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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문화비평연구회 (090622)
폴 비릴리오,『전쟁과 영화』,‘5장 영화관 페른 안드라’ 요약
발제 이은실
1916년 미국이 마침내 전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을 때, 할리우드의 모든 사람들은 애국적 망상에 사로잡혔다고 제시 라스키1)는 말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영화적 픽션에서 전쟁의 픽션으로 이동했다. 세실 드 밀2)은 주저하지 않고 즉석에서 군 지휘관으로 나섰다. 스튜디오 분견대는 '라스키 국방군'을 형성하였다. 목요일 저녁마다 소도구 창고의 엽총을 들고 의상실의 유니폼을 입은 스튜디오 식구들의 군악대를 선두로 할리우드 거리를 행진하였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와 채플린이 거대한 군중을 상대로 연설하였는데, 당시에 그저 메가폰 외에는 대중 연설의 어떠한 수단도 없었으므로 군중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성 영화와 정치인들의 침묵에 익숙해져 있던 군중에게 말의 부재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우들의 무언의 몸짓에 매료되었던 군중은 자신의 달러를 기꺼이 전쟁 기금으로 내놓았다.
<십계>3)라는 성경 영화를 찍을 당시의 세실 드 밀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국 세실 드 밀 스스로가 유대민족을 이끄는 신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측근과 특히 익명의 엑스트라군-그는 이들의 삶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을 즐겼다-을 거의 손아귀에 쥐고 있듯이 독재를 휘둘렀는데, 이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신적인 태도, 즉 일종의 카리스마적인 완벽함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같은 시기에, 서유럽과 소련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과 혁명의 지도자들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다. 그들은 역사와 다른 것들의 안내자로서, 기적적인 영화감독 및 배우 세대와 똑같은 카리스마 효과를 대중에 대해 지니게 된다. 이들은 '초정치적 시대'를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실재 권력은 무기의 병참술과 이미지 및 음향의 병참술 사이에서 전쟁 상황실과 선전 집무실 사이에서 분유된다. 무솔리니는 "선전은 나의 최상의 무기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로사비타는 당수를 다음과 묘사했다. "보라, 시저여! 너의 임무는 완수되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능을 지니고 있노라. '그의 의지는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가 지니고 있던 초자연적인 것, 신적인 것, 기적적인 것을 지니고 있노라. (<<시저의 부활:선택된 자>>, 1936에서 인용)마찬가지로, 히틀러에게 사적으로 자신의 위대한 역사적 모델이 누구인지 물어보았을 때, 그는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비스마르크라고 답하지 않고, 뜻밖에 모세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 기적적인 독재자들이 이미 통치하기를 멈추고 ‘이들도 역시 연출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러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가을, 자동차로 뮌헨을 가로지르면서, 히틀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관 '페른 안드라'4)의 이름이 바뀐 것을 알고는 미친 듯이 분노하였다.
영화의 마법 의식을 기념하여 서둘러 가는 군중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 히틀러는 1938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중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는 극장과 영화관 밖에서의 환상이 필요하다.”
히틀러는 일상적 리얼리즘을 위반했다. 그리고 연출, 트릭, 무대의 쪽문과 회전 무대의 메커니즘, 그리고 특히 조명과 영사기 조작의 여러 가지 다른 가능성에 대한 그의 뛰어난 기술적 지식을 떠올리지 않고서 그의 범죄의 본성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히틀러의 장관이었던 슈페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히틀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위대한 정치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중략) 심지어 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도 그는 무기의 조작 성능보다 심리학적 효력을 먼저 생각했다. (특히, 급강하 폭격기 스투카의 사이렌 소리와 A4미사일 탄두5)의 발명은 그의 공적이다.
마찬가지로, 작가 제이 도블린에 따르면, 히틀러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상표 창조자”였다. 예컨대 나치의 문장인 역만자형은 강력한 감정적 함축을 끌어내었다. 바이트 할란 감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한 자가 히틀러였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 되었다.”(“효과가 큰 깃발과 휘장은 매우 많은 경우에 어떤 운동에 대한 관심에 최초의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동안에 나 자신이 여러모로 시도하며 마지막 모양을 그렸던 하켄크로이츠는 본래 게르만인이 청동기 시대부터 썼던 행운의 상징이다. 붉은 바탕에 횐 원을 남기고 그 한가운데에 검은 하켄크로이츠를 그린 깃발이었다. 오랫동안 시도한 뒤에 나는 깃발의 크기와 횐 원의 크기, 마찬가지로 하켄크로이츠의 모양과 굵기의 일정한 비율을 정했다. … 우리는 우리의 깃발 속에서 우리의 강령을 본다. 우리는 붉은 색 속에서 운동의 사회적 사상을, 흰색 속에서 국가주의적 사상을, 하켄크로이츠 속에서 아리아 인종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사명을, 그리고 동시에 그 자체가 영원히 반유태주의였고 또 반유태주의적일 창조적인 활동의 사상의 승리를 본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서 영화감독들과 연예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루스벨트가 미국의 산업적 생산 기계를 재가동시키기 위해 뉴딜정책과 더불어 라디오와 영화에 기대어 ‘국내 시장 전쟁’을 정비하는 동안, 히틀러는 초대작으로서 전쟁을 재개하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수백만 명의 독일 실업자들을 무대에 올린다. 극한에 몰린 독일 인민과 그 지도자들은 이미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며, 선도, 악도, 시간도, 공간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이상 기준이 될 수 없는” (괴벨스) 세계로 이동한다.
1934년 히틀러는 <의지의 승리>의 촬영을 위해 젊은 감독 리펜슈탈에게 도움을 청한다. 뉘른베르크에서 1주일 동안 개회되는 국가-사회주의당 대회를 찍고, 전례 없는 규모의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나치 신화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아모스 포겔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거대한 기획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중략) 한 번도 연출된 적이 없었던 최초의 가장 중요한 ‘진짜 다큐멘터리’의 제작을 낳았다. (중략) 이 대대적인 대회가 영화의 시작에서 조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완벽한 혼돈 상태에 빠진다.
다른 한 편으로, 히틀러는 건축가 슈페어에게 이 정치적 초대작의 ‘실재적’ 무대 장치를 세울 임무를 맡겼다. 히틀러가 그에게 뉘른베르크의 당 대회장인 체펠린펠트의 거대한 공간 구성의 컨셉트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을 때, 그는 원안의 돌기둥을, 하늘을 향하는 150개의 영사기가 내뿜는 빛의 기둥으로 대체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관중에세 천장까지의 높이가 6000미터나 되는 다주식 상연 홀에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마침내 유럽에서 전격전의 플래시가 터졌을 때도, 독일의 스튜디오에서는 애정 영화를 계속 찍었다. 나치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 관객은 이러한 영화에 열광했으며, 이 모든 것은 ‘강한 민중적 테두리’를 갖는 리얼리즘 영화를 원했던 괴벨스6)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뮤지컬 코미디, 향토 영화(들판의 삶과 단순하고 억센 독일 남성을 찬양하는 영화), 요정극7) 등도 늘어났다.
권력은 이를 감시하였다. 독일군은 자신의 각 부대마다 촬영 기사를 한 명씩 두었으며, 이들은 각 연대마다 영화-군대-선전의 합동 부서인 선전 기동대 즉 정보를 즉시 재분류하고 취급할 임무를 띤 이미지-전술-시나리오의 정정 단위를 보유하게 된다.
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1943년 1월 14∼26일 북아프리카 프랑스령(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개최된 미국 대통령 D.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W.처칠의 제3차 연합국 전쟁지도회의)의 막바지에, 곧 그를 죽음으로 이끌 질병으로 쇠약해진 노인 루즈벨트는 부주의하게도 전면전을 선포한다.
1942~3년의 끔찍한 겨울 동안에 파울수의 제6사단은 스탈린그란드에서 포위되어 괴멸된다. 그것은 소련의 대반격의 시초를 표시하는 결정적 승리였다. 1943년 말, 베를린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그때부터 다수의 독일군 지휘관들은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직접적인 승리의 횟수가 줄어들자 여론에 대해 히틀러는 분쟁 초기에 획득한 승리에 관한 플래시백을 제공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바이트 할란 감독에게 3년 전 나르비크에서의 독일군과 연합군의 격렬한 전투에 관한 역사적 영화를 노르웨이에서 찍을 것을 명령한다. 나르비크는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쓰라린 패배와 위신 실추의 상징이었는데, 이제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다시금 가장 주목할 만한 타깃이 되었다. 결국 이번에는 결말이 승리로 장식될 리메이크에 그들이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독일 사병들 또한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바이트 할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영화를 위해 죽는 것보다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중략) 총통 자신이 과장법을 써가면서 명령했던 프로젝트는 세인들에게서 잊혀졌다.
얼마 후, 히틀러는 <콜버그> 촬영을 명령한다. 그 영화는 1943년 10월 28일 크랭크인 되었다. 독일군이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는데도, 총통은 다시 한 번 병력을 영화 감독들에게 완전히 일임할 것을 강요한다. 이는 ‘군사적 명령’이었다. 폭격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콜버그 시의 구역들은 베를린 인근에 다시 세워졌는데, 그 때 도시는 실제로도 폭탄 세례 속에서 무너져 가고 있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수로를 통해 강을 우회시키고 물 속에 숨겨진 폭발물을 원격 전기 조종 시스템을 통해 폭파함으로써 홍수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1945년 1월, 영화가 상영 준비를 마쳤을 때, 베를린의 개봉관은 이미 폐허 더미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도 폭탄 세례 속에서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는 독일 제국 총통 관정 지하 벙커의 카메라 옵스큐라8) 안에서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 지옥’에서 떠나게 된다.
증언에 다르면, 그의 마지막 나날에 히틀러는 건축 구상을 다시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어느 것에도 개의치 않으면서, 그는 뤼미에르 형제9)의 벽처럼 다시 솟아오르는 ‘새로운 베를린’의 설계도를 정교하게 만들어갔다.
우리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산업적 전쟁과 산업적 영화 간의 상호 침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수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장 진지한 전쟁 영화들이 종종 가장 희극적인 영화들이었다는 것과, 군사 기술 자체도 20세기초 우스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규모 전투의 ‘객관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카메라-눈이 더 이상 장군이나 무대 감독의 눈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인간의 눈과 두뇌가 감지할 수 있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사실과 효과들을 기록하고 분석하여 이를 다시 (전장의) 무대 장치 속에 기입할 수 있는 모니터의 눈이 되어야 한다.
이 경우 군사 결정권자의 시선은 영속적인 플래시를 통해 시간과 공간 속으로 확장되면서 단일한 시선의 복수화를 시도한다. 이 플래시들은 여기와 저기, 어제와 오늘,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곳과 존재하지 않는 곳을 연결한다. 연대기적 의미의 이와 같은 극소화는 군사적 기술의 직접적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애초부터 ‘사건들이 언제나 이론적 시간 속에서 전개된다.’ 나중에 영화에서도 보여지게 되는 것처럼 일어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유일한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상관적이면서 우연한 뒤틀림에 의해 정렬된다. 여기서 억압적인 대응 능력은 항상 예측 능력에 의존한다.
1) 영화 사업가로 자신이 소유한 라스키사를 아돌프 주커의 페이머스 플레이어스와 결합해 페이머스 플레이어-라스키사를 만들었다.
2) 그가 만든 무성영화 시대 스펙터클 사극의 거대한 스케일은 할리우드영화의 전형이 되었다. 1923년에 만든 <십계 The Ten Command-ments>는 스펙터클 성서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3) 주로 성경 속의 에피소드를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에 옮겨놓는 역사를 담당한 그의 연출력은 당시로서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가령, <십계>에서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가르는 초자연적 기적이나 [삼손과 데릴라]에서 우상의 신전 기둥을 무너뜨리는 삼손의 기적은 그 자체가 매우 스펙타클하며 효과적이었다. 이런 성경의 소재를 영화화함으로써 감독으로서 장수했으며, 또한 지금까지 추앙되고 있다.
4) 루돌프 헤스의 증언. 페른 안드라는 히틀러처럼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 여배우였다. 이 배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영화관은 나중에 아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5) A4)또는 v2로켓은 최초의 음속 탄도미사일(ballistic missile)로써 탄도미사일의 초기 모델이다. 목표물 오차가 17km에 달해 많은 시설물이 파괴되고 사망자를 발생시킨다. 전쟁기간중 약 5,000대가 만들어졌으며 이중 500대는 시험용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영국과 벨기에로 발사되었다. 이 연구를 이끈 과학자는 '폰 브라운 박사(Wernher von Braun)'이며 독일육군에 고용되어 페네문데의 독일로켓프로그램 연구소를 이끈다.
6) 독일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 국회의원, 당 선전부장으로 새 선전수단 구사, 교묘한 선동정치로, 1930년대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국민계발선전장관 등으로 문화면을 통제, 국민을 전쟁에 동원했다.
7) 초자연적인 권능을 지닌 가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주술과 경이로움·볼거리들을 제공하는 연극.
8) 카메라 옵스큐라(라틴어: camera obscura, ‘빛을 가린 방’이란 뜻)는 그림 등을 그리기 위해 만든 광학 장치로, 사진술의 전신이다.
9) 프랑스의 영화 카메라 겸 영사기 발명가 형제.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 ·흥행 ·배급 등 현재의 영화제작 보급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이다. 그러나 실사영화가 대중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흥행이 벽에 부딪치자 영화에서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