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여 저녁 7시 50분까지 점심시간 한 시간을 뺀 8시간 50분간의 긴 공판시간이었지만, 그들의 한을 풀어내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재판을 끝낸 자리에서 증인들은 한결같이 못다 한 말이 있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은 인혁당 재건위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유도 모르고 연행되었으며, 구타와 고문끝에 수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하였으며, 그리고 검사의 공소사실을 부인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판조서에는 자신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뉴스나 혹은 다른 매체를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알게 되었으며, 지인(知人)들이 연행 또는 수배중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둘째, 그 소식을 접하고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하나, 그런 나라의 동량(棟梁)들을 연행했다니 하고 안타까워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저 자신도 영장도 없이 연행되어 정신 차리고 보니 남산 중앙정보부 취조실(혹은 경찰서 취조실)이었다.
셋째, 무작정 뭇매를 때리고 심지어는 물고문 전기고문을 자행하더니 부르는 대로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넷째, 검찰조서 작성과정(이때 고문을 가했던 조사관들이 검찰 취조실에 같이 있었다)에서 진술서대로 말하지 않으면, 또다시 고문(혹은 고문을 받은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 위협)을 가해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진술한 내용이 맞다고 검사 앞에서 자필서명을 했다.
다섯째, 1심 공판에서 검사의 공소사실을 부정하고, 구타와 고문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말했으나, 구형된 대로 형을 받았으며, 다시 고문과 구타사실 등 진실을 적어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2심 공판도 1심과 같이 똑같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1,2심의 공판조서를 보지도 못한 채 상고이유서를 작성하여 대법원 법정에 섰다. 상고는 기각 당했다.
여섯째, 공판조서는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과정에서 처음 봤으며, 자신들이 법정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이렇게 모든 사건 관련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수사와 재판과정을 겪었다고 증언하였다. 세상에 이런 기괴한 재판도 있는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보통사람들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조작재판'이었다.
특히 전창일 선생의 증언은 더욱 놀랍다.
“나는 74년 재판을 받을 당시에도 인혁당을 몰랐다. (검사가 증거로 제출한) '1974년 4월-4권'(학민사, 2005년 4월 9일)이라는 책에 '세칭 인혁당사건을 말한다'는 글을 쓴 것도 82년 출옥후 인혁당에 대해 공부를 한 후에 쓴 글이다”라고 증언할 정도였다.
또, 전 선생에 이어 증언한 김종대 선생은 문용선 재판관의 “그럼 도대체 진술서를 몇 번 썼다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몇 번인지 잘 모른다. 처음 조사관들은 잘 대해줘 내가 아는 대로 썼다. 그러나 그다음에 인상불명의 조사관들에 의해 조사 받을 때는 진술서 한 장을 쓰는데 하루가 걸렸다.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쓰지 않으면 내가 쓴 진술서를 찢어 버리고 지하실로 끌고 가 구타와 고문을 가했고 나에게 다시 종이를 주면서 부르는 대로 쓰라고 강요당했다.”
전기고문까지 받았던 황현승 선생은 '1974년 4월'에 쓴 글을 통하여 당시 고문상황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특히 전기고문의 고통은 서술이 불가능한 실재다. 서른 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고통이 생생한 기억으로 떠올라 몸서리치지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찾지 못한다. ~ 경험 많은 수사관은 내 의지력이 무너지는 정확한 시간도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끝내 무력해져 수사관이 일방적으로 불러주는 진술서를 받아쓰고, 심문조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나는 올가미에서 풀려 날 수 있었다.”
남대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던 나경일, 강창덕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남대구경찰서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정보과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손바닥 허벅지 엉덩이 등을 구타했고, 콧구멍에 고춧가루 탄 물을 부어 넣었다.”(나경일 증언)
“손바닥 발바닥을 가격하고 얼굴에 수건을 올려놓고 물을 부어 고문을 했다.”(강창덕 증언)
사건의 실체는 이랬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만들고 중정은 시나리오를 작성하였으며, 이것을 가지고 고문과 협박으로 진술서를 받아 재판을 받게 하고 이들을 사형대로 감옥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사형수의 아내들은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이날 증언대에 선 증인들은 한결같이 진실을 밝혀줄 것을 재판부에 눈물로 호소하였다. 특히 점심시간을 마치고 2시반경 다른 증인들보다 목소리가 큰 김종대 선생이 고문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었을 때, 재판정은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김 선생의 증언은 법정 안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나체로 손발이 묶인 채 양팔 속에 양다리의 무릎을 끼운 뒤 무릎 안쪽으로 쇠막대를 넣어서 두 사람이 들어 책상에 걸칩니다.(이때 방청객에서 “그게 통닭구이라는 고문이어”하며 괴성이 나온다) 이러면 머리가 밑바닥으로 처지게 되는데, 코에 수건을 덮고 커다란 주전자로 물을 콧구멍 쪽으로 부으면 숨도 못 쉬고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자칫 기관지로 물이 들어가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고문에 대한 증언이 나오자 유족들이 앉아 있던 맨 앞줄에서 처음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통곡소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형수의 아내들은 폭포수가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30년 전 자신들의 남편도 김 선생과 같은 고문을 당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핸드폰 진동소리에도 기겁하며 손사래를 치던 재판정 관리인도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다. 김 선생의 증언이 공소사실 확인과 재판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제야 울음소리가 멈췄다.
또 다시 밝혀진 증언들
그동안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해서는 수차례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증언 내용들이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었으나, 이날 증언자들의 증언 중에는 몇 가지 다시 살펴볼 증언들이 있었다.
첫째로, 인혁당 재건위 조직도에서 초기에 서울지도부가 '5인 지도부'였다가 나중에 '4인 지도부'로 바뀌게 된 경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창일, 김종대 선생이 증언을 하였다. 전 선생은 고문에 의해 진술서를 작성한 후 2,3일후에 다시 끌려가 5인 지도부를 4인 지도부로 고쳐 써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물론 지도부라는 말 자체가 조작된 것이지만 희생자를 한명이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 조사관의 회유에 하는 수 없이 '4인 지도부'라고 고쳐 써 주었다고 증언하였다. 여기에서 빠진 사람이 박중기 선생(현 추모연대 의장)이다. 박 선생이 빠지게 된 이유는 긴급조치 이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있어 지도부 결성당시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 선생은 서울지도부 아래는 3개조가 있었는데, 1조에 포함되어 있던 박중기, 김달수를 빼고 다시 써달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박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출옥하는 날 고 이수병 선생이 연행되었다고 하며, 그후 자신도 인혁당 재건위의 지도부로 찍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 한쪽 눈을 실명하였다고 한다.
앞선 기사에서 인혁당 관련자를 26명이라고 했으나, 세 분이 더 고초를 받았다. 박중기, 김달수(4월혁명회 회원) 김금수(전 노사정위원장) 선생들이다. 이들은 1974년 4월에 연행되어 6월까지 중정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는데, 이들은 다행이도 중정이 작성한 시나리오에 박 선생의 경우처럼 맞지 않아 당시 재판정에 서지 않고 풀려났다.
둘째로, 공판조서 조작에 대한 증언들이다.
예상했던 대로 증언자 모두가 공판조서를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에서 처음 보았으며, 모두가 일관되게 공소사실을 부인하였으나 공판기록에는 순순히 인정한 것으로 적혀있었다고 증언하였다. 또, 황현승 선생의 경우는 재판정에서 '구타와 고문에 의해 허위진술 하였다'고 말했는데 공판조서에는 '진술당시 담배도 피고 자유롭게 이야기했다'라고 적혀있고, 강창덕 선생의 경우에도 남대구에서 당한 구타와 물고문을 재판정에서 이야기했는데 공판조서에는 나와 있지 않았으며, 이재문 선생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이재문의 지시를 받았다고 적혀있다고 했다. 또, 재판 당시 같은 사건이면 같이 재판을 받지 않고, 검사 신문시에는 개별적으로 재판을 받았고, 변호사 신문시에만 같이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강신옥 변호사는 변론도중에 법정구속당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혁신계에 대한 증언들이다.
전창일 선생은 혁신계에 대해 “혁신계라는 말은 4.19혁명 발발하던 해 1960년 7월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또 다른 정치적 노선을 가진 정당들을 '혁신정당'이라는 말로 보도되면서 공식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때 혁신계 인사로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통일사회당의 윤길중씨, 사회대중당 김달호씨, 사회당 최근우씨 등이 있었다. 나는 민자통에서 통일운동을 했는데, 월남한 이산가족이다 보니 하루빨리 가족을 만나야겠다는 심정에서 더욱 혁신계 일원으로 활동했었다”라고 증언하였다.
혁신계의 뿌리는 일제시대 항일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혁신계는 해방이후에는 남로당, 전평 등 정당과 기층운동에서 활동해왔으며, 진보당의 조봉암이 사형당한 이후로 활동이 주춤해졌다가 1960년에 들어서 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의 정당운동과 민통련, 민민청, 통민청 등 청년학생운동을 통해 다시 활성화되었다. 1960년 말부터는 혁신계를 단일화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 민자통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후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혁신계 인사들은 대거 구속되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에도 혁신계의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연루자들 역시도 혁신계 인사였다. 79년의 남민전 사건의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선생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도 혁신계 인사들이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1974년 - 남은 증언들
전창일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지여부를 묻는 질문에) 나는 중정에 끌려가던 날 술에 취에 있을 정도로 사태에 대한 경각심이 없었다. 왜 연행되었는지도 고문을 당하고 서울구치소(현 서대문독립공원)에 가서 구치소 소장이 “왜 내 방에는 문패(당시 죄명을 적어둔 패를 말함)가 없냐”는 질문에 어느 교도관이 “긴급조치 위반입니다. 어제밤 남산에서 데려왔습니다”라고 말할 때에야 알게 되었다. (검사의 고문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에) 나를 고문하던 자들은 고문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은 “너, 최종길 교수라고 아냐? 우리가 얼마 전에 고문하다 죽인 사람이다. 너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꺼리김 없이 고문을 자행했다. 만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신직수가 우리가 받은 고문을 그대로 받았다면 그도 공산당이 됐을 것이다. (검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 날을 '국제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세인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30여년간 그 누구도 우리의 진실을 밝혀준 이가 없었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우리의 역사의 큰 흠집입니다. 그 죽어간 이들의 누명을 꼭 벗겨내 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사가 75년 당시 한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유신헌법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으며, 학생들이 유신헌법철폐를 위해 데모를 한다는데 돈이라도 모아 줘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나도 돈을 내고 지인들도 돈을 냈다. 김종대 (변호사의 질문에 이야기하던 중) 작고한 우홍선 선생이 가지고 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피아노 공부를 하고 있던 딸아이를 위해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기실에서 우연히 이수병 선생을 만났는데 고문을 얼마나 당했는지 “나 때문에 고문당하고 죽을 고생을 한다”고 말하는데 기운이 없고,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미는데 너무 힘이 없더라. 나는 그때 그가 왜 연행이 되어 이 모진 고초를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변호사가 현장검증을 하자고 신청을 하자 법원에서 받아드리지 않았다.(...) 하재완이가 재판중에 탈장이 되어서 포승줄에 묶인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삐져나온 장을 밀어 넣으려 하더라. 황현승 (검사의 질문에 이야기하던 중) 민청학련 선언문 등 몇 가지 유인물을 읽어보았습니다.(...) 우연히 우홍선을 만났는데 그는 내게 “나는 원래 시계 반대방향으로 글을 쓰는데 강제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계방향으로 썼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경일 (검사의 검찰 조사과정이 어땠는가의 질문에) 검사가 자리를 비우자 나를 고문했던 수사관이 “순순히 시인할 일이지 왜 귀찮게 하냐”며 침대몽치를 빼들더니 사정없이 내려치더라. 그리고 나를 끌고 지하실로 갔는데 마치 도살장 분위기였다. 그 후 모진 고문을 당한 끝이라 순순히 따라 올라가 서명날인을 했다. 검찰조서 내용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수사관을 대동한 검사 앞에서는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이재문을 알고 있었냐는 검사의 질문에) 이재문, 강창덕과는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당시 이재문은 염소목장을 하고 있었다. 그 목장에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렇게 만나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주로 했으며, 유신헌법을 철폐해야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경북대 학생들이 벌인 반유신투쟁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 '참소리'라는 신문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런 만남이 남대구서에 끌려가서는 지하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모임으로 날조되었다. 세상에 지하조직을 만드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만드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강창덕 (공판조서에 대한 판사의 질문에) 법정에서는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남대구경찰서에서 고문받아 작성된 공소장이라고 했다. 국선변호사는 누구인지도 몰랐다. (검사의 질문에 이야기하던 중) 서도원 선생이 나를 보더니 “누군가 억울하게 죽을 것 같다. 이렇게 고문조작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누구 한 명을 죽일 것 같은데 도예종 선생을 수괴로 만들어 죽이려고 한다. 차라리 나를 수괴로 만들지 저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죽더라도 나의 가족들에게는 억울한 나의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여덟 명을 죽이는 것을 보고 과연 이 땅에 법이 있는가? 정말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변호사의 질문에 이야기하던 중에) 나는 남대구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남대구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던 중 조사관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명칭을 뭐라고 했으면 좋겠냐? 이번에 끌려온 사람들 중에 서도원, 도예종등 1차 인혁당 관련자들이 많으니 인혁당재건위라고 하면 어떻겠냐”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변호사는 법정에서 처음 만났다. 대법원 판결까지는 가족면회도 금지되었다. |
이들의 증언이 마무리된 시간이 7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다. 점심시간도 한 시간 줄여서 진행했다. 고희를 넘긴 증언자들이나 방청객들에게는 너무 힘든 자리였다. 자리를 차고 일어서는 방청객들끼리 주고 받는 농담이 있었다. "이게 다 고문이어... 빨리 재판이 끝나기는 해야지 이거 원... 대구에서 오르락 내리락 거리기도 힘든 나이인데 말이여..."
다음 재판은 8월 14일로 정해졌다. 다음에도 오전 10시부터 320호에서 진행된다. 이날 공판에서는 사건 관련자인 이창복, 임구호, 김한덕 선생과 유족인 이영교, 강순희 여사가 증언대에 설 예정이다.
증언자들 소개
김종대 - 1936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김해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서울에 와서 삼락일어학원장을 하다가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0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82년 석방되고 난 후, 사월혁명회와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황현승 - 1935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나 당진농업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 광신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1982년에 석방된 후 현재는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경일 - 1930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일본8번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제일모직 노조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받아 수감되어 있다가 1982년 석방되었다. 현재는 민자통 대구경북협의회, 범민련 남측본부, 평화통일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
첫댓글 박정희.. 는.. 악마의 화신이다. 국민들도 바보천치들이고. 슬프고 애닮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