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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적 및 지향 ] 캄보디아 바탐방 교구 내에 의료시설은 더 더욱 열악한 실정이어서 진료소를 설치한 후 바탐방 교구 내 쩜나옴 마을의 주민들과 인근 지역마을 주민들에게 올바른 진단과 약 복용법, 투약, 주사, 상처 치료, 의료 상담, 건강 예방 교육, 위생 교육, 타 의료 기관과의 연계하여 데이케어 센터를 겸한 진료소를 설치하고자 합니다. 단기적인 의료봉사도 중요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면서 진정성을 가지고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2. 지역의 현 실정과 사업(계획)의 필요성(구체적으로 간결하게 작성)
교통사고로 다리가 골절 되었는데도 치료비가 없어서 통증을 온몸으로 참으면서 방치되어 있고, 단순한 감기로 기침을 오래하다가 폐렴으로 진전됩니다. 뇌출혈로 쓰러져서 고통을 참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뇌출혈로 움직일 수 없이 와상 상태로 누워 있다가 욕창이 심하여 패혈증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특히 암환자들의 암성 통증에 모르핀 제제를 중환자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의료법으로 인해 통증을 견디지 못해 임종을 했습니다. 식생활이 열악하여 생기는 빈혈 환자의 증가와 어린이들의 영양실조에 따른 발육부진, 단백질 부족으로 종기가 자주 나며, 상처가 잘 치유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고열 조절을 해 주지 못해 후천적으로 간질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밖에도 참으로 다양하고 가난한 의료 현장의 안타까움을 직접 목격합니다. 40도에 가까운 더위와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전염병과 영양실조, 말라리아 모기, 벼룩과 이, 빈대가 많고, 의료 사정이 낙후되어 있는 캄보디아에는 의료진의 손길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이렇게 열악한 현실을 매일 접하면서 캄보디아 쩜나옴 주민들을 위한 진료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6. 사업 대상 지역의 선택 배경: 왜 이지역을 선택하게되었는가? 성가소비녀회 수녀를 피견하게 된 이유는 정말 절박한 곳이기에 의료와 교육을 지원하려고 파견하였습니다. 400년에 걸친 쇠퇴기 후에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20세기 동안에는 전쟁의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했고, 그 이후 다시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습니다. 1975에서부터 1979년까지 나라는 농촌에서 공산주의 게릴라 운동을 펼치던 크메르루즈의 집권으로 황폐화 되었습니다. 크메르루즈 집권기 동안 최소한 20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피살되었거나 사망했습니다. 캄보디아의 종교는 소승불교가 97%이고, 그 외에 이슬람교, 가톨릭, 개신교, 힌두교 등입니다. 쩜나옴 지역은 캄보디아에서 드물게 가톨릭 신앙이 오래 전에 형성되어 구교우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폴폿 시대에(1975-1979) 주교와 본당 사제가 순교한 역사를 가진 특별한 장소입니다.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을 점령한 크메르루즈는 도시민의 80% 이상을 시골로 내몰고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그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고문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약 200만 명 이상!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에 4분의 1 정도의 인구가 죽어간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인, 성직자, 소수 민족들이 대상이었습니다. 킬링필드 당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의 공포 속에 내던져진 캄보디아 사람들,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죽음을 당하는 위기 속에서 바탐방 교구장이셨던 텝임 주교님은 충분히 다른 나라로 피신할 수 있었으나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를 연상시키듯 되돌아 오셔서 쩜나옴이란 교우촌에 머물며 다른 사람들을 피신시키려다가 크메르루즈에게 체포되어 치명하시고 그 유해는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캄보디아의 현실이 그렇듯이 이 지역도 경제적, 정신적 가난이 깊이 퍼져있고 교육, 의료 혜택이 절실한 마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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