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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_명 조선국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예문관 제학 증시문효공 옥계 노선생 신도비명
옛날 우리 선조대왕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고자 학자를 높이 등용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대의 이조판서는 옥계 노선생이었는데 도덕과 문행이 일세를 감복하였다. 얼마 안되어 서울의 객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선조대왕께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면서 조회를 중지하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보통 때보다 부의를 더하였다. 그해에 예조에서 선생의 효행을 보고하자 선조대왕께서 더욱 가상히 여겨 담당 관원에게 명하여 마을에다 정문을 세워 표창하도록 하였다.
선생의 휘는 진(禛)이고 자는 자응인데 대대로 옥계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옥계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관향은 풍천이고 성균관 진사 휘 유(裕)가 그의 시조인데 대대로 선비가 났었다. 고려 말엽에 오랑케를 피하여 함양으로 이주하였다가 이내 함양인이 되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휘 숙동이 문장과 청렴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세종조 때 예조참판 예문관제학의 벼슬에 이르렀다.
숙동이 휘 분(昐)을 낳았는데 과거에 두 번이나 급제하여 예문관 교리가 되었으며 슬하에 둔 셋 아들이 모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중 둘째 아들이 가장 어질어 학문을 좋아하고 뜻을 지키면서 서재의 이름을 신고(信古)라고 명명하였는데 곧 선생의 아버지이다. 휘는 우명(友明)인데 정일두(鄭一蠹)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모재(慕齋) 김공(金公)이 조정에 천거하여 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안동권씨 생원 시민(時敏)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덕 무인(1518년)에 선생이 탄생하였다.
선생의 뛰어난 자질이 숙성하여 행동거지가 저절로 법도에 들어맞았고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으므로 신고공이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여 중용(中庸)과 주자(朱子)의 잠명(箴銘)를 손수 써서 가르쳤는데 한번 보면 외어서 마치 마음에 이해하는 것 같았다. 점점 자라서는 스스로 차근차근 공부를 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었고 정유년(1537년)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니 칭찬이 매우 자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예우하였다. 그와 같이 노니는 사람은 모드 당세의 명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남명(南冥-조식), 하서(河西-김인후), 갈천(葛川-임훈), 고봉(高峯-기대승), 소재(穌齋-노수신) 같은 분들과 친분이 가장 깊어 서로가 도의의 벗으로 삼았다.
병오년(1546년, 2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고 재차 사관에 천거되었는데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박사로 관례에 따라 전적에 올랐으며 예조의 낭관에서 지례현감(1551년, 34세)으로 나갔는데 이는 대체로 선생께서 평소 영예의 승진을 기뻐아지 않은데다가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기에 편리한 곳을 찾는 것이 급하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안팎에 청렴 근신한 사람을 선발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이 참여 되었으므로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얼마 있다가 불러들여 홍문관 수찬, 교리로 임명하였는데 임금 앞에 나아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거동이 차분하였으므로 재상 윤개(尹漑) 가 보고 사람들에게 “정말 강관답다”고 말하였다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으로 선발되었다. 무오년(1558년-41세)에 필선, 부응교로 승진되었고 그 이듬해에 장령에서 천거되어 검상, 사인에 임명되었으며 집의, 전한으로 승진되었다가 이내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때 정권을 쥔 간사란 사람이 선생의 집안과 인척 관계가 있었는데 선생의 재주와 명망을 중히 여겨 아첨하면서 선생에게 도움된는 말 한마디를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자 선생께서 문을 닫고 불응한 채 한 번도 그를 만나지 않았으므로 선비들이 더욱 중히 여겼다. 경신년(1560년-43세)에 특명으로 품계를 올려 형조참의로 임명하였고 승정원 우부승지로 전직되었다. 그 이듬해에 어머니의 나이가 칠순이 넘었다고 하여 법례에 따라 글을 올려 시골로 돌아가 봉양하겠다고 간곡히 요청하니 명종께서 특별히 가까운 수령으로 임령하고 나서 표범 가죽의 담요을 하사하여 효성을 표창하였다.
이내 담당부사와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병이 나 곧바로 돌아와서 오래도록 다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담양과 진주의 백성들이 오래 갈수록 더욱 사모하였다. 정묘년(1567년-50세)에 이조참의에서 충청감사로 임명되어 나갔다가 사직하고 돌아오자 전주부윤에 임명하였다. 임기가 차자 부제학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왔다가 이윽고 상소를 올려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겠다고 요청하였다. 선조께서 위로하고 타일으면서 휴가를 주어 직함을 띠고 왕래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돌아가 또 사직의 싱소를 올리면서 경계의 말씀을 곁들여 올리니 선조대왕께서 비담을 내려 칭찬하고 면직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이어 그 도백에게 명하여 어머니를 봉향할 물품을 지급하니 선생이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신미년(1571년-54세)에 곤양군수로 임명하고 그 이듬해에 대사간과 이조참의로 불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자 선조대왕께서 직접 임명장을 써서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또 그 이듬해에 대사헌, 동지춘추관사로 임명하였는데 부임한 지 한 달이 안되어 세 번이나 사직의 글을 올리고 돌아왔다. 병조참판 대사간 겸 예문관 제학을 임명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을해년(1574년-58세)에 자헌대부의 품계로 올리고 예조판서로 임명하였는데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면서 당시 정사의 미비점까지 개진하였다.
그 대략은 “몸을 길은 것으로 말미암아 성품을 기르는 것이고 먼저 뜻을 확정하고 나서 옛날의 일을 고찰해야 합니다. 멀리 고대의 제왕의 원대한 규모를 더듬어 보고 비근한 규례를 따르는 데에 젖지 않아야 합니다. 혼자서 운영하는 것을 자신하여 일세의 선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자신이 총명하다고 여겨 여러 부서의 사무를 아울러 관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궁중의 높고 낮은 이의 분수를 엄히 하고 측근에 있는 사람의 참소가 점점 젖어들지 않게 막아야 합니다. 예리하게 나가다가 빨리 물러나지 말고 처음에 부지런히 하였다가 나중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하였다.
상소가 미쳐 도달하기 전에 이조판서로 옮겨 제수하자 또 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1575년-58세) 상복을 벗고 나서 공의전(恭懿殿-인종의 비, 인성황후)의 상을 당하여 형조판서의 관직을 띠고 급히 나갔다가 병으로 해임되었다. 공조판서로 임명하고 재차 대사헌이 되었으나 모두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직무를 본 지 겨우 수십여일만에 병이 나 해임시켜 달라고 하자 또 이조판서로 임명하였는데 병이 심해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노 아무개는 본디 덕망이 있어 선비들의 표상이 되었으며 상을 당하여 예절의 제도에 벗어날 정도로 거상(居喪)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병이 위독하였으니 병위문을 하는 예가 있어야 하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선조께서 그 즉시 내의를 파견하여 잇따라 약물을 하사하셨다.
병이 위독할 때도 가사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선영의 밑에서 죽지 못하였으니 사실 평생의 뜻이 아니다.”하면서 세상을 떠났는데 춘추 61세였다.(1578년) 운명한 날 집에 한 섬의 곡물도 없었으나 선조께서 하사한 부의에 힘입어 염습(殮襲)과 초빈(草殯)을 하였다. 서울의 사대부가 조정을 비우고 달려와서 곡하였고 거리에 아이들이나 미천헌 일꾼들도 너나없이 비통해 하였다.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다가 장사를 지냄.)할 때에 함양의 선비나 백성들이 노소를 막논하고 지경에서 맞이하여 위문과 부의를 다하였다. 장사를 치를 때에는 몇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으며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리를 만들어 놓고 곡하였다.
선생께서는 온화하면서도 지조가 굳건하였고 활달하면서도 이해심이 있었으며 차분하면서도 장중하였다. 비루하고 사리에 어긋난 말이나 거칠고 저속한 행실이 행동과 언어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마음가짐이 수월하여 서로 간에 간격이 없이 평소 겸손하였으므로 가부를 따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일에 임하여 행동을 결정할 적에는 꿋꿋하게 스스로를 견지하여 한결같이 의리만 따르고 이해나 득실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나 손님을 정겅껏 접대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오직 상대에게 손상을 주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나 나쁜 점을 보았을 경우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큰 덕이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효성과 우애에 있어서는 천부적으로 타고났었다. 신고공께서 돌아가셨을 때 선생의 나이 아직 어렸으나 성인처럼 곡하고 슬퍼하면서 형님-희(禧)을 따라가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선생에게 “너는 나이가 어려 혈기가 성숙하지 못하였으니 고기를 먹어 삶을 보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자 선생이 말하기를 “제 나이 지금 여섯 살이니 상복을 벗을 때에는 여덟 살이 됩니다. 여덟살 먹은 사람이 아버지의 상을 지키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하였다. 어머니께서 그 말에 감동되어 선생의 뜻을 굽히지 못하였으므로 3년 상을 예절에 따라 끝마쳤다.
아버지를 일찍 여인 것을 항상 지극한 아픔으로 여기었으며 어머니께서도 유난히 사랑하여 잠시 밖에 나갈 때마다 문에 기대여 기다렸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서는 조금 먼 곳으로 글을 배우러 가지 못하였고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는 오랫동안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보살피고 문안드리는 것과 기뻐하는 즐거움이 늙을 때까지 한결 같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손수 봉양할 음식을 마련하면서 궁색한 안색을 보이지 않았다.
형님-희(禧)을 아버지처럼 모셨는데 세상을 뜨자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대하였다. 종가댁이 쓸쓸한 것을 민망히 여겨 재차 사당을 짓고 기구들을 마련하여 제사를 맡은 사람이 걱정하지 않게 하였다.
어머니께서 병석에 눕자 선생이 여러 달 동안이나 옷을 벗지 않고 간호하면서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펴보았다. 상을 당했을 때에는 선생의 나이 이미 60이 되었는데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꼭 예절을 지키었다. 비록 매서운 추위나 찌는듯한 더위나 비바람 눈보라가 세차게 치는 속에서도 묘소로 가지 않는 적이 없었다.
선영을 받드는 예절은 반드시 과거 선비들이 정해 놓은 제도를 따라서 하였고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목욕하고 나서 직접 제물을 살펴보았으며 소공복(小功服)이나 시마복(緦麻服)도 반드시 예절을 따라 극진히 하였다. 그리고 친구의 상에도 반드시 슬픈 마음을 다하였다.
양집안이 본디 청빈하여 둘판에 논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었다 비록 누차 지방 장관을 맡았지만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 외에 자신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관직을 떠날 때에는 한 필의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므로 행장이 초라하였다. 화창한 시기를 만날 때마다 친구들과 같이 학도들을 데리고 산중의 절이나 시냇가 집을 왕래하면서 즐기되 오직 서책을 가지고 다녀 시원하게 욕기(浴沂-명리를 잊고 유유자적함)의 흥취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재상인줄 몰랐다.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학도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도의에 대하여 이야기해 마지 않았다. 항상 논어(論語),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숭상하고 믿었으며 퇴계선생과 편지를 왕래하면서 깊이 서로 존중하였다. 선생이 항상 “학문은 많은 말이 필요없고 ‘대학’의 첫머리 열여섯 마디 말만 가지고도 넉넉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이 반드시 봄에 근본을 두었고 임금에게 말할 때엔 겉으로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 전중하고 단아하고 풍부하고 명쾌하여 염낙(濂洛)의 문체를 깊이 얻었다. 시는 비록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가끔 지을 때에는 의취가 유연하고 원대하여 절대로 묵은 말을 답습하지 않았다. 선생이 지은 시문(時文) 몇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옥계문집-원집 7권 4책, 속집 4권 2책)
선생이 일생 동안 차분하게 몸을 닦고 학문에 몰두하였으므로 세상의 일에 유의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을을 맡았을 때 직무를 신중히 이행하였고 계획을 시행할 때엔 반드시 관대한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또한 조그만 이익을 엿보고 일을 이르키거나 선전을 하여 이름을 내지 않았다. 영남은 지역이 커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다. 선생이 관찰사가 되어 복잡한 일을 정성껏 처리하고 엄하게 하면서도 가혹하게 하지 않았다. 묵은 송사와 적체된 옥사를 한 마디 말로 판결을 내리자 교활한 서리들이 움츠러들고 탐학한 관리들이 미리서 단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따르고 믿어 일로(一路)가 크게 다스렸다. 김공(金公) 계휘(繼輝)가 선생의 후임자로 와서 업적을 보고 ”덕행과 문학을 가진 분이 이처럼 관리의 일까지 알 줄은 예상하지도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선생이 순흥안씨 기묘명현 처순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가정의 교훈을 받아 일찍부터 정숙한 덕이 있었다. 선생보다 10여년 전 무진년(1586년-51세)에 죽어 함양의 주곡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묻히었는데 선생의 묘소가 같이 있다. 아들 일곱을 낳았다.
큰 아들 사훈(士訓)은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별좌에 보임되었다. 참봉 조언의 딸에게 장가들어 승(勝)을 낳았는데 음직으로 봉사에 보임되었다. 봉사가 처음에 문목공(文穆公) 정구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형우(亨遇) 하나를 낳고 재차 하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형달(亨達) 하나를 낳았다. 딸은 여희좌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아들 사회(士誨)는 재주와 덕행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익산군수에 이르렀다. 유응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2명과 딸 세명을 낳았다. 큰아들 길이 아들 둘과 딸 셋을 낳았다. 큰 아들은 형후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그 다음 아들 철은 생원인데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큰 아들은 형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큰 딸은 허탁에게 둘째 딸은 강응황에게 셋째 딸은 이익빈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아들 사흔(士訢)은 조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척을 낳았다. 척이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형필이다.
넷째 아들 사악(士諤)과 다섯째 아들 사전(士銓)은 후사를 두지 못했다.
여섯째 사첨(士詹)은 목사 박광옥(朴光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사회의 아들 철을 후사로 삼았다.
일곱째 아들 사심(士諗)은 김효사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다. 큰 아들 욱은 생원으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형좌이다. 그 다음 아들은 등으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큰 딸은 김여정에게 출가하고 다음 딸은 곽이준에게 출가하였다.
선생의 두 딸 중 큰 딸은 유기에게 출가하여 후사가 없었고 그 다음 딸은 허성필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환이고 딸은 최응형에게 출가하였다.
아아 선생과 같은 재주 학문 덕망으로 세상에 드문 선조대왕의 인정을 받았으니 하늘이 큰 임무를 내린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곤궁할 때에 공부를 하였다가 높은 직위에 오르면 시행하려는 것은 사실 평생의 포부였으나 어머니가 늙고 병든 바람에 선생의 몸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벼슬 길에 나온지 30년이나 되었지만 조정에 있었던 세월이 3년도 되지 않았으므로 대업을 시행할 겨를이 없었다. 상복을 벗자 선생도 조종에 돌아와 몸을 맡기자 선조대왕께서 재차 이조판서로 발탁하여 장차 정승이 되었을 터인데 선생이 이미 거상할 때에 과하게 슬퍼하여 수척해진 것으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늘이 몇 년의 수명을 더 주지 않아 중도에서 그만 두었으니 어찌 선비들의 한없는 아픔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후세에 모범이 될만하고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넉넉히 시들어진 풍속을 고무시킬 수 있었다. 남녘의 선비들이 서로가 재목을 모아 선생이 거처한 곳과 평소 왕래하던 땅에다 사당과 서원을 세워서 선생을 높이 사모하는 정성을 붙이었으니 정말 감동을 일으키는 효과가 없어지지 않고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인조대왕께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태상에게 시호를 의논하라고 명하여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돈사(惇史)야말로 아름답다. 이것으로 선생의 덕을 다 표현했으니 말이다. 이내 그 설을 부연하여 다음과 같이 명한다.
웅장한 저 천령에 맑은 기운 모였다가
거인을 내었는데 공만이 완전했소
하늘이 오륜을 펼치니 효도가 온갖 행실의 근원인데
공이야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순수하게 성품을 따랐다오
부모의 품안에서 벗어나자 사랑하고 공경할 줄을 알았고
남은 힘으로 학문을 닦아 성현이 하신 일을 사색하셨소
몸에다 근본을 세웠다가 백성들에게 시험해 보니
정사를 하거나 문장을 지으면 사람들이 놀랐다오
인륜을 숭상하는 정치를 하자 사람들이 놀랐다오
인륜을 숭상하는 정치를 하자 사람이 편안하고 풍속이 후해졌으며
경연에 단정히 앉아 있자 선비들이 태산 복두처럼 우러렀다오
평소에 효도와 우애를 말할 적에 반드시 요순을 일켤렀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도 충실하여 듣는 사람마다 믿었다오
상소를 올릴 때에 정성을 기울였으니 글자마다 교훈다웠으므로
예악을 일으켜서 당우 시대처럼 기대했었네
나아가도 영화를 구하지 않고 물러나도 세상을 잊지 않았으므로
때때로 계책을 내놓았는데 그 역시 경제에 풍성하였네
다하지 못한 것은 세월이 덧없이 짧기 때문이니
의리와 정리의 경중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 드물다네
공만이 두 가지를 다하였으므로 성대한 명망이 뒤따랐는데
공의 평생을 개괄해 보면 효도로 미루어서 한 것이었네
이름이 사서에 기록되어 우리 유도에 공이 있으니
뒤에 한없는 세상이 있으므로그 향기 묻히지 않을 것이오
공의 덕행이 후세에 전해질 만한데 비석이 있어야만 되겠는가
내가 한 말이 아첨이 아니라는 것을 선비들이 생각해 볼 것이네
숭정4년(1631년) 10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이정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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