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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최 승 정 신부의 성 서 백 주 간
제 11 회 죄 와 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과연 인간의 어떤 죄를 상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죄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벌은 무엇인지 들여다 봅니다.
1.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가? 신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ㅡ. 선악과를 먹으면 선과 악을 분별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
ㅡ. 선악을 구별하는 것이 왜 나쁠까? 우리는 성화(聖化 ㅡ 하느님처럼
거룩해 지는 것)를 꿈꾸며 살아가는 데 왜 하느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가?
ㅡ. '선악과'와 '성화'가 갖는 다른 의미는?
2.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은?
ㅡ.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은 내가 점점 커져 신이 없는 듯 살아
가는 것
ㅡ.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
3. 천사 이야기
ㅡ. 옛날에 가르치던 천사의 등급
ㅡ. 가톨릭교회는 745년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4.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선과악'의 의미는?
ㅡ.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바빌론 유배로 인해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 유다인들
ㅡ. 유배지인 바빌론에서 알게 된, 인간은 지혜를 얻음으로서 행복해
진다는 '지혜사상'
ㅡ. 창세기의 저자는 지혜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당시의 지혜사상을 거부
하며, 선과악을 분별하는 '선악과'를 지혜의 상징으로 표현해 두었다.
ㅡ.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근본은?
5. 오늘날의 선악과는?
ㅡ. 문명과 기술발전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현대 과학 기술의
믿음
ㅡ. 우리는 어떤 선악과를 따먹으려 하고 있나?
6.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 그리고 은총
ㅡ. 죄의 본질(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숨는 것이며, 이에 따른
벌은 우리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ㅡ. 하느님은 재판하지 않으시고 '너 어디 있느냐?'며 우리를 찿고 계신다.
ㅡ. 우리들은 스스로가 아니라, 찿아 나서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면서 그들은 이제 죽을 운명이 된
거지요? 그런데 그냥 내보내시지 않고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가죽옷"을 입혀서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래도 그들이 보호 받는
것을 바라시는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한다는 것에 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옷을 입혀 주시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래도 보호 받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제가 지금 굉장히 느리게 하면서도
사실은 계속해서 저희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냐하면은 하나의 단어,
아니면 하나의 사상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한 번 꿰뚫어가는 그런 것들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실제로 지은 죄의 중심에는 하느님처럼 된다는 그런
죄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게 죄의 본질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은 무언가를 얻으므로써, 선과악을 구별
하는 뭔가를 얻으므로써, 뭔가를 함으로써 하느님 처럼 된다는 것,
그러면서 그것이 죄의 본질이 되는.
※ 아담과 하와(인간)가 지은 죄의 본질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도행전(사도 14,8-15 참조)을 읽게 되면은 바오로와 바로나바가
선교여행을 갔다가 그들이 사람들을 고쳐주고 그러는걸 보면서, "야,저들이
신들인가보다!" 그러니까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옷을 찢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왜 그렇게 부릅니까?" 합니다
지금 이 대목과 정확히 반대가 되는 대목입니다.
그런 능력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구일 뿐입니다라고
이렇게 대답하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그런데 어떤 대목이 나오냐하면 요한복음 10장에 보면(요한 10,22-39)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당신이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식으로 얘기하면서 따집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가 되는 건 예수님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냐? 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요한 10,34)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그래서 내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인데 그것이 왜 너희를 힘들게 하느냐?
율법에도 그렇게 써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 안에서 사실은 갈등이 빚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가? 신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아니면 신이 되려고 하는가? 이와 같은 문제들이 서로 다른 진술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냥 여러분들에게 한 마디로 물어 본다면 이런 식의
질문입니다.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 봅시다.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면은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말을 씁니까? 성화(聖化)라는 말을 쓰지요?
성화되어야 된다. 영어로는 '디비니 제이션(Divinezation)'이라고
합니다. 그거는 어떤거냐 하면 '성스러운',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된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거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럼 우리는 성화 되어야
합니까 하고 제가 질문을 던지면? "예!"
그럼 신이 되어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면? "아니오!"
사실은 같은 의미인데 사실 같은 얘기 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받아
들여야 될 것인가?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신화(성화)라는 것은?
신화와 성화는 같은 의미입니다.
성화(Divinezation), 신화(Deification) 거룩해진다.
글로피 케이션(Glorification)이게 다 같은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가 되는 의미는 과거의 이와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무언가 능력을 키워서 신이 되어 신이 있던 그 자리에서 신을
몰아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내가 대결
구도 속에서 내가 신을 이겨서 신을 몰아내는 그림입니다.
※ 내가 능력을 키워서 신을 몰아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죄!
반대로 요한 복음에서 얘기하고 있는 예수님이 "너희는 성화 되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해져야 된다" 라는
이야기는 내가 뭔가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에 따라서 다른
구절을 인용해 본다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하느님은 점점 켜지셔야
합니다." "나는 점점 사라지고 하느님이 그 자리를 채우셔야 됩니다."
따라서 요한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성화, 신화의 의미는 뭐냐?
나는 사라지고, 하느님이 나를 채워주는 즉 내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친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중에 주님의 기도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누구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그건 어떤 뜻입니까? 내가 커진다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점점 작아져서
사라질 때까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얘기 합니까?
두 번째 입니다. 따라서 성화, 신이 되는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겁니다.
내가 점점 켜져서 신과의 대결 안에서 하느님이 자리를, 내지는 신이 없는
듯이 살아 가는 것. 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의 본질에 있다는 겁니다.
※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은 내가 점점 커져 신이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다.
반대로 하느님이 온전히 나를 채워서 나는 더 이상 없고, 하느님만이 계심.
바오로 사도도 갈라디아서 2장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똑같은 신화, 성화지만 하나는 내가 점점점 커지고
높아지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내가 점점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입니다.
같은 낱말이지만 양 극단에 있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물질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이유도 뭡니까?
'돈', '금전 만능주의'. 결국 뭡니까?
"돈만 있으면 뭐 든지 할 수 있다" 즉 뭐 든지 할 수 있는 분은 누구
입니까? 신 입니다. 그런데 돈만 있으면 하느님도 필요없다. 내맘대로 할
수 있다. 내가 신이다. 이 사상이 문제인 겁니다.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이란 우리가 쓰는 주고 받는 도구입니다. 그것을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우리들의 마음, 그 마음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마음인 겁니다. 다른 한편 커룹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4)
옛날에는 뭐라고 불렀지요? 옛날 성경에 보면 케루빔 입니다.
커룹 = 케루빔. 케루빔이라는 것은 커룹의 복수형 입니다.
이거 말고도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는 또 신적인 존재가 있지요?
스랍 입니다. 스랍 = 세라핌. 케루빔과 세라핌~ 이런 노래들 기억 하실
겁니다. 예, 천상에 있는 존재 들입니다. 지금은 신학교에서 정규과목에는
빠져 있는데 과거에는 신학교의 과목중에서 성서 신학과 교의신학, 뭐
여러가지 신학의 파트가 있겠지만 요 두 과목이 굉장히 중요 한 파트입니다.
그런데 교의 신학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에 하나가 뭐가 있었느냐 하면
천사학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엔젤롤로지'라고 부르는데요
ANGEL Learning 중세때 나오는 천사학에 나오는 여러가지 총론을 보면
하늘에 있는 천상의 나라에서도 하느님외에 천국에 시민들이 있는데
그들이 천사입니다. 모두 9등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흔히
부르는 천사는 그 9등급중 마지막 등급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천사는
8등급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어떤 등급들이 있냐? 여러분들 미사
드리며 들어 보셨지요? 역품천사, 능품천사, 좌품천사 뭐 이런 천사들은
그 가운데 있는 등급들입니다.
※ 천사등급: 세라핌, 케루핌, 좌품, 주품, 역품, 능품, 권품, 대천사,
천사(디오니시오가 분류한 것으로 교리는 아님)
천사학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미사때 경문에는 다 나옵니다. 그런 천사들이
그 중간에 있고 맨 꼭대기에 있는 천사가 두 등급이 있는데 맨 꼭대기가
스랍 = 세라핌입니다. 두 번째가 커룹 = 게루빔입니다.
하늘나라 가면 정말 그런지는 모릅니다. 천사학에서 그렇게 가르쳤다는
겁니다.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제가 속였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천사학이 중세 때 그렇게 가르쳤는데 사실은 모르지만 스랍은 누구냐?
요즘식으로 얘기하면 기쁨조(?)입니다. 하느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이사야서 6장에 보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를 외치는
천사가 있잖아요, 그게 스랍(세라핌)입니다. 주위에서 계속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쁨조입니다. 커룹은 누구냐? 호위 경호원들입니다.
뭔가 하느님을 지키는 좀 싸움을 잘하는 천사고, 나중에 계약의 궤도 커룹
들이 지킵니다. 커룹들이 계약의 궤 양쪽에서 지키는 모습을 우리가 많이
만납니다. 스랍, 커룹, 그 밑에 천사들이 있고, 맨 마지막 8단계는
대천사고 마지막은 천사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법으로는, 전례 규정
안에서는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이라는 세 대천사 이외의 다른 천사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전례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 교회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745년; 라테란 공의회)
하지만 유다 전통 안에서는 그외에 굉장히 많은 천사들의 이름이 등장
합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많은 천사들의 법에서는 성서에서 등장하지 않는
천사의 이름은 사용하면 안 된다라는 어떤 전례 규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많이 그런 것들이 약간은 좀 부정적인 의미에서 신비적인
경향으로 발전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옆에서 그것을 막아 놓았는데 유다
전통에 보면 대천사가 사실은 한명 더 있습니다.
대천사가 네명입니다.
"우리엘"이라는 또 하나의 천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의 이름은
구약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저희가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자, 이제 본질적인 질문으로 넘어갑시다.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가졌던
본질적인 질문은 선과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왜 먹으면은 안
되었는가? 라는 이야기 입니다.
※ 선과 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왜 먹으면 안 되는가?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 왕국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그리고 주전 587년에 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서 남유다가 멸망합니다.
그리고 남유다에서는 어떤 일을 하느냐? 예루살렘에 있던 유다의
정치가들을 모두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아 옵니다. 이것을 포로기 또는
유배기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 바빌론 유배(BC 597 ~ BC 538):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으로
유다 상위 계층들이 포로가 되어간 사건.
자, 그들이 바빌론으로 넘어 오면서 그들에게 풀어야 될 여러가지 숙제가
생깁니다. 첫째 그들이 해명해야 할 것은?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는지? 이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야훼의 존재가, 하느님이 더이상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더이상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입니다.
※ 유다인의 정체성 위기: 국가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 유배생활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했다.
나중에 역사서에 가면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와 같은 문제와 함께 덧붙여서 그들은 이제 도대체 하느님은 누구인가?
야훼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해명해야 만
하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제 유일신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사실은 이와 같은 역사의 과정이 있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또 야훼는 일종의 다신적 신관 안에서 야훼는 단지 이스라엘의
하느님일 뿐인 그와 같은 신관이었습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마루둑은 바빌론의 하느님, 바알은 우가릿의
하느님, 뭐 시리아에는 누가 있고, 이집트에는 라, 투트니 그런 신들이 있고
그런 신들은 각각의 땅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다인들이 바빌론
으로 포로로 끌려간 사건을 이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 안에서
그들은 이제 유일신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갖게 됩니다.
※ 이스라엘 멸망 후 유다인들은 인류 최초로 유일신관을 갖게 되었다.
이게 굉장히 중대한 일입니다. 인류가 거기에서 처음으로 유일신관인
하느님 한분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유다의 하느님이 바빌론의 신인 마루둑에게 싸워서 진게 아니라
그래서 죽어 버린게 아니라 이세상에 야웨 하느님 한 분 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유다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하느님이 바빌론이라는 자기
오른팔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한대 때린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율법이다라는 신학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서 보니까
바빌론이라는 곳은 당시에 그다음에 거의 알렉산더가 세상을 정복하는 그와
같은 시기까지 바빌론이라는 곳은 오랜 시기동안 당시의 모든 문화, 특히
근동지역의 모든 문화가 아주 집약되어 있는 그런 곳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바빌론에 가서 본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그것은 마치 1950년대 1960년대에 우리나라 어떤 할아버지를 뉴욕이나 런던
한 복판에 갖다 놓은 겁니다. 그때 그들이 무엇을 보았겠습니까?
"야, 대단하다!" 했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바빌론에서는 벽돌을 구워서 4층, 5층짜리 높이의
건축물들, 아니면 음악들, 아니면 잘 정비가 된 도시의 모습을 그들은
여기에서 만나는 겁니다. 놀라운 체험을 하는 거지요. 그런 문화적인 정복이
어떻게 보면 전쟁을 해서 군대가 정복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서운
그런 지배의 효과를 사실 드러냅니다.
오늘 이자리에 오신 분 중에서 아무도 한복 입고 오신 분은 없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우리 것을 많이 잃어버리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 것에 관해서는 정말 많이 모르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국의 것에 관해서는 정말 다른 사람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공부를 해
놓고, 우리가 뭔가 우리의 뿌리에 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아무튼 유다에서 바빌론으로 간 사람들의 문제는 따라서 뭡니까?
그 모든 문화적인 것을 받치고 있는 데는 항상 사상적인 바탕이라는 것이
있는데 당시의 이 지역의 사상적인 바람이 뭐냐 하면 '지혜 사상'입니다.
'지혜사상'이라는 게 뭐냐?
※ 지혜사상: 인간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사상
인간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신은 지혜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는데 인간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철학에서 내지는 인문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행복이라는 것은 곧
종교적으로 얘기하는 구원과 동의어 입니다.
행복이란 곧 구원입니다.
여러분을 왜 신앙을 가지십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던 정답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가 얘기하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잖아요,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뭡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이 지혜를
통해서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지혜사상이 얘기하고 있는 지혜의 정점이
뭐냐하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겁니다.
※ 지혜사상이 말하는 지혜의 정점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신학 안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성서 신학, 교의 신학 이런 것들이
있지만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는 한 분야가 있습니다.
영성신약에서 얘기하는 그런 영성(Spiritualit) 인간의 그런 것들의 아주
중요한 정점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분별하는 겁니다.
영어에서 Discernment 라고 합니다.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하느님께 속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것
식별하는 것 이게 오늘날 신학의 굉장히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입니다.
지혜사상도 역시 마찬가지인 겁니다.
지혜의 정점이 뭐냐? 옳은 것과 그른 것, 나를 행복한 곳으로 이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이제 분별하게 하는 것,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오늘 지금 우리가 만나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저자들
또는 편집자들은 그런 지혜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는 겁니까?
지혜사상에서는 말한다. 인간이 지혜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지혜를 얻음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지혜사상에서는
말한다. 하지만 웃기지 마라. 인간의 이 모든 불행이 뭐에서부터 시작
되었는지 아니? 지혜에서부터 시작된 거다.
스스로 지혜를 얻음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그 잘못 된 지혜사상이
인류를 결국은 불행하게 만든거다.
※ 창세기 2,3장의 저자는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지혜가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사상을 부정한다.
지혜사상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그 모든 불행이 잘못된 지혜사상으로부터 출발한 거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야훼사상과 지혜사상을 적대적인 관계에 놓고 있는 겁니다.
2,3장의 얘기는 따라서 그 이야기의 진술의 궁극적인 것은 지혜사상에 대한
하나의 대척점에서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쫓고, 무엇을
버려야 될 것인가를 얘기 하면서 지혜사상은 잘못된 거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 그곳(바빌론 포로)에 가서 유배간 그 양반들에게.
그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야훼 신앙과 지혜 사상의 관계를 설명
하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우리가 성경을 쭉 펼치다 보면 그 후반부에 보면 지혜문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 구약성경의 지혜문학: 욥기, 잠언, 코헬렛, 지혜서, 집회서
어떤 책들이 있습니까? 거기에서 그 방법으로 단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떻게 얘기 합니까? 코헬렛의 시작을 보면 어떻습니까?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
거기서 얘기하고 있는, 거기서는 일단 지혜사상을 수용 합니다.
어, 그래 그래! 지혜사상, 너희들이 하는 말이 다 맞아!
그게 정말 그런 것 같애, 그런데 왜 그런지 아니?
왜 그 모든 것이 헛 된줄 아니? 왜냐하면 모든 것이 야훼 하느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모든 지혜의 근본은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데
있고, 지혜가 얻으려는 그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을 잘 지키는 것. 토라를 잘 지키는 것.
※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은 지혜사상을 수용하고는 있지만 지혜의 근본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가장 현명한 사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란 누구인가?
가장 토라를 잘 지키는 사람이다.
※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토라를 잘 지키는 사람을 구약성경에서 뭐라고 불렀지요?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의로운 사람.
따라서 기존의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지켜왔던 그 토라를 지키면서 야훼
하느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가장 너희가 얘기하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야
이스라엘은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잘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거야!
어떻게 보면 좀 허무한 대답이죠? 어떻게 하면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의사 선생님들에게 물어보면 허무한 대답이 돌아오지요. 뭡니까?
하루 세끼 적당한 양 즐겁게 맛있게 드시고, 적당한 운동하고 기쁘게 많이
웃으면서 사십시오! 대답은 무지하게 쉬워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인거지요. 굉장히 쉬운 대답인데.
예! 이스라엘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따라서 바빌론으로 간 이들이
그곳에서 만난 지혜사상을 수용하는 데는 한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닙니다.
창세기 2장, 3장에서는 그것을 단죄하면서 적대적인 관계지만 하지만
나중에 지혜문학에서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신학화 합니다.
어, 그래 굉장이 훌륭한 얘기야! 좋은 얘기야, 그게 맞어, 하지만 그게
우리가 믿어 왔던 야훼 신앙이라는 그 손바닥 위에 있는거야 따라서 우리가
해 왔던 것을 잘해오면은 그것으로 충분한 거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실은 그런 질문 속으로 하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선과악을 구별하는 열매 이거 먹으면 왜 안되는거야?"
우리가 자식들 가르칠 때 선악을 구별하지 말라고 가르칩니까?
구별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얘기보면 앞으로 구별하지 말고
막 살으라고 가르쳐야 되겠구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기저(基底) 흐르는
것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그 역사적인 바탕 위에서 우리가 이 텍스트를
읽어나가야 하는 겁니다.
예, 다음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신학적 개념들
* 죄
* 벌
* 은총: "너 어디 있느냐?"
* 구원
죄! 이 인간의 첫 번째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야기 안에서는 죄의 본질에
관해서 이야기 합니다. 파악 하셨습니까?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합니까?
하느님이 산들바람과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자, 하느님으로부터
숨습니다. 그게 죄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 죄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숨는 것(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죄지은 인간이 받는 벌은 무엇입니까?
뭐 이 이야기 안에서는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만 그걸 다르게 해석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겁니다.
※ 이에 따른 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ㅡ 벌은 하느님이 내리지
않고, 인간 스스로 초대한다.
따라서 벌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자신의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것" 그게 바로 벌입니다.
많은 이야기 안에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벌 주시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벌을 받는 겁니다. 결국 인간 실존의 이야기 입니다.
나중에 나중에 인생을 살아 가면서 결국 누가 나를 용서 못합니까?
내가 나를 용서 못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용서 하시는데 나는 용서하지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은 공간적인 의미입니다.
오늘날 윤리 신학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 나라에 가면은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자신이 감추려고 했던 모든 인생의 이야기들 모든
것들이 다 환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겁니다.
자신의 삶이 하느님을 향해 살았던 사람은 그것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더 기쁘겠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부끄러운 사람들은 그 빛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싫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리 어둠쪽으로 갈꺼라는
겁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니라 똑 같은 곳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곳이 천국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곳이 지옥이라는 겁니다.
좀 그럴듯한 설명이지요? 저는 굉장히 그럴듯 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 죄와 벌만 있느냐? 아닙니다. 은총이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너 어디 있느냐? 이게 하느님이 본질인 겁니다.
그렇게 죄지은 인간, 그리하여 벌 받은 인간을 찿아나서는 하느님의
모습인 겁니다.
※ "너 어디 있느냐?": 죄를 지은 인간을 찿아 나서지는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은총이다.
마치 놀이터에 가서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엄마 보이는데서 놀아!"
그러다가 아이가 없어지면 엄마가 아이를 찿아 나서잖아요.
바로 그런 겁니다. 나를 찿아 나서시는 하느님. 나중에 하느님이 인간을
찿다가 찿다가 어떻게까지 한 겁니까?
스스로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데까지 찿아나서는 겁니다.
인간을 찿으시는 하느님!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의 본질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본질입니다. 다른 신들은 멀찌 감치에서.
그리고 우리도 약간 우리들 신학 안에서 그런 신학이 있습니다.
성서적이지 않은 내지는 약간 철학적인 신관이 있습니다. 멀찌 감치에서
재판석에서 옳고 그름을 재판만 하는 그와 같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우리가
신관을 갖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그 비슷한 신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창세기 2, 3장에서 만나는 그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입니까?
사람을 찿아나서는, 그리고 결국 나중에 스스로 인간이되는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창세기에서 고백하는 하느님은 재판관이 아니라 부모처럼 우리를 찿아
나서시는 하느님이다.
그와 같은 하느님을 우리는 만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말 기도문에는
아직까지 그런 말이 일상화되지 않았는데 서양말 기도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기도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이러고 시작하면서
시작되는 기도문들이 꽤 있습니다.우리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냐?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람을 아끼는 하느님이다. 그와 같은 하나의 고백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우리는 창세기 첫 부분부터 만날 수 있는 겁니다.
"너 어디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통해서 우리들은 구원
된다는 겁니다. 그 은총을 통해서 우리들은 행복해 진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 찿아 나서시는 하느님(은총)을 통해 우리들은 구원을 받고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예!"
하고 받는 것, 하느님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구원이다.
※ 은총은 우리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마음을
열고 "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가장 출발점이고 가장 마지막 결론 이기도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 또 하나는 나무에 대한 묵상입니다.
나 무
* 생명 나무
* 선악과 나무
* 무화과 나무
* 고퍼 나무
* 십자 나무
앞서 말씀 드렸지만 요즘에 생태에 대한 문제가 아주 심각한데 아담이
잘못 했는데 벌은 땅이 받아지요? 저주를 받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 생태 신학의 관점: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창세 3,17)
인간의 죄는 생태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이해한다.
결국 인간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생태계가 함께 위기에
처하는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생태라는 말보다 환경(Environment)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요즘은 에코(Eco)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왜냐하면 환경이라는 말은 인간 중심적으로 공학적으로 인간 문제가 주위의
환경 중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걸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다
라는 환경 공학적인 접근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생태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생태학의 출발점은 뭐냐? 그거 하나만 바꿔서는 전체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보고 전체를 봐야된다라는 것이 생태학의
출발점 입니다.
즉 어디까지 보아야 되느냐 생태계의 출발점은 인간이 갖고 있는
철학적 사상적인 면부터 건드려서 전체적으로 크게 반성을 해야 된다.
이 모든 생태적인 문제의 출발점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요즘에 생태 신학이라는 것을 얘기 했을 때 가장그 출발점은
신학적인 출발점이 창세기의 첫 대목에서부터 신이 없어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텐데 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께 있겠느냐?
뭐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스티븐호킹 박사가
얼마전 인터뷰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현대 문명의
가장 문제점인 겁니다.
이런 세상이 주는, 하느님 앞에서 또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앞에서,
또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앞에서 우리들이 더 이상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는 겁니다. 그것도 역시 어떻게 본다면은 죄의 본질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가 다른 게 아니라 우리들이 지금 갖고 있는
기술 중에서 가장 무서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을 그것이 바로
인간이 열지 말아야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연게 아니겠느냐라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십니까?
보통 이론적인 하나의 이론이 완결 된 이후에 그것이 상품화 되는데 까지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사용할 수 있는 단계 까지는 50년에서 1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보는 TV, 영상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론은 1910년
정도에 나옵니다. 하지만 실지로 우리 앞에 TV 라는 그와 같은 것들이
상용화 된 것은 그로부터 50 ~ 60년 70년이 지난 다음에 우리들이 각
가정마다 TV 를 갖게 됐습니다.
기술적인 발전이 보통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이론이 되고 그게 상품이 되는데까지.
그런데 핵 분열 내지는 핵 융합에 관한 이론이 나온 것은 1940년도 그
물리학적인 이론이 나온 것이 20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이론이
나오고 나서 원자 폭탄이라는 구체적인 그와 같은 이론이 눈앞에 보이는
폭발력을 갖고 있는 무기로 나타난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맨하탄 프로젝트라는 것이 2주에 걸립니다.
딱 2주 동안에 폭탄이 완성 됩니다.
※ 맨헤튼 프로젝트: 인류 최초 핵무기 개발 사업의 암호명
놀라운 일이죠. 만약 오늘날 인류가 과거의 그런 맨하탄 프로젝트와 같은
정성과 관심을 가지고 인류의 가장 무서운 병 중에 하나인 암에 관한
치료법을 연구 했다면 암은 완벽하게 치료하는 치료볍을 연구 했다면 암의
완벽한 치료법을 개발하는데 까지 한 달의 시간이 걸릴꺼라고 학자들이
예상은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안 하는 겁니다. 왠지는 모르겠습니다.
폭탄 만드는 데는 열심이었는데 병고치는 데는 그렇게 열심이 아닌 겁니다.
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 그 모든 생태계의 문제, 땅에 관한 저주의
문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 가지 화두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나무입니다. 나중에 잠시후에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는 결국은 나무로 만듭니다.
그리고 첫번째부터 등장하는 것이 생명나무, 선과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에덴 동산을 설명하면서도 하느님께서 그곳에 나무를 두셨다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눈을 뜨고 나서(선악과를 먹고나서)도 무화과 나무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노아가 고퍼나무를 나르는 것. 우리말
성경에는 전나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사실은 어떤 나무인지 모릅니다.
그냥 전나무 아니겠는가라고 그렇게 번역 했습니다만 히브리 원문에는
고퍼라는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무인지 확인 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전나무가 아니겠느냐? 라고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십자나무에 이르기까지,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을 일으키는 것도 나무에서부터 시작을 했다면 그것을 구원하는 것도
하나의 나무의 문제가 아니겠느냐? 라는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이런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나무를
좀 많이 심는 것, 그 점에 있어서는 지금 독재자였기 때문에 뭐 역사에
대한 공과가 많이 엇갈리긴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칭찬을 좀 해줘야 될 겁니다. 저도 제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다보면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았고 좀 벌건 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부다 푸르른 걸 보면은 어, 그린벨트하고 그런 거 참 잘된
일이다. 나중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런 그린벨트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는
거를 보면서, 그리고 그런 환경에 관한 그런 경각심이 부족한 그와 같은 조처
들을 보면서 앞으로 누가 국가의 지도자가 되든 이건 생태라는 문제,
환경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조금 의식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단지 이번 정권의 4대강 문제에 관해서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을 포함해서 입니다. 4대강 개발 등 이런 저런 문제 아니면 옛날 정권의
천성산의 문제, 아니면 그 앞에 새만금의 문제 아니면 핵 폐기물 쓰레기장에
관한 문제, 그리고 지금 원전에 관한 문제도 지난주인가 지지난 주에 일본
수상이 아주 좋은 얘기를 한겁니다.
"일본에서 더 이상 원자력 건설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있는
원전도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폐기하려고 과정을 밟겠다."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전 세계에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아, 이런식으로 하면 우리가 에너지를 국민들 전체가 절제하면서 국가가
운영될 수 있고, 우리 다음 세대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 그와 같은 에너지
정책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라는 모범을 일본이 보여 준다면은 그건 세계를
위해서 굉장히 좋은 일일꺼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가 박수를 보내야 될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전세계에 이미 그러한 정책을 몇십 년 전부터 시작해 온 또 하나의
나라가 있습니다. 독일입니다.
1980년 이후에 독일에서는 원자력 건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대체
에너지를 계속해서 개발해 내면서 다른 원자력 발전소를 좀 안전하게 마무리
할 수 있는 많은 연구들을 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좀 힘들 게 보는 것은 그렇게 옆 나라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지금 사실 진행 중인 상황인데도 우리 정부와 언론에서는 "우리는 괜찮아!"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정말 문제가 생기면 그 때는 뭐라고
그럴 껍니까? 오해였다고 그럴껍니다. 아니면 미안하라고 그럴 껍니까?
뭐라고 얘기할 껍니까?
원자력이라는 것은 아직 인류가 가진 기술을 가지고는 그것을 안전하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짧은 시간 안에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인류는 아직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짧게는 50년에서 300년 길게는
몇만 년도 우리가 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 후대들에게 너무 큰 짐을
남기는 일이라는것 생각해 보면서 저는 천주교회에서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서명운동을 하면은 그런 게 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요즘에
여러가지 글들을 좀 찿아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한 손에는 성서를 읽으시면서도 다른 한 손에는 세상의
일에 관한 그런 올바른 정보를 많이 접하셔야 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깨어 있는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 12 회 카인과 아벨이 계속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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