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도
남원에는 나병환자가 많았다. 이현필 선생이 남원에 오실 때는 떡을 많이 해가지고 떡 담은 그릇을 짊어지고 이선생과 강남순, 강부남씨 등 형제들이 나병자들의 집집을 찾아다녔다. 이현필 선생은 나병자들의 곪아서 진물이 나는 손도 꽉 잡고 악수하며 문안했다. 나병자들은 고맙기도 하나 자기네 손을 잡아주는 일이 너무도 황송해서 “선생님 고생하십니다. 이 병은 다섯 번 뒤집어진답니다.”고 절망스런 말로 한탄했다. 이선생은 “형님! 형님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 병이 났지만 이 죄인은 보이지 않는데 병이 더 심합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떡을 받으려고 준비한 깡통에 채워주며 다녔다.
광주 방림에 계실 때 어느 날은 가난한 여자들이 무등산에 올라가서 땔나무를 해서 무겁게 머리에 잔뜩 이고 휘청거리면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불쌍한 모양을 보았다. 이선생은 그 여자들이 하루 종일 점심도 못 먹고 영양 실조된 지친 몸들이 힘에 겨운 나뭇짐을 이고 가는 모양을 보시고는 측은해서 그들을 불러다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이고 보리쌀도 몇 되씩 떠주어 보냈다. 여자들은 그만 감격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이러냐?” 했다.
이현필 선생의 정신을 따라 제자들도 자주 희사(喜捨)와 구제를 했다. 오북환, 정한나 집사 등이 어느 날은 광주 다리 밑에서 사는 나환자를 찾아가서 가지고 간 고구마도 주고 구제했다. 그 거지 여자와 그의 남편은 전에 면서기 노릇도 하던 분인데 그와 그 어머니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병자와 한 자리에서 기거까지는 차마 못했다. 병자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감격해서 “여러분들은 누구십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찾아 주십니까. 감사합니다. 여기 누가 감도 사다 줘서 먹으라 두고 갔지만 나는 그것도 못 먹습니다. 고구마도 먹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 혼령이라도 이 같은 은공은 잊지 않겠습니다.”하면서 고마워 눈물을 흘렸다.
제자들은 자기네들의 크고 작은 일은 모조리 이현필 선생에게 찾아와 의논하고 지도를 받았다. 이선생이 광주에 계실 때 한번은 김춘일 수녀가 찾아갔다. 선생은 앞뜰에 나와 앉아 클로버의 씨를 훑어 따고 있었다. 한 손에는 조그만 바구니를 들고 무척 감격한 표정이었다. “보시오, 이 생명의 신비를. 하나님의 솜씨를 보시오!” 이선생읜 조그마한 클로버 씨 하나가 결실하는 데도 그렇게 세밀하게 고안하신 하나님의 솜씨의 오묘함에 지금 황홀해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김춘일 수녀로서는 하등 감동을 못 느낄 평범한 일이었다. “참으로 그럴까?”고 이선생의 소녀 같은 감상적 탐미주의(耽美主義)가 우스워 보였다.
그러나 그 후 해가 지나갈수록 이선생이 생명의 신비를 감격해 하시던 심정이 조금씩 이해되는 듯싶었다. 이현필 선생이 자기의 마지막 사기(死期)가 가까이 오는 줄 의식했던 마지막 수양회 때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최고도로 북받쳐 올랐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도 최후가 가까웠을 때에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억제할 수 없을 만큼 불타올라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 : 1)하시던 것과 비슷했다.
이선생은 제자들에게 부축을 받고 간신히 모임에 나오면서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라! 이번에 헤어지게 되면 언제 다시 만날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원내의 나이 많은 어머니들을 기쁘게 해드리라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격식 밖의 춤도 추게 했다.
6.25동란이 지난 직후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 식구들은 광주 도청자리에 임시 거하다가 거기서 옮겨 양림에 있는 외국 선교사들의 빈 주택과 동산 안의 빈 교사들을(후에 신학교로 사용함) 임시 빌려 거처하게 되었다. 그 무렵의 동광원 식구의 수는 백명을 훨씬 넘는 대가족이었다. 그때 한 사람의 식량으로는 하루 쌀 3홉씩 배급되었는데 그것으로는 배가 고팠다. 그때 김준호씨는 이현필선생과 함께 신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했다.
그 해 겨울날 어느 눈이 몹시 퍼붓는 밤 그들 두 사람이 거처하던 온돌방은 생전 불을 때지 않아 뼈저리게 차가웠다. 김준호씨는 그날도 걸식탁발을 하였다. 다 떨어진 헌 누더기 옷을 입고 손에 깡통을 차고 하루 종일 광주 거리로 구걸하고 다니다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지만 하룻밤 따스하게 쉴 구석도 없었다. 아무리 자기가 자원해 나선 수도의 길이라고는 하지만 추운 겨울에도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마련되지 못한데다가 눈 오는 겨울밤 따스한 구석조차도 없이 밤을 지낸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었다.
인생이 너무도 서글펐다. 밖에는 눈이 계속 퍼부어 오는데, 밤은 열시가 지났는데, 그때까지도 자리에 눕지도 않고 묵묵히 무슨 생각에 잠겨 안장 계시던 이현필 선생은 아마 눈 오는 밤이니까 또 불쌍한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고 계신 눈치였다. 어느 시인은 눈오는 소리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 표현했지만 이선생에게는 눈 오는 밤엔 배고픈 겨레들의 서글픈 얼굴들이 자꾸 떠올랐다.
“준호, 오늘밤 이 거리에 가장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네는 가서 그 사람을 찾아 돌봐주고 오너라.” 그 순간 이선생이 꼭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아니지만 일생동안 선생을 곁에 모시는 김준호씨는 말은 없어도 선생의 뜻을 느낀다. 지금 선생의 마음은 제자에게 이렇게 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낮에 김준호 씨는 금동시장 부근 양림다리 밑에서 불쌍한 거지 아이 셋을 찾아 본 일이 있었다. 양림 다리 밑을 중심으로 해서 부근에는 거지가 2백 명 가까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도 이 셋은 가장 불쌍한 거지였다. 김준호씨가 찾아가자 그들은 추위 속에서 양철 동이에 나무 조각을 넣어 불을 피우고 둘러 앉아 쪼이고 있었다. 김준호씨도 틈에 끼어 함께 앉아 불을 조였다.
그때 문득 보니 저 편 뒷 구석에 병들어 앓고 누워 있는 청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불도 못 쪼이고 아마 임종이 가까운 듯했다. 그 젊은 거지는 추운 오늘밤에 거기서 그대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서 김준호씨는 깊은 침묵에 잠겨 있는 이현필 선생에게 다녀온 보고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다. “오늘 종일 다니며 본 사람들 중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양림다리밑에 그 거지였습니다. 아마 오늘밤 얼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추위 속에 아무 덮을 것도 없었습니다.” 했다.
추운 겨울을 지나는 것이지만 이선생의 요도 없었고, 다만 선생의 몫의 이불 한 자리가 개어서 선생 곁에 있었다. 김준호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선생의 곁에 있던 이불을 김준호씨 쪽으로 밀어놓으면서 “이것을 가져다주고 오시오” 했다. 무심코 한 이야기였지만, 이선생의 결단을 보고는 김준호씨는 뉘우쳤다. “내가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겨울이라도 사실 이선생의 몸차림은 처참했다. 조끼도 없는 맨 저고리에 얇은 바지를 입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 요도 없이 앉아 추위에 떨고 있으면서도 김준호씨의 말을 듣자 마자 지체 없이 자기 이불을 내놓았다. 한 벌 밖에 없는 선생의 이불인데 어떻게 거지를 준단 말인가. 눈은 계속 퍼부어 오는데 그 이불을 남에게 주고 나면 선생은 이 겨울에 어떻게 지낸단 말인가. 그 겨울을 이불도 없이 선생이 떨며 지내게 될 일을 생각하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수도사의 서원은 순명(順命)이다. 한 번 내린 명령이니 불순종할 수 없었다.
김준호씨는 할 수 없이 이불을 안고 한쪽 팔목에는 구걸하는 깡통을 걸고 선생의 방을 물러나와 눈 내리는 밤길을 걸었다. 양림동 다리 쪽을 향해 걸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걸음이라 얼마 걸어가다가 눈길에 미끄러졌다. 이불을 안은 채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고 나니 왈칵 부아가 터져 나왔다.
사실 김준호씨는 그날 점심도 저녁도 굶고 있었다. “우리 선생은 남의 속도 몰라. 나보고 어찌 이런 일까지 하라는 건가.” 선생이 시키는 일은 언제나 상식을 넘는 격식 밖의 일이어서 제자에게는 힘들고 무거운 고역이었다. 눈이 너무 쌓여 길을 온통 메워 버려서 양림동 다리까지 찾아가려면 아득했다. 더 이상 가기가 싫어진 김준호씨는 길가에 있는 잘 아는 박공의 집에 들어가, “박 집사님, 나 이불을 여기 맡겼다가 내일 아침 가져가겠습니다.” 하고는 그 집에 이불을 맡겨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숙소로 돌아왔다.
선생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나 그 밤을 지나가기가 양심이 괴로웠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박공의 집에 달려가 이불을 찾아 안고 거지 굴로 찾아갔다. 걸어가면서 속으로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이불을 갖다 주고 어쩌고 하노라면 또 아침은 굶게 생겼구나.’ 했다. 전날의 거지 굴을 찾아갔더니 병든 젊은 거지 곁에 건장하여 보이는 거지 두 사람이 있다가, 김준호씨가 가지고 간 이불을 받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대신 인사하면서 그때까지 아직 채 죽지 않고 있는 병든 거지에게 그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
그 곁에는 어제 함께 불을 쪼이던 거지 아이들이 서로 구면 사이라고 호의를 베풀며 김준호씨에게 자기네 깡통을 내밀어 그 속의 먹다 남은 밥을 먹어라 권했다. 배고플 때 군침이 도는 하얀 백반이다. ‘이렇게 감사할 일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쌀밥을 준비해주셨는데 나는 괜히 불평만 했구나.’ 김준호씨는 감사하면서 사양하지 않고 먹었다.
거지에게서 얻어먹는 신세가 됐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감사했다. 다음날도 김준호씨는 또 그 다리 밑을 찾아갔다. 병든 거지가 지난밤은 그 이불을 덮고 따뜻이 잤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가 보니 그 거지는 반쪽이 없는 낡은 미군 담요를 덮고 있고, 어제의 이불은 간 데 온 데 없었다. 어제 곁에서 시중하는 듯하던 건장한 두 거지는 없었다. 그들이 이불을 빼앗아 가지고 가버린 것이다.
병든 거지를 위로하여 여러 가지를 물으니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집에 돌아와 이현필 선생에게 그동안의 전후 사정을 다 말했더니 이선생도 관심을 가져 다시 가보라고 했다. 며칠 지나 다시 그 다리 밑에 가 보았더니 그때는 거기 아무도 없었다. 그의 생사 여부가 염려되어 김준호씨는 사방으로 그의 행방을 찾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