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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로마서 12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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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12장 1절의 처음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접속 부사는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이유나 원인, 근거가 될 때 쓰입니다. 앞에 무언가 설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받아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겠다는 말입니다. 무슨 내용을 받은 것일까요? 로마서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뉩니다. 1-11장은 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12-16장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과 공동체에서의 생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 더 압축해서 설명 드리면 11장까지의 전체 내용은, 로마서 1장 17절의 내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형식입니다. 1장 17절이 중요한 핵심 구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내용을 우리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알고 있습니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것을 1-11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장까지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인간의 죄, 하나님의 의(義), 율법과 믿음, 피조물의 구원,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긍휼하심,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 등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의 결론으로 ‘인간은 완전히 불의(불법)한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라고 12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12장은 우리가 의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여러 가지 생활의 기준과 모범들을 제시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 전반전 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후반전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후반전 시작의 휘슬이 울리는 타이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도 받으시고, 미진하고 부족한 부분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의인으로 살아가는 최고의 모습은 예배의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1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공동체, 혹은 믿음의 성도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형제’를 부를 때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형제들이 믿음으로 성장해 가고, 서로가 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든든히 세워 갈 때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할 때입니다.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형제들에게 감사하노라, 형제들에게 평안이 있으라, 형제들 때문에 기쁨이 넘치노라....” 하나의 예로, 골로새서 1장의 서두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2-6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우리(바울과 디모데)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 마다~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너희가~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로부터~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듣고 믿음이 성장해가며 열매를 맺어가는 골로새교회와 형제들을 크게 칭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칭찬과 감사를 할 때에 ‘형제들아’ 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호칭의 또 하나의 의미는 강한 책망과 권면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분쟁과 분열 행위를 하거나, 교회 공동체 내에서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들에 대해서 올바른 기준의 제시가 필요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형제여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형제여 이렇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형제여 그것들은 금하여야 합니다. 형제여 이 방법을 택하십시오...”이런 식의 내용들입니다. 책망과 권면의 말씀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0절입니다.(당파문제 책망)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절입니다.(재림이 곧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하지 않는 자들 권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이렇게 ‘형제’라는 호칭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당근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사용되는 호칭이었습니다.
오늘 12장의 ‘형제’는 권면을 하기 위해 부르는 호칭입니다. 앞서 말한 그러므로와 형제들을 연결시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로마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지체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체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가 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권면의 말들은 로마교회 공동체에도 해당되고, 거기에 속한 개개인, 즉 지체들 각자에게 동시에 해당되는 말씀이 됩니다. 교회 공동체와 지체들에게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아직도 예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예배의 모습과 각 지체가 취하여야 하는 예배에 대한 태도를 동시에 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교회와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면”한다고 합니다. 자비가 권면의 근거가 됩니다. 자비하심은 기다리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온유한 속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비하심의 헬라어 원어는 ‘자비하심들’ 이라는 복수형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봐주시고 참아주셔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며 자행하는 못된 습성들을 속히 버리기를 기다리십니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 주십니다. 수 없이 많은 횟수로 용서에 용서를 거듭해 주십니다.
지금 자비하심으로 권면한다는 것은, 현재 로마 교회 공동체와 믿음의 지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로마교회와 지체들에게, “내가 너희를 너그럽게 용서할 때 나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직선적으로는 “좋은 말 할 때 돌아오라!”고 권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한다는 말이 그렇게 부드러운 말이 아닙니다. ‘부추기다’, ‘내몰다’, ‘강요하다’는 뜻입니다. 어조는 부드러울 수 있으나 실제 내용은 강력한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하심을 보이시면서 무엇을 그렇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잘 안하려고 하는 것, 잘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1절 하반절 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 이 말씀을 들려주시려고 형제들에게 자비하심으로 권면 하신 것입니다.
이 문장 안에는 하나님과 믿음의 자녀(의인)가 맺어지는 가장 중요한 행위인 예배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의 중심 단어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죄 사함 받고,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분명한 사실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죄를 용서 해주고 눈감아주는 구실로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죄 용서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지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죄를 권장하지도 않습니다. 은혜가 죄를 용서해 주는 하나님의 수단이었다면,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우리는 은혜에 걸맞게 삶으로, 행동으로 의의 열매들을 맺어가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 받은자의 삶과 행동의 표현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자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육신의 나를 벗어버리고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내 자신의 일체를 완전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삶의 지혜와 행동양식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 없이는 우리는 의의 새사람이 아니고, 불의의 옛사람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된 자의 삶의 가장 최우선이 예배이며,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세 가지가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몸을 드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 그리고 영적예배입니다.
1. 첫째,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몸은 숨길 수 없는 내 육신의 겉포장입니다. 몸에는 내 삶의 흔적과 체취가 그대로 배어있습니다. 우리는 몸에 온갖 행위들을 묻혀 놓습니다. 몸은 내 생각과 의지를 반영하여 움직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가고, 취하고, 버리고, 잠자는 내 삶의 24시간의 완벽한 데이터가 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몸의 모든 흔적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자신의 몸에 어떤 언행들을 숨겨 놓았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그 내용들을 숨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의 시간에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몸을 드리라는 말씀은 내가 아무리 숨기고 가리려 하여도 나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뜻입니다.
숨길 것 없이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지체들은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몸 안에 숨겨져 있는 모든 것이 낱낱이 공개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평소 삶에서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자신의 몸을 숨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행한 더럽고, 추하고,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참아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에 붙은 더러움들을 진실 되게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을 미워하시지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면서 그 죄들을 몸 안에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혐오 하십니다.
몸을 드리라는 것은 추상적인 언어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의 입술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몸을 드림으로 인해 나 자신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공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비하심의 하나님이 무한한 용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똑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단련시키실 것입니다. 몸의 중요성에 대해 고린도 전서 6장 15절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몸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사전 작업입니다. 몸을 드리기 위해서는 몸을 깨끗이 간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몸을 드림으로 인해 주님의 보혈로 인해 씻겨지고 또 씻겨져서 거룩의 모습으로 변모 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몸은 거룩한 성전이 되고, 여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항상 함께 거하실수 있습니다. 몸을 드리는 것은,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통해 나의 몸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드러내십시오. 숨겨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 때마다 진실한 회개로 용서를 구하십시오. 자비하심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단하십시오. 몸을 드리기 위해 내 몸을 항상 소중하게 여기고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몸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구약의 제사의 제물에 비유해서 말하면서 독특하게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제사의 제물은 죽은 상태인데 산 제물로 드리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산 제물(as living sacrifices)은 살아있는 희생물들이라는 뜻입니다. 희생물들은 죽어있기 마련인데 살아있다는 것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심의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그 감사의 표현으로, 감사의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 감사와 반응의 방법이 “살아있다”는 외침입니다.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이 나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주님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확실하고, 내가 그것을 현재 믿고 있고, 입술로 고백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나는 계속 죽어있는 상황이 됩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주님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머물지 말고 산 제물, 즉 살아있는 희생물들을 드리라고 합니다. 희생물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살아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하는 의무와 책임의 결단들을 말합니다. 몸을 드리는 것이 예배의 사전 준비라면, 희생물들은 예배를 통한 나의 다짐입니다. 5월이 가정의 달인데 성도님들 모두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며 감사한다고 말씀드리기고 하시고, 받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만 하고 끝나면 부모님은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뭔가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이나 용돈을 드려야 좋은 마무리가 됩니다. 하나님도 예배를 통하여 살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반응하면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만 끝나면 “뭔가 더 없니”라고 더 듣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그 추가적인 “무언가”가 바로 희생물들, 우리의 결단을 듣고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결단들이 있겠습니까?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대화할 수 있는 시간, 바로 구별된 기도의 시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제가 이 시간 만큼은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으로 구별하게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결단합니다. 도와주옵소서” 이런 말을 올려 드릴 때 주님은 아마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이기에 반드시 따로 떼어 시간을 마련해 놓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내 삶의 중심을 잡게 해주고, 나의 독선을 제지하고, 내 감정을 다스려 주고, 내 욕망을 억제하고, 내 정욕을 끊어내고, 나의 시선을 오로지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다른 것을 계속 말할 것 없이 기도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확실하게 살아있는 존재라는 풍성한 은혜들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기도는 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절대의 필요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그대로 실천할 때에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지침서인 말씀을 손에 놓지 않겠는 결단, 내 입술에서 찬양이 떠나지 않게 하겠다는 결단, 복음의 증인으로 이웃에게 주님을 증거 하겠다는 결단.....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결단들은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소망이나 소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바로 거룩한 자녀로서 제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말합니다. 주님의 희생의 가치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런 것들이 예배를 통하여 계속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에 이 세상의 저항과 도전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가만히 놓아주지 않고 흔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복되는 고백을 통해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고백의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결단들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 몸과 산 제물을 드림으로 나타나는 영적예배입니다.
예배 전에 몸을 드리기 위해 깨끗함으로 잘 준비하고, 예배 시간에 살아있다고 감사로 반응하며 결단들을 올려드릴 때에 영적예배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이라고 하면 신비롭고, 독특하고 자극적인 체험을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특히나 영적이라고 하면 ecstasy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황홀경, 무아의 경지, 도취, 환희의 절정 등에 다다르는 것이라는 신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이라는 헬라어 단어 ‘로기코스’는 신비적인 용어가 아니라 생각하다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데, 어떤 것이 참되고 핵심적인 본질에 부합한다는 의미로서 ‘진실 된, 진정한’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감사와 결단을 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말씀에 따르는 삶의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기코스’, 영적예배 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교통하시면서, 세상에 나가서도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워 주십니다. 예배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무장으로 해 줍니다. 네가 가진 약점을 보완하고, 깨지고 허물어진 상처들을 고침 받고, 일어날 새 힘을 공급 받고, 낙담과 좌절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은밀히 말씀하시는 세밀한 음성을 듣고 새롭게 각성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영적예배입니다. 영적예배를 드려야 되는 이유는, 우리가 제일 많은 시간들을 보내는 세상에 나가서 참된 예배자로 성공하라는 파송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배는 정해진 시간에 교회 건물에 와서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모든 차원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삶의 모든 공간과, 그리고 그 곳에서 맺고 있는 인간관계 전부 예배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 일하는 것, 쉬는 것, 오고 가는 것, 모든 일상이 예배의 시간입니다. 가족과, 이웃과, 직장과, 사회 모든 분야가 다 예배의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넓은 의미의 예배에 대한 이해가 개인이나 공동체에 영향을 줄 때 한 층 높아지는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가 된다고 합니다. 일상의 예배에 성공하려면, 교회 공동체 내에서 드려지는 예배 시간이 영적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충만함을 받아야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서 참된 예배자로 설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나가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움직이면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순간순간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늘의 지혜와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1절의 말씀을 통하여 믿는자로서, 의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 무감각하게 지내왔던 예배의 습관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로마의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들 잘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우리교회를 포함한 현 시대의 교회들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가진 몸을 예배 시간에 드려야 됨을 실감하고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사탄이 주는 따른 생각에사로 잡혀 시간만 허비하면 안 됩니다. 예배 시간에 “나는 죄인이었으나 주님의 희생으로 살아났습니다”고백해야 합니다. 감사와 동시에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을 주님께 드리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을 의지하여 주님이 내게 주시는 뜻을 받을 수 있는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충만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세상에 나가 예배자로, 인생의 성공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로마서 1장 1절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셔서 예배의 성공자, 인생의 성공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의인으로 살아가는 최고의 모습은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2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절에서와 같이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성공자가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맞습니다. 1절의 내용만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분명하게 예배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기초로 하여인생의 성공자가 되려면 반드시 2절을 넘어서야 합니다. 말씀 중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 그리고 결단으로 올려드렸던 내용들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아무리 고백하고 결단했다 하여도, 정작 교회 밖에 나가서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겠다는 다짐을 뜻합니다. 이 의지가 끈임 없이 작동되고 발휘된다면 인생의 성공자로 나가는 첫 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한다면 “변화를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변화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다가 형체가 “변하시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능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변화를 받는다고 합니다. 변화시키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이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성령을 받아드릴 때 변화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변화 시키는 주체가 바로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을 근거로 내 자신이 무언가 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서 모든 일을 감당해 나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2절 앞부분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부분이 문제입니다. 변화를 가로막는 장벽, 변화의 대척점에 세대, 바로 세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되고자 하는 노력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무력화 시키려는 존재가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속임수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여전히 세상 쪽에 서서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풍요와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변화’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정답이 됩니다. 당장 변화가 없을지라도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뒤에서 응원해주고 밀어주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더라도 계속 앞만 보고 전진해 나갑니다. 하지만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반쪽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치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카멜레온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슬쩍 나타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일 수 있으나 시간만 허비하는 쭉정이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변화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변화가 의미가 없다면 바울은 로마서를 11장 까지만 쓰고 말았을 것입니다. 12장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가 성령으로 인해 변화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변화가 없을까요? 오늘 다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몸에 계속 죄들을 쌓아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예배의 짐이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찌 되었든 우리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예배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결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고 깨닫든 영적 예배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듣고 받은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받기를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성령의 인도함으로 변화를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뜻을 이해 하는 데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변화되어가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한 판단이 섭니다. 주저 하지 않습니다. 망설이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합니다. 변화를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는 변화를 받아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으로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 당장 성령의 열매 없음에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내 자신이 무엇부터 해야 되는지 깨달았다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정말 되돌아보지 않고 내 자신이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데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직성령의 인도함을 구하여야 합니다. 내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드리기 드리기 원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분별하여 실천하기를 원한다면 주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앞세우는 신앙을 지녀 합니다. 예배의 성공자는 하나님의 뜻에 나의 의지를 맡기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공자는 성령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을 맺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 들려 주신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의인답게, 자녀답게, 예배의 성공자, 인생의 성공자로 살아가셔서, 소망과 평안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성령으로 변화를 받으라!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우리의 기준으로 가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희생의 고귀한 가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이 주님의 일방적인 선물이기에 우리가 수동적이었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최선의 예배들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감사를 드리고, 결단을 드리고, 행동을 드리고, 열매들 드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들을 하는 것이 의인의 삶이라는 사실을 짧은 두 구절에 함축하여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오늘 말씀은 의인이 된 우리 모두에게 정말 소중한 단어를 던져 줍니다. 그 말씀은 변화를 받으라! 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생의 전 과정에서 잊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예배가 중심이 되면 변화할 것입니다. 변화 받은 사람은 곧 예배의 성공자입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면 인생의 성공자,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1-11장까지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마십시오. 12장부터가 우리가 진짜로 감당해 나가야할 부분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내가 예배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를 받아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분별력의 소유자들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 모두가 예배의 성공자 인생의 성공자가 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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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고귀한 희생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좋고 편한 마음에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말씀으로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감사와 결단의 산제물을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게 하셔서 진정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집중하게 하옵소서. 예배를 온전하게 드림으로 인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를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대의 풍습을 과감히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나의 온전한 삶을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예배의 성공자가 되고 싶습니다. 인생의 성공자가 되고 싶습니다. 도와주옵소서. 예배가 행위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삶으로 연결되어 무수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까지 이르도록 보호하시고 붙잡아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결단합니다, 오직 예배자로 살겠습니다! 변화 받은 자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언제나 예배를 통하여 힘주시고 능력주시고 세대를 이길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50527 수요설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로마서 12장 1-3절. 2015. 5. 27 수요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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