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월은 남사당패의 일원이었던 아버지 박덕삼의 3남 10녀중 한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전한다.박초월 선생의 출생지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남원 운봉 비전리에 생존해 살고있는 친조카의 말에 의하면 [박초월 집안은 잠시 남원 아영면에 머물렀던 것 이외에는 대대로 운봉에서 살았다 한다. 출생지가 순천으로 기록된 것은 선생의 부친과 모친과의 부부싸움으로 인해 잠시 선생이 어머니 따라 순천에 머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순천태생이라고 한것같다.]이하생략.아무튼 박초월은 판소리의 텃밭이었던 이 고을에서 성장한 덕분에 일찌감치 소리와 접할 수 있었다. 운봉 비전마을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싸워 크게 이긴 곳으로 황산대첩비 있고, 특히 판소리를 집대성한 가왕 송흥록이 살았던 마을이다. 초월은 어려서부터 소녀명창으로 인근 고을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는데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하면서 사사하게된 스승은 김정문 명창이다. 김정문은 송만갑의 수제자로, 김정문에게 흥보가 한바탕을 사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리의 길로 입문하게 된다. 이때부터 소리에 완전히 매료된 초월은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운 후 16세에 상경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송만갑 명창에게서 매서운 소리 수업을 받던중, 1930년 전주 전국남녀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열일곱의 나이로 일등을 한다. 이때 오케, 폴리돌, 빅타 등 당시의 대표적인 레코드사들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도 취입한다. 그후 10여년간 송만갑 명창에게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임방울, 정광수에게도 소리를 받은 초월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초월이 특히 잘 불렀던 심청가와 춘향가는 이때 배운 소리로, 박초월은 이 무렵 물산박람회에서 주최하는 명창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한다. 기량을 인정받은 초월은 이때부터 창극활동에 뛰어들게 되는데, 초월은 임방울, 박귀희 명창과 함께 동일창극단의 멤버가 되어 전국을 일주하기도 한다.이때 초월과 박귀희, 김소희가 함께 출연한 창극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춘향전으로 박귀희가 이도령 역을 김소희가 춘향 역을 박초월이 월매역을 맡아서 출연한 창극 춘향전은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한다. 8. 15해방이 된후 초월은 박귀희, 김소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는데, 그중 햇님달님 이란 작품은 창극사에 족적을 남길정도로 대인기였다. 해방이 되고 창극활동이 한때 시들해지면서 창극단체가 해산되자 박초월은 서울을 등지고 지방을 돌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 1955년에 박귀희, 김소희의 연락을 받고 상경, 한국민속예술학원(현 서울국악예술고)설립에 온 힘을 쏟는다. 이후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학교를 본궤도에 올려놓는데 큰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박초월이 국악사에 끼친 공로가 적지 않은데, 1964년 서울의 몇몇 창악인의 주도로 하한담이나 조선달 등 후사가 없는 선대명창의 위령제를 열어주는 뜻있는 일이 시작됐으나 차츰 국악인들은 이일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초월은 1966년부터 156위의 신주를 집에다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인다. 이에 후배와 제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됨은 물론 주위의 칭송도 자자했었다.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를 지정 받았고,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이나 수궁가중 범피중류 대목과 토끼수궁에서 나오는 대목을 잘 불렀고, 발림도 좋고 노래 또한 절창이었던 까닭에 당대의 최고 인기를 누렸단다.박초월은 본인의 기량 뿐만 아니라 명인명창이 많이 배출된 가계로도 유명하고, 특히 남원국악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조통달 명창이 초월의 조카이자 수양아들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서울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남원에서 제자양성에 힘쓰고 있는 민속악의 거장이자 대금의 명인인 서용석은 초월의 언니인 박점례의 아들이다. 또 조카 서용석의 아들이자, 박초월의 조카 손자되는 서영호(아쟁)와 서영훈(피리)은 남원시립국악단에서 그 몫을 다해내고 있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현재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의 지도위원으로 있는 박천택(예명 동현)은 초월의 남동생 박수룡의 아들로 대금 연주활동은 물론 후배지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이렇듯 초월의 집안은 국악의 본향인 이 고장 남원 국악발전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초월의 성음을 흔히들 대통 속에서 나오는 성음으로 일컬을 정도로 뱃심으로 밀어 나오는 깊은 소리는 판소리의 특징인 수리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초월은 진양 설움 조를 장기로 할 정도였는데, 춘향가중 춘향모 비는 대목이나 이별가가 특기였다고 한다. 또한 낮은 소리를 낼 때도 특이한 장기로 여겨질 만큼 음역이 매우 넓었던 초월은 노래 솜씨뿐 아니라 연기력도 뛰어났는데 청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특히 추월강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제자로 조통달, 최난수, 김수연 명창등이 선생의 소리를 잇고 있다. 1979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바쁜 여생을 보내다 1983년 11월 26일 많은 국악인과 팬들의 오열 속에 운명하였으며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공원묘지에서 2000. 8. 28 운봉읍 가산리 산1-12번지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