다."
"의사는 다녀갔습니까?"
" …… 원치를 않으십니다."
이지숙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녀의 머뭇거림이 안창민의 어머님에 대한 호칭이 마땅찮아서 그럴 거라고 김범우는 어림했다.
"이 선생님 생각으로는 어떠십니까?"
"아무래도 의사한테 보여야 될 것 같습니다. 연세도 연세고 ……"
"알겠습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김범우는 이지숙에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별로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리하고 강단 있게 생긴 얼굴이었다. 윤기 있게 빛나는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안창민을 깊게 사랑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간호를 하고 나섰을 리가 없었다. 안창민의 처지가 처지고, 그의 어머니가 아픈 것도 자연스런 발병이 아니라 안창민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병간호를 나선 것이다. 경찰의 주목이나 주변의 소문 같은 것은 무릅쓰겠다는 각오가 아니고서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혹시 안창민과 그녀는 사상적 동지로서 맺어진 연인 관계는 아닐까. 글쎄,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표나는 행동은 삼갈 것이 아닌가. 그럼 순수한 사랑의 감정만으로 하는 행위일까. 그렇다면 그녀는 안창민의 장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김범우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이지숙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의문만 자꾸 가지를 뻗을 뿐 이해의 결론은 얻어지지 않았다. 다만 영리하고 야무지다는 인상은 확실하게 남았다.
김범우의 이야기를 전명환 원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들었다.
"참으로 큰일이오. 이런 혼란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염상진네가 그 사실을 알면 또 가만히 있겠소. 아마 지금쯤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오. 또 보복을 가해오고, 죽고, 죽이고 …… 무슨 짓들인지 모르겠소."
전 원장은 헐어빠진 왕진가방에 진찰도구를 챙겨 넣으며 시름겨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허기로 쓰린 속을 의식하면서도 김범우는 담배만 빨아댔다. 그때까지 아침을 못 먹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전 원장이 염려하는 바를 벌써 두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직감적으로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염상구를 만난 자리에서는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은 염상구를 자극만 할 뿐 폭력행위를 중단시키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가보실까요."
전 원장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김범우는 담배를 비벼 끄고 따라 일어섰다. 총상 입은 순경은 좀 어떠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벌써 겨울이 시작이구만요."
전 원장이 큰길로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무슨 의미가 담긴 것도 같았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하는 것도 같았다.
김범우의 눈길은 큰길에서부터 병원 현관에 이르는 길 양쪽으로 피어 있는 꽃들에 머물렀다. 가을꽃 국화와 코스모스가 한 무더기씩 자리바꿈을 해가며 줄지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꾼 정성이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가을꽃의 행렬이었다. 하늘의 탓인가, 어찌 가을꽃은 꽃마저 저리도 투명하고 애상적일까. 문득 스친 자신의 생각이 엉뚱하고 어색스럽게 느껴져 김범우는 피식 웃었다.
"곧 군부대가 주둔하게 될 모양입니다."
전 원장이 강조하는 기색 없이 예사롭게 말했다.
"군인들이요?"
김범우로서는 다소 의외의 소식이었다.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면 또 다른 국면의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예감이 스쳐갔다.
"별로 많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김범우의 그런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전 원장은 김범우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요, 벌교까지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전상 그런 모양이라 하더군요. 벌교 자체의 문제보다도 전체적 소탕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일이라고 해요."
전 원장은 간접화법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 원장도 그 소식을 들으며 읍내의 군대주둔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반증이었다.
김범우는 누구에게서 나온 정보인가를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군대 주둔이 기정사실이 된 이상 알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별로 많지 않다면, 대충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요?"
"그건 물어보지 않았어요. 관심 쓰기가 싫은 문제여서."
전 원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김범우도 따라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걷기에 열중했다. 그들의 뒤를 두 청년이 이십여 미터 간격을 두고 따르고 있었다.
"니, 김범우가 틀림웂제?"
한 청년이 목소리를 낮추어 다짐했다.
"아, 그렇당께로 몇분썩이나 묻는겨?"
다른 청년도 역시 목소리를 낮춘 채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실수허먼 큰일난께 안그러냐. 싸게 경찰서로 전화 걸자."
"그려, 사거리에서는 잡아야 할 것잉께."
두 청년은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운 상점으로 뛰어갔다.
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경찰 두 명이 김범우를 체포하기 위해 집으로 갔었다.
경찰들은 헛걸음을 했고, 보고를 받은 서장은 청년단에 긴급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청년단원들은 김범우를 찾아내기 위해 읍내를 들쑤시고 다니는 참이었다.
김범우는 사거리에서 남국민학교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접어들다가 두 경찰이 겨눈 총부리 앞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당신이 김범우요?"
"그렇소!"
김범우는 두 경찰을 노려보며 버티고 서 있었다.
"당신을 체포하겠소."
"이유가 뭐요!"
김범우의 목소리가 노기에 차 있었다.
"경찰서로 갑시다. 이유는 거기 가면 환히 나와 있을 테니까."
"아니 왜들 이러시오. 우리 김 선생이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전 원장이 경찰들 앞으로 나섰다.
"원장님은 가만 계세요. 다 그럴 만한 잘못이 있어서 이러는 겁니다."
한 경찰이 전 원장을 팔로 제지하며 김범우를 향해 눈을 치떴다.
김범우는 그때까지도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낮 노상에서 총구의 겨냥을 받을 만큼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잡아가겠다고 겨눈 총 앞에서 김범우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좋소, 갑시다."
김범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장님, 천상 집을 혼자 찾아가셔야 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따가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김범우는 전 원장에게 전혀 달라진 기색 없이 말했다.
"갑시다."
경찰이 총부리로 김범우의 등을 밀었다. 입가에 쓴웃음을 문 김범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너 명의 행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김 선생 ……"
전 원장은 신음처럼 소리를 흘리며 느리게 걸어가고 있는 김범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김범우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꾹 참아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안창민의 어머니를 의사한테 보인 다음 칠동리를 찾아가려 했던 것이다. 죽임을 당했다는 영감이 누구인지나 알아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염상구는 부하에게 김범우가 잡혀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시원한 것도 아니고 불쾌한 것도 아니고, 뭔가 석연찮은 느낌으로 찜찜한 기분이었다.
"어디서 잽혔드냐?"
"사거리 쬐깐 지나서구만요."
"워처케 잽히드냐?"
"긍께, 뭐시냐, 멀어서 무신 소리 허는지는 못 들었고라, 점잖허니 걸어가등마요."
염상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범우의 태연한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고상혔다. 나가서 다른 대원들한테 연락혀라. 생고생 안허게."
염상구는 두 부하를 사무실에서 내몰았다. 그리고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서장님, 청년단 염상군디요. 김범우 도착혔는게라?"
염상구는 김범우를 체포한 것이 청년단의 노고임을 확인시켜둘 심산이었다.
"아직 안 왔소."
"쪼깨 있으면 도착헐 것이구만요."
"알았소."
금방 전화를 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장님, 서장님 ……"
"뭐요."
"아까도 말혔지만 기술 좋게 다루씨요. 김범우도 김범우제만 그 뒤에는 김씨 문중이 있응께요."
"그런 걱정까진 마시오. 다 내가 알아 할 일이니까."
전화가 끊겼다. 염상구는 수화기를 고리에 거칠게 걸며,
"쌍놈새끼, 지랄허고 자빠졌네. 대갱이를 팍 쪼사뿌렀으먼 속이 씨언허겄네. 경찰 못된 것이 한이시웨."
욕지거리를 쏟아놓았다.
사실 염상구는 경찰이 아닌 것에 항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 정식 경찰이 되어보려고 노력도 했었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낮은 학벌에 체계적으로 아는 것 없음이 장애였고, 설령 된다고 해도 말단순경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말단순경질보다야 청년단 감찰부장에 주먹패 '오야붕' 노릇이 몇 갑절 세도도 크고 실속도 있는 자리였다.
경찰서장이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는 까닭에 염상구는 아직 자신이 청년단 단장이 된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염상구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경찰서장한테 전화가 걸려왔던 것은 김범우가 다녀가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장은 밑도 끝도 없이 김범우를 체포해야 한다고 서둘러댔고, 왜 그러냐는 물음에 거침없이 '빨갱이'라고 했던 것이다. 김범우가 잡혀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염상구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김범우가 하고 다니는 행동을 보면 어딘가 석연찮고 미심쩍은 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빨갱이'라고 점찍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장의 행동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서장이 확실한 근거 없이 김범우라는 사람을 체포할 리가 없었다. 김씨 문중은 일본 서장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걸찍한 집안이었다. 염상구는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아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가면 알게 되겠지. 염상구는 김범우의 일을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전화기 핸들을 돌렸다. 오늘밤부터 보복행위를 중단시킬 작정이었다.
"싸게 솥공장집 바꿔도라."
"공장얼 바꿀께라, 집얼 바꿀께라."
"귀에 말뚝 박았냐? 솥공장집이란 말 워디로 들었냐!"
염상구는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렀다.
"알았구만요, 알았어라."
교환의 목소리가 금방 기가 죽는다.
"썩을 년, 못생긴 낯짝 갖고 색이나 쓸지 알었지 말귀 하나 지대로 못 알아묵고 지랄이여."
염상구는 송화기에다 대고 거침없이 욕질을 해댔다.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염상구는 일부러 그렇게 정나미 떨어지는 욕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교환수 영자년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였다. 고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 인물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목소리는 카랑하면서도 나긋거리고, 어떤 때 콧소리 섞은 목소리는 간을 녹일 만도 한데 그 인물이라는 것이 앉은뱅이 코에다 이마가 툭 불거지고 이빨까지 뻐드렁니여서 가관이었다. 염상구는 목소리만 듣고 흑심을 품었다가 정작 대면을 하고는 입맛이 싹 가시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자년은 눈치도 없이 추파를 던지며 전화를 걸 때마다 흰소리를 하려 들었다.
"여보시오, 누구시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그 솥공장집이요?"
"그런디라."
"윤태주 바꾸씨요."
"워찌 그러요? 태주 자는디요?"
"곤허게 자는디 나헌테 말허씨요."
짜석, 밤에는 지랄치구 싸댕기구 낮에는 똥구녕에 햋빝 드는지도 몰르고 자빠져 자는구만.
염상구는 쓴웃음을 물었다.
"여그 청년단인디, 싸게 깨우랑께요."
"워메 그려라? 글먼 진작 청년단이라고 헐 일이제. 쪼깐만 기둘리씨요."
염상구는 담배를 댕겨 물었다.
"여보세요, 윤태줍니다. 부장님이십니까?"
"나 염상구시."
"아, 안녕하십니까. 어쩐 일이세요?"
"헐 말이 있응께 얼렁 사무실로 나오소."
"전화로는 안 되겠습니까. 너무 피곤해서요. 요새 밤잠을 통 못 자는 것 부장님도 아시잖습니까."
"어허, 윤태주, 워찌 그리 말이 많여? 나올 끼여, 안 나올 끼여?"
"알았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알겄어. 당장 나와."
염상구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시건방지다는 생각이 그의 비위를 긁었다.
이것들을 놔먹였더니 제까짓 것들이 뭐나 되는 줄 알고 간덩이가 부어올랐군.
염상구는 그들의 행동을 중단시켜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