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17일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54)이 주미대사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정치권 안팎과 언론에서는 이번 인사에 적잖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현직 언론사 사주가 주미대사에 내정된 것을 두고 정치권은 ‘실용주의적 인사’와 ‘권언유착’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내놓았다. ‘실용주의적 인사’란 반응은 홍석현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세계신문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미국 내에 지인이 많고, 홍석현이 대북정책에서 현 정부와 일치를 보이고 있어 미국 내 인맥을 활용, 한국의 대북정책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으리란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2월 27일 『경향신문』과 가진 특별회견에서 홍석현의 주미대사 내정은 한ㆍ미 지식인간 새로운 대화 채널을 구축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홍석현의 주미대사 내정에 대해 정부ㆍ여당이 추진 중인 언론개혁이 후퇴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언론ㆍ시민단체들은 홍석현이 탈세로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고, 신문시장의 무한경쟁을 촉발한 장본인이라며 이번 인사에 반발하고 나섰다. 또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이 정통부 장관으로 기용된 데 이어 홍석현이 주미대사로 내정돼 정부와 삼성 간에 우호적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리고 홍석현이 유엔 사무총장을 노리고 있다거나 차기 대권을 노린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홍석현은 1949년 10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홍진기는, 경성제대 법과를 나와 일제 때 판사를 지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법무장관과 내무장관 등 요직을 지냈다. 이 때문에 4ㆍ19 직후 구속되기도 했는데, 이때 이병철이 옥중에 있던 홍진기를 도와줘 이병철과 돈독한 사이가 된다. 그리고 이병철의 3남 이건희(현 삼성그룹 회장)와 홍진기의 장녀인 홍나희 씨가 결혼, 두 사람은 사돈이 된다. 이후 홍진기는 『중앙일보』 부사장, 동양방송 사장, 『중앙일보』 사장 및 회장을 지내는 등 1986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일보』를 이끌어왔다. 특히 홍진기는 이건희가 삼성그룹 총수로 취임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 때문에 이건희가 처남인 홍석현을 각별하게 여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석현은 경기고 출신으로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산업공학 석사학위와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77년부터 83년까지 세계은행 경제조사역을 지냈으며, 1983년 귀국해 재무장관 비서관과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을 지내다가 85년부터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일했다. 홍석현이 삼성그룹에 돌아온(?) 것은 1986년 (주)삼성코닝 상무를 맡으면서부터다. 삼성코닝 부사장까지 오른 홍석현은 1994년 『중앙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았다.
홍석현은 94년 3월 21일 대표이사로 취임한 날을 『중앙일보』의 ‘제2창간기’로 선포했다.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고 가로쓰기 편집과 조간화, 섹션화를 도입하는 등 지면에 혁신을 가했다. 그리고 무가지 살포와 증면 등 공격적인 판매를 펼쳐 신문사간의 무한경쟁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홍석현의 대표이사 부임 후 『중앙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메이저급 신문사로 거듭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런 홍석현에게 한 차례 위기가 닥친 것은 1997년 대선 때?1000눼? 이때 『중앙일보』의 보도태도와 『중앙일보』에서 나온 ‘이회창 경선전략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이라는 내부 문건으로 홍석현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나섰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중앙일보』는 이 문건이 기자들의 단순한 정보보고 내용이라고 반박했으나 99년 홍석현이 탈세혐의로 조사받고 있을 때 국제언론인협회(IPI)에 보낸 서한에서 “97년 12월 대선 당시 홍씨가 사장 겸 발행인으로 있는 『중앙일보』는 김대중 씨에게 패배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습니다”라며 이회창 후보 지지 사실을 스스로 밝혔다.
99년 4월 삼성그룹과 분리돼 『중앙일보』의 실제 사주가 된 홍석현은 그 해 9월 국세청으로부터 자신이 사주로 있는 보광그룹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돼 세금포탈 혐의로 10월 2일 구속된다. 홍석현의 구속 수사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홍석현의 구속이 ‘언론탄압’이란 논조를 폈다. 그리고 홍석현이 검찰에 들어설 때 『중앙일보』 일부 기자들이 “사장님! 힘내세요”란 말을 한 것은 후에 기자적 양심을 버린 일로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와 관련해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오동명은 “신문은 독자들의 신문이어야 한다”며 기자적 양심에 호소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고 퇴사하기도 했다.
탈세사건은 홍석현이 2000년 5월 26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및 벌금 30억 원을 선고받은 것으로 일단락됐으며, 홍석현은 구속 수감된 지 3개월 만에 풀려났다. 언론사의 세무조사 문제로 논란이 일던 2001년 2월 홍석현은 『중앙일보』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 언론의 잘못된 관행이나 구태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있다면 과감히 고쳐나가야 한다”며 “신문의 공정한 판매광고 경쟁과 경영의 투명성을 위해서라면 통상적 세무조사에서 언론기관이라고 해서 어찌 예외적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홍석현은 한국신문협회 회장과 세계신문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중앙일보』의 지분 43.8%를 갖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