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안응칠(安應七)이었다. 16세 때 카톨릭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되고 일본이 우리 나라의 자치적인 외교권까지 빼앗자 안중근은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1906년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1907년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를 길러냈다.
그러던 중 한일신협약에 의해 우리 나라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의병 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일본국과 싸웠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30살이던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결의,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역전에서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안중근 의사는 총을 내던지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펼치고는 "대한제국 만세"를 불렀다. 피살사건에는 그 외에 우덕순, 주도선, 유동하가 함께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 러시아경관에게 체포된 안 의사는 뤼순(여순) 관동군 사령부 지방법원법정에서 6회에 걸친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검찰관 예비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 의용군사령관으로서 총살하였다>고 밝혔다.
1910년 2월14일 선고공판에서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 징역 1년3월이 각각 선고됐다.
1910년 2월 안중근은 변론을 맡던 안병찬 변호사에게 유언 '동포에게 고함'을 전달했는데, 이 글은 1910년 3월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 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느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 안중근 의사 순국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 의사는 32세의 일기로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 온 새옷으로 갈아입고 뤼순(여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고 사형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 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의 유해는 현재 뤼순(여순) 감옥 인근 언덕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는 옥중에서 쓴 <동양 평화론>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