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영혼의 엔지니어이다
洪 潤 基
시인이 쓰는 ‘시어’는 일상적이기 보다는 특질적인 ‘파워’를 가진 언어가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시는 ‘텐션’(tension), 즉 긴장미가 결여되기 쉽다. 시가 일반적인 ‘산문’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처럼 시어 구사가 결코 일상적이고 평범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루울’, 다시 말해 ‘제약’을 띠고 있다는 특출한 점이다.
따라서 시인의 언어는 모두 ‘에너지’를 갖고 있음으로써 그 시의 윤활적인 감성의 전달이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인 구조 역학적 작용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곧 ‘살아 있는 시’의 표현 양식이다. 따지고 본다면 빼어난 ‘산문’의 경우에도 에너지가 넘쳐서, 우리는 흔히 “그 글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칭송하게 된다. 활력이 없는 언어 표현은 시 아닌 다른 모든 문학 작품에서도 그것은 죽은 글이다. 하물며 시에 있어서랴.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는 시어야말로 결코 늘어지고 막연한 언어의 유희가 될 수 없다. 그 때문에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항상 ‘시는 이미지가 강한 언어만을 다룰 것’을 강조하여 오고 있다. 또한 시어는 율동적인 ‘리드미컬한 처리’로서만이 언어 구성에 있어서 포괄적인 에너지를 발산시켜 독자에게 동시에 활력과 만족감인 기쁨을 베풀게 된다.
그와 같은 시를 창작하는 일은 곧 시어에다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값진 작업이다. 특히 시인은 ‘운률어’(韻律語)를 통한 영혼(soul; spirit)의 엔지니어라는 것을 스스로 파악하면서 낱말 하나하나를 가지고 옥을 갈고 다이아몬드를 깎는 것과 같이 심혈을 경주하여 시어를 탁마할 일이다. 이 사람은 여러분의 시작업이 한국 시문학사에 있어서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역할인지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매달 열심히 읽고 있다.
시인에게는 ‘발표의 자유’가 있다. 그와 동시에 잊어서 안 될 것은 ‘발표작에 대한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식을 낳으면 성장 기간 동안은 부모로서 훌륭하게 양육시킬 의무가 있듯이 우리가 생산한 시에 대하여 시인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시인은 영혼의 엔지니어인 동시에 시어로 시의 목숨을 다루는 생명의 엔지니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못된 한 편의 시가 우리 시단을 얼마나 크게 어지럽히는 것인지 각성할 일이다. 특히 남의 ‘모작’이거나 심지어 ‘표절’ 등은 심각한 ‘反文學 행위’이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중차대한 ‘시인의 책무’에 대하여 반드시 스스로 성찰하고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냥 떠오르는 詩想만을 붙잡아 적당히 써 왔다면 오늘부터라도 반성하고, 참다운 시작업을 위한 새로운 결의 속에 ‘나 하나만의 나의 시세계’ 구축을 위한 시어의 엔지니어로서 새 출발을 해야만 한다.
영혼의 엔지니어인 시인에게는 시에너지의 ‘파워’, 즉 ‘詩힘’이 그의 눈에 보일 때, 바로 그 ‘모멘트’(moment)에 비로소 시작업이 성공하고 있음을 또한 직감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모멘트라는 것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움직거리고 있는 운동이 일으켜 주는 한 순간의 중대한 에너지를 말한다. 이를테면 기다란 작대기의 양쪽을 쥐고 힘껏 굽혀서 꺾을 때, 힘의 압력에 의하여 작대기가 딱 하고 부러지는 순간에 우리는 물리적인 힘의 모멘트를 목격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모멘트는 힘의 크기며 깊이, 그리고 너비 등을 단호하게 결정짓는다. 이것이 시의 경우는 시어가 베풀어 주는 ‘신선한 충격’의 크기며 깊이와 너비로서 비유될 수 있다. 독자들이 어떤 시를 읽는 순간 그 즉석에서 수용하는 모멘트의 크기며 깊이와 너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선하고 활력있는 시어만을 캐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남이 전혀 다루지 않은 ‘새로운 시어’에 의한 시를 써야 한다. 또한 강력하고도 기교적인 메타포(metaphor; 은유)를 구사해야 한다. 특히 ‘현대시는 메타포에 의해서 그 생명력을 발휘한다’고 나는 단정하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시는 살아 있는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는 이미지 형상화로 그 존재 가치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메타포라는 말은 그리스어인 ‘메타포라인/metapherein’에서 생겨난 영어이다. 본래 ‘메타/meta’는 ‘그 위에’, ‘그 후에’, ‘그것을 초월하여’라는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그리스어이며, ‘퍼라인/pherein’은 ‘운반한다’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합성어인 ‘메타포라인’은 본래 ‘어떤 것 위에다 날라다 준다’, ‘그것을 초월하여 운반해 준다’는 뜻으로 썼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메타포’는 ‘하나의 말을 통상적인 의미의 말로부터 다른 말, 즉 별개의 말로 옮겨 준다는 뜻을 갖는다. ‘은유’, 즉 ‘둘러댐’이다.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A는 B이다’라고 하는 메타포가 성립될 때, 그 의미의 ‘콘텐츠’(contents)는 ‘A도 B도 아닌 C,D,E~X,Y,Z’로 새로운 이미지의 다양한 ‘패러다임’(paradigm)의 광폭적인 전개와 동시에 강력한 종합효과인 ‘시너지’ (synergy)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메타포의 능수능란한 구사야말로 그 시인의 역량을 판단시키는 평가기준인 ‘바로미터’(barometer)이다.
덕장에서
고드름 주렁주렁 떨어지는
봄 오는 날 얼었다 녹았다 아직도
겨울을 붙들고 매달려 있던
한 마리
황태
빨갛게 물들거나
노랗게 물들거나 태우다 버린
생각들로 어깨 나누고 있는 뼈와 살
녹았다 얼었다 다시 기억의 무덤 속에서
바람 부는 날 운다.
스무 살 누나
운다.
손과 다리 잘려나간
나 아니면 널 알아볼 수 없는
정지된 시간 속 사진을 본다. 질주하는 불빛 피해
뱃속 텅 비어야만 제 맛인 소주를 어둠의 얼굴 위로
게워 내는 바람은 엊그제 되찾은 필름
너 아니면 날 알아볼 수 없는
저 멀리 돌아앉은
적막의 자궁을
본다.
-윤건영 장시 <늘 목구멍에 걸리는 등뼈를 위해> 서두 부분
모두 55연으로 엮어진 ‘장시’의 서두 2연만을 인용해 본다. 우선 이와 같은 장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시인 윤건영의 그 역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은 필자도 지금까지 48년 간 시를 써 오지만 아직 장시를 써 보지 못했다.
이 시의 주제는 문명비평적인 ‘삶의 진실 추구’이다. 사회적․저항적인 경향이 강한 연면한 새타이어와 더불어 호흡이 매우 긴 생명력 강한 시어 구사로서 이미지의 막강한 파워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으며, 질 높은 메타포에 의한 활력적이며 해학적 표현 기교가 응당 독자를 압도 시키고 있는 가편(佳篇)이다.
다소 ‘산문적’인 묘사와 관념어도 나타나고 있으나 장시가 갖는 불가항력적인 시작법은 때로 그와 같은 요청을 동반하게 된다. 앞에 인용한 제2연과 3연의 메타포 솜씨는 근래 한국시단에서 보기 드문 연상 수법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시 전편을 숙독해 보면 누구나 수긍하겠거니와 윤건영의 상상력의 패러다임이 무한하다고 하는 실증적인 묘사법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세계를 떠나서, 현실 그 자체를 허수(虛數)의 시점(視點)에서 조망하는 ‘네가 리얼리티’의 세계, 합리적․비합리적, 현실적․초현실적 세계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양상이다.
눈 덮인 먼 산을 뒤에 두고
복사꽃 한 가지
가늘게 가늘게 시절을 젓는다.
꽃필 자리 미리 와
맴돌며 기다리는 심사
뽀얀 안개에 녹이며
속에 간직했던 메시지를
똑 똑 떨어뜨린다.
세상 얘기 가지고 올 이
이제나 저제나 마음 졸이며
머리 흔드는 꽃망울의 속내
버드나무는 연두색 그 독한 그리움을
호젓한 오솔길에 뿌리고
바람은 또 그렇게
복사꽃 한 가지
곱았다 폈다
푸짐한 햇살을 간추리며 흙의 품으로 흐른다.
-최승학 <복사꽃 한 가지> 전문
최승학의 <복사꽃 한 가지>는 이 달의 가작(佳作)으로 단연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다. 파워풀하면서도 그야말로 프렉시블(flexible)한 나긋나긋한 메타포의 표현 기교는 앞으로 한국시단에서 그 성가(聲價)를 기대할 만하다고 보련다.
시인이 시를 제대로 알고 쓴다는 것은 좀처럼 용이한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더러는 시세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덕이는 경우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흠인 관념어 ‘심사’와 ‘그리움’ 같은 것은 ‘이미지’로서 다른 사어들을 새로히 캐내 메타포하여 바꿔서 묘사한다면 좋겠다. 다른 시인들도 흔히 이런 과념적 표현을 하고 있는데 시어의 고도한 세련미를 위해 삼가야 할 일이다. 거듭 지적하거니와 시인은 영혼의 엔지니어이기 때문이다.
앙상한 가시 털을 세운 채
허리 구부리고
잠들어 있다
봄으로 가는 새벽이
더 남은 모양이다
계곡은 아직도
꿀 먹은 벙어리다
봄꿈을 꾸며
나는,
겨울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등정을 서두른다.
-장은수 <꿈꾸는 겨울산> 전문
깔끔한 겨울 산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릴리시즘의 전형적인 서정시로서 호감이 간다. 요즘 보면 수다스럽고 소란스런 시작 상황이 지배적인 데 반해, 안정된 이미지 처리가 자못 돋보인다. 시의 생명적인 요소는 강조할 것도 없이 ‘서정시’가 그 본령(本領)이라는 견지에서 이 작품은 최승학의 시와 함께 독자의 좋은 평가 대상이라고 본다.
고도산업화 시대의 스피디하고도 번잡한 사회적인 패너메넌(pheno- menon; 현상)은 그 반대급부적 요청으로서 안정된 감각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애쓰기 마련이다. 여기서 릴리시즘의 신선한 시작품은 독자들에게 적응도가 커진다.
옥에 티라고 한다면 마지막 연의 ‘사타구니’가 썩 어울리지 않는다. 장은수는 기발한 이미지의 발상을 시도한 것 같으나 신체어(身體語) 중에서도 음성적(陰性的) 속어 묘사는 상쾌감을 절감시킨다. 시집에 넣을 때는 시어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 메타포의 아름다움이며, 언어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것은 곧 그 시에 대한 독자의 수용과 동시에 감동에 크게 작용한다.
저
지칠 줄 모르는
정열
발길 드문
절기에
찾아와 반갑다며
넓은 가슴으로
소리치며 달려와
방파제에 부려 놓은
바다 속 이야기
-손희자 <겨울 바다> 전문
이 작품은 손희자의 기교적인 감각시이다. 시각적․청각적인 이미지가 이른바 ‘공감각’(共感覺)으로 적층 효과를 형성시키고 있다. 제3연의 역동적인 이미지 구사가 독자에게 무리 없이 어필하고 있다.
더구나 비교적으로 절제(節制)된 시어 구사를 하고 있는 점도 바람직하다. 요즘 시가 군소리가 많고 설명적인 산문화 경향에 이 작품은 쐬기를 박는 작업으로 평가하고도 싶다.
시어로서 관념어인 ‘정열’이며 ‘절기’는 배제시키고, 그러한 시의 콘텐츠는 이미지로서 처리해 준다면 이 작품은 앞으로 평가될 것이다. ꏨ
□ 시 월평 2006년 4월호 한맥문학 □
첫댓글 장은수 시인님의 <꿈꾸는 겨울산>에 대한 좋은 시평이 있었군요.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정은미 시인미 칭찬해주니 엄청 고맙네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