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홍매화/구절초님
-* 강설 *-
간단한『금강경』이나 아함부 계통의 경전을 설할 때에는 그런 수준의 장엄이라면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학술 모임을 열었을 때 그발표 내용에 신빙성을 줄 수 있는 권위있는 분이
참석하면 그 모임에서 토의된 내용 전체의 신뢰성(信賴性)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또 어떠한 모임이건 그 모임을 반짝 빛나게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말들을 하잖습니까.
"그 사람 온댔어요? 그 사람 빠져 버리면 영 재미가 없는데..."
마찬가지로 경(經) 중의 왕(王)이라고 하는『화엄경』을 설하는 데에 갖가지의 능력을
성취한 보살들이 그것도 부처님 법석(法席)을 한 방향도 빠짐없이 시방을 완벽하게
둘러싸 주어야 비로소 완전한 장엄이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본래부터 보살의 눈으로 아는경계를 얻지 못한 까닭과 세간에서 뛰어나는
함께 하지 않는 보리의 선근을 구하지 않은 까닭과 보살의 큰 원력을 내지 않은
까닭으로 보지 못합니다.
보살의 원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들마다 지각기 욕심이 있습니다.
이 욕심은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바향으로 발휘해 갈 때 보살의 원력이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력을 발하지 않았으므로 이법회에 동참은 했으되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성문들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난 게 아닌 까닭에, 제법(諸法)이 환(幻)과 같고
보살이 꿈 같음을 알지 못한 까닭에 여래의 경지에 대해 무지합니다.
모든 법이 헛것인 줄 알고, 보살보살하고 우리들이 받들지마는 그 보살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꿈과 같음을 알아야 제대로 여래를 본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렵고 지겨운 것을 꿈과 같이 여기고 잊어 버리기는 쉽습니다.
또 빨리 잊어 버리려고 노력도 하고, 잊어 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았던 기억은 내내 떠 올리고 싶고, 언제까지나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름다운 추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바라밀을 갈고 닦아야 얻게 되는 보살을 꿈과 같이 여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또한 이 성문들은 본래부터 여러 큰 보살의 넓고 큰 환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래의
경계를 알지 못합니다.
불.보살의 경지에서 광대한 기쁨이라는 것은 성문승들이 느끼는 큰 기쁨과는
격이 다를 것입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들은 여기서 기뻐하는데 반대로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고, 다른 데서 더
즐거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돌리가 있듯이 성문과 보살들의 차이는 환희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나는 법입니다.
위애서 말한 모든 경지는 다 보현보살의 지혜눈의 경게라는 것입니다.
이 지혜눈의 경계는 성문, 연각의 이승(二乘)의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자보십시오. 또 보현보살의 지헤가 나왔습니다.
팔만대장경의 결론이자『화엄경』의 결론이 결국은 뭔고 하니 보현행원(普賢行願)이라는
것입니다. 보현보살이 닦아야 하는 열 가지 덕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 사이사이에서 그것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한참 동안 나열한 경지는 결국은 보현보살의 원력과 지혜에 의해서야 가능하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원력이 참다운 지혜없이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슬기롭게 살고 현명하게 사는 사람은 원력이 무한히 있는 사람입니다.
그 원력을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보현보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보다 험한 일 하는 사람에게 먼저 절하고 친절을 베풀 게 뭐가있어요?"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기사에게, 아파트 경비하는 분에게 예의차리고 깍듯이
인사할 줄 안다는 것은 웬만큼의 인격을 갖추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고, 넓은 눈을 가진 보살입니다.
"뭐 그런 험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까지 체면없이 굴 필요가 있겠어?"
하는 사람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작디 작은 체면에 사로잡혀 가지고서 캄캄한 것입니다.
소견이 잘못 들었고, 불교인이 갈 길이 아니고, 보현보살의 행함이 아닌 것입니다.
보현보살의 넓은 지혜를 가지고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면 에경(禮敬)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승(二乘)에서 떨어진 사람들, 즉 아집(我執)에 떨어져 있고, 아견(我見)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인간의 무한한 진실 생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시시한 행동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의 눈을 갖추면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보현보살의 행(行)은 자기 아집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같지 않아서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해도 해도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제자들인 성문들은 보현보살의 지혜눈과 경계와 같지 아니하므로
비록 법이 설해지는 서다림에 함께 있으면서도 앞에서 세세하게 설명한 여래의 경지를
알아 듣지 못한다는 말을 장대화엄답게 열 가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든지 간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완벽을 기하겠다는 의도인 덕입니다.
지금까지 이 성문들이 여래의 갖가지 경계를 알지 못하는 이유로 과거의 원인을
살펴 보았습니다.
-* 경문 *-
② 현재의 인연
또 여러 큰 성문들은 이런 선근이 없고 이런 지혜의 눈이 없고 이런 삼매가 없고
이런 해탈이 없고 이런 신통이 없고 이런 위덕이 없고 이런 세력이 없고
이런 자재함이 없고 이런 머물 곳이 없고 이런 경계가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증득하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관찰하지 못하고 견디어 받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하고 다니지 못하며,
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열어 보이고 해설하고 칭찬하고 나타내 보이고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지 못하며, 향하여 가게 하고 닦아 익히게 하고 편안히 머물게 하고 증득하게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큰 제자들이 성문승을 의지하여 벗어 났으므로 성문의 도를 성취하고
성문의 행을 만족하고 성문의 과보에 머무르며, '없다 있다' 하는
진리에 결정한 지혜를 얻고 실제에 항상 머물러서 끝까지 고요하며,
크게 가엾이 여김을 떠나서 중생을 버리고 자기의 일에만 머무르고,
저 지혜는 쌓아 모으지도 못하고 닦아 행하지도 못하고 편안히
머물지도 못하고 원하여 구하지도 못하고, 성취하지도 못하고 청정케 하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통달하지도 못하고 알아 보지도 못하고 증하여 얻지도 못하였으므로,
비록 서다림 안에 있으면서도 여래를 대하여 이렇게 광대한 신통 변화를 보지 못하였다.
-* 강설 *-
이 성문승들은 과거의 인연도 별 뚜렷한 것이 없었고, 현재의 노력도 미흡하다는
조건으로 또 열 가지를 나열합니다.
이런 선근과 지혜의 눈과 해탈과 신통과 위덕과 세력과 자재함과 머물 곳과 경계가 없기
때문에 여래의 경지를 모릅니다.
이 '모른다'는 것은 열 가지가 넘게 열거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들 스스로가
알지 못하므로 남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제자들은 성문승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문승은 바로 성문의 법입니다.
성문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입니다.
수행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번뇌와 고통을 제거하여 열반에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재해결만을 지상의 목표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함과 동시에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을
불교의 이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해탈을 꽤하는 것을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라고 합니다.
불교라는 이름을 빌어서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보는 외도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정신에 입각해서 보면 그것은 불자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의 번뇌 소멸만을 취하는 이런 소승적인 교리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온전한 불자가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 승려 출신의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도 승려 출신이지마는 우리 나라 승려들에 대하여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국에 갔을 때 그 쪽 나라 스님들의 수행 모습을 보고서는
'우리 나라 스님들은 부처님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국 사찰은 대개가 깨끗하고 또 아름답게 잘 꾸며 놓았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있는 어느 사찰을 가 보니 담장이 무너지고 마당 정리도 잘 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렇게 권하였답니다.
"스님, 저렇게 무너지게 내버려두지 말고 담장이라도 고치고 마당 청소라도 좀 하시지요."
"어디 그런 법이 있습니까? 스님이 무슨 담장을 고치고 마당 청소를 해요?
그런 것들은 신도들이나 하고 우리들은 그저 수행만 하면 됩니다.
스님들이 일을 하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 쪽 교리가 그렇게되어 있습니다.
수행은 스님들만 할 수 있는 것이고, 신도들은 마냥 스님들 외호(外護)나
하여야 된다는 그런 입장이더라는 것입니다.
신도들은 일을 하다가 벌레나 곤충들을 죽이는 업을 지어서 지옥에 가도 되지마는
우리 스님들은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더라는 것입니다.
신도들은 스님들 외호나 잘 하다가 재수있으면 극락가고, 스님들은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공부만 해가지고 천상에 가든지 극락에 가야 한다는 의식이고,
날씨가 더워서 그런 지는 몰라도 일이라고는 아침에 나가서 탁발해 오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는 우리 나라 스님들에 대해서 새삼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방 불교 계통 나라에 가 본 분은 아시겠지만 스님들과 신도들은 절대로 같이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이 다니지도 않습니다.
버스에서도 '스님석'은 언제나 비어놓고, 또 스님이 타면 신도들이 전부 일어섰다가
스님이 자리에 가서 앉고난 뒤에야 다시 제자리에 앉을 정도로 스님과 신도들의
격이 다릅니다.
오늘날처럼 사회가 밝아졌는데도 이런 전통이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물론 대승불교권에서도 문제가 있기는 있습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다. 마음만 잘 깨우치면 그대로 부처이다."
이렇게 스님이고 속인이고 간에 똑같이 부처된다고 하니까 누가 누구를 위하고
존경할 게 뭐가 있느냐 하는 태도가 많습니다.
신도들이 스님을 무시하기 예사이고, 비구니들이 비구들의 의견을 묵살하기도 예사입니다
위계 질서가 없는 것, 이게 대승 불교의 폐단이라면 폐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가르치고 모든 사람을 성불의 길로 나아가게 가르치는 대승 불교의
교리는 참으로 우수합니다.
이런 바탕을 바르게 공부했더라면 철이 제대로 들어서 신도는 스님을 존경하고,
스님들은 신도를 존중해 줄 줄 알고, 비구와 비구니는 서로서로 협조하고
양해를 할 것입니다.
이런 풍토가 이상적인데 서로가 설익어 가지고서 자기자신들의 고집을 내세우고
양보하지 않는 미성숙한 모습이 또 우리 나라에서는 문제인 것입니다.
강설 *-
어느 신도분의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절이나 하고 기도하려 사찰에 갈 때에는 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스님들으 모습이
한없이 거룩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교리를 공부하게 되고, 또 개인적으로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되다 보니까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을 자꾸 잃게 되고 심지어는 나보다도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님들을 만나면 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혼자 절에 들어섰습니다.
초겨울이 감싸고 있는 절 마당에는 비질의 자국이 남아 있고 큰 고목에는 마지막으로
몇 개의 낙엽만이 달려 스산함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법당에 들어가지 않고 이리저리 거닐고 있는데 한 젊은 스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저 쪽에서부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회색빛 옷자락이
바람에 휙 날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다. 스님들이 있다는 저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 스님들께 강요하지 말자.
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으로도 족하다.
모두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이 주말 오후에도 산 속에서 찬바람과 함께 살고 있는 저런
스님들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우리들이 좋아서 공부를 해 놓은 것은 우리들이 간직할 문제이지 자랑거리나 남에게
강요할 문제는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저는 괜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젊은 스님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리서 허리 숙여 크게 절을 하였습니다."
이런 요지의 글에 공감을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깊이 하였습니다.
정말로 공부를 깊이 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대로 숙성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은 신도건 스님들이건 간에 잘못된 것은 남에게 떠넘기고
또 남이 자기에게 잘해줄 것을 기대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직분만 잘 하면 되는 것이지 남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없습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성문의 편협한 점은 꼭 사리불이나 수보리 같은 부처님 제자들이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소승의 무리들이 좁은 소견에 사로잡혀 편협된 것에 떨어진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부파 불교 시대에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치우치는 그런 무리들을 보수파라고 하는데
경전상으로는 장로파(長老派)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방 계통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소승불교라고 하지 않고 장로파, 또는
상좌부(上座部)라고 합니다.
반면에 정말 깨어있는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대승 불교 운동을
대중부(大衆部)라고 합니다.
여기 성문을 이야기하면서 역으로 대승 불교의 나아갈 길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큰 제자들은 성문승을 닦았으므로 성문의 도를 얻고 성문위 행을 만족하고
성문의 과보에 머무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것'이라는 이 한 마디로 다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성문들은 '무유제(無有제)'라고 하는 흑백논리(黑白論理)에 빠져 있습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중도(中道)이지 흑백논리가 아닙니다.
그 어디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불교의 중도관입니다.
그러나 이 성문승들은 있는 것 아니면 반드시 없는 것이다하는 양극단의 소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문승들은 번뇌 망상이 소멸되어 고요한 실제의 자리에만 끝내 머물고만 있지
그것이 작용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적멸한 바로 그 자리에는 천 개의 태양보다도 더한 에너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가만히 멈추어 있지, 그것이 다시 보살의 작용으로 행해지지가 않습니다.
크나큰 자비를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중생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