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땅끝 고흥반도를 세거지로 한 고흥유씨 가문이라
9대조 유탁은 고려 최고의 재상으로 일생을 승승장구하여 오래도록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시중이었으니, 노국공주 사후 시름에 빠진 공민왕의
과공비례를 찬하다 목은 이색의 "유탁은 죄가 없다"는 지극한 간언에도
국사를 팽개친 공민왕에 끝내 죽임을 당해 시호가 충정공이라
공은 최영장군 보다 다섯살 위이고, 이성계 장군보다는 열아홉살 위이니
훗날 조선 태조 대왕은 공이 죽임을 당하기 전 남겨 놓은 다섯살 아들 습에게
벼슬을 주라는 꿈을 꾸고 벼슬을 높여 주니,
기해동정 대마도 정벌에 공이 큰 10대조 양정공 유습이시다.
충정공 유탁의 조부 영밀공 유청신은 본래 초명이 유비였으나
고려 중엽 원나라 간섭기에 사신으로 스물아홉 차례 원나라에 다녀오고
세명의 고려왕을 호종한 밀사로 원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여
원세조는 그에 대한 찬미의 시를 짓게 하고, 고려의 충신이라 청신이란 이름을
하사하니 그가 고려 왕들의 영광의 밀사 7대조 영밀공 유청신 이시다.
조부 영밀공의 그러한 음덕이 있었기에 고려의 신하들 앞에서도 고려 왕을
무시하고 무례하던 원나라 사신들도 유시중 앞에서는 공손했다 한다.
고흥 유씨는 7대조 영밀공 유청신이 조정에 등용하기 전에도
시조 유영부터 대대로 이어 온 고이부곡의 호장 가문으로
세거지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고 양류동이라 이름하니
씨족의 성을 버드나무 유로 쓰는 가문의 내력이라
이는 유씨 중에서도 그 근본이 확실한 경우이다.
버드나무 유라 하면 봉황이 깃들어 알을 품는 나무란 뜻으로
난생설화에도 이어지는 시조 유영의 탄생 비사이다.
고려조 부터 명문귀족이었던 고흥 유씨는 조선조에도 권력과 재물을 쫓지 않고
9대조 충정공 유탁의 강직함을 우러러 고귀한 가풍을 이어 오니
지금도 고흥 바닷가 집성촌에서는 살생을 금하여
물고기 잡는 어부 대신 농사짓고 갯벌 조개만 체취하며 살아오고 있다.
조선말 일제 강점기 조선의병 총대장 으로 조선 총독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러
떠나는 안중근 장군에게 자신의 최신식 권총을 내어 준 춘천 집성촌의 의암 유인석
천안 집성촌의 민족혼 유관순 열사와 그의 부모
일제의 호남대토벌 당시 분연히 떨쳐 일어 선 전주 집성촌의 일문구의사들의 항거는
나라 잃은 백성의 당연한 의거였다.
이에 우리 고흥 유씨 가문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빛나는 얼을 이어
대대로 이어 온 고귀한 가풍을 마음에 새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나라의 어려움에
적극 나서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