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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1) 2024. 8. 11
초대교회의 특징
행2:42-47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의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구절이 바로 36절입니다.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서 ‘너희’는 물론 유대교 집권층과 유대인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진지하게 들은 사람들은 뭔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를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심정이 3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해결책 제시 – 구원에 이르는 방법>
구원의 방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구원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먼저는 그들이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할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이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무지와 무관심(불신앙)으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또한, 회개를 단순히 어떤 특정한 잘못에 대한 뉘우침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회개는 방향을 180도 전환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둘째,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두 번째 단계는 ‘세례’입니다. ‘회개’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면, ‘세례’는 회개의 공개적인 증표입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나의 신앙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와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하나님 은혜가 임합니다.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첫째,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인정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죄 사함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로 만들었기에,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둘째,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내주(임재)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를 성전 삼으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제시한 구원의 약속에는 제한이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즉 구원에는 남녀노소, 국적, 인종, 문화적 수준, 사회적 지위 등의 전제적 조건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결과>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설교를 하니, 그 결과가 놀랍습니다.
41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의 초대에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이날 하루에만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나 더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초대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모든 교회의 모델입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뜻합니다. 왜 성전에 모였겠습니까? 세례받은 사람의 수만 3천 명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만한 넓은 곳이 거기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그들은 유대인이었기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그들은 유대교에서 독립한 교단을 조직할 뜻은 없었습니다. 오직 유대교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보내주신 메시야를 믿고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유대교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전에 기도하러 가고 또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성전을 자주 방문하셔서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사도들을 중심으로한 이 새로운 세력이 더해짐에 따라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 드디어 그들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박해로 되어 나타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함께 모인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무엇을 행하였습니까?
첫째,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예배하는 공동체’).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전에 모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찬미의 내용은 ‘은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롬8:2).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찬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그저 구경꾼으로 있다가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은헤’를 체험케 해 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앞서 46절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모였으니 날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재해석하면, 예배란 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즉 삶이 곧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4:20~23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것만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서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으로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일주일 한 번 온 성도가 함께 모여 드리는 주일 예배의 소중함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예배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양육하는 공동체’).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은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은 거의 무학의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에게 무슨 가르침을 받았을까요?
예,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에 대한 회고를 듣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았으니, 예수님의 가르침이 막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기억력도 좋았습니다.
사도들에게 다른 지식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세상적인 지식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성도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습니까?
각종 분야의 박사들도 많습니다. 목사보다 공부 더 많이 한 분도 수두룩합니다.
그분들이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 성경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가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설교자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젖을 먹고 죽을 먹습니다만(어머니가 먹여줌), 장성한 사람이 되면 단단한 음식을 먹습니다(스스로 먹음). 히 5:13-14절 “…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마치 죽과도 같습니다. 누가 먹어도 쉽게 넘어가도록 금방 소화되도록 목사님이 말씀을 준비해서 떠먹여 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죽만 먹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고 소화해 내어야 힘을 쓰게 됩니다. 스스로 깨닫는 말씀이 힘이 있습니다.
셋째,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랑의 ‘교제’는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1) 구제입니다.
44~45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여러분, 이것은 지금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강제로 재산을 빼앗아서 똑같이 분배하여 나눠 갖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들이 자기의 재산, 소유를 팔아 나눠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 동기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실제적인 구체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까, 가난한 이웃은 더 이상 남이 아니었습니다. 남이 아닌데 내 것 주는 것이 무엇 아깝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까, 병든 이웃이 더 이상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말로만의 사랑, 계산하는 사랑, 받은 만큼만 주는 사랑, 이기적인 사랑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2) 떡을 떼고 애찬을 먹었습니다.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전에서 모인 후에, 각 가정으로 흩어졌습니다. 집집이 나누어서 우리가 속회로 모이듯이 가정 교회로 모인 겁니다. 집에서 떡을 뗐는데, 같이 모이기만 한 게 아니라 같이 성찬식을 했습니다. 그 당시 예배는 형식에 딱딱 맞춘 게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찬도 나누고, 그러면서 서로 교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애찬은 차별이 없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한 식탁에 참여하였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되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가족을 ‘식구'라 표현 - 함께 먹는 것이 곧 한 가족임을 증명).
애찬을 통해 서로를 격려해주고, 힘들어하는 형제자매를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특히 가난해서 끼니를 제대로 못 때우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며 ‘나는 먹을 게 더 있으니까, 형제님 자매님은 많이 드세요.’라고 서로 돌보면서 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할 때 영적인 가족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충성되고 진실한 성도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하고 사랑을 나누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문제는 변질입니다. 초대교회의 이 아름다운 모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었습니다.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여러 파벌로 나뉘고 다툼도 있었습니다.
고전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또,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애찬’ 나누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고전11:20~21).
‘주의 만찬’과 ‘자기의 만찬’이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찬과 애찬을 만찬의 형식으로 행했습니다. 각자 집에서 만찬을 준비해 온 후 교회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유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는 자들이 만찬을 먼저 먹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에 분명히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빈궁한 자들이 나중에 와서 자신들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에 상처받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28절)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넷째, 기도에 힘썼습니다.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기다릴 때부터 늘 해오던 일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행1:14)고 기록합니다. 또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때에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행2:1). 그들은 성전에 모일 때에도 기도에 힘썼지만, 점점 가정에서의 가족 예배와 집에서 모일 때에도 기도에 힘썼습니다. 공식적인 또는 비공식적인 모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기도에 힘쓰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43절에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하는데, 사도들만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게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다 같이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다 보니까, 사 도들이 교회의 대표였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을 더욱더 높여드리고 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응답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맺는 말씀 - 초대교회의 부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기도에 힘쓰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 결과는‘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지탄이 아니라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판’이 좋아야 합니다(이미지 광고).
요즘 많은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많이 받는 형편이 되어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그리고 우리 사도교회가 초대교회처럼, ‘칭송을 받아’, 큰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