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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소말리아 내전, 잔인한 폭력, 여성 할례에도 살아남은 히르시 알리!
이슬람 여성들의 불편한 진실에 맞서다!
알리의 회고록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리가 자기성찰적이고 엄밀한 정신과 솔직한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세련되면서도 아주 솔직담백한 언어는 볼테르의 단편 《자연아自然兒L’Ingenu》에서처럼 오히려 불쾌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 알리는 좌와 우로 나뉘는 전통적인 이분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다. 또한 태생적으로 아주 깊은 반권위주의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며, 이데올로기 노선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도 않는다. 앞으로도 알리는 차마 제기되지 못했던 어려운 문제들에 계속 천착할 것이다.
이사벨라 토머스Isabella Thomas, <옵저버>
알리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 테러리스트들이 노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슬람에 대해 유례없이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알리는 보수주의자들이나 좌파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물로서 상냥하면서도 열정적이다. <보스턴 글로브>
아얀 히르시 알리는 여성의 권리 옹호와 이슬람 극단주의 비판에 있어서는 절대 물러섬이 없다.
<뉴욕 타임스>
이성의 힘에 호소하는 감동적인 증언이다. ‘표현의 자유’를 ‘종교적 검열’의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옵저버>
히르시 알리는 어느 편에서도 명확한 사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이목을 끄는 용감하고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인사 중 한 명이다. <뉴스데이>
알리에게는 ‘논쟁을 몰고 다닌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알리는 지독할 정도로 솔직하며 원리주의 이념의 단순성과 폐쇄성을 포착하고 정치에 종교를 이용하는 행태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한때 종교적 순응주의를 경험했던 히르시 알리는 이제 불순응주의와 의견 불일치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뉴욕 포스트>
마치 스피노자의 환생처럼 보이는 히르시 알리는 아마도 17세기 이래 철학자 가운데 가장 용감한 합리주의 반란자일 것이다. 힘 있는 문체로 스스로 자유를 찾아온 여정에 대한 자전적 경험을 기술함과 동시에 이슬람의 반여성주의를 명료하게 고발한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소말리아 내전의 실상과 민중의 삶을 조명하다
《새장에 갇힌 처녀성The Caged Virgin》의 저자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얀 히르시 알리는 독자의 마음속 깊은 곳을 울리는 자서전을 통해 무장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들려준다. 소말리아 내전을 피해 난민이 된 그들의 끔찍한 삶과 사우디아라비아, 케냐, 에티오피아의 이슬람 전통 속에서 교육받았던 유년 시절, 난민 신분으로 네덜란드로 가서 지성에 눈뜨고 활동가로 거듭난 일을 비롯해 네덜란드 하원의원이라는 정치인이 되기까지의 행보를 솔직하고 담대하게 기술해나간다.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 유린 현장을 저자의 경험으로 풀어내다
저자는 겨우 다섯 살에 외할머니의 강압으로 여성 할례를 받았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다른 나라들처럼 소말리아에서도 어린 소녀들이 “순결”해지기 위해 할례를 받는다. 여성 할례는 이슬람이 전파되기 전부터 이루어졌다. 모든 이슬람교도가 여성 할례를 받는 것은 아니며, 이슬람교도가 아니면서 여성 할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소말리아에서는 사실상 모든 여자아이들이 여성 할례를 당하며 이 의례는 언제나 이슬람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할례는 보통 다섯 살 무렵 받는데, 클리토리스와 음순을 도려내 말끔히 제거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의 고통을 생각해 특별히 배려하는 경우 도드라진 부분만 잘라내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대개는 도려낸 부위 전체를 꿰매기 때문에 상처가 아물면서 두꺼운 반흔조직이 형성되는데 그 흉터가 정조대 역할을 한다. 많은 여자아이들이 할례를 받다가 죽거나 할례를 받은 후 감염으로 사망한다. 살아남더라도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거나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기도 한다.
저자는 문화적 특수성에 기인한 악습과 폐단을 고발한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에 관한 영화 <복종>을 테오 반 고흐와 함께 만들었다. 영화에는 간통했다는 이유로 채찍으로 맞는 여성, 지긋지긋하게 싫은 남자와 결혼한 여성, 일상적으로 폭행당하는 여성, 삼촌에게 강간당하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여성, 이렇게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가해자들은 여성들의 몸에 새겨진 꾸란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학대행위를 알라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 네 여성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십만 이슬람 여성의 상징이다. 이후 테오 반 고흐는 이슬람주의자에 의해 피살당했으며, 히르시 알리는 협박과 무장경호 속에서 살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품위 있고 도드라져 보이는 정치계의 샛별이자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는 투사의 인생을 다룬 이 책은 출간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아왔다. 히르시 알리는 날카로운 시선과 정확하면서도 때로는 모순된 문장으로 자신이 가졌던 신념, 강철같이 굳은 의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평등과 싸우겠다는 결의의 과정을 되새긴다.
보수적인 이슬람과 극우 정치인들에게는 ‘악마’라는 낙인이 찍혔고, 가족과 가문으로부터 쫓겨난 알리는 여전히 위협에 시달리고 있지만 침묵하기를 거부한다. 아얀 히르시 알리는 오늘날 유럽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논쟁도 많이 불러일으키는 문제 인물 중 하나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적 이상과 종교의 압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지금, 이만큼 시의적절하고 의미심장한 회고록은 없을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5장 은밀한 만남, 성, 수쿠마위키 냄새
아버지가 안 계신 틈을 타서 외할머니는 여동생과 나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 “이렇게 길게 늘어진 킨티르(클리토리스)를 자르고 나면 너와 하웨야는 순결한 여자가 될 게다.” 그러는 사이 외할머니가 나를 붙들어 오빠와 비슷한 자세로 눕혔고 다른 여자 두 명이 내 다리를 잡고 벌렸다.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전통 할례 의식을 치러주는 대장장이 가문 출신인 낯선 남자는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가랑이를 붙들더니 마치 외할머니가 염소젖을 짤 때마냥 비틀기 시작했다. 한 여자가 “그게 바로 킨티르란다” 하고 말해주었다. 가위가 내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며 소음순과 클리토리스를 잘라내는 소리는 고기조각에서 지방을 잘라내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가랑이 사이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지나갔고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남자가 기다랗고 무딘 바늘로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피 흘리고 있는 대음순을 꿰매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외할머니는 나를 달랬다. “이건 평생 한 번만 겪는 일이야. 그러니 조금만 더 견디거라. 거의 다 끝났어.” 마지막으로 남자는 이빨로 실을 잘랐다. 이것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전부다.
6장 의심과 도전
군중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의지도 확고해졌다. “도둑이야! 도둑이야!”를 연호하는 사람들은 누더기를 걸친 사람부터 정장을 입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어린 소녀들은 월드컵경기에서 케냐 축구팀이 승리하기라도 한 것마냥 들뜬 모습으로 사람들을 응원했다. 큰 부상을 입은 소년의 머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고 퉁퉁 부어오른 두 눈은 감겨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소년의 입을 세게 걷어찼지만 소년은 몸만 부르르 떨 뿐 바닥에 꼼짝 앉고 누워 있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토할 것 같아서 얼른 그 자리를 도망쳐나왔다. 이제껏 내가 목격한 광경 중에서 가장 역겨운 광경이었다. 단순히 지켜보고만 있었음에도 동참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쪘다. 소년은 아마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듯 나이로비에서는 몰매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7장 환상과 기만
종교는 사망 이후의 생명을 보장해준다는 차원에서 나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이슬람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규율, 즉 선하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처신하거나 돼지고기·과식·음주를 삼가는 일 등의 표면적인 규율은 따르기 아주 쉬웠다. 하지만 성을 금기시하거나 개인의 정신을 통제하는 더 깊이 있는 규율은 따를 수 없었다. 나는 자기 두 발로 땅을 딛고 설 수 있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8장 피난민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에 앉아 소말리아를 떠났다. 모래와 가시나무, 한두 그루의 바오밥나무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뙤약볕을 가릴 그늘 한 점 얻지 못한 채, 절망에 빠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며칠을 기다렸다. 사방에는 전갈과 뱀이 득실거렸지만 어떤 게 위험하고 어떤 게 그렇지 않은지 분간할 수 없었다. 쭈글쭈글한 갓난아이는 엄마의 마른 젖에 매달렸고, 영양실조에 걸린 아기의 머리는 몸보다도 더 커 보였다. “아기를 구해야 해요. 아직 살아 있잖아요!” 아기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어차피 다른 아기들도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국경을 넘는 것 말고는 이 아기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따뜻한 물을 먹이자 아기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기 이름을 지어주자고 제안했지만 모두가 거부했다. 어차피 죽을 아기라고 했다.
9장 아빠
엄마는 아빠와의 관계 때문에 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엄마는 적대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어 내면으로 침잠했다. 나를 심하게 때리는 일도 전보다 더 잦아졌다. 사람들은 엄마를 피해 집을 나갔다. 바깥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짐승마냥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처참한 상황이었지만 엄마는 팔자 좋게도 자신의 꼬인 인생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2부 자유
10장 미련없이 떠나다
가족을 버리고 나는 홀란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 날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난민센터에서 면담이 끝난 뒤 줄곧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쯤 나를 추척하고 있을 가족들이 기어이 나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람은 원하는 것을 믿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과 인연을 맺지 않을 자유,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자유,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자유, 선택을 존중해주는 자유,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자유,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던 권리다.
11장 장로들의 심판
부모가 서류상으로 맺어준 남편인 오스만 무사가 여덟 명의 오스만 마하무드 장로들과 두 명의 마허텐 장로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가족들은 가문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남편을 거부하고 도망친 나에게 나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너는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바로 대답했다. “내 영혼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영혼이 시키는 일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물세 살 먹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당당한 표현이었다.
12장 하웨야
내 인생 최악의 소식이었다. “네 동생 하웨야가 알라의 품으로 돌아갔구나.” 엄마와 하웨야는 끔찍한 곳에서 생활했다. 이제껏 내가 본 방 중 최악의 환경이었다. 엄마는 답답한 마음에 폭력을 휘둘렀다. 엄마의 꿈은 악몽으로 변해있었다. 엄마에게는 이제 남은 가족도 없었다. 마하드 오빠는 엄마를 실망시켰고 두 딸 중 하나는 엄마를 저버렸다. 그리고 남은 딸 하나는 미친 상태에서 임신까지 했다. 엄마의 악몽이 현실이 되었고 하웨야가 죽음으로써 그 악몽은 더 끔찍하게 변했다.
13장 레이덴대학교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해내고 말았다. 나는 이방인으로서 낯선 땅 네덜란드에서 근사한 자격을 당당히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사람들 사이에서 잘 적응하면서 친밀하고 굳은 교우관계도 맺었다. 생활비도 스스로 벌어서 해결했다. 내 손과 발, 두뇌만으로 이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뿌듯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었다.
14장 알라를 떠나다
나는 자그마한 노동당연구소의 초급연구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이민 문제였다. 이민 문제는 21세기에 홀란트가 마주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민족적 전통을 이유로 홀란트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나 성적 학대 또는 근친상간 같은 범죄가 기록되기를 원했고 매년 얼마나 많은 어린 소녀들이 네덜란드 식탁 위에서 여성 할례를 당하고 있는지 기록되기를 바랐다. 이런 수치들이 작성되면 그 수치만으로도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슬람 남자들이 여자를 때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고 나는 그런 사례를 수시로 접해왔다. 사실 서구인들은 이슬람을 오해하고 있다. 꾸란에는 매질 같은 처벌이 명문화되어 있다. 꾸란은 학대가 적법한 행위라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공동체의 비난을 받는 일은 더더욱 없다. 일단 진실이 폭로되고 나면 모든 문화는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입각해 타문화에 무관심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행태가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15장 협박
나는 이슬람 여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받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를 바랐고, 그런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이슬람 여자들이 저항의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여성도 남성처럼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으며, 동일한 권리를 누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깨우쳤던 여성주의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8세기 영국의 작가, 철학자, 여성주의자-옮긴이)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국제사면위원회조차 명예살인에 의해 희생되는 여성에 관련된 통계를 작성하지 않았다.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통계는 작성하고 있었지만 간통이나 불륜 등을 이유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체형을 당하거나 사형당하는 여성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기록은 작성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자 무슬림들의 협박이 잇달았고 결국 나는 지역 경찰서의 보호를 받지 않고 유명 정치인이나 왕실가족을 경호하는 정예특수경찰의 경호를 받게 되었다.
16장 정치
이슬람 여자들이 갇혀 있는 정신의 새장에서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기에 이슬람 여자들이 갑자기 나를 지지하고 나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굴종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스스로 모임을 조직하거나 자신들의 견해를 개진할 역량이 없었다. 새로 구성된 하원의원들의 의원선서식이 열리는 1월 30일에도 나는 호텔에서 지냈고 그 뒤로도 몇 주 동안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세로 살았다. 한 호텔에서 며칠만 묵어도 호텔 이용객이나 호텔직원들이 나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보안요원들은 호텔마저도 이리저리 옮기게 했다.
17장 테오의 피살
점심 무렵부터 세부적인 내용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목격자가 50명도 넘는 가운데 한 남자자 체포되었다. BBC 방송으로 기억되는 방송에서 한 여자가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턱수염을 기르고 이슬람 사람들이 입는 로브를 입은 남자였어요.” 나는 의자에 못박혀버렸다. 이슬람교도가 저지른 짓이라면 <복종> 때문에 일어난 일이 틀림없었다. <복종>을 만들지 않았다면 테오는 아직 살아있을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내 책임이었다.
뒷이야기
오후 4시 나는 기자회견이 있는 기자실로 들어갔다.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사진가들과 카메라 기자들은 서로 밀쳐대며 내가 한걸음 뗄 때마다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기자실을 가득 메운 기자들 앞에서 심호흡을 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의회를 떠난 지 정확히 75일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