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적으로 시조는 정형으로서의 규칙과 질서를 자기 안에 함유할 수밖에 없는 전통적 서정 양식이다. 이러한 시조가 자본주의 사회의 분망하고 다잡한 일상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정신, 즉 자유와 해방의 정신과 다소간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조를 가리켜 조선시대 사대부 계급 중심의 서정 양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이에서 기인한다. 실제로도 시조를 이미 시효를 다한 과거의 서정 장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시조가 이처럼 그 형식적인 면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내포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는 하다. 현금의 시조가 자유시와 달리 독자 일반으로부터 얼마간 소외되어 있는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구체적인 현실과 견주어볼 때 시조라는 정형율이 얼마간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격렬한 활기, 즉 자유의 정신과 해방의 정신을 담아내기에는 아무래도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필자의 이러한 지적은 한갓 단견일 수도 있다. 최근에 들어 매우 적극적으로 다양한 형식 실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시조이기 때문이다. 다소간의 한계를 갖기는 하지만 근간에 발표되고 있는 시조는 거의 자유시와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아무리 형식 실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몇 개의 유형으로 대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시조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시조가 붕어빵처럼 고정된 틀에 찍어내는 낡은 형식을 답습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시조가 그만큼 활기와 생기를 되찾고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시조는 아직도 도처에서 상당한 정도로 씌어지고 읽혀지고 있다. 서정 장르로서 중심을 상실한 것은 분명하지만 근년에 들수록 더욱 설득력 있는 자기 갱신의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시조이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이 오늘의 시조가 보여주고 있는 바로 이러한 점이다. 시조가 여전히 계속해서 씌어지고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오늘의 시대정신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조라는 서정 양식이 조선시대 사대부 계급의 예술의식, 심미의식에 기초하여 보편화된 것은 분명하지만 단지 거기서 그치고 있지는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다.
하지만 그와 관련하여 필자는 아직 이렇다 할 설득력이 있는 논리를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김용범의 시조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만 지금으로서는 부르주아 계급 중심의 오늘의 민주사회가 조선조 사대부 계급 중심의 봉건사회와 적잖은 부분에서 겹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볼 따름이다. 사대부 계급 중심의 조선조 봉건사회가 귀족, 기사, 승려 계급 중심의 서구 봉건사회와 그 성격과 실제의 면에서 많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어찌 보면 조선조 사대부 계급 중심의 봉건 사회는 오히려 서구 부르주아 계급 중심의 근대 사회와 상당 부분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우리 민족이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민주주의를 신장시켜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이들 계급간의 상호 유사성 때문에 현금에 이르러서도 시조라는 정형 양식이 계속해서 창작되고, 향유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문학과 예술의 제반 양식을 토대(물질)의 변화에 상응하는 상부구조(정신)의 일부로 파악하는 데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논의는 지극히 도식적인 계급 환원적인 결론에 그치고 말 수도 있다. 이러한 비판과 반성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시절가조(時節歌調)로서 시조 자체가 함유하고 있는 형식적 탄력성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데 근거한다. 일단은 시조 자체가 항상 자기 형식의 최소한의 근거를 제외하고서는 앞장서서 변화를 선도해 왔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시조는 그 중심을 잃지 않는 한 언제나 다양한 형식실험을 거듭해온 전통적 서정 장르인 것이다.
오늘의 시조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박현덕의 경우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평시조의 '3장 6구'라는 기본적인 틀로부터 최대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고 있는 것이 그이다. 이러한 지적이 가능한 것은 그의 시가 시조의 기본 질서와 규칙을 감싸안는 중에도 언제나 제반 형식실험들과 다양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노력이 단지 형식의 경우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용의 면에서도, 다시 말해 세계관과 인식의 면에서도 자기 나름의 고군분투(孤軍奮鬪)를 자청하고 있는 것이 그이다. 음풍농월이라는 비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시조가 본래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박현덕의 이러한 노력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만 생각하면 박현덕의 시조는 일상의 자유시와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작품을 읽는 맛도 일상의 자유시를 읽는 맛과 별다른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본고에서 그의 시조를 서정시 일반의 독법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이에서 기인한다.
2.
박현덕의 시조는 그것이 본래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대의 노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매우 충실하다. 이는 곧 그가 자신의 시조를 시대와 현실에 대한 발언의 한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발언의 한 형식이라는 말은 증언의 한 형식이라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문학관은 오늘에 이르러 이미 식상할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발언과 증언은 말할 것도 없이 심미적 이성의 간섭과 견제 안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결코 서정 장르 고유의 예술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오늘의 자본주의의 현실이 물신을 우상으로 숭배하면서 수많은 노동의 소외를 낳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그로 의해 인간의 삶이 가차없이 찌그러져 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시인으로서 그의 노력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시는 노동의 소외에 의해 왜곡된 산업현장의 인간군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어렵지 않게 오늘의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피폐한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렇다. 그의 시에는 일용 근로자의 현실이 묘사되어 있는가 하면, 대단위 사업장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탄광 노동자의 현장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우선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하여·1], [나는 얘기한다·황혼에 대하여·6] 등에는 온갖 고통에 처해 있는 외국인 노동자, 즉 '불법체류자 네팔인 구얀氏', '중국인 산업 연수생 王龍' 등의 모습이 노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화의 진전에 따른 다국적 노동의 현실에서 기인했을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한 형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언론매체들에 의해 누차 조명된 바 있다. 그밖에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해서·2]에는 용접공 천씨, 털보 아재 등의 노동 현실이 그려져 있고,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해서·8]에는 온도계 공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죽은 문송면의 장례 모습이 그려져 있다. 1970년대의 노동 영웅 전태일의 일생을 압축하여 묘사하고 있는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하여·3], 서울역 지하도에서 잠자리를 펴는 노숙자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해서·10] 등도 같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하여·11]에는 좀더 직접적으로 가두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시위 행렬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동의 소외와 그에 따른 비인간화를 드러내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작품 안에 가족들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아버지를 탄광 노동자로 그리고 있는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하여·7]과 [무등을 생각하며·3], 막내 이모를 신발공장 노동자로 등장시키고 있는 [나는 얘기한다. 황혼에 대하여]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특히 '아버지'는 적절히 추상화되어 제법 복잡한 의미망을 형성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무등을 생각하며·7]과 같은 시는 예외적으로 '아버지'가 가족사적 의미망을 훌쩍 뛰어넘고 있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시조라는 비좁기 짝이 없는 형식 안에서도 당대의 사회현실을 매우 충실하고 세세하게 묘사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이 된다. 시조라는 한정된 틀을 생각하면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물론 사회현실을 충실하고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다. 사회현실의 현존을 익숙한 풍경으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감동을, 재미를 주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도 뻔한 삶의 면면을 확인시켜 주는 데서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작품에 이처럼 지루함이 노출되는 것은 사회현실의 환경과 인물을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변형 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에 급급한 그의 시적 솜씨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의도를 무작정 감추어서는 안되지만 지나치게 노출하는 것도 시의 감칠맛을 훼손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에도 이러한 점이 없지 않거니와, 이는 특히 고양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주제의식이 과도하게 노출된 작품보다 절제된 분위기를 고집하는 작품이 훨씬 더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장 모퉁이
쪼그리고
몰래 담배 피운다
말랑말랑한 햇살이
온 몸 칭칭 휘감고
풀밭을
두런거린 나비
개나리에
사푼 앉는다.
―[봄날] 전문
평시조 한 편을 자유시처럼 섬세하게 행과 연을 나누어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른 봄 추위를 피해 공장 모퉁이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가난한 노동자의 모습이며, 그와 더불어 제시되어 있는 주변의 자연 환경, 즉 햇살과 풀밭, 개나리와 나비 등의 형상이 매우 맑고 깨끗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봄의 햇살이 지니는 온기를 말랑말랑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도 매우 재미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한테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일 수 있는 여백을 주고 있어 이 시는 주의를 집중시킨다.
독자들의 몫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시인의 세계관을 강제하는 작품이 제대로 된 즐거움을 줄리 만무하다. 따라서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설명을 피력하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 사람들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지나친 친절로 인해 상상의 재미를 느낄 영역이 도무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되어 있는 뻔한 소재를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되어 있는 뻔한 관점으로 노래하는 작품의 경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박현덕의 작품 중에는 변형된 연시조 혹은 변형된 사설시조가 적잖다. 다소간 긴 길이의 이들 작품들이 그것 자체만으로 심미적 성취의 일부로 기능하는 예는 거의 없다. 오히려 감칠맛 나는 절제와 응축을 통해 독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단시들이 훨씬 자연스럽게 살갗을 파고드는 경우가 많다.
새벽 네 시
모란 시장
꽃불 주위의 중년들
무너진 꿈
층층 안고
봉고를 기다린다
어둠 속
한 대가리를 위해
발 구르며
담배 빤다.
이 시는 앞의 시에 비해 좀더 더 사실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현실에 대한 특별한 추상이 없이 새벽 인력 시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이다. 일종의 시적 풍경화인 셈인데, 이 때의 풍경화는 물론 당대 사회의 풍속화를 지향한다. 이 시대 일용 노동자들의 삶의 단면을 순간의 거울로 비춰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에 묘사되어 있는 깔끔하고 깨끗한 새벽 풍경이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특히 이 시의 중점 대상인 "모란 시장/꽃불 주위의 중년들"에 대해 보여주는 시인의 태도에 의해 확인이 된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연민의 마음이다. 연민의 마음은 그 시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의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현덕 시의 중심 대상은 일단 계급적 특징을 갖는다. 계급적 특성을 갖는다는 말은 그의 시가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적 가치로부터 소외된 인간군상, 즉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존재들을 핵심 대상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을 그가 이미 낡은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고집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세계관이 얼마간 1980년대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남다른 사회의식,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고 해도 좋다. 그의 시가 이처럼 깊이 있게 사회의식, 역사의식을 껴안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에서 그만큼 타자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실제의 일상에서 항상 타자와 함께 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지금도 대우 모터 노동조합에서 상임 일꾼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현덕의 시가 갖는 사회의식, 역사의식의 면은 [다시 제주에서] [겨울의 章], [無等을 생각하며] 연작 등에 이르러 그 정점을 보여준다. [다시 제주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4·3 제주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유를 드러내고 있고, [겨울의 章]에서는 동학 민중혁명에 실패하여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에 함축되어 있는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식자들 사이에는 이미 상식화된 지 오래인 사유와 의식의 편린들을 담아내고 있는 데서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에 드러나 있는 의식이나 인식이 새롭지 않기는 [無等을 생각하며] 연작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들 연작시 가운데는 의외로 빛나는 이미지와 서정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이 적잖아 관심을 끈다. [無等을 생각하며·1], [無等을 생각하며·5], [無等을 생각하며·7], [無等을 생각하며·8], [無等을 생각하며·9], [無等을 생각하며·10] 등이 그 예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박현덕의 시조는 [무등을 생각하며] 연작에 이르러 비로소 활짝 개화를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꼭두새벽 유리창 열면
망월 묘지 혼령들이
아파트 베란다에
가슴 추수린
새가 되는
여름은 산을 만들고
둥근 달도 물어 올렸다.
―[無等을 생각하며·5] 전문
통사의 구조만으로 보면 이 시는 그 초점이 '여름'이라는 계절에 있다. 뿐만 아니라 단 하나 뿐으로 이루어진 시문장의 주어도 '여름'이다. 초장과 중장의 모든 표현이 주어인 '여름'의 수식어이고, 종장의 나머지 표현은 주어인 '여름'에 따르는 목적어와 서술어이다. 수식어에만 주목하면 "꼭두새벽 유리창 열면/망월 묘지 혼령들이//아파트 베란다에/가슴 추수린/새가 되는" 것이 여름이다. 따라서 이 여름이 목적어와 서술어에서 "산을 만들고/둥근 달도 물어 올"리는 것은 다소 비약이 없지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찌 보면 오히려 그것이 이 작품에 함유되어 있는 시인의 상상세계를 따라가는 재미를 부여한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종장 마지막 구의 "둥근 달도 물어 올렸다" 라는 표현은 초장 둘째 구의 망월 묘지의 이미지와 어울려 절묘한 심미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은 결국 "망월 묘지의 혼령들이" "산을 만들고/둥근 달도 물어 올"린다는, 즉 자연의 질서, 곧 신의 섭리를 만든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망월 묘지의 혼령들에 의해 여름 산의 숲이 이루어지고 둥근 달이 떠오른다는 인식은 자못 참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현덕의 시에 드러나 있는 이러한 참신함은 대부분 시를 시로 받아들일 때 획득된다. 전통적인 어법을 응용해 순간의 거울로 포착하는 응축되고 압축된 이미지와 서정이 그의 시에서는 훨씬 더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를 시 이상의 과도한 무엇으로 생각할 때 파탄이 오는 것은 그의 시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면은 또 다른 연작 [송정리 詩篇]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연작은 역 근처의 특정 지역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 이른바 창녀나 갈보들의 삶을 중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 시대 특정 지역의 풍속화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 작품 역시 독자를 미적 즐거움 속으로 흡입하는 데는 실패한 경우가 적잖다. 이러한 작품은 별다른 도덕적 기능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 작품이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한계들을 말끔히 극복하고 있는 예의 하나이다.
송정역 앞 1003 번지
맨 몸으로 버티는
방직 공장
그만 둔
스물 넷
언니가 산다
밤마다
환장하게 피어
쪽방 밝힐
자궁꽃.
―[송정리 시편·1] 전문
이 시의 중장에 포착되어 있는 "방직 공장/그만 둔/스물 넷/언니가" 몸파는 여자, 즉 창녀나 갈보를 가리킨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의 '언니'는 창녀나 갈보에게서 흔히 느낄 수 있는 퇴폐적 이미지나 불결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의 '언니'는 종장에 이르러 "밤마다/환장하게 피어/쪽방 밝힐/자궁꽃"으로 비유되고 있어 오히려 밝고 환한 분위기를 발한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를 발하는 것이 단지 그녀가 꽃으로 비유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는 다름 아닌 그녀를 바라보는 시인 자신의 밝고 환한 마음이 반영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그것이 그녀를 예의 인물로 드러나게 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현실 정합성과 관련하여 이들 몸파는 여자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안목에 대해 일부러 진실 여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이른바 출장 마사지가 횡행하는 현금의 매춘 실태와 견주어 보면 "방직 공장/그만 둔/스물 넷/언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도 있고, 시의성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요즈음의 여성 매춘 행태에는 무분별한 사치와 소비에의 욕망이 가장 깊숙이 자리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시인은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인 언니로부터 차라리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퇴폐와 타락이 자본주의적 인물의 표본이라고 하지만 정작의 퇴폐와 타락을 대표하는 자본주의적 인물은 이 시에서의 언니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연민의 마음으로 몸을 파는 여자들을 노래한 그의 시 가운데에는 그밖에 [송정리 詩篇·3], [송정리 시편·5], [송정리 시편·6] 등의 작품이 읽을 만하다. 이들 시에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시적 응축과 압축, 여백과 비약이 함유되어 있어 독자의 상상력이 충분히 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따듯한 서정과 섬세한 이미지는 우리의 시조가 세계의 무대에 바로 설 수 있는 정작의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오랜 전통을 지닌 민족 고유의 서정 양식으로서 시조가 세계의 다양한 서정 장르와 오늘날 당당하게 어깨를 겨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시조는 앞으로 좀더 심미적이고 예술적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시조라는 서정 장르에게만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유미주의, 탐미주의가 허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박현덕의 시조에는 거의 대부분 인물형상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들 인물형상은 오늘의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인간군상, 다시 말해 근대사회의 우상인 물신의 억압에 의해 제멋대로 일그러진 인간존재들이다. 그가 특별히 이러한 인물형상들을 택해 시의 중심 대상으로 삼는 것을 가리켜 구태여 도착된 그로테스크의 취미라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들 인물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민이 그의 시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이는 결국 그 나름으로 오랫동안 정제한 인간관, 나아가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 안에 인물 형상을 받아들이는 기법이며 솜씨가 모든 작품에서 고르게 뛰어나 보이지는 않는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채 오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거개의 그의 시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서의 인물도 [송정리 詩篇·1]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평면적인 외면 묘사의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적잖다.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이라고 하더라도 [겨울 삽화·4]에서와 같이 객관상관물을 이용하는 등 작품의 내포를 훨씬 긴장감 있게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 가운데 이러한 정도의 심미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은 아직 많지 않다.
문학을 가리켜 흔히 인간학이라고는 하지만 이 때의 인간이 시에 아무런 변형 없이 평범하게 나타날 때 쉽게 식상하게 되고 말 것은 뻔하다. 주체적인 변형을 통해 인간을 새롭고 참신한 이미지로 드러날 때 독자의 상상력은 심미적 충동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법이다. [聖 金曜日의 저녁]은 바로 그러한 면에서 얼마간 돋보이는 작품이다.
먼 마을 저녁 연기가 비둘기로 날고 있다
즈믄 세월 강물처럼 오솔길을 지나갈 때
어머니 흘린 노을 몇
소나무에 걸렸다
이 작품은 평시조의 한 편으로, 종장을 두 행으로 분할하여 흥미로운 파격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는 평시조의 기본 형식이 갖는 익숙함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된 배려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기존의 형식에 최소한의 파격을 가하여 낯설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한 세심한 노력의 결과라는 뜻이다. 하지만 특별히 이 작품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많은 작품들과 달리 독특한 비의적 분위기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핵심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형상화하는 방식이 남다를 뿐만 아니라 색다른 이미지를 통해 전체적으로 비실재를 감수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러한 비실재는 탈현실의 결과이겠지만 상대적으로 시적 감칠맛을 배가시키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어머니 흘린 노을 몇/소나무에 걸렸다"라는 표현에서 노을 대신 '눈물'이라는 어휘를 선택했을 때 상대적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이 훨씬 약화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초장에 드러나 있는 "먼 마을 저녁 연기"를 "비둘기"로 변형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시 가운데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 곧 지나치지 않은 탈현실, 탈형상의 작품은 별로 많지 않다. [바람집] [밤―별] [에밀레傳] 등의 시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그러한 방법을 겨우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밤―별]은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으며 천천히 즐길만한 좋은 작품이다. 여기에 그 전문을 인용하며 글을 맺기로 한다.
서역으로 간 행렬이 갈고리달 넘실 뜬 고비사막 지나 은하수를 건너고 있다. 더러는 지리멸렬한 세상, 마음의 문 닫는다.
그 길 끝나는 곳 모래 태풍에 마을 수장되고 부시시 먼지 쌓인 잠을 털고 일어나면 결국은 숯등걸처럼 밤새 몸을 사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