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란 무엇일까?
[ 자 료 ]
1. 묘청 등이 왕께 아뢰기를 “서경에 궁궐을 세워 거처를 옮기시면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와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개의 나라가 다 신하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지상 등이 왕께 아뢰기를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니 이는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청컨대 위로는 천심과,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람에 따르시어 금나라를 타도하소서.” 하였다. 왕이 어찌 하면 좋은가 물으니 이지저가 “금나라는 강적이니 가벼이 하지 못할 것입니다.”라 하니 왕이 그만두었다. 황주첨 등이 또 칭제 건원할 것을 아뢰었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고려사 묘청 ]
2.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 : 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 ]
[ 분석 및 개요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과 폐단이 표출되는 속에서 귀족 사회 내부의 족벌과 지역의 대립, 이념의 대립, 외교 정책의 대립, 고구려 계승 의식에 대한 대립 속에서 개경파와 서경파와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자겸의 난 이후 “개경의 지덕은 쇠하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다.”라는 풍수 지리설을 배경으로 서경에 대화궁을 건설하며 서경 천도에 나서는데, 이는 실은 중흥 공신으로 권세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천도가 세력의 근거지를 잃는 것이었기에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서경 천도에 반대하게 되고, 천도의 좌절 속에 묘청은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로 삼아 봉기하나 김부식에 의해 1년 만에 진압당하고 만다. 이로써, 서경파는 몰락하고 분사 제도 폐지로 서경의 지위는 격하되고, 금에 대한 굴복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고려의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