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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소식란 스크랩 이제학이 걸어온 길
장영환 추천 0 조회 274 10.05.24 13:10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이제학이 걸어온 길

 

이제학 그는 일명 '동네를 지켜주는 할아버지, 할머니느티나무'라고 불리는 두 그루의 아름드리 큰 정자나무 바로 밑에 있는 시골농가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가산(佳山)리 41번지. 담양출신인 그는 소꼴을 베어서 소죽을 만들어 소를 먹이고, 집에서 가내수공업으로 하고 있던 바구니(죽제품)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파는 일을 도우면서 담양동초등학교와 담양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올라온다. 함께 살던 노부모는 정부에서 간척지를 막아 놓고 거기에서 일정기간 농사를 지으면서 세를 납부하면 논을 준다는 말만 믿고 고흥으로 이사를 한다. 이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을 졸업하고 상경하여 공장에 다니고 있던 형들이 ‘제학이만은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하여 서울로 올라오게 한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당시 정부 당국의 ‘서울인구 분산정책에 따라 가족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오지 않은 경우 정규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하는 정책 탓에 양평동에 있는 국제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제학이 네가 전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주일에 반을 실험에(전자과) 매달리고는 대학에 진학하기 힘들거다”라는 교생실습 나온 아리따운 여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서강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간다.

 

 어렵게 대학에 들어온 그는 광주민중항쟁을 처참하게 총과 군화발로

진압하고 피로써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울 것인지,

현실과 타협하면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꿈인 국어선생님의 길을 갈 것인지 고민하다 결국 불의에 항거하기로 결심하고 학생 운동권에 뛰어든다. 대학교 2, 3학년 동안 그는 데모대의 맨 선두에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싸웠고, 신촌교회 대학부학생회장을 하면서 노동자야학에도 관여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서강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면서 전국학생연맹 건설준비위원회 서부지구 의장을 맡아 전국학생운동의 구심점 형성에 앞장섰다. 1986년 당시 김세진, 이재오 열사들의 분신을 비롯하여 극한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서울지역의 거의 모든 학생회장들이 잡혀갔다.

 

 

 

 

 

하지만 그는 안기부, 보안사, 마포?화곡?용산경찰서 전담반형사들의 현상금과

포상에 혈안이 된 추적 따돌리며, 끝까지살아남았다.

 1987년 2월 7일 그는 전학련 건준위 학생대표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극악한 탄압에 희생된 故박종철열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독재정권 퇴진을 위한 범국민궐기대회를 조직했다. 당일 그는 명동성당에 2중 3중으로 철통같이 배치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백만 학도의 뜻을 모아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날 대회를 촉발로 하여 결국 故박종철열사 고문치사사건이 전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었고, 결국 전모가 드러나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다.

 

학생운동을 마감한 그는 당시 가장 소외받고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실현시키는데 일조하고자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인

천지역과 안양지역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실현을 보장할 수 있는 노동조합건설에 앞장서서 1989년에는 안양지역금속노조 초대사무국장에 선출된다.

 

또한 그는 1989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및 노조건설을 위한 노동자 대투쟁 당시 지역노조 분회인 거성정밀 노조건설 파업투쟁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판사는 ’파업을 주도한 혐의가 중죄에 해당하나 64세 된 할아버지까지 파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하였던 것으로 보아 근로자들이 주장하는 임금인상 및 노조건설에 대한 타당성이 인정되므로 집행유예에 처한다‘고 판시했다.

1990년 6월 3일 그는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동지이자 세상에서 유일한 아들래미 원영이의 엄마인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김수영씨와 결혼한다. 결혼한 그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노동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 아파트 세차를 하고 노동조합에 나가 조합일을 수행한다. ‘92년 그는 노동운동도 활성화되어 노동자들의 권익도 많이 신장되었고, 학생운동?노동운동과정에서 수배와 파업투쟁, 구속 등을 통하여 몸이 많이 상해 좀 쉬기로 결심하고 노동운동을 정리한다.

 

 

그는 학생회장을 하면서 제적되는데 1993년 재입학이 허용되자 미루어왔던 학업을 마무리하고자 복교하여 1994년 11년 만에 서강대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후 그는 서민의 삶의 모양을 결정해버리는 정치가 올바로 서지 않는다면 사회의 각 부분이 올바르게 정착될 수 없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정치를 배우기 위해 1998년 서강대학교 교수시절 인연을 맺었던 경기도지사 후보 손학규 선거대책본부의 대변인실 지원팀장을 맡아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손학규 후보가 패배하자 그는 국제화 시대 국제적인 안목과 경제적인 현실감각을 익히기 위해 사업을 구상하고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6개월간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양천구에 ‘캐나다센터’라는 유학센터를 만들고 아이들의 영어교육 여건이 좋은 캐나다로 조기유학을 비롯한 유학 사업에 매진하여 센터지부를 두는 등 사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이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손학규 지사후보의 요청으로 경기도지사 재차도전에 합류하여 당선에 큰 역할을 하고 이후 경기문화재단의 기획조정실장과 대표이사 권한대행을 하면서 경기도의 굵직굵직한 사업 파주LCD산업단지 조성, 영어마을, 세계평화축전을 기획추진하고 정무특보로서의 역할을 맡아한다.

 

이후 손학규 대선후보와 함께 선진평화연대, 동아시아 미래재단을 만들고 선진평화연대

기획운영실장, 동아시아미래재단 사무처장을 거치면서 손학규 대선캠프를 진두지휘하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함께 이명박 독재정권에 맞서 견제야당을 키워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이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민주당의 불모지 양천(갑)에 출사표를 던지고 제18대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한다.

 제18대 총선에서 그는 거물 원희룡, 강삼재와 붙어 예상을 깨고 많은 득표를 하여

5선의 강삼재를 꺾고 2등을 하여 양천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는 또한 21세기의 정치는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가 아닌 ‘생활정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연세대에서 국민들의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공부하여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고, 경기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지금은 민주당 양천(갑) 지역위원장으로서 지역구 활동을 하면서

경기대학교와 용인대학교에서 대학원생과 대학생들에게 후학 양성과 학문적 도량을 넓히기 위해

 행정학 강의를 하면서 절치부심 내공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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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5.25 09:53

    첫댓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동문소식을 전해주어 고마우이~~~ 이제학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국제인었던거는 오늘 첨 알았네.
    많은 내공을 쌓아 훗날 좋은 정치인이 되길...

  • 10.05.25 10:03

    원문보기 눌러 들어가보니 양천구청장후보던데 선전하고 당선되었으면 좋겠네. 친구들아 우리 마음으로라마 응원해주자

  • 11.08.27 15:35

    박수를 보냅니다 그정의감 뜻이있으면 길이있는法 간절이 원하며 이루어지리라 하였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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