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주 투 이정림 – 오봉훈 장로
1984년으로 기억 되는 어느 날, 괴정제일교회 중고등부 SFC에서 고등학생과 중학생으로 첫 인사를 했습니다. 이사 했기 때문에 동생과 함께 집 가까운 교회로 옮기게 되었고, 부모님과 언니, 오빠는 장림교회 교인이라고 짤막한 소개를 받았습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학생들로서만 몇 년 지내게 되었지요. 재수를 하고 대학을 들어갔고 바로 입학한 당신과는 대학부에서 만나 임원도 같이 하고 했네요. ‘일 잘 하고 신앙 생활 잘 하고 똑똑한 후배가 들어왔구나!’라고 생각 했습니다. 여러모로, 선배들이 매우 마음에 들어했어요. 추억해 보면 그때 사회적으로는 참 암울하고 어두웠으나, 군대 가기 전 대학부는 정말 가정 같았어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놀아주고,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진영이 형, 경근이 형, 원택이 형, 득영이 형, 진영이 형이 서울 가면서 후배들 잘 가르치라고 데려다 놓고 간-멀리 부산대 근처에 살면서 얼떨결에 괴정까지 예배 드리러 다녔던-기영이형, 친구 보훈, 경일, 현돈, 창규,성일, 동기, 종표와 부인의 동기였던 진성, 현성, 혜영이와 부인을 잘 따라 다녔던 몇몇 후배들이 기억납니다.
지금은 어림 없는 얘기일 수 있지만, 어떤 선배님이 “대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300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칠판 한 가득 책 이름을 적어 주시면서 실제 독서 모임때 엄하게 가르치셨던 선배님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박영선 목사님, 김홍전 목사님, 프란시스 쉐퍼, 존 스토트, 바빙크, 후크마, 제임스 사이어,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도이벨트, 윌리스턴 워커와 땅콩박사와 심지어 서양철학사 책들까지 적어 주시면서 필독서라고 힘주어 얘기해 주셨던 분이 계셨네요. 모두들, '헐!' 이런 분위기였지요. 동아대학교, 고신대학교, 송도, 태종대, 대신공원, 남포동과 가끔은 해운대와 광안리에서 모두 함께 즐거웠습니다. 이때까지도 좋은 후배였어요.
1989년 여름 바람 없는 비가 굉장히 많이 왔어요. 물이 만든 산사태가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것을 체험 하였지요. 우리 집이 무너졌지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잘 곳도,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일하시던 회사의 3층 기숙사 중 하나에서 잠 자고, 동사무소에서 주는 구호품으로 임시로 입고, 먹었고, 근처 사시던 작은 아버님께서 도와 주셨고, 우리 지도하시던 정명훈강도사님께서 너무나도 많이 애써 주셨지요. 그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와 어머니께서 근무하셨던 택시 회사의 복구도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요. 군대도 왔었고, 소방서에서도 많은 인력이 나서서 힘을 보태 주셨던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부인과 부인의 동기들로부터도 금일봉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들과 후배들이 책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등록금도 보태 주고 했습니다. 부인과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그 이후로 많이 친해졌던 것 같습니다. 부인의 학교 친구들과도 인사하고, 대학부 임원도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주 보게 되었어요. 이때는 성격 있는 똑부러지는 좋은 후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늦게 군대를 갔고, 부산역에서 마지막 보고 제대할 때까지 휴가 나오면 대학부 모임에서 잠깐 보는 그런 사이였어요. 제대 후, 나는 학교를 마저 다녀야 했고, 당신은 졸업했고, 얼마 있다가 취업을 했고, 그 사이 결심하고 고백했다 남포동 카페에서 차였고, 허탈해서 눈 마주치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열심히 봉사했네요. 그 해 하기 봉사를 합천군 묘산면으로 갔었는데, 그때 잠시 후배들 격려하러 왔던 기억도 납니다.
'왜 왔지? 혹시 나 보러? 정신 차려라! 오봉훈!' 이러면서 봉사 마치고 남해상주 해수욕장에서 잊어 버릴려고 선배들, 후배들과 열심히 놀았네요. 미조 수협에서 근무중이셨던 연희 아빠가 넘치는 횟거리를 가지고 오셔서 먹여 주셨던 것과 그 날 밤 비가 엄청나게 와서 텐트 안에서 물과 함께 자던 기억도 나고 사촌 동생 영훈이 깨워 할아버지한테 갈까라고 잠시 생각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1년 정도 흐른 후, 대신 공원 주일 오후 청년부 모임에서 너무나도 희안하게 공식적으로 사귀게 되었지요. 나는 어이없고, 당황스럽고, 어안이 벙벙! 친구들은 깜놀! 후배들을 헐! 선배들은 응! 이런 반응이었어요. 친한 친구가 “봉훈아! 갑작시리 머슨 일이고!”라고 했어요. 우리의 본격적인 연애는 이렇게 시작 되었어요. 취직 후 월급 받아 용두산 공원 부산타워 아래 벤치에서 옷 선물해 준 것 기억합니다. 비싼 옷이었어요. 기억이 다르면 무조건 당신의 기억이 맞아요. 틀렸다면 부디 나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길 바라요. 그리고, 오빠 빨리 취직하라고 독려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그후 무척 열심히 공부했네요. 자격증 따고, 미화당 취직하고, 졸업하기 전, 괴정 집에 인사 드리러 갔지요. 그때 너무 떨렸어요. 같은 교회 다니던 이모님께서 나를 안 좋아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많이 긴장했어요. 무사히 인사 드리고 나왔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답니다. 설명하기 어렵네요. 아버님, 어머님, 처형, 처제, 형님! 너무 고맙습니다.
다음 해 초, 서울로 직장을 옮겼고, 1996년 드디어 결혼해서 창동 주공 2단지에서 신혼을 시작했네요. 직장 선배 덕분에 집을 얻었고, 장모님께서 서울 올라와 많이 도와 주셨지요. 이 또한 감사한 일이지요. 양가 인사 드리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에서 우는 부인을 보았어요. 마음이 짠 했어요. 남편말고는 아무도 없는 서울로 가는데 얼마나 만감이 교차 했을까요? '잘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여보! 고마워요.
신혼 시작해서 처음 야단 맞은 날이 기억납니다. 혼인 신고 하러 동사무서에 가서 신고하고 등본 떼서 집에 왔는데 보니 동거인으로 되어 있었고, 이것을 본 당신은 “내가 동거인이냐? 부인이지! 아이고! 다시 갔다와!”이러고, 나는 “동거인 맞잖아! 같이 사니까!” 이랬더니, 부인이 “뭐라? 다시 가서 설명하고 바로 해 가지고 와!” 미안해요.
그 후 여보는 쌍문동, 미아리, 노원에서 근무하면서 진원이 키우느라 참 혼신을 다했어요. 나는 회사일 열심히 하느라,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느라, 진원이는 부인의 작품입니다. 그때 생각 하면 진원이에게는 매우 미안하고, 부인에게는 너무 감사합니다. 상계동에서 지하철로 다니게 한 것 미안하고, 아기 진원이 뒷 좌석에 태우고 운전하고 교회 오다가 교통 사고 나게 한 것도 미안하고 고마워요. 직장 생활 너무 열심히 하느라 육아의 많은 짐을 부인에게 지운 남편이었네요. 진원이에게 고향같은 상계동 생활 너무 고맙고, 장미 아파트 이사 가자고 한 거, 내가 공기 좋은데 살아야 한다고 가지 말자고 말린 것 미안해요.
너무나도 감사하게 막내 진서가 우리에게 온 것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안면도 가족 여행 후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갔는데 임신했다는 소식에 너무 감사했어요. 포기 했었잖아요. 아이는 한 명만 주실려나 보다라고! 인생의 위기 때 진서로 인해 정신 많이 차리고 넘어지지 않고, 교회 떠나지 않고 살았어요. 그때 부인이 끝까지 인내해 주고 참아 주었어요. 감사합니다.
온생명교회와 함께 인생 2막이 시작된 거 같아요. 무작정 상계동 떠나 남양주 이사 오자고 했을 때 흔쾌히 옮겨와 준 거 너무 고맙고, 진원이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한 빚으로 남아 있네요. 보람에서 잘 살다가, 친구들 하고 모두 단절하고 너무나도 낯선 환경에서 진원이가 많이 힘들어 했지요. 다행히 그 때 계셨던 두 분 전도사님이 진원이를 잘 양육해 주셨어요. 감사한 일이지요. 부인과 진서와 같이 출근하면서 매일 투덜투덜 했던 것 미안해요. 한편으로는 이해 바라요. 나의 출근 시간이 부인보다 30분 빨랐고, 진서를 영동대교 사거리 유치원까지 데려다 주고 오려면 매우 시간이 많이 걸렸거든요. 나도 진서 찾아서 구의동에서 여보가 퇴근할 때까지 많이 기다렸답니다. 그때 기다림의 시간이 진서 기억에는 좋은 날들이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남양주에서 용산으로, 구리로, 다시 뚝섬으로 출근했던 지난 날의 부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31년 8개월을 마치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명예롭게 물러난 당신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합니다. 몸의 병과 함께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부인을 보면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가장입니다. 오마주 투 이정림 속편을 쓰는 날에는 보다 많은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정림아! 고맙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