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5월경에 육군본부(대구 소재)로부터 갑작이 연락을 받고 부산에서 대구로 올라갔다.
근처에 있는 육본(초등학교로)에 가보니 전군에서 40~50명의 장교들이 모여 있다. 나는 작업복에 공병장교의 상징인 빨간 마푸라 을 목에 감은 중위로서 순서에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앞에 앉은 가운데 분이 장군님이시고 그 양쪽에 대령님이 5~6분이 앉아 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 요원을 선발한다는 일을 모르고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였다. 그 중에 한분이 대학은? 전공학과는? 또 다른 분이 상대성 원리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학 전문부 입학시험에도 나왔고 사범대 손 학장님의 원자 물리학에서도 흥미 있게 배운 기억이 나서 간단하게 설명한 것으로 기억이 난다. 경례를 하고 교실을 나오려고하는데 그중의 한분이 “귀관은 명령을 내면 육사로 오겠는가?”해서 “ 별 생각이 없 읍니다”라고 답변을 하였다. 재식 교련 같은 것은 내 소질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명백히 답변을 하고 다시 부대로 귀대하여 그 일은 잊어버렸다.
육군사관학교(진해) 교수부로 부임
‘육사 교관으로 선발 됐으니 부임시켜라’라는 전문이 기술 공병단장 앞으로 왔다는 연락이다. 처음에 나는 육사에 대한 내용도 잘 모르니 내심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중대부관 김 중위도 단장과 중대장이 공병감실에 연락을 해서, 계속 여기에서 근무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결과는 공병감실에서도 빨리 부임시키라는 연락이 왔다며, 결국 중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만 2년간을 몸담아온 이 중대를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게 됐다. 이 결과가 나에게는 앞으로 짧지도 않은 4반세기를 육사에서 복무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던 일이다. 부산 범일 동 에 있는 시외버스를 타고 구포다리를 거쳐 약2시간 만에 도착한곳이 처음 보는 진해(鎭海)다. 마침 육사에 근무하는 한 상사를 만나서 같이 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날이 1952년7월3일 이다.
학교입구에 아치모양의 간판이 낯익은데, 내가 있었던 중대에서 만든 것이다. 완만한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니 이곳 경화동 중학교와 국민학교 건물 에 임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육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 마침 생도들은 하기훈련으로 다른 지방으로 가 있고, 조용한 교내를 들어가면서, 여기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나는 상당히 불안한 심정으로 연병장 옆에 있는 목조건물의 교수부(敎授部)를 찾아갔다. 마침 퇴근 후에 혼자 교실에 남아서 채점 을 하고 있는 이대성(李大聲:연세대)문관 교수로부터, 이곳에서는 일반 학 을 담당하며 ,자기는 수학을 강의 한다고 소개한다. 이 말을 듣고 비로 서 마음이 놓였다. 군사훈련 교관으로서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 이다. 며칠 후 에 선발 되어 모인 8명의 우리들은, 4년제 초대 교수부장인 박중윤(朴重潤: 예 少將)대령님에게 정식으로 신고를 했다, 우리들은 수학에 중위 문원(文源) 김증호(金曾鎬) 엄장일(嚴章鎰) 김주환(金冑煥), 물리학에 대위 장종량(張鍾良) 중위 김영전(金永銓), 국어학 에 중위 이광신(李光信) 도학 중위 김필균(金弼均)등이다.
육사가 진해에서 재(再) 개교해서 일반학(一般學)교육을 위한 교수들은 1951년 10월 30일 개교 후에 부산에서 피난 중 이던 최윤식(수학) 이숭녕(국문) 방성희(물리) 교수등 7~8명의 유명교수들을 문관교수로 초빙 하였다. 이때 교수들은 부산에서 진해까지 스리쿼타 차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등 어려운 실정이었으며 사명감으로 헌신적으로 교육에 임하였다 고
한다.이중에는 기간요원으로서 현역 중에도 영어는 중위 황찬호(黃燦鎬) 조순(趙淳) 철학에 중위 이영춘(李永春) 수학에 중위 임재규(林在圭) 오윤용(吳允用) 민공기(閔公基) 등이다. 한 학기를 마치고 12기생의 입교로 9월부터는 2개 학년의 수업에 대비하여 이번에 부임한 우리들 8명이 정식으로 선발 됐다고 한다.
우리들은 곧 9월 달의 개강 준비를 시작하게 됐다. 상주하는 미 군사 고문단에서 미 육사(west point) 출신의 대위로부터 대이야(Thayer)제도에 의한 교수방법을 지도 받았다.이는 소단위의 인원(20~23명)의 교반에 따른 독특한 교수법 이다.육사의 모든 교육은 어떠한 상환아래서도 예리한 논리적 분석과 자주적인 사고력으로 자신 있게 행동에 임할 수 있는, 우수한 국가지도자를 양성한다는 하나의 초점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것은 웨스트포인트 미국 육사교장을 16년간이나 역임한, 대이야 교장의 공적이기도 하다.
생도 11기생 을 첫 담당
6ˑ25전쟁이 한참 일 때, 제11기부터 제13기생 까지는 현역병으로 복무 중 전장에서 모집광고나 군의 연락을 통해서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고서에 의하면 제11기 생도들은 7:1의 경쟁률로 입학 했으며, 현역군인 및 군속이113명으로 절반이 되며, 재학생과 공무원들이 105명으로 가정환경등도 비교적 좋은 편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육사 11기생, 2학년의 물리학을 통해서 대학교육을 처음 담당한 입장에서, 아무리 의욕이 왕성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는 참고서적의 절대적 부족으로 좀 힘들었다.
2학년에 담당할 ‘일반 물리학 ’은 미 육사에서 사용하는 ‘하우스만 슬렉’저서와 물리실험 책을 번역하여 , 프린트로 만들어 가르치면서 또 프린트를 하는 식 으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다행이 내용이 겉보기에는 우리들이 배운 일본인 학자들의 교과서 내용을 압축한 것 보다는 훨씬 이해하기가 쉽게 느껴 젓다. 그 대신에 계획된 수업진도와 매시간 끝에 치루는 일일시험은 철저히 지켜야만 했다. 매달 성적결과에 따라서 교반이 바뀌며, 국내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 11기생들은, 모두가 대단한 포부의 의욕과 열성(熱誠)으로 충만(充滿)하고 있었다고 느꼈다. 그들은 참으로 우수했고 폭넓은 과학지식을 몸에 지니면서 한눈팔지 않고,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학술연구가 아니라, 인격과 학력이 있는 청년 사관이 되는 것이다. 학업을 통해서, 숙련된 지도자, 명확한 사려 분별자(思慮 分別者),와 다방면의 학문을 깨달아서 알 수 있는 폭 넓은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수수업, 활발한 질의응답, 여기다가 빈번한 학력의 등급을 정하고, 정기적인 학급편성 바꾸기 등으로 우리들은 IB(instruetor briefing)를 통해서 교관들은 사전준비를 하고, 그 이튼 날은 일제히 각 교반으로 들어간다. 이런 수업을 일주일에 5번 정도를 해나기니 좀 고단하기도하다. 그래도 새로운 방식에 의한 교수방법과 진지한 생도들의 자세에 보람을 느낀다.
물리실험기구는 전무한 상태인데 같은 진해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 가보니 간단한 몇 가지가 있어서 안세희(安世熙:전 延大 總長)대위 의 양해를 얻어서 표면장력을 측정하는 죨리 저울(jolly balence)등을 빌려오는 실정이다.이때는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의 원조에 의존
하고 있던 우리나라로서는 4년간의 대학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교실에는 교단도 없이, 평면에 놓인 책상 앞을 교관은 좌우를 움직이면서 질문도 하고 설명도 하게 된다. 학급은 학과목 마다 학력에 따라서 학급편성을 매월마다 재편성 하게 되고 성적에 따라서 1교반도 되고 5교반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 여태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교육방법에 우리들 스스로도 놀라면서, 수업 준비를 서서히 진행 해갔다.
사관생도들의 일반 학 교육을 위한 교재는 물론 교육시설도 미비 하였다.전란중이니 당연한일이다. 우리들은 무에서 유로 창출한다는 의지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나갔다.
실험기구 도입과 당시 세태(世態)상
1952년 11월 10일에 백마고지(白馬高地)의 영웅 김종오(金鍾五:예 大將)소장님이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첫 일성(一聲)은 “나는 이기지 못하나 우리는 승리 한다”면서 며칠전만해도 “매일 전쟁터에서 초급장교들이 하루 15~6명씩 전사하는데 이곳 진해에 내려 와보니 꿈만 같다”고 술회하니 아직도 전선은 치열한 상항 같다. 그런데 53년 봄에 교장이 미 육사 방문 겸 미국 체류 시에, 3만불 상당의 물리실험 기재를 구입한다기에 과에서는 이에 대한 구매 품목 등을 조사 보고 했다. 그리고 교장이 미국 샌꼬 회사에다 계약을 했으며, 회사에서 수신 처를 ‘Korean Military Academy'라고 해서 보냈다는데 한국의 세관원이 잘 몰라서 ’영도 보세창고에서 그대로 방치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시에 3만 불은 큰 금액이며 듣기로는 교장님 노력으로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서 실험용으로 하사 받은?것이라고 알고 있다. 3년 후에 이학사 학위수요(學位受與)문재 때 문교부의 해당관계자들이 물리 화학 실험실을 둘러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일반대학에서 우리만큼 많은 최신일반 실험기구는 없었으니까...)
1년 가까이나 소식이 없어서 적극적으로 알아보니 부산 영도보세창고에 그대로 방치 되 있다는 정보를 얻고, 54년5월경에 김익권(金益權)교수부장의 분부로 나는 급거 부산으로 물리실험기재를 찾기 위해 내려갔다. 내려가서 세관원과 함께 부두(埠頭)가를 샅샅이 찾아다니면서 결국 쌓여있는 나무궤짝을 뜯어보고 찾아냈다. 그로부터 연일 세관출입을 하여, 이번에는 물품을 통관시키는데 각종 서류가 필요했다. 왜냐 하면 몇 백 개가 되는 기구의 많은 세금을 면제 받아야한다. 관인 도장만 해도 20여개이며, 마지막에 대구 육군본부의 참모총장 직인을 받아야했다. 총장실 앞 의 헌병 두 사람이 가로 막는 게 아닌가. “비켜” 하면서 문을 열어보니 장성세분이 나를 쳐다본다. 새파란 대위 놈? 의 무례를 용서하고 그중의 중장 한 분이 내 군복 상의에‘육사’마크를 보드니 ‘육사에서 왔느냐’고 하시어, 서류를 말씀드리니 지금 총장이 부재중이라고 하면서 쾌히 결재를 하셨다. 그길로 서울 상공부, 경제 부처 등을 방문하고, 국장들을 직접 만나서 해결했다.
여기에서 생각한일은, 계장-과장-국장 순으로 순서대로 하다가는 결제 한번 받는데 하루 종일 또는 며칠이 소요 될 뿐 아니라, 그때의 하루 출장비가 100환이라고 아는데, 턱도 없이 부족하며, 잠자리는 부장님의 서울 집을 봐주는 분이 있어서 그 집에 가서 잠을 자야할 형편 이다. 여기에다가 진해에서 서울로 이동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실험 기자재를 운반해야할 목표로, 나는 부산 ˑ 서울ˑ 대구를 오가며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만 했다. 이 방법은 부산 세관에서도 마찬가지로 밀어 붙이게 됐다. 즉 무조건 제일 윗분을 만나서
사유를 말하고, 다음에 밑에서 올라오는 식 으로 내 나름대로의 방식을 정해서, 빨리 결제를 받고, 통관 업무도 세관원에게 배워서 수백 건 이 되는 서류를 직접 만들어서 해결 했다, 세관원 왈‘이런 기재수입은 많아야 한 두건인데 ,장교님 것은 1년분도 훨씬 더 돼내요“하며 질렸다는 말이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부패한 자유당시절이라 옆에서 서류를 작성하다보면, 이따금 식 업자들의 수표가 호주머니를 왔다 갔다 하는 시절이라, 나는 점심 한번 대접도 못해서 지금 생각하면은 철없이 휘둘렀던 내 행동이 미안스럽기도 하다. 특히 대뜸 직접 찾아간 어느 상공부의 국장님은 계통을 밟으라고 했을 때, 나는 내 명분을 밝히면서 지금은 전쟁 중인 현실을 잊으셨냐고 도로 호통을 치니, 그분은 얼굴을 붉히면서 아무 말 도 안 하고 서기관 과장을 불러서 빨리 도와주라고 하신 그 국장님을 지금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1953년 말부터 휴전이 되고 얼마 안 되서 육사를 서울 태릉(泰陵)으로 옮기는 문제가 논의 됐다고 한다. 나는 부산에서 실험기자재를 운반하기 위해서, 학교 트럭을 타고 진종성(陳鍾聲) 중위와 함께 부산 부두가 로 갔다, 그때가 1954년6월21일이다. 기자재를 전부 진해 화물차로 옮겼다. 결국 기일 내 에 아슬아슬하게 부산항구에서 여기까지 옮기고 나니 한시름 놓였다. 내게는 이번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전쟁으로 보였다.
진해에서 화물 편으로 함께 떠나는 대위 석동호(石東浩) 김교영(金敎榮) 오진덕 (吳鎭德) 홍종하(洪鐘夏)들은, 좋아하는 바둑판을 들고 즐겁게 화물차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잔무 처리로 다시 진해 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이분들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분들은 다 좋은 곳으로 떠나갔구나! 명복을 빈다) 내일이면 나는 진해에서 만2년6개월 만에 서울로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