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되도록 빨리 마시고 싶었어. 다 함께
무영은 즐거운 마음으로 재료를 다듬었다. 밤에 캔 재료는 쓰임새가 조금 달랐다.
사실 약을 만드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즐거웠다. 결과물이 약과는 천양지차니까 말이다.
"자아,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높이가 가슴 정도에 이르는 커다란 항아리에 손바닥을 댄 무영이 호흡을 골랐다.
"후우우......"
셀 수 없을 정도로 해본 일이지만 언제나 이 순간만큼은 긴장감을 참기 어려웠다. 무영의 오른손에서 미약한 뇌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뇌기는 항아리를 타고 흘러갔다. 그 순간, 무영의 왼손에서 맑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뇌기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기운이었다.
그 기운 역시 항아리를 타고 흘렀다. 그러더니 이내 뇌기와 만나 서서히 뒤섞였다. 뒤섞여 만들어진 기운이 항아리를 부드럽게 감쌋다.
"후우우......"
무영은 숨을 내쉬며 손을 뗐다. 항아리를 감싼 기운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기운은 조금씩 밀봉된 항아리 안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일단은 성공적이군."
무영의 표정은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잘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이것도 하면 할수록 능숙해진다.
무영은 문득 스승님이 떠올랐다. 스승님과 함께 있을 때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밤에 산을 타야 했다. 스승님이 이것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것만큼은 스승님을 능가했다고 자신했다. 물론 그것은 스승님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자아, 앞으로 아홉 법 정도만 더 하면 제대로 숙성이 되겠군."
한 번 기운을 뒤집어씌우면 세 시진 정도 지나야 완전히 흡수된다.
그동안 가만히 항아리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무영은 기운을 다스리며 이번에는 신선단 제조에 들어갔다. 며칠 전 낮에 시간을 내서 잡초를 잔뜩 캐왔다. 그것을 이용해 신선단과 신선고를 만드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연단을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항아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완성되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연단을 하면 제법 효능이 특별한 신선단과 신선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영은 약을 만들기 전 흐뭇한 눈으로 항아리를 한 번 쳐다봤다. 신선주는 정말로 오랜만이다.
스승님이 떠나기 전날 뻗을 정도로 마신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마시지 않았다. 만들지를 않았으니 마실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스승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실까?"
신선주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스승님이 떠올랐다. 무영의 스승은 정말로 신선주를 좋아했다. 그것도 무영이 만든 신선주를 특히 좋아했다.
무영이 신선주를 만들면 무영이 가진 특유의 뇌기 때문에 특별하 맛이 첨가된다. 무영의 스승인 천복은 그 맛을 상당히 좋아했다.
"스승님이 계셨다면 이 선선주 중 칠 할은 스승님께서 드셨을 텐데......"
무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분이다. 무영은 다시 신선단 제조에 집중했다. 무영의 손끝에 뇌기가 퍼득였다.
무영은 기대에 찬 얼굴로 바라봤다. 모든 제조 과정이 끝났다. 높이가 가슴까지 오는 커다란 항아리다. 혼자 저 안의 술을 다 마시려면 몇 달은 걸릴 것이다.
무영은 천천히 항아리의 입구를 개봉했다. 청아한 향이 확 풍겨 나왔다.
항아리에는 맑은 술이 한가득 찰랑였다. 무영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기뻐해 주실 스승님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쉽군."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이렇게 신선주가 완성되는 순간은 항상 스승님이 옆에 있었다. 그리고 바가지로 신선주를 하나 가득 퍼서 단숨에 마셨다.
무영은 아련히 떠오르는 스승님의 모습에 잠시 감상에 젖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항아리를 쳐다본 순간 너무나도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스, 스승님?"
항아리 옆에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스승님이 서 계셨다. 바가지 하나를 들고.
무영의 스승인 천복은 신선주를 한 바가지 가득 떴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마셨다.
"꿀꺽. 꿀꺽."
술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무영은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커어. 훌륭하구나! 실력이 더 늘었어!"
스승의 말에 무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 스승님. 제가 이곳에 있는 건 어떻게......"
천복은 아무렁 말도 없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신선주를 한 바가지 더 펐다.
"꿀꺽. 꿀꺽."
바가지 안에 있던 신선주가 말끔히 목궁멍을 타고 넘어갔다.
"커어! 좋구나!"
천복은 무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천복의 표정이 인자하게 변했다.
"네가 만든 술을 먹고 나니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무영은 천복의 말에 직감적으로 뭔가를 느꼈다.
"스, 스승님......!"
"내가 왜 네게 술 빚는 걸 가르치고 시켰는지 아느냐?"
무영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자의 기운을 잘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천복히 흡족한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해주지 않았는데 용케 그것을 알았구나. 그럼 뭐가 제일 중요한지 알겠느냐?"
"조화입니다."
천복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래, 이제 마음이 놓인다."
무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천복을 바라봤다. 순간,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천복의 몸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비록 천운이 따랐다고는 하나, 넌 내 모든 것을 온전히 이어받은 유일한 제자다. 덕분에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구나."
"스, 스승님!"
천복이 미소 지었다.
"왜? 가지 말라고 할 참이냐? 고얀 놈 같으니. 이 스승이 우화등선 하는 것이 그리 배가 아프단 말이냐?"
"그, 그것이 아니라......"
무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고작 십 년이다. 스승님과 함께한 시간은 고작 십 년밖에 안 됐다.
무영은 좀 더 많은 시간을 스승과 함께하고 싶었다. 술을 달라면 얼마든지 더 만들어 드릴 수 있었다. 궂은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단지, 그저 단지 조금만 더 스승님과 함께했으면 한 하는 바람뿐이었다.
"울지 말거라. 난 운이 참 좋았다. 너처럼 제대로 된 제자를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
무영은 뿌연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다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마지막 가시는 모습이라도 똑똑히 보고 싶었다.
천복의 몸이 조금 더 희미해졌다. 그리고 존재감도 함께 희미해졌다.
"그동안 내가 키운 제자들은 하나같이 모자란 놈들뿐이었다. 능력이 모자라면 채워줄 수 있지만 마음이 모자란 건 나도 어쩔 수 없더구나."
무영은 묵묵히 스승의 말을 경청했다. 천복은 그런 무영을 보며 더욱 인자하게 웃었다.
"너를 믿는다. 내가 퍼트린 인연의 끈들을 네가 잘 마무리 해다오."
무영이 놀란 눈으로 스승을 바라봤다. 조금 더 자세한 얘기가 필요했다. 이것은 스승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았다.
하지만 천복은 그저 웃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천복의 몸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술항아리와 함께.
"이건 다른 신선들과 잘 나눠 먹도록 하마."
스승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무영은 멍한 얼굴로 방금 전까지 스승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털썩.
무영이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무거운 뭔가가 가슴에서 빠져 나간 것처럼 허전했다.
"스승님......"
무영은 그렇게 앉아 한동안 멍한 얼굴로 스승과의 십 년 추억을 곱씹었다. 한 줄기 눈물이 무영의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최근 서가장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무사의 수도 확연히 늘어났고, 상권에 대한 장악력도 대단했다.
그에 비해 정가장은 거의 몰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정가장주 정일지는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손에 쥔 서찰을 움켜쥐었다.
"으드득. 이 썩을 놈들이!"
지금도 서가장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데 자신은 이렇게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니 가슴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야 할 자들은 계속 기다리라는 말뿐이니 너무나 화가 났다.
화르륵.
정일지는 촛불에 서찰을 태워 버렸다. 이런 흔적은 절대 남겨선 안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드러나게 되면 정가장 쯤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수 있는 자들이다.
정일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힘겨운 상황이었다. 정가장이 뭔가를 해보려면 일단 부족한 무사부터 모아야 하는데 그조차 쉽지 않았다. 모든 게 서가장 때문이다.
서가장과 정가장이 좋지 않은 사이라는 건 소주뿐 아니라 강소성 전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그러니 무사가 모일리 없었다. 일단 정가장에 무사로 들어가면 서가장과 언제 싸우게 될지 모르는데 누가 정가장에 적을 두려 하겠는가.
"그저 지금 남은 사람들이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현재 정가장에 남은 무사의 수는 고작 서른이 전부였다. 원래는 조금 더 많았지만 그들은 서가장과의 싸움 이후 정가장에서 나가 버렸다.
그 싸움에서 불구가 되거나 회생불능의 상처를 입은 무사들에게 정가장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일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싸움에서 진 덕분에 정가장의 사업체가 크게 위축되었다.
절반 이상 서가장에 너어가 버렸고 나머지도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받은 돈의 팔 할을 퍼부어야 했다. 그렇게 간시히 사업체의 절반을 붙잡았다.
그리고 남은 이 할의 돈은 정가장의 미래를 위해 써야 했다. 필연적으로 상처 입은 무사들에게 돌아갈 돈은 거의 없었다.
남은 서른의 무사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사업체에 남아 있던 무사들이 무사해서 서른 명이라도 구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열 명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사업체를 관리하던 무사들은 서가장과 마찬가지로 싸움에 투입하지 않았기에 건질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 남은 서른이었다.
현재 정가장은 그 서른 무사를 이용해 사업체도 관리해야 하고, 장원도 지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정일지는 똥줄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가장이 조금 더 성장하고 완전히 안정을 되찾으면 자신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서가장에 의해 정리되기 전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로 곤란한데 말이야.'
정일지는 그렇게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위험한 방법을 떠올렸다. 그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방법.
그것은 협박이었다.
온몸을 흑의로 두른 사내 둘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어다. 한 사내는 가슴에 주먹만 한 크기의 '령(令)'자를 금실로 수놓았고, 다른 한 사내는 그저 흑의만 걸치고 있었다.
"훗, 정일지 그 쥐새끼가 정말로 그따위 말을 했나?"
"그렇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입가에 비웃음을 그린 사내는 금령(金令)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보고하는 사내는 흑귀 중 한 명이었다.
흑귀는 금령의 차가운 눈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금령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은왕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금령은 은왕도 결코 함부로 하지 않는 존재였다.
"소주에 다른 쓸 만한 조직은 없나? 정가장을 대신 할 만한 곳 말이야."
"몇 군데 무가가 있긴 합니다만 정가장을 대신할 만한 곳은 없습니다. 소주는 현재 거의 서가장이 정리한 상태입니다."
금령이 얼굴을 찌푸렸다. 벼락 맞아 죽은 흡혈광마 때문에 소주의 일이 너무 많이 꼬였다.
"복잡해졌군. 남궁세가가 사실상 소주에서 손을 뗀 상태니 더 이상 건드릴 필요도 없지만."
처음 흡혈광마까지 동원해 정가장을 도운 이유가 바로 남궁세가 때문이었다.
남궁세가의 움직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기회로 좌우쌍위를 업애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실패했다. 그리고 남궁세가는 소주에서 손을 뗐다.
"어차피 이젠 쓸모없는 패로군. 회수해."
"예."
금령의 명에 흑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금령은 그런 흑귀를 보며 뭔가가 떠올랐다는 말을 이었다.
"소주를 이대로 내버리기엔 뭔가 걸리는 게 많아. 그러니 적당한 곳을 알아봐."
"적당한 곳이라 하심은......"
"무가가 아닌 곳으로 한 번 알아봐. 상단 정도가 괜찮겠군. 적당한 상단을 하나 접수해. 크지 않아도 좋으니 부려먹기 편한 놈이 상단주로 있으면 좋겠지."
"예.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흑귀의 대답을 들은 금령이 손을 저었다. 흑귀가 바로 방에서 나갔다.
금령은 잠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던 금령이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봤다. 밖이 약간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창 밖으로 수많은 흑귀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 낙양으로 파견 나갔던 흑귀들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흑령의 모습도 보였다.
은왕에게는 열 명의 흑령이 있다. 그리고 그 흑령은 각각 백 명의 흑귀들을 거느린다. 모두 합하면 흑귀가 천 명이다.
금령은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은왕이 은환을 이용해 키운 자들이었다.
만일 정상적인 방법으로 수련을 했으면 이제 이류나 간신히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흑귀들은 대부분 일류를 넘어서는 고수였다.
"하여간 대단하다니까. 뭐 그래봐야 스승님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금령은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을 떠나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스승은 아직도 그의 마음에 큰 앙금이 되어 남아 있었다.
스승을 떠올린 금령은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금령의 눈이 다시 창 밖을 향했다. 그의 눈에 흑령의 모습이 다시 들어왔다. 왠지 거슬렸다.
금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삼 흑령."
금령이 부른 흑령은 가슴에 삼(三) 자를 수놓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옷도 검고 실도 검어 눈에 잘 안 띄지만 웬만큼 내력이 있는 사람은 충분히 구할 수 있다.
삼 흑령은 금령의 부름에 순식간에 앞으로 와서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상관에게는 언제나 깍뜻해야 하며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
어길 경우 죽음이 차라리 나을 정도의 고통을 받게 된다. 그것이 은왕에게 은환으로 키워진 자들이 져야 할 숙명이었다.
금령은 삼 흑령을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간단히 말했다.
"보고해라."
"예?"
"개봉에서 있었던 얼굴로 그대로 보고해 봐라."
삼 흑령은 긴장한 얼굴로 개봉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 와중에 흉마의 시체에서 얻은 환약에 대한 것도 말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 와중에 흉마의 시체에서 얻은 환약에 대한 것도 말해야 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얻을 때 옆에 있떤 흑귀들이 너무 많았다.
금령이 손을 내밀었다. 삼 흑령은 속으로 갖은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공손히 청령환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금령은 손바닥에 올려진 청령환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건 청령환인가? 아니, 청령환이라기엔 좀......"
약에 대한 것은 웬만한 의원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기에 한 눈에 청령환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설프게 만들어진 가짜였다.
금령은 청령환을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이건......'
금령이 삼 흑령을 보며 손을 휘저었다.
"이만 가봐라."
금령의 말에 삼 흑령은 속으로 불만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예."
금령은 그런 삼 흑령을 물끄러미 보다가 품에서 작은 단약 하나를 꺼내 던졌다.
삼 흑령은 영문도 모르고 그 단약을 받았다. 그것은 은빗으로 반짝이는 단약이었다.
"헉! 으, 은환!"
"그 정도면 불만 없겠지."
금령의 말에 삼 흑령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감사했다. 은환이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은왕을 배신하지만 않으면 굉장한 효능을 보장하는 영단이다.
금령에 준 청령환은 진짜가 아닐 확률이 높을뿐더러 정확히 어떤 약인지 알 수 없어 꺼림칙하다. 그러니 그것과 은환은 바꾼다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흑령은 가벼운 걸음으로 물러났다.
금령은 흑령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이내 창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청령환을 내려놓았다.
"이것은 청령환이 아니다. 이것은...... 이것은 신선단이 분명해."
금령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이 약을 고루흑마가 얻었단 말인가. 흑령도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왜 굳이 모양를 청령환처러 만들려고 했을까? 신선단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영단인데."
청령환은 낙양 유가장의 비전 영약이다. 들어가는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만들기도 까다로워 유가장에서도 몇 개 못 만드는 약이라 전해진다.
"설마 사기라도 치려고 만든 건가? 대체 왜?"
금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기는 느낌이 완전히 신선단이다. 이것이 신선단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신선단을 만들 사람이 절대 아닌데......"
그것이 금령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였다. 게다가 그의 능력이라면 이렇게 어설프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모양도 청령환과 절대 구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설마...... 설마......!"
금령은 한 가지 가설을 세우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제자를 들인 것인가?"
제자를 들였고, 그 제가가 이것을 만들었다면 말이 된다. 하지만 제자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뛰어난 신선단이다.
"가만있자......"
금령은 시간을 계산해 봤다. 자신이 모르는 제자다 그렇다면 최대한 시간을 들여 봐야 삼십 년이다.
"벌써 삼십 년이나 되었구나......"
금령은 문득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려 삽십 년 동안이나 잊고 살았다. 한 번도 사부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무려 삼십 년이나 지난 오늘 갑자기 사부가 떠올랐다.
"그 사부가 새로 제자를 받아들였다니. 믿을 수가 없군."
자신에게 심하게 배신을 당했으니 다시는 사람을 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란 듯이 또 제자를 들인 모양이다. 물론 아직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고작 삼십 년으로 신선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는 없지. 고작 삼십 년으로는......"
금령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만일 삼십 년 만에 신선단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정말로 재능이 뛰어난 녀석일 것이다.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슬픈 일이었다.
금령은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가 청령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건 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지."
금령은 청령환을 품에 넣고 문을 나서서 어딘가로 향했다.
"이런 건 은왕에게나 쓸모가 있는 물건이니까."
금령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조용히 울렸다.
무영은 집을 나섰다. 은자 다섯 먕에 구한 집이었다. 소주 외각에 위치한 허름한 집이었는데, 근처에 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몇 채 있었다.
"열흘 말인가."
소주에 도착한지 열흘이 되었다. 그 열흘 동안 무영이 한 일은 신선주를 만들고 신선단과 신선고를 만드는 일이었다.
스승님이 갑자기 나타나 신선주를 몽땅 가져가시는 바람에 술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원래는 닷새면 끝낼 수 있는 일이었는데 열흘이 걸렸다.
그래도 덕분에 꽤 효능이 뛰어난 신선단을 잔뜩 만들 수 있었다.
무영은 이번에 신선단을 만들면서 자신의 실력이 한 단계 상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스승님이 만나서였는지 아니면 얼마 전 산에 누워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도 멀었지."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아직 멀었지만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
또 한 계단 올라서지 않았는가. 이런 식으로 발전해 가면 언젠가는 스승님의 발끝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아, 우리 하린이를 만나러 가볼까?"
무영은 가슴이 설레었다. 예전에는 십 년 만에 보는데도 담담했는데 이제는 고작 열흘 만에 보는데도 가슴이 설렌다.
'이래도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하린은 남궁세가 소가주와 정혼을 한 사이다. 서하린의 당돌한 말이 떠올랐다.
십 년 전부터 무영을 기다려 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고 했다.
무영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마음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 순간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라."
흘러가는 대로,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흘러가는 대로..... 내 마음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되는 걸까?"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느새 소주 거리로 들어섰다.
한창 걸어가고 있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가장이 박살났다며?"
"그렇다더라고. 아주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남았다던데?"
"서가장이 한 일이겠지?"
"그렇지. 좀 원한이 쌓였곘나."
"그래도 염왕채는 그냥 두고 정가장만 친 걸 보면 좀 그렇지?"
"아, 염왕채가 이젠 한 식구가 되지 않았나. 뭐, 우리한테도 나쁠 것 없고."
"그야 그렇지."
무영은 사람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갑자기 정가장을 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남겼다는 얘기는 무공을 모르는 자들도 모조리 죽였다는 뜻이다.
무영은 발걸음을 돌려 방금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삼십 대 중반쯤 되는 사내들이었다.
"잠시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사내들은 자신들에게 말을 거는 무영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어라? 당신은 약장수?"
그들은 무영에게 약을 산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무영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뭐가 묻고 싶은 거요? 뭐든 물어보쇼."'
사내 중 하나가 호기롭게 말했다. 그는 무영에게 산 약 덕분에 십 년 동안 고생하던 고질병 하나를 말끔히 고쳤다. 어떻게 보면 무영은 그의 은인인 셈이었다.
"정가장에 대해서 궁금해서요."
"아, 정가장. 아주 박살이 났다더군. 뭐 무림인들 싸움이야 다 그렇지 않겠소?"
"한데 개미 한 마리 안 남았다면......"
"아, 그 얘기를 들었소? 말 그대로요. 정가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물건들까지 싹 쓸어갔소. 그것도 흔한 일이지. 서가장이 염왕채를 쳤을 때도 물건들을 싹 쓸어갔으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서가장은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까지 건드리지는 않을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염왕채 때는 그랬지. 그런데 이번에는 안 그랬다는 게 문제요."
"한데 정말로 서가장이 그렇게 한 게 맞습니까?"
"글쎄. 확인은 안 해봤지만 뭐 뻔하지 않겠소?"
무영은 사내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럼 정가장의 사업체들은 어떻습니까? 무가들은 보통 사업체를 몇 개 거느리지 않습니까?"
"그렇지. 정가장에도 사업체가 몇 개 있긴 했소. 하지만 이젠 정가장 것이 아니지."
"그럼......"
"절반은 예전에 서가장이 먹어치웠고 남은 건 얼마 전 채금 상단이 집어먹었소."
"채금상단이요?"
무영은 왠지 상단의 이름이 낯익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예전 객잔에서 자신의 신선단을 모아 팔아치울 생각이라던 상단이었다.
"그렇군요."
"뭐, 더 궁금한 건 없소?"
"없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영의 인사에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에에, 뭐 별것도 아닌 건데, 그건 그렇고 약은 다시 언제쯤 팔 거요? 지금 그걸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사내의 말에 무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런 대단한 약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
무영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사내의 말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났다.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일단 서하린을 만나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서가장은 분명히 아니었다. 무영이 보기에 서무룡은 그렇게까지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가장에 있는 모두를 죽였다면 애들까지 죽였다는 뜻이다. 절대 그럴 분이 아니야.'
무영은 십 년 동안 사람을 상대로 약을 팔아왔다.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무영이 판단하기에 예전 유가장주라 하더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서무룡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럼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지.'
무영의 뇌리에 구대흉마가 떠올랐다.
서가장 정문에 도착한 무영은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를 쳐다봤다. 무사들은 무영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약사님 아니십니까?"
서가장에 있는 무사들 대부분이 무영에게 목숨을 구원 받았다. 현재 서가장에 있는 무사의 수는 백 명 정도였다. 원래는 칠십 명 정도였지만 새로 삼십 명을 더 뽑았다.
물론 그들은 아직 무사라 하기에도 힘들다. 아직 제대로 된 수련 과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가장에 현재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무사들은 거의 무영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무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하하하. 물론입니다. 그 이후로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셨습니다. 아무리 사는 게 더 낫다지만 그런 고통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요. 하하하하."
무사는 밝게 웃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상상을 가볍게 초월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십니까? 아, 장주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무사는 그럴 거라 생각했다. 듣기로 무영은 서가장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옳은 일일 것이다.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들을 살려 놓을 정도의 약이 평범할 리 없고 그런 것에 들어간 약초의 가격이 결코 적을 리 없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셔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당장 달려가 장주님께 알려드리곘습니다."
무사의 말에 무영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 장주님이 아니라 하린이를 만나러 왔습니다."
"하린이?"
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이 커졌다.
"아가씨를 말입니까?"
무사는 커진 눈으로 무영을 쳐다봤다. 그냥 이름을 부를 정도면 꽤 친한 사이라는 뜻이다. 대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졌다.
무영은 무사의 궁금증을 충분히 안다는 듯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하린이와는 어릴 적 소꿉친구입니다."
"아......!"
무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무영이 서가장에게 그렇게 큰 도움을 선뜻 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우리 아가씨 정도면 그런 마음이 들만도 하지.'
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곘습니다. 그럼 아가씨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무사는 순식간에 안쪽으로 달려갔다. 무영은 무사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문 안쪽에 위치한 작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 빠르게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영은 그것을 발견하고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하린과 모용혜였다.
'아직도 남아 있었나? 의외인데?'
서사장에 모용혜가 열흘이나 머물 이유가 없다. 모용혜도 나름대로 한가하지만은 않을 텐데 열흘이나 시간을 보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오라버니!"
서하린이 빠르게 달려와 무영에게 안겼다. 무영은 크게 당황하며 자신을 끌어안은 서하린을 바라봤다.
"하, 하린. 이, 이건......"
어느새 다가온 모용혜가 차가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참 보기 좋네요."
모용혜의 말투는 왠지 싸늘했다. 무영은 또 당황했다.
"아, 그...... 그러니까......"
무영은 할 말을 찾으며 서하린을 억지로 가슴에서 떼어냈다. 무영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무영은 서둘러 호흡을 정리했다.
서하린과 모용혜의 눈이 무영에게로 향했다. 무영은 고개를 들어 두 여인과 번갈아 눈을 마주쳤다.
"대체 열흘 동안이나 뭘 하신 거예요?"
서하린이 약간의 원망을 담아 말하자 무영이 또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할 일이 조금 있어서. 뭐. 다 끝났어."
"그 일이 뭔지 물어도 되나요?"
이번에는 모용혜였다. 모용혜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어느새 냉기가 사라진 말투에 무영은 또 당황했다. 이건 너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별것도 아닌데 뭐. 술을 좀 담갔어."
서하린과 모용혜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술이요?"
고작 술 때문에 자신들을 만나지도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니 왠지 배신감이 밀려왔다.
"오라버니! 정말 너무해요!"
서하린이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울먹였다. 무영은 크게 당황했다.
"응? 뭐, 뭐가? 왜 그래?"
"맞아요. 공자님 정말 너무하셨어요."
이번에는 모용혜다. 무영은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마치 두 여인이 짜고서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 대체 내가 뭘......"
"고작 술 때문에 한 번도 안 오신 거예요? 제가 술보다도 못한 사람이었어요?"
서하린의 눈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무영은 그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헉! 아, 그, 그건...... 그냥 같이 마시고 싶어서......"
무영이 그렇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들도 술을 한 번 빚으려면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잘 안다. 오랫동안 숙성을 시켜야 맛좋은 술이 나온다는 것도 안다.
"되도록 빨리 마시고 싶었어. 다 함께."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급히 품에 있던 술병을 꺼냈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무영의 손에 있는 술병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술이에요?"
무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신선주."
신선주라는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는 동시에 신선단을 떠올렸다. 무영이 만드는 것에는 모두 신선이라는 이름이 붙는다.그리고 대단한 효능을 가졌다. 이 술도 특별한 것이 분명했다.
"빨리 함께 마시고 싶어서 조금 무리를 했어. 이게 또 쉽지 않은 일이거든. 원래는 좀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스승님이....."
무영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스승님이 떠올라 침울해졌다. 다시는 스승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한숨이 나왔다.
"후우. 됐다. 설명은 그만하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거나 마시자."
무영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여인 모두 방금 전 무영의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그럼 제 방에 가서 마셔요."
서하린이 그렇게 말하고는 급히 무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무영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서 그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다.
"어서 가요."
세 사람은 서하린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하린은 시비를 시켜 간단한 안주거리를 준비하게 했다. 무영은 그것을 보며 그녀를 말렸다. 신선주는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됐어. 술잔만 준비하면 돼."
무영의 말에 서하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들 앞에는 술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무영은 술잔에 신선주를 가득 채웠다.
"자, 그럼 마셔 보자고."
무영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찼다. 정말 몇 달 만에 처음 마시는 신선주였다. 게다가 스승님이 칭찬해 준 맛이다. 과연 맛이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기대에 찬 무영에 비해 서하린과 모용혜는 조금 시큰둥했다.
'이게 날 열흘 동안이나 기다리게 만든 주범이란 말이지.'
서하린은 잠시 술잔을 노려봤다. 그렇게 눈싸움을 한 다음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무영이 빚은 술이라고 하니 꼭 마셔보고 싶었다. 괘씸한 술이긴 했지만.
찌릿.
서하린은 온몸을 관통하는 충격에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용혜도 마찬가지였다.
신선주는 신선단과 마찬가지로 입에 넣는 순간 저절로 넘어갔다. 입안이 온통 짜릿해지는 순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고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청량한 뒷맛이 남았다.
그리고 목을 넘어간 신선주는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짜릿하고 황홀해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멍한 얼굴로 비어버린 술잔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영을 바라봤다. 두 여인이 눈이 반짝 빛났다.
"저, 정말로 대단해요. 이런 술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하, 한 잔만 더 주세요."
모용혜가 잔을 내밀자 서하린도 질세라 잔을 내밀었다. 무영은 빙긋 웃으며 두 여인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아직 술은 많이 남아 있었다.
"신선주는 그래도 꽤 독한 술이니까 너무 많이 마시는 건 좋지 않아."
물론 건강에 전혀 해로움이 없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말이다. 신선주의 근본이 신선단이니 당연했다.
무영이 가져온 신선주는 두 병이었다. 세 사람은 두 병의 신선주를 말끔히 먹어 치웠다.
그리고 서하린과 모용혜는 그대로 술에 취해 잠들어 버렸다.
무영은 침상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잠든 두 여인을 가만히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나마 다행인가."
생각해 보면 열흘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은 너무 무심한 처사였다. 충분히 중간에 시간을 한 번 낼 수 있었다.
신선주를 스승님이 가져간 후 다시 밤에 약초를 모아야 했으니 그때 서가장에 들를 수도 있었다.
"뭐, 그래도 신선주 두 병으로 화를 풀었으니 아주 싸게 먹힌 건가?"
무영은 다시 미소 지었다. 자신 역시 술을 마시며 스승님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술이 아니라 두 여인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영은 다시 한 번 두 여인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본 후 방에서 조용히 빠져 나갔다.
다음 날, 서하린과 모용혜는 아침에 눈을 뜨고서 새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한 침상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잤을 줄은 몰랐다.
"어, 어서 씻어야겠네."
서하린과 모용혜는 허둥지둥 침상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서가장을 나와 무영이 머물고 있다는 집으로 향했다. 어제 술을 마시면서 무영이 얘기를 해줬기 때문에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라버니! 우리 왔어요!"
서하린의 외침에 무영이 문을 열고 천천히 나왔다. 무영의 얼굴에 눈부신 미소가 떠올랐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무영의 미소에 잠시 멍해졌다.
'저렇게 잘 생겼었나?"
두 여인이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무영의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이런 얼토당토안은 착각을 하다니.'
무영의 얼굴이 잘 생겼건 그렇지 않건 전혀 상관없었다. 특히 서하린은 더했다.
예전 무영이 어릴 때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 상황에서도 무영을 좋아했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웬일이야?"
무영은 설마 아침부터 그녀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약간 놀란 상태였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빙긋 웃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우리랑 함께 정협맹에 가지 않으실래요?
"정협맹?"
무영은 두 여인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갑자기 정협맹에는 왜 간단 말인가. 물론 모용혜가 정협맹 소속인 모용세가의 일원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서가장은 아직 아니다. 게다가 모용혜도 아직은 정식으로 정협맹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서하린은 그런 무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서가장도 정협맹에 입맹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저와 함께 정협맹으로 갈 생각이에요. 장주님이 직접 움직이실 수는 없잖아요. 현재 서가장이 아직 완전히 안정된 상태가 아니니까요."
모용혜가 설명을 덧붙이자 무영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무영이 한동안 말을 하지 않자 모용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 혹시 정협맹에서 일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모용혜의 말에 무영의 눈이 커졌다. 그런 건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 자체를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모용혜는 무영의 반응에 약간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공자님의 능력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아니에요. 공자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할 거예요. 아직 세가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모용혜는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낭중지추라 했다. 어차피 결국은 무영이 얼마나 뛰어난지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무영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무영의 실력 때문이라야지 자신이 나서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협맹에도 소속된 의원들이 있거든요. 혹시 생각 있으시면 함께했으면 해서요."
모용혜는 그 말을 하며 너무나 조마조마했다. 기대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모용혜는 앞으로 정협맹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한다. 그 시간을 무영과 함께하고 싶었다.
"이것 참,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스럽네."
무영은 당장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정협맹이라, 정협맹......'
무영도 정협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며, 정파 성향을 띠긴 하지만 실리를 많이 따지는 곳이었다.
최근에는 상당수의 중소문파를 받아들여 덩치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또한 그에 걸맞은 인재들을 대대적으로 모으는 중이었다.
'과연 그곳에 가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무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그곳에서 뭘 할 수 있으며 뭘 얻을 수 있을지.
무영이 생각에 잠긴 동안 서하린과 모용혜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무영을 바라봤다. 그녀들의 눈에는 간절함과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무영은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두 여인의 눈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고민을 하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일단 가자."
"예?"
"일단 정협맹이 있는 곳까지는 같이 가자고. 정협맹에 들어 가는 건 그때 가서 결정하고."
무영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정말이에요?"
무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어차피 떠돌이 약장수인걸."
무영의 말에 두 여인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무영은 그것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금령은 소주로 들어섰다. 금령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은왕에게 통보만 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금령이 이곳 소주로 온 것은 비천의 보고 때문이었다.
"분명히 뛰어난 약장수라고 했지?"
비천은 약사라고 하지 않고 약장수라고 했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만일 비천이 약사라고 보고를 했다면 금령은 결코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기대가 되는구나."
어쩌면 사부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제자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금령에게는 재미있는 일이었다.
만일 사부라면 그냥 돌아설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그리고 그 제자라면 은밀히 속을 떠 볼 것이다.
그래서 끌어들일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만일 이도저도 아닌 자라면 은환을 이용해 끌어들일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약사라면 은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테니까.
금령은 새삼 비천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 정도까지 알아낸 것을 보면 정말로 대단하다.
"그나저 비천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금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천이 알려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비천은 지금 개봉을 떠나 소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니, 거의 소주 인근에 도착했다. 개봉에서 얻을 건 모두 얻었다. 그 정보를 분석한 후 다시 소주로 온 것이다.
이미 약장수에 대한 것은 전서구를 통해 보고를 올렸다. 은왕으로부터 그에 대한 조사를 더 해도 된다는 것까지 허락을 받았다. 물론 금령이 움직였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관계가 있어."
그것이 비천의 예측이었다. 서가장과 유가장을 도운 약장수와 뇌룡은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비천은 다시 소주에서 면밀한 조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약장수가 다시 소주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서둘러야겠어."
비천은 미리 무영의 거처를 파악했다. 몰룬 그것도 은왕에게 보고를 했다. 지금 비천이 향하는 곳이 바로 거기였다.
비천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라버니, 그걸 다 들고 가시게요?"
서하린이 무영의 등에 매달린 거대한 짐을 보고 기겁을 했다.
"어쩔 수 없잖아. 다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
정말로 거대한 상자였다. 그 안에 신선주가 든 항아리와 무영이 그간 열심히 만든 약들이 들어 있었다. 당연히 등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거 다 술은 아니죠?"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반은 맞았다. 상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신선주가 든 항아리니까.
서하린도 모용혜도 더 이상 무영의 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신선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번밖에 못 먹어봤지만 이미 신선주의 맛에 매료되어 버렸다.
'제게 모두 신선주라면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꿀꺽.'
두 여인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무영의 마음이 왠지 뿌듯해졌다.
"자, 이제 슬슬 가볼까?"
세 사람은 곧장 소주로 떠났다. 금령이 무영의 거처에 도착하기 반 시진 전이었고, 비천이 도착하기 두 시진 전이었다.
무영 일행은 정협맹이 있는 호북 무한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첫댓글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감사헤여^^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