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은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아픈 사연이 있겠지요? 그녀의 작품에는 '가시', '돌멩이'같은 무서운 소재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소재가 내 가슴 속 아픈 상처를 위로해 주네요. 수필 <돌멩이가 묻고 있는 것> 작품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돌멩이가 묻고 있는 것(수필) / 나희덕
1.
교실 청소를 끝내고 나온 오후, 세상은 온통 먼지투성이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입 속에서 모래알이 자금자금 씹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황사가 찾아오지 않는 계절에도, 학교에는 늘 먼지가 많았다. 어쩌면 아이들은 학교에 공부를 하러 오는 게 아니라 먼지를 일으키러 오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옷자락의 비벼댐, 쿵쾅거리는 신발에서 떨어지는 흙먼지, 칠판 위에서 글자들이 지워질 때 하얗게 쏟아지던 분필가루…… 학교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리창들은 먼지를 삼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까지 든다.
고아원에도 먼지가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치고 박고 싸우는 아이들, 마당 가득 땅따먹기, 오징어, 삼팔선, 망까기의 영토를 그렸던 막대기들, 돌조각을 튕기고 던질 때마다 피어오르던 흙먼지, 오래 빨지 않은 이불을 털 때 햇빛 속에서 웅웅거리던 먼지들…… 우리의 놀잇감은 흙과 돌멩이, 그리고 때가 새까맣게 눌러앉은 서로의 몸뚱이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각 방의 실장에게 청소검사와 용의검사를 받았지만, 빗자루와 물에 쓸려나가는 먼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먼지들은 끈질기게 돌아와 우리를 둘러싸고 구석구석 쌓여갔다.
학교와 고아원. 매일 그 사이를 오가면서 내 마음 속에도 먼지가 쌓여갔다. 어떤 빗자루로도 좀처럼 쓸려나가지 않는 어떤 무력감, 두려움, 막막함, 이질감 같은 게 일찌감치 자리를 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걸 일찍 철이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학교에 가면 고아원 패거리라고 놀리고 고아원에서는 총무 딸이라고 따돌림을 당하면서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적대감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몸과 마음을 한껏 구부리고 살았던 시간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의 기억들이 부옇게 흙먼지가 낀 것처럼 현상되곤 한다. 하지만 그 황사의 시절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기다려 준 친구가 있었다.
“아직까지 있었어? 이번 주는 청소당번이라 기다리지 말라니까……”
“괜찮아. 문제집 풀고 있었어. 어제 배운 문제인데도 왜 이렇게 어려운지. 난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가 봐.”
“그래도 열심히 하면 중학교 가선 잘 할 거야.”
“그럴까? 니가 설명할 땐 알겠는데, 막상 나 혼자 풀려면 정말 모르겠어. 자아, 책가방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싫어. 그러지 마. 자꾸 이러면 나 너랑 못 다닌다아.”
“몸 약한 친구 가방 좀 들어주는 게 어때서 그래?”
“그래도 남들이 보면 총무 딸이 친구 부려먹는다고 뭐라 할 거라구.”
“너는 나 공부 갈쳐주는데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잖어.”
매일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s는 끝내 내 책가방을 뺏어 들고야 말았다. 한 손에는 제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내 가방을 들고 가면서 s는 그때만큼은 행복하고 떳떳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반면 빈 손으로 걸어가야 하는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그 불편함을 무릅쓰고 s에게 가방을 내맡겨야 했던 것은 그녀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차마 빼앗을 수 없어서였다.
따악.
갑자기 뒤에서 돌멩이 한 개가 날아왔다. 돌아보니 고아원 남자애들 몇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중 누가 돌을 던졌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K가 내 손목을 겨냥한 것이라면, 명중이었다. K는 도벽이 있는 아이답게 손놀림이 빠르고 정확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목을 쥔 채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넌 손목아지가 없냐? 가방은 몸종이 들게 하고……”
K가 내뱉고 간 말이 귓가에서 아프게 맴돌았다. 내가 멍하니 땅바닥에 앉아 있는 동안 S는 팔을 걷어부치고 남자애들을 쫓아갔다가 돌아와 씩씩거렸다.
“나쁜 새끼들! 잘 알지도 못하고 지랄이야. 근데, 너 괜찮아? 많이 다쳤어?”
S는 팔목을 감싸쥔 내 손을 걷어내고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울지도 못하고 그 돌멩이를 주워 들어 바라보았다. 돌멩이에는 왠지 피와 소금의 냄새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K가 나에게 돌을 던진 것은 단지 S에게 가방을 들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모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돌멩이를 맞아야 했다. 그것은 K가 세상을 향해, 또는 수없이 불렀지만 끝내 대답이 없는 부모라는 존재를 향해 던졌을 증오의 돌멩이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돌멩이는 내 손목에 시퍼런 멍을 남겼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보이지 않는 멍자국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K는 나와 한 반이었고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 유난히 영리하고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지만, 그 아이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주로 싸움과 도벽을 통해서였다. 학급에서 번번이 일어나던 도난사건이 K의 짓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K는 고아원에서 싸준 도시락 중 반찬통은 일부러 빼버리고 매일 맨밥만 가져왔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이면 맨밥에 학교에서 무상으로 주는 급식우유를 부어서 말아먹으며 보란 듯 떠들어댔다.
“무슨 고아원이 반찬도 안 싸줘. 총무 딸만 입 있냐?”
K는 우유에 젖은 비릿한 밥알을 목으로 밀어넣으며 나를 조롱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S와 다를 것 없는 내 반찬통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먹다 만 도시락을 책상 속에 넣고 교실을 나왔다. 운동장에 날리는 흙먼지는 눈물과 뒤섞여 이리저리 뭉쳐졌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실로 들어왔는데, K의 식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너희도 이렇게 먹어봐. 해봐. 해보라구.”
K의 허풍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등 뒤에 날아와 꽂히는 그 소리들이 그치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K의 집요한 적대감 속에는 나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뒤섞여 있다는 것을. K에 대한 나의 감정 역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나 사춘기에 가까워진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몰랐고, 우리가 놓인 상황 역시 그런 감정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K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에게 그토록 많은 상처를 입혔고, 결국 어느 해 겨울 고아원에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2.
나에게 유년은 마음껏 누려야 할 천국의 시간이 아니라 힘겹게 건너야 할 터널 같은 것이었다. 고아원 울타리의 안과 밖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나는 병약한 몸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그 시절을 견뎌야 했다. S는 그 무거운 짐을 진심으로 나누어 지려고 했던 친구였고, K는 그 나눔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잔인한 방식으로 가르쳐 준 친구였다. 그 환대와 적대 사이에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스무 살까지 부모 없는 아이들과 성장기를 보냈다는 것이 시인이 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내 인생의 상당한 기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시절은 기질이나 감수성, 삶의 태도 등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식이 너무 많으신 우리 어머니 / 나의 어머니라고 고집부리고 나면 / 웬지 미안해지는 우리 어머니”(「우리 어머니」)라는 구절처럼, 나는 어머니조차 공유해야 했다. 또한 “합창기도가 끝나자마자 숟가락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칠십 개가 넘는 그 소리는 칠십 개가 넘는 종소리가 되어 식당과 우리의 눈동자와 가슴을 끝없이 울렸다 밥 먹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느껴지는 배고픔을 위하여”(「종소리에 대하여」) 의 집단적 식욕과 배고픔은 고스란히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없는 단하나의 잉여, 부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숨죽여 살아야 했다. 차라리 내가 고아였다면 마음이라도 편했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반 가정집의 아이들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나는 부당한 특혜처럼 여겨야 했고, 그로 인해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고 참아야 하는 쪽은 늘 나였다. 매일 S의 숙제를 도와주고 공부를 가르쳐 주었지만 생색을 부리거나 그 대가로 S를 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S의 호의를 뿌리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주눅들거나 미안해하지 않도록 한 배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배려는 오인되었고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K가 던진 돌멩이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너는 누구냐’고. 그 돌멩이는 부모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첨예하게 가르고 ‘나’와 ‘그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그으며 날아왔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너는 누구냐’고 묻는 전짓불 앞에서의 공포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k가 던진 돌멩이는 이후로도 수시로 날아와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내게 던지곤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아원에서 이십 년을 살았고 그 후로 이십 년을 시인으로 살아왔지만, 정작 그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못했다. 첫 시집 『뿌리에게』에 몇 편의 시가 실려 있을 뿐, 고아원 친구들에 대해 쓰려고 하면 어떤 완강한 힘이 마음을 가로막곤 했다. 극적인 삶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것을 문학적 소재로 삼는 순간 그들을 대상화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되어 살고 있을 친구들이 우연히 자신과 연관된 글을 발견하고 어떤 생각을 할까 두렵기도 했다. 내 문학적 의도가 다시 오인 받을까봐 두려웠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자주 만나지 못했고 자연히 우리들 사이의 거리감도 더해졌다. 처음엔 모임에 이따금 나갔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그마저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이나 식당에 취직한 친구들이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할 때, 나는 대학에 다니며 시를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면서 고단한 대학시절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것도 부당한 특권처럼 여겨졌다. 내 시는 그런 불편함에서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그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거나 위선적인 노릇을 면하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대해 쓰는 것이 불편하다면 ‘나’에 대해 쓰면 되지 않는가, 라고도 반문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을 배제한 나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억의 실꾸러미는 이미‘우리’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다. K가 던진 돌멩이는 ‘나’와 ‘그들’을 가르며 날아왔지만, 내 마음은 S와 K를 여전히 피붙이나 다를 바 없이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간극들은 내 글쓰기의 장애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우리’에 의해 자주 거부당하거나 소외되었던 ‘나’, 그러면서도 ‘나’의 개체성을 한 번도 떳떳하게 주장해 본 적 없는 희미한 목소리. 그 부재의 존재감이야말로 지금까지 ‘나’에 대한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들에 대해 쓰지 못했지만, 그들은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고.
고흐는 “내가 세상과 관련을 맺는 유일한 순간은 세상에 대해 어떤 부채감과 의무감을 느끼는 때이며, 또한 감사의 마음으로 소묘나 회화로 몇몇 작품을 세상에 남기기를 원하는 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보면 내가 오랜 세월 지고 온 부채감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s나 k에 대해 느끼는 것은 감사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글에 자주 나오는‘꼽추 난쟁이’처럼 그 친구들은 나에게 불편한 시선이나 질문을 던지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구하는 유년의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나희덕 시 작품
땅끝
귀뚜라미
배추의 마음
그런 저녁이 있다
푸른 밤
허락된 과식
방을 얻다
[나희덕]시 모음.txt
(가나다 순)
11월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가을이었다
고통에게 2
귀뚜라미
그 곳이 멀지 않다
그런 저녁이 있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기억의 자리
길 위에서
나비를 신고 오다니
나 서른이 되면
낯선 편지
너무 많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땅끝
마른 물고기처럼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방을 얻다
배추의 마음
비 오는 날에
빈 의자
빗방울, 빗방울
뿌리에게
사과밭을 지나며
살아 있어야 할 이유
시월
어두워진다는 것
왜
이 복도에서는
저 물결 하나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찬비 내리고
푸른 밤
한 포기의 집
해일
허락된 과식
흐린 날에는
교과서에 수록된 나희덕 산문 작품
<풀비린내에 대하여>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
<반 통의 물>
K팝스타 이설아의 노래 <엄마로 산다는 것은> 노랫말을 뮤직비디오로 만들어 어머님께 선물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