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과 천곡의 우정
김 광 수
원형상源形象의 화가 일랑一浪은 나와 중학교 동창으로 일찍이 미술에 꿈을 안고 뜻을 같이한 사이다. 그러나 나는 주위의 만류로 다른 길을 걷다가 공직에서 정년 하였지만 그와의 우정은 반세기를 통해 변함이 없다.
나는 ‘효’문화의 계도啓導를 위한 일과 더불어 사학史學쪽에서, 일랑은 명문대 교수로 정년하고 지금은 예술원 회원과 화단의 원로가 아닌가! 우리는 서로 다른 생활 속에서도 틈이 나면 언제나 만나왔으니 남다른 데가 있다.
지난 해 어느 날이다. 독도문화심기, 가족해체, 노인문제 등을 이야기하며 ‘효’가 점점 잊혀가는 것을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세월은 흐르고 나만 남는다는’.는 어느 시詩 한 구절을 이야기 하다가 그는 문득 효심과 우정에 얽힌 이야기로 ‘둔촌遁村과 천곡泉谷’의 사연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천곡은 영천永川최씨요, 둔촌은 광주廣州이씨다. 여말麗末의 문인으로 둘 다
천성이 강직하고 지조가 굳어 벼슬을 버리고 평생 독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낸 학자들이다.
일랑의 선조이기도 한 둔촌의 본명은 집集이요, 충목왕 때 과거급제하고 정몽주, 이색, 이승인 등과 교유交遊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역신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부친李唐과 함께 영천에 사는 천곡崔允道을 찾아가게 되었다. 다행이 친구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신돈이 주살誅殺된 4년 뒤 개경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다.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개경에서 영천까지 남의 눈을 피하여 밤길을 걸었다. 숱한 고생 끝에 친구 집에 당도한 둔촌은 이제 살았구나하고 사랑채 툇마루에 기대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천곡의 생일인지라 많은 이웃 주민들이 모여 주연酒宴이 한창일 때 소식을 들은 천곡이 나왔다. 구세주로 알았던 친구가 반기기는커녕 큰소리로 ‘망하려거든 혼자만 망할 것이지 어찌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禍는 싣고 오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문전 박대다.
둔촌은 하는 수 없이 노부老父를 업고 정처 없이 길을 재촉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곡의 진심이 아닌 것으로 믿고 싶었다. 포박 령이 내린 당신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이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천곡은 천곡대로 잔치가 끝나고 날이 어둡기를 기다린 후 둔촌이 멀리 가지는 못하였을 것이라 믿고 뒤를 더듬었다. 마침내 둔촌과 천곡이 만나 서로 끌어안고 오랜만에 회포를 푼 뒤, 밤이 깊은 뒤에야 천곡의 집 다락방에
숨게 된다. 이는 하늘과 땅과 세 사람만이 알 뿐이다.
이렇게 하여 4년간에 걸친 피신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그때가 공민왕 17년戊申1368년이다.
천곡은 가족에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하자니 그 또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과 반찬을 고봉으로 담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만에 하나 발각되는 날이면 양가 모두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고도 남는 일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긴 세월, 날마다 고봉으로 담는 밥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주인의 식욕이 놀라워 하루는 여종이 몰래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생각다 못해 안방마님께 고하였으니 그 말이 결국 천곡의 귀에도 들어갔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함구령이 내린다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엄하게 다스렸지만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
이렇듯 주인의 심각한 입장을 헤아린 여종燕娥은 마침내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부인 역시 혀를 잘라 벙어리로 살았다고 한다.
그 후 마침내 영천에도 수색이 시작되고 천곡의 집에도 들어 닥쳤지만 당초 둔촌 부자를 쫒아버린 사정과 그 정황을 목격한 동리 사람들의 증언으로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해가 바뀐 어느 날 또 큰 일이 일어났다.
둔촌이 친상親喪을 당한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처지에서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절차는 고사하고 장례를 비밀리에 치러야 했다. 천곡은 자기수의 壽衣를 내다가 예禮에 어긋남이 없이 받들고 모부인母夫人의 가묘에 장사를 지냈다. 광주이씨 시조始祖묘가 바로 그 묘인 것이다. 공양왕 20년, 신돈이 실각돼 유배 되었다가 죽음을 당한 뒤, 장장 4년여에 걸친 피신생활이 끝이 났다. 둔촌이 떠날 때 천곡과의 아쉬움을 전별餞別의 시로 옮겨 정표로 전한 것이 가훈家訓처럼 대를 이어 자손에게 전래되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연유가 사후死後 육백년이 지났건만 시종여일하게 양가 양가 후손들이 매년10월에 선영에서 묘제를 지내는 미덕美德으로 남아있다. 또한 충비忠婢연아의 제사도 곁 드린다고 한다. 이렇듯 효를 중심, 우의와 의리, 충성과 부도婦道의 지조어린 선대들의 훈훈한 이야기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숭모崇慕의 정으로 감동케 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교육이 되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 일랑이 그려준 작은 그림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숲속에 새가 있고 두 마리의 사슴, 달을 보고, 풀을 뜯는 정겨운 모습이다. 가대家代로부터 효행을 제일로 삼아온 일랑의 정신적 의지가 담긴 것 같아 새삼 돋보인다.
싱가포르 가정과 우리의 효 문화
싱가포르 사회에서 가정은 높은 건물의 벽돌에 비유된다. 가정의 안정을 최우선시하는 이유로 가정은 사회 안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사회 안정의 기초를 보장한다고 했다. 또 싱가포르 정부는 가정의 안정이 겉과 속을 모두 치유하는 이중적인 의의가 있으며 싱가포르 미래의 전망과 운명에 직접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민 한 사람 한사람이 가정에서 그 본분을 지키고 책임을 다한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분명 본분을 다하고 법을 잘 지키는 좋은 시민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삼세동당三世同堂은 조부모, 부모, 아들 3대가 한집에서 사는 것을 말하며 조부모와 부모는 자기의 말과 행동으로 전통문화의 가치를 대대로 전해지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정교육은 학교나 일반사회의 그 어떤 교육에서도 대처할 수 없다고 믿고 정부도 삼세동당가정의 존재를 매우 중요시한다.
국부로 존경받는 이콴유李光耀 전임총리는 재임시에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의 공고(흔들림 없는)와 단결은 화교역사가 5천년이 지나도록 쇠퇴하지 않게 했다. 현대화 과정에서 우리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삼세동당’ 가정이 분열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유연한 대처를 주문하고 사회통합을 주창했다.
‘삼세동당’ 제도는 경제에도 많은 이득을 가져오고 있다. 첫째. 토지의 절략과 심각한 주택문제의 완화, 국가가 노인을 부양하는 재정적인 지출을 줄이고, 둘째. 노인이 주축인 유가사회의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을 지키고 부모에 대한 부양과 존중이다. 만약 ‘효’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생존 체계가 약해지며 문명생활이 조잡하게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 부모를 박대하면 나중에 자기도 늙어 똑같이 박대받는다는 결과를 알고 있다.
싱가포르 지도자들이나 학자들 대부분도 ‘효’를 윤리의 출발점으로 여기고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중 가장 으뜸으로 보존해야 할 것으로 믿고 제시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인구 450만으로 고속성장을 이어온 도시국가다. 이곳에서도 서양 문물과 개인주의 팽배로 가정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노인과 자녀들을 포기하는 현상이 늘어나며 손자세대가 크게 약화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서 싱가포르 정부는 가정을 공고히 하고 행복을 촉진하는 많은 논의와 조치를 취해왔다. 3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부모부양법’의 적용이나 가정준칙의 제시 등으로 부모와 어른들에게 친절한 칭호사용을 하게하였으며 매년 경로주간을 설정, 노인을 존중하는 좋은 사회분위기를 창출해 내고 있다. 또 청소년들에게는 부단히 효도를 배우게 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4월 국제컨설팅 업체 ECA인터네셔널에서는 세계 257개 도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년 연속 싱가포르가 제일 살기 좋은 도시 1위를 지켜오고 특히 치안과 보건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무었을 말함 일까?
지난해 우리 한국에 특기할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효행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숱한 어려움과 시간이 걸렸지만 세계 초유의 ‘효행장려법’이 금년 8월 4일부터 시행되었다. 이법은 효행을 장려하고 교육을 통해 ‘효’를 실천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어 사회적 기본 틀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무감각이고 관심 밖의 일이다. 효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사회가 안정되며 나라가 바로 선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정신없이 달려왔다. 산업화 도시화로 가족해체를 불러왔고 개인주의 팽배로 ‘가족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는 우리 현실이다. 개탄하는 지경에 심히 우려 되지만 천만 다행하게 ‘효행장려법’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경제위기라고 한다. 우리국민 모두가 뜻을 모우고 힘을 합하여 가정을 살려나가야 한다. 효하는 마음을 살리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도덕성 회복, 기초윤리 질서운동이 절실하다. 다 같이 한 마음 한뜻으로 행동하는 실천만 남았음이다.
우리는 누구나 정서적으로 효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효’의 불씨를 발현시켜 나가면된다. ‘효’가살면 가정과 나라가 산다는 국민적 효운동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실천하는 행동이다.
싱가포르의 ‘삼세동당’가정을 지키듯 우리도 아름다운전통 현실에 맞는 ‘효’문화를 승화시켜 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자. 효는 일방적이 아니고 쌍방개념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울어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아무리 좋고 훌륭한 법아나 제도가 있어도 교육과 운영에 좌우 된다. 가장 한국적이고 한국인다운 키워드 ‘효’를 우리가정과 사회의 최고 가치로 살리고 키워 나가자. 그리고 국가적인 브랜드로 내 세워 세계화 하는데 힘을 모으는 오늘이 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