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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기간 중에도 전남대에서 근무
증 언 자 : 김웅산(남)
생년월일 : 1940.(당시나이 41세)
직 업 : 전남대수위(현재 전남대수위)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전남대학교 문학부 건물의 경비를 하던 분으로 5월 17일 밤 계엄군이 광주에 들어온 것과 5월 18일 계엄군이 학생, 시민들을 잡아다가 종합운동장에서 구타하는 것을 목격함.
5월중 항쟁 전의 이야기
나는 전남 진도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은 지극히 소농이었기 때문에 가난하였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제 사회경험도 할 겸 해서 이일저일 여러 가지 안 해본 일이 없다. 학교 다닐 때 나의 계획은 문학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험이 있어야 문장을 구성하는 데 유리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깃배도 타고, 농사도 짓고,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중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갑종을 받아서 우선순위로 영장이 나왔다.
군대생활은 3군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군대생활 중에 울진, 삼척지구 공비 토벌작전 때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 그리고 1970년 8월 30일 제대해서 얼마 후 결혼을 했다.
우체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3년간을 출판사에서 일했다. 당시 전라남도 26개 시, 군 교육청, 또한 중학교 이상의 학교를 돌아다니며 교양도서, 학력검사지, 지능검사지 등을 판매, 수금하는 일을 하였다. 나는 얼마 후 개인회사에 있는 것 보다 공무원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원호청에 가서 의뢰를 했더니 우체국으로 발령을 내주었다. 군대에서 작전시 몸을 다쳤기 때문에 제대와 함께 보훈대상자가 되었다. 우체국에서는 저금 보험업무를 맡아보았는데 얼마 후 그 업무가 국가시책 상 농협으로 이관되면서 나도 함께 고향 단위농협으로 전직이 되었다.
1979년에 큰집 큰형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농협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농협에 있을 당시 나는 회의감이 자꾸 들었다. 진짜 농협이라고 하는 것은 농민을 위한 농협이어야 하는데 완전히 농민을 상대로 하여 장사를 하고, 농민의 피땀으로 농협을 운영하는 모순이 있었다. 그와 같은 것은 나의 생리나 주관에도 맞지를 않았다. 그때 나는 그 헐벗고 굶주리는 농민들을 우롱해 먹고살며 농협을 육성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도저히 내 양심에 농협 직원이 되어서는 안 되겠 다고 생각하고 사표를 냈다.
1979년에 농협을 그만두고 있으니까 집안의 나와 동갑인 광주 지산국민학교 이사장(김성자)이 진도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출마한다고 하여 내가 고향에서 선거운동을 맡아 면책을 하였다. 후에 당선은 안 되었지만 고향에서 득표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공적으로 지산중학교 서무과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지산중학교에서는 당시 3개월 정도 근무했다.
내가 전남대학교에 부임해 온 것은 1980년 4월 21일이었다. 부임해 오기 전 과거의 학생 데모는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서만 했다고 하는데 부임한 이후의 학생 데모는 각 단과대학별로, 또는 각과별로 모여서 중앙도서관 앞으로 총집결을 했다. 그렇게 학교 전체를 돌면서 시위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보다 훨씬 확장되었다.
'계엄령을 철폐하라!', '신현확이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일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계엄군, 전남대학교에 들어오다
1980년 5월 17일은 토요일이었는데 나는 그날 밤 문학부에서 숙직을 했다. 숙직실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밤 10시쯤 되어서 충청, 제주 일원까지 계엄령을 확대 선포한다는 자막이 TV 스크린 하단에 나왔다. '이제 완전히 계엄령을 선포해서 학생들을 때려잡을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며 걱정했다.
그때 정문에서 근무하는 채춘영이라는 본부 야간순찰이 왔다. 나는 "방금 TV를 보니까 충청, 제주 일원까지 계엄령을 확대 선포한다니 이제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해서 학생들을 전부 잡아갈 모양이네"라고 그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상대 뒤 대폿집 가서 막걸리나 한잔 하기 위해 숙직실 문을 잠그고 나갔다. 상대 뒤에서 둘이 막걸리 한 되를 마시고 나오니까 11시 55분이었다.
경영대 앞에서 정문 쪽을 바라보면 밑으로 내려다볼 수가 있다. 그때 군인들이 트럭에 탄 채로 헤드라이트를 비추면서 오고 있었다. 뒤에 차량 헤드라이트에 군인들의 철모를 쓴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본 나는 계엄군이 벌써 들어온다하면서 채춘영에게 "너는 임지로 빨리 돌아가서 근무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문학부로 돌아와서 앞문을 잠그고 텔레비전만 켜놓고 있었다. 30분이 지나니까(18일 0시 20분) 계엄군이 숙직실 창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아저씨! 우리는 계엄군인데 문 좀 열어주시오."
"여기는 출입문이 없으니 저쪽 앞으로 돌아오시오."
내가 문을 열자마자 두 놈이 달려들면서 "우리는 계엄군이다."고 말하며 총부리를 들이댔다. 그때 총은 벌써 착검이 된 상태였다. 나도 육군 상사 출신인데 착검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욱 깜짝 놀랐다. 계엄군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여기 지금 학생들 어디 있냐?"
"지금 학생들은 한 사람도 없다."
"정말로 한 사람도 없냐, 이 건물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1, 2, 3층으로 되어 있는데 학생들은 모두 일찍 나가고 한 사람도 없다."
내가 자신있게 학생은 하나도 없다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계엄군이 들어오기 한 시간 정도 전에 확인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0시 30분 정도 되었을 때 어느 여학생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와서 "아저씨,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전남대학생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었다. 당시 문학부 3층에는 인문대 학생회실이 있었다. 여학생은 "학교를 탈환하기 위해서 계엄군들이 출동을 한다."고 하면서 "3층 학생회실에 학생들 지금 있냐?"는 것이었다. 내가 있다고 하자 그 학생은 허겁지겁 다시 뛰어올라갔다. 그때 학생회실에서는 7, 8명의 학생회 간부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대강 학생회실을 보안 조치하고 전부 철수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계엄군들이 들어왔을 때 나는 자신있게 학생들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계엄군은 1, 2, 3층의 실내와 외곽으로 각각 몇 명씩 나뉘어 수색을 하였다. 나중에 전부 모여 있는 것을 보니까 계엄군 숫자는 30명 정도 되었다. 그 당시에는 벽보가 각층마다 벽에 붙어 있었다. 계엄군들은 각 벽에 붙은 것을 전부 떼어내기 시작했다. "짜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런 것이나 써 붙여!" 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벽보를 뜯어내었다.
또한 3층 학생회실에 있던 유인물을 전부 가지고 내려와서 한군데 전부 모아 놓았다. 그렇게 모아놓고 보니까 작은 차로 한 대분 정도 되었다. 계엄군은 이것을 차에 실어갔다. 그런데 그때 외곽을 돌던 계엄군 두 명이 학생 한 명을 끌고 왔다. 그 학생을 계엄군은 내 앞에 무릎을 꿇린 채 들이대었다. 계엄군은 "아저씨, 이 새끼가 학생이오, 아니오?"라고 퉁명스레 물었다.
언뜻 생각해 보니까 학생이라고 하면 좌우간 봉변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학생은 얼른 봐서 상대 증축공사장에서 일하는 이목수 아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목수는 당시 상대 증축공사를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당시 상대 3학년에 복학하기 전이었다. 이목수 아들은 군대에서 제대를 하여 2학기에 복학할 때까지 공사장에서 일손도 돕고 야간에는 공사장 옆 임시천막에서 공사장을 경비하고 있었다. 그날 밤 계엄군의 수색을 당할 때 그는 임시천막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군화발에 여지없이 두들겨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은 학생이 아니고 이 뒷동네에서 공사장에 나가는 일꾼이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계엄군은 "아저씨 말을 내가 믿습니다."고 하고는 군화발로 그 학생을 툭 차면서 "이 새끼, 빨리 가!" 하였다. 그래서 그 학생은 위기를 모면하고 돌아갔다. 계엄군은 그렇게 건물 내외부를 샅샅이 수색하고 돌아갔다.
18일 새벽 6시쯤 계엄군은 다시 재수색을 했다
당시 나와 같이 문학부에 근무했던 아주머니(상대 뒷동네에 사는 최옥영)가 학교에 계엄군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아침에 시장 나가는 길에 동네에서 사범대 교양학부 앞길로 내려오다가 계엄군을 만난 것이었다. 본부 쪽에서 전남대 내의 '프런티어 동산' 있는 쪽으로 계엄군이 새까맣게 몰려온다고(아마 아침 일찍 주변을 재수색하고 있는 계엄군이었을 것이다) 하면서 겁에 질린 채로 "아저씨! 아저씨!" 하며 뛰어왔다. 그때 나는 문학부 밖을 나와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겁에 질린 채 얼른 사범대 쪽 뒷길로 빠져나갔다.
18일 오후의 전남대 연행상황
18일(일요일)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대학원 건물 앞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내가 그쪽에 갔을 때는 상대 뒷마을에 사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대학원 건물 앞뜰에서 종합운동장을 내려다보니까 급기야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을 차량으로 싣고 들어와서 막 내리자 웃옷을 벗기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게 한 뒤 토끼뜀을 시키고 구타를 하고 야단이었다. 오는 차마다 사람을 가득 싣고 와서 내리자마자 기합을 주고 있었다. 3, 4대 정도의 군용차량이 들어왔고 잡혀온 사람은 50-60명 정도 될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잡혀온 사람들은 종합운동장의 군인들 막사와 이학부에 수용되었던 것으로 안다.
문학부를 공수부대가 점령하다
19일(월요일) 오전 10시경 공수부대 상사가 와서 문학부 숙직실이 공수부대의 상황실이 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인문대 본관(연구동)으로 가서 근무를 했다.
낮에 근무자들의 비품이 문학부 숙직실에 있기 때문에 신발을 가지러 숙직실에 갔었다. 문학부 상황실(숙직실) 안에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것 같았다. 숙직실 안에는 제일 높은 사람이 있는지, 계급이 무엇인지는 알 수도 없었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문학부 상황실 밖에 동초(움직이는 보초)를 서고 있는 사병에게 "17일 몇 시에 어디서 출발했느냐?"고 물었다. 사병은 "우리는 전라북도 00기지에서 17일 밤 10시경에 출발했는데 이곳 전남대학교에 12시경 도착한 것으로 보아 약 2시간 정도 걸렸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의 군대생활 경험이나 생각으로 미루어보아 이것은 사전에 지휘계통으로는 이미 하달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18일 0시를 기해 충북 제주일원까지 계엄령을 확대 선포한다는 TV 자막이 나온 사실로 보아). 나는 이것이 광주항쟁을 조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문학부의 계엄군 주둔상황은
19일 오전 10시경 문학부 숙직실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1개 대대 병력 정도가 문학부 1, 2, 3층에 배치되어 숙소를 정했다. 그러나 문학부로의 연행자 수용은 전혀 없었다.
19일은 다른 근무자와 인수인계를 하고 퇴근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들어 온 것은 21일이었다. 그때부터 27일까지 혼자서 문학부를 지켰다.
당시(5월 21일) 나는 방값이 싼 광산군 서창에 방을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21일은 내가 숙직이었기 때문에 걸어서 학교까지 왔다.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오후 2시경) 이미 계엄군은 철수하고 없었다. 문학부 앞에는 계엄군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메트리스 등이 문학부 어학연구소 앞에서 불타고 있었다.
21일 학교에 도착하여 근무를 하고 있는데 당시 인문대 서무과장인 주판기(현재 인문대 학적과장) 씨가 전화를 했다. "지금 밖에는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나고 도저히 겁이 나서 나갈 수 없으니까 김웅산 씨 혼자 학교를 잘 지켜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혹시 음료수나 술이 먹고 싶거든 사태가 수습된 뒤에 내가 모두 지불해 줄 테니까 상대 뒤 구멍가게에서 외상으로 갖다 먹고 학교를 잘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27일까지 계속 혼자 학교에서 근무했다.
5·18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5월 광주항쟁은 민주를 부르짖는 순수한 학생, 시민의 데모였다. 그런데 계엄군이 초기 진압과정에서 너무나 처참하게 과잉진압을 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목격 한 자녀를 둔 시민들이 "내 새끼들을 공수부대 군인들이 다 죽인다." 하고 울분을 참지 못하면서 젊은 데모대를 지원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광주항쟁을 더욱 확산되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빵이나 라면, 음료수를 갖다주고, 심지어 돈을 걷어서 경비로 쓰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광주항쟁을 맞으면서부터는 나도 민주란 것은 확실히 와야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요즈음 광주항쟁 국회청문회를 통해서 보면 그 당시 계엄군으로 왔던 지휘관들이 증인으로 나와서 자기들은 상급부대의 명령에 의해 정당하게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문하는 국회의원들에게도 상당한 모순과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놈들이 그렇게 말할 때 왜 질문을 제대로 못 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36년간 왜놈의 피압박 민족으로 있을 때도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없고 개량된 복장도 없이 무명 합바지에 머리에는 흰 수건을 쓰고 삽자루, 몽둥이, 호미, 쇠스랑 등으로 대항을 했는데.......
대한민국 군인 복무규율을 보면 "대한민국 군인은 국민의 군대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한 군인이 적도 아닌 우리 국민을,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서 총부리를 들이댔을 때, 그 옛날 왜놈한테로 합바지, 무명바지 입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 메고, 호미로, 곡괭이로 대항하던 사람들의 후손이 당하고만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총이라도 탈취해서 나도 총만 있으면 저놈을 쏘겠다는 복수심이란 것은 당연히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계엄군 지휘관을 가리킴) 같으면 그런 생각이 안 드냐라고 반문을 좀 했으면 좋겠다.
5월 광주항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히 책임자를 가려서, 4·19 때 내무부 장관을 사형시킨 적도 있지만, 사형은 안 시키더라도 그 책임자(광주항쟁의 학살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전국민에게 사과를 하고 특히 광주시민, 전남도민에게 백배 사죄하여 전국민이 살려주자고 하면 살려주고, 의법 처단해야 한다고 하면 의법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나는 문학부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 3월 1일 제1학생회관으로 옮겼다. 생활은 어렵지만 별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다. 늦게 결혼했기 때문에 아이들도 어리고 해서 막막하기도 하지만 희망을 갖고 산다. 다만 몸이 건강하니까 그것만 잘 지키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염려하곤 하지만 광주항쟁 이후 언제나 나는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이 희생을 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온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금 희생을 당하는 학생들이 이기고야 만다는 것을 확신했다. 기필코 언젠가는 데모를 하는 학생들이 승리하고야 만다는 이야기를 동료들과도 함께 얘기했다.
(조사.정리 박형호)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