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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骨 그리고 文字香
-이근배 시조론
홍 성 란
1.
"때로는 경시하고 때로는 소중히 여기는 사심이 없어야만, 그리고 때로는 증오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편견이 없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저울처럼 공정하게 내용상의 높낮이를 판단할 수 있고, 거울처럼 상세하게 표현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가 어떻게 한 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평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文心雕龍} [知音]편에서 유협이 고민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노래여 노래여} 등 그의 시조와 시 세계에 깊이 경도해온 필자로서는 공정한 저울과 상세한 거울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을 스스로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편향적인 안목으로 필자의 구미에 맞는 것만을 찬탄하며 "고집스럽게 동쪽만을 바라보느라 서쪽의 담장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 앞서게 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이근배 시조론을 펴기에 앞서 '지음'의 한 구절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것이다.
40여년 시력을 지닌 沙泉 李根培의 시조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1960년대 벽두에 '5대 일간지 신춘문예 3개 부문(시조, 동시, 시) 석권'이라는 문단 신화를 만들며 등단한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내놓은 시집, {노래여 노래여}의 서문([시간을 뒷걸음질치면서])과 시조집,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의 후기([이 땅의 시를 쓰기 위하여])에 나타난 그의 문학관과 작품 세계에 반영된 그 사상적 기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둡고 추운 시간을 살면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던 것도, 실의와 좌절 속에서 몇 번인가 나를 일으켜 세우던 것도 詩였다. 시에 대한 어떤 이념이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내 삶의 가장 치열 한 아픔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그것을 詩로 쓰고 詩로 썼다. 여기 와서 돌아보니 내가 가려는 길 은 한 백 년쯤 미래가 아니고 몇백 년 혹은 그보다 멀리 朝鮮王朝나 新羅쯤으로 시계바늘을 되돌 려 놓고 뒷걸음질치면서 詩를 쓰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事象을 抽出해서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서 오늘의 삶의 認識手段으로 삼는 일―그것이 내가 최근에 穿鑿하고자 하는 시 세계라고 공언한 일도 있다. 참으로 우리의 역 사는 무한한 문학의 자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뒷걸음질치면서] 부분)
그는 "역사 속에서 事象을 추출해서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서 오늘의 삶의 인식수단으로 삼"아야 하며 바로 그것이 그가 "천착하고자 하는 시 세계"라 공언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시에 대한 어떤 이념이나 의미를 부여하기"를 부정하는 듯 하지만,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수록한 3부([墓碑銘] [鴨綠江] [壁] [漢江橋] [普信閣鐘] [山河日記] [不毛地의 戀歌] 등)와 2부의 시편들([달빛 속의 아리아] [彼岸歌])은 우리 역사의 사실과 현상인, 전쟁의 참화와 분단현실이 가져다준 민족적 비극을 다룬 시조가 주를 이룬다. 이는 {노래여 노래여}의 해설문, [타고난 노래꾼의 詩]에서 신경림이 지적한 바, '한 시대의 짙은 어둠이 역설적으로 그 시대의 修辭를 발달시킨다'는 논리의 반영이다. 같은 글에서 신경림은 이근배를 평하여, 좌중을 완전히 압도하는 언변을 지니고 있으며 대범하고 통이 크며, 책상머리에 앉아 글줄이나 끄적거리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 한다. 또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들끓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이었으며, 정이 깊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 평가한다.
나는 그때 조국이란 낱말에 괜히 눈물 고이는 버릇을 가졌고, 그래서 詩를 쓸 때는 항상 맨먼저 떠올려져서 너무 많이 그것에 이끌렸던 일이 돌이켜 생각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상, 그리고 母國語로 詩를 쓰는 이상 조국을 떼어버리고 시를 쓰거나 말할 수는 없다는 일이다. ([이 땅의 詩를 쓰기 위하여] 부분)
이근배 시인의 이러한 면모는 단순히 가족사의 비극에서 오는 슬픔만이 아니라, 이조 선비의 憂患意識과 동궤에 있는 현실인식 태도에서 온다고 본다. 조선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사대부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임금과 나라를 걱정하고 부정적 현실을 아파하고 고민하는, 우환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이근배의 전기적 사실을 밝혀준 글 [만세소리가 마를 때까지], [신춘문예 여섯 번 당선한 재기와 감성]에 의하면, 조부는 유림들과 교분 있는 한학자였고 외조부는 최익현을 따라 순절하지 못한 것을 평생 원통하게 생각하던 면암의 제자로서 강골을 지닌 선비의 가문이다.
일제 때는 나라를 되찾아 보겠다고
해방이 되고서는 좋은 세상 만들어 보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며 처자식을 돌볼 줄 모르던
할아버지의 큰아들인 저의 애비가
어린 나이에도 몹시 자랑스러웠으니까요
제가 아비를 닮았다고요?
-[할아버지께 올리는 글월] 부분
인용된 작품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이근배 시인은 이러한 가족사와 家風 속에서 성장하였다. 당시 지식인들 다수가 좌익성향을 지녔던 것처럼 좌익의 부친은 6·25가 발발하고 9·28 수복 후 편지 한 장만을 전하고 오늘까지 終無消息인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 [門]에 의하면 "한밤중에 누가 문"을 박차고 들이닥쳐 "머리맡에 펼쳐진 공책에/ 검은 발자국이 찍"힌 후 "문을 못 믿는" 버릇이 생기게 되는데 그 연원도 이념문제로부터 산생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事象들로 하여 이근배에게 민족과 나라의 안위를 근심하는 우환의식이 자리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가 "조국"이란 낱말에 괜히 눈물이 고이고 시를 쓸 때도 맨먼저 조국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남다른 이유를 능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노래여 노래여}의 발문인 이어령의 [오르페우스의 피리]에 의하면, 이근배는 오르페우스의 피리를 지니고 있어서 깬 것은 잠들게 하고 잠든 것은 깨어나게 하는 逆說의 언어로, 우리가 시의 창조적 긴장을 체감하게 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근배의 시 세계에 몰입하여, 그는 '언어를 다스리는 시인'이라는 생각을 한 바 있다. 예리하고 호쾌한 志氣(風)와 단정하고 장중하며 정직하여, 典雅하되 화려하지 않은 수사(骨)! 이 風과 骨은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풍골이 하나로 합해졌을 때 완전하게 갖추어지고 생기발랄한 문장미({문심조룡} [風骨]편)를 이루게 되는데, 이근배의 시문에서 바로 이 風骨美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신경림이 이근배를 "재주와 덕을 함께 지닌 사람"으로 평가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재주는 무엇을 잘하는 소질과 타고난 슬기를 이르는데, 재능이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을 터이다. 재능은 氣質로부터 조성되고 기질은 그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충실하게 하고, 사상과 감정은 언어와 문장을 확립하게 한다({문심조룡} [體性] 편). 이근배 시인의 기질과 風格은 그 門中의 가풍과 한학자인 조부의 절대적 영향 아래 형성되었는데, "할아버지의 문갑 위에는 먹물이 마를 날이 없어서 먹냄새와 책냄새 속에서 자라면서" 文字香 書卷氣가 자연스레 몸에 배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문자향 서권기는 그의 작품 속에 "복고주의적 또는 상고주의적 취향(신경림)"이 나타나게 하기도 하고 [骨董街 散策]에서처럼 청화백자라든가 벼루에 관한 지대한 관심 등 古董書畵 취미를 엿보게 한다. 또 하나, "내 안에는 봉화산의 만세소리가 들끓고 있다. 이 나라 역사의 만세소리, 백성들의 삶의 만세소리 그리고 밝혀지지 않는 어둠의 만세소리…, 나는 만세소리를 다 캐낼 때까지 쓰고([만세소리가 마를 때까지])" 또 쓰겠다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그의 시가 무엇으로부터 산생되며 그 풍격이 어떠한지 짐작하게 한다.
2.
이제 [風骨 그리고 文字香]으로 이름한 이근배 시인의 정신적 면모와 개성을 작품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살펴볼 [壁]은, 시는 역사의 事象을 담아야 한다는 시인의 역사의식과 분단조국에 대한 현실인식이 표출된 196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墓碑銘] [鴨綠江] [普信閣鐘]도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노래한 전후시로서 모두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1.
鄕愁의 꽃이파리/ 피빛 피어 눈에 감겨//
어머니! 외마디 지르고/ 高地에 올라서면//
저기 저/ 祖國의 가슴을 찢어/ 줄기져 간 鐵條網.
2.
凝視 눈빛을 거둬/ 문득 작은 돌을 본다.//
입 다물어 굳었어도/품고 있는 슬픈 證言//
自由를/ 사랑한 兵士의 碑文 없는 墓石인걸.
3.
눈 쌓인 四角에서/ 불 붙이던 情熱이랑//
神話의 골짝마다/ 스며진 젊은 피도//
역겨워/ 하늘을 外面해서/ 풀꽃으로 피었는가.
4.
가슴에 손 짚으면/ 心臟은 파닥이고//
意志는 銃彈처럼/ 아득히 달려가도//
못 뚫어/ 마주 서보는/ 悲願의 門, 壁이여!
5.
歲月이란 날개 속에/ 봄은 또 오리란다.//
피 모아 쌓은 熱望/ 그날엔 끊어지리.//
무너져/ 江河가 되면/ 배를 질러 가야지.
-[壁 -休戰線에] 전문
본시 "壁"은 와 土가 합하여 만들어진 형성문자이니, 바람을 물리치려고 방을 흙으로 발라 막은 보호막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벽"은 소통과 내왕의 단절을 의미하는 장애물인 것이다. 지금, "조국" 하면 눈물이 고이고, 이념이 달라 이 땅에서 살 수 없었던 부친으로 하여 이산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시인이 "조국의 가슴을 찢어/ 줄기져 간 철조망", "휴전선" 앞에 서 있다. "자유를/ 사랑"하여 "조국"을 사수한 "병사의" 무덤 앞에 놓인 한 덩이 "작은 돌"은 "입은 다물어 굳었어도" "포성([보신각종])"이 울리던 "신화의 골짝"에서 목도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그 "작은 돌"은 "조국의 품안에서([묘비명])" 산화해간 "젊은 혼[묘비명])"의 "비문 없는 묘석"이다. "피빛" "꽃이파리"는 참혹한 전장, "눈 쌓인 사각"에서 한줌 "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던 "젊은 피"다. "파닥이"는 "심장"의 "의지는 총탄처럼" "비원의 문, 벽"을 향해 "아득히 달려가"지만 그 "벽"은 끝내 "뚫"을 수 없는, 끝내 열 수 없는 "비원의 문"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산의 아픔을 안은 채 속절없이 "날개" 단 듯 흘러가 버릴 "세월" 뒤에는 기필코, 겨레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고 "이 산하 덮인 어둠/ 구름 걷([산하일기])"고 분단의 "벽"을 "뚫어", "휴전선"을 "끊어" "눈부신/ 그 여운을 밟아([산하일기])" 희망의 "봄", 통일의 그날은 "오리란다". 그때,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무너져" 하나로 흐르는 "강하"에 "배를 질러 가"리란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포함하여 문공부 신인예술상 수상작들([산하일기] [달빛 속의 풍금])도 전후시로서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안고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조국애와 우국지심을 담고 있다.
희고 붉은 꽃이 이 산야에 다시 피다
이것들 앞에서
통곡이 받쳐 오름은
네 뿌리 淨한 피빛이
배어나는 까닭이다.
먹물 같은 역사 속에
네가 울린 목숨의 燒紙
재로 댕겨진 불, 이 저 가슴에 일고
네가 간 그 빛길 사이로 가는 行列이 보인다.
-[燒紙-어느 젊은 죽음에] 전문
[소지]는 "어느 젊은 죽음에"라 한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재와 이념의 시대({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은 시인에 의하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쓰여진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에 한 운동권대학생의 분신자살 후 올려진 진혼제를 빌어 "먹물 같은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희고 붉은 꽃이 이 산야에 다시 피"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산야"를 "피빛"으로 물들이던 "전쟁([한강교])"은 끝났지만, 우리 역사를 "먹물"로 채색하는 분단조국이라는 현실과 자유를 빼앗긴 억압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자는 전쟁의 참화 속에 산화해간 "젊은 피([벽])"처럼 억압의 시대에 "붉은 꽃"은 다시 피어 "淨한 피"를 뿌려야만 하는 현실을 "통곡"하는 것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젊은" "목숨"을 "소지"하며 신령 앞에 무엇을 빌어야 하는가. 화자는 말한다. "정한 피"가 "재" 되어 "댕"긴 "불"은 우리 앞에 "빛길"을 열고, 그 불길 옮겨 붙은 "이 저 가슴"들은 그 "빛길"을 따라 불의에 항거하는 의분의 "행렬"이 되어 떨쳐 일어나 가야할 것이라고.
[소지]는 "재로 댕겨진 불, 이 저 가슴에 일고/ 네가 간 그 빛길 사이로 가는 행렬이 보인다"고 했지만, 뒤집어 읽으면 이처럼 하나의 선동적 문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 읽기는 [주묵화]에서도 가능하다. "또는 茶山의 뜻"이라는 부제가 달린 주묵화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즐겨 그렸는데 이 붉은 빛은 부적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이다. 부적은 무엇인가. 악귀나 잡신을 쫓기 위하여 붉은 색으로 야릇한 글자나 모양을 그린 종이인데 벽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결국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왜 주묵화를 많이 그렸을까. 다산이 살던 시대는 조선후기 봉건사회가 해체되고 있던 시기로 "조그마한 것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혼란과 모순의 시대였다. 다산의 많은 한시를 비롯한 글에는 토지제도의 모순으로 빚어진 지주와 전호의 갈등, 삼정의 문란과 탐학한 관리들의 횡포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비판하여 당대 현실의 모순과 갈등, 부정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다산은 {與猶堂全書} [寄淵兒]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임금을 사랑하거나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고,
시대를 아파하거나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진실을 찬미하고 허위를 풍자하며 선을 드러내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不愛君憂國, 非詩也, 不傷時憤俗, 非詩也, 非有美刺勸懲之義, 非詩也)
시는 다만 자기의 독백이나 감정의 분식이 되어서는 안 되고, 민중의 고통과 시대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애국연민사상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둠을 갈고 어둠을 갈다 보면
검은 먹빛 속에 피가 스밀 때가 있다
백성의 타는 뜻일랑 붉은 먹으로 쓴다.
흰 창호지에 蘭도 山水도 붉은 빛깔이다
댓돌 밑에 엎드려 삼 년을 울어도
王朝의 크나큰 아픔을 누가 값하랴.
갓 쓴 놈, 벙거지 쓴 놈, 패랭이 쓴 놈,
푸줏간 고기는 모두 한 斤씩이다
흰 옷의 갈기를 세워 旗를 올려라, 旗를 올려라.
-[朱墨畵] 전문
"검은 먹빛"으로 겹쳐지는 "어둠"은 시대의 사악한 기운이다. 시대적 제 모순과 갈등, 탐관오리의 횡포는 "백성의 타는 뜻"이 "피"처럼 엉기게 하는 "어둠"이다. 시인은 주묵화를 그리는 다산의 뜻을 우리 시대상황에 겹쳐놓고 있다. "먹"을 "갈다 보면" 뭉클뭉클 불어나는 먹물을 보면 그 먹물이, 학정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울분이며 끓어오르는 "붉은" "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끓어오르는 울분은 "붉은 먹"으로 풀어쓰는 것이다. 다산의 시대, "왕조의 크나큰 아픔"인 역사의 오류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반복되고 있다. 봉건군주시대나 국민주권의 자유를 표방하는 오늘 이 시대에서 '평등'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갓 쓴 놈, 벙거지 쓴 놈, 패랭이 쓴 놈"에게 '평등'은 모두 평등한가. "푸줏간 고기는 모두 한 근씩"이라는 언표는 푸줏간 고기는 모두 한 근씩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이다. 평등한 나라는 평등을 애써 말하지 않는다. [주묵화]의 이 발언은 다산의 [哀絶陽]을 상기하게 한다. "시아버지 장례 치르고 갓난아긴 젖먹이는데(舅喪已縞兒未 )/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三代名簽在軍保)"으니 군포를 낼 수 없는 가난한 백성은 소마저 빼앗긴다. 급기야 "아이 낳은 죄라고 남편이 한탄하더니(自恨生兒遭窘厄)/ 칼을 갈아 들어간 뒤에 방에는 피가 흥건(磨刀入房血滿席)"해진다. 다산이 이 이야기를 듣고 지은 시가 [애절양]이다. 가난한 백성은 부당하게 군적에 올라 감당할 수 없는 군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하는 비참한 삶을 연명하는데 "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豪家終歲奏管絃) 쌀 한 알 베 한 치도 바치지를 않으니(粒米寸帛無所捐), 다 같은 백성인데 공평치 않(均吾赤子何厚薄)"음을 한탄한 작품이다. [주묵화]의 "갓 쓴 놈, 벙거지 쓴 놈, 패랭이 쓴 놈,/ 푸줏간 고기는 모두 한 斤씩"이라는 반어나 [애절양]의 "다 같은 백성인데 공평치를 않"다는 인식은 모두 당위적 평등의식의 소산이다. 그리하여 맑고 곧은 선비정신은 의분에 차 "흰 옷의 갈기를 세워 기를 올"리라 외친다. 일어나 불의와 비리, 탄압과 고통의 "어둠"을 떨쳐버리라 외친다. 이러한 개혁 또는 혁명으로 가는 선동성은 모두 애국연민사상, 사대부의 우환의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목 잘린 甁에 갇혀
날지 못하는 한 마리 鶴
그 朝鮮王朝의 울음
끼룩끼룩 울고 있다.
그렇지
또 한 번 바스라져도
목청이야 살을 테지.
나이가 들수록
새살 돋는 靑華白磁
어둠을 씻고 나면
말갛게 뜨는 하늘
역사는 금이 갈수록
값을 되려 더 받는다.
-[骨董街 散策] 전문
[골동가 산책]은 이근배 시인에게서 은은히 우러나는 문자향 서권기의 연장선에 있는 고동서화 취향을 오롯이 드러낸 작품이다. 사실 우리는 시인이 인사동 거리를 산책하다 우연히 "목잘린" "청화백자"를 만난 것인지, 아니면 내실에서 "조선왕조의 울음/ 끼룩끼룩 울고 있"는 "한 마리 학"이 그려진 "청화백자"를 품에 안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시대는 갔어도 그 가치는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나이가 들수록/ 새살이 돋"아 나며 "금이 갈수록/ 값을 되려 더 받는다"는 사실이다. 세월은 흘러 "역사"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역사"는 남겨진 "역사"에 "금"을 더해가겠지만 그럴수록 고귀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어제의 낡은 것은 미련 없이 폐기처분해 버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에, 다투어 새롭고 신기하고 편리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첨단과학의 시대에 오랜 세월을 안고 묵묵히 역사를 증언하는 골동품은 희소가치 외에도 범접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 이상의 그 무엇이 들어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라는 이름의 과거로 다시는 회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1.
어디서 실낱 같은 물소리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一世를 끊긴 바람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한 그런 向土性 피톨들이 내 전신을 감싸 돈다.
때로는 밤이면 高麗나 朝鮮의 빛깔 고운 그릇을 찾아 古蹟을 헤매기도 하고 사랑을 먹물처럼 진하게 갈다가는 어느새 빈 벼루만 남긴다.
2.
출렁거리나니
이토록 내 안에 海溢하나니
속잎 트거라
사랑의 눈물 거두고
비, 눈 또 바람되어 우는
너 이 봄에 다시 피거라.
-[錯綜] 전문
도대체 시인의 마음에 복잡하게 뒤얽힌 것들은 무엇일까. 시인에게는 왜 근원 모를 "실낱같은 물소리"가 들려오고 시인 앞에는 왜 "일세를 끊긴 바람"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일까? 사실 시인은 "고려나 조선의 빛깔 고운" 역사를 찾아 "고적을 헤매기도" 한다. 1973년, 소지왕릉으로 추정되는 천마총발굴 현장에서 "신라 어린 계집애 벽화의 울음소리([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를 듣는 것도 그러한 역사 현장체험의 소산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근원을 {노래여 노래여}의 서문인 [시간을 뒷걸음질치면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의 역사는 무한한 문학의 자원"이라고 생각하므로 그는 역사의 事象을 파헤치고 追究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그 자원(역사의 사상)을 마음껏 활용하고 유린하는 일이 나만의 특허권인 양 자못 흥분하고 탐욕스럽게 달려든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렇다. 그의 "내 안에 해일"하는 것은 그토록 "출렁거리"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사랑"이다. "고적"의 흙 속에 묻혀 있는 "고려나 조선의 빛깔 고운"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다. "향토성 피톨"은 시인 안에 뻗쳐오르는 그 "사랑"의 기운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빈 벼루만 남"겨질 지라도 그 "사랑의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착종]은 지금까지 이근배 시인의 작품세계에서는 낯선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사설의 형태를 보이고 '2'는 평시조 형태이다. 시인에 의하면 1970년대 초에 이미 한 작품 안에 사설시조와 평시조를 혼합하여 혼합형 연시조를 썼으며 당시, 어느 세미나 석상에서 혼합형시조의 미래를 전망한 바 있다. 그러나 '1'을 살펴보면 그것이 과연 사설시조의 형식요건에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현재 사설시조의 형식과 미학적 특질을 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현대사설시조 창작의 지표로 삼는 시인을 찾아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사설시조의 형식과 미적 특질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1) 통사의미론적 연결고리를 이루는 3개의 장(초·중·종장)으로 하나의 시상을 완결한다.
2) 각 장은 4개의 통사의미 단위구로 구성하되 각 단위구는 2음보격으로 엮어 짜는 길이의
융통성을 갖는다.
3) 시상의 전환과 완결을 위해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시키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상으로 늘여 변화를 준다.
이와 같이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형식적 정체성을 이어받아 초·중·종 3장으로 이루어진다(사설시조의 정형성). 그런데 평시조의 각 장은 4개의 음보(마디)로 이루어지지만 사설시조는 4개의 통사의미마디로 이루어진다. 이때, 4개의 통사의미마디는 2음보격 연속체로 이루어지며 그 길이는 상당 정도 늘어날 수 있는데(사설시조의 비정형성), 대체로 중장이 많이 늘어나는 형태를 보인다(사설시조는 종장도 확장될 경우가 허다한데 이 경우 종장 첫마디의 3음절 준수는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둘째 마디의 5음절이상 유지라는 규칙은 말이 많아지는 환경 속에 있으므로 별 의미를 갖지 못하며, 2보격으로 늘여나가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통사의미마디란 통사론적 혹은 의미론적으로 구분되는 단위구를 말하는데, 아무리 말이 많은 사설시조도 4개의 통사의미단위구로 구성된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이 4개의 통사의미마디에 대한 구분은 개별 작품마다 통사적으로, 율격적 호흡으로 분단하되 가장 우선되는 것은 의미의 응집력에 의한 구분이다. 사설시조의 미학은 사설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2음보격 연속체로 말을 재미있게 엮어 짜나가는 데 있다. 이근배 시인은, 시와 시조를 함께 쓰고 있기 때문에 사설시조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함부로 쓰여지는 사설시조를 경계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단 한편의 사설시조가 있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사설시조의 형식과 미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한 작품,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을 살펴보자.
돌엔들 귀 없으랴/ 천년을 우는 파도 소리, 소리……./ 어질머리로다, 어질머리로다,/ 내 잠 머리 맡의 물살을 뉘 보낸 것이냐.//
천년을 유수라 한들 동해 가득히 풀어놓은 내 꿈은 阡의 용의 비늘로 떠 있도다./ 나는 金을 벗 었노라, 머리와 팔과 허리에서 新羅 文武王 그 榮華 아닌 束縛, 安存 아닌 고통의 이름을 벗고 한 마리 돌거북으로 귀 닫고 눈 멀어 여기 동해 바다에 잠들었노라./ 천년의 잠을 깨기는 저 天馬 炤知王陵의 부름이었거니 아아 살이 허물어지고 피가 허물어져 불타는 저 新羅 어린 계집애 벽화 의 울음소리,/ 사랑의 외마디 동해에 몰려와 내 귀를 열어,//
大王巖/ 이 골짜기에/ 나는 잠 못 드는/ 한 마리 돌거북.///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전문
시인은 장의 구분 없이 행만을 바꾸어 썼지만, 이 글에서는 작품을 인용하면서 먼저 3장을 구분하고, 중장에서 한 연으로 이어쓰기를 하여 사설시조의 형식적 특징인 2음보격 연속체라는 사설 엮음의 계속성을 드러내었다. 또한 빗금으로써 각 장을 4개의 통사의미마디로 구분하고(/) 초·중·종 3장의 구분을 하였다(//, ///).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은 빗금 친 바와 같이 각 장을 4개의 통사의미마디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설시조의 형식요건을 정확히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한 음보가 대개 3∼4음절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작품의 각 마디를 채우는 음량은 다소 늘어나 있는데, "문무왕"의 죽음과 순장된 "신라 어린 계집애 벽화의 울음소리"라는 비극적 사실을 끌어와 음량이 큰 2음보격 연속체로 사설을 엮고 있다. 이 작품은 평시조의 4보격에서 태생된 '4보격성 2보격'으로, 유장한 느낌과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설시조의 특성상, 2음보격 연속체로 말을 많이 엮어나가는 풀이의 형식을 지녀 感傷에 빠지지 않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역사의 사상"을 "마음껏 활용하고 유린"하듯이 "자못 흥분"된 어조로 거침없는 "물살"에 실어 유장한 서사를 풀어내기 위해 사설시조라는 형식을 선택한 것이다.
"동해 바닷속 돌거북"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자신이 죽은 후에 화장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겠다는 대왕의 유언에 따라 바다 한복판에 만들어진 이 수중릉을 역사는 "대왕암"이라 부른다. 우리는 대왕의 고뇌와 번민은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삶은 "영화"와 "안존"의 나날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문무왕"은 살아 "왕"으로 군림하는 동안이 오히려 "고통"과 "속박"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이제 이승의 삶을 다하여 "귀 닫고 눈 멀어" 왕의 짐을 "벗고" "동해 바다"에 잠들었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도소리", "머리맡"에 밀려드는 "물살"로 하여 아직도 "어질머리"를 앓는다. 오늘토록 "어질머리"를 앓게 하는 그 "천년을 우는 파도소리"는 "천마총 소지왕릉"에 순장된 "벽화의 울음소리"였던 것이다. 소지왕의 시대와 문무왕의 시대는 200년이나 되는 역사적 相距가 있었건만, 살아서 듣지 못한 억울한 원혼, "벽화의 울음소리"를 죽어서 "동해 바다속의 돌거북"이 되어 "천년"을 듣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상상력에서 우리는 그의 志氣와 장중하고 전아한 아름다움, 風骨美를 느낄 수 있다.
사실 역사의 사상에서 소재를 얻고 상상력을 펼치는 건 이근배 시인만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미당 서정주 시인은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新羅抄}, {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 외에 수많은 시편들을 남겼다. 이근배는 미당과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사제의 연을 맺게 되고, 그의 첫 시집({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의 서문을 미당에게 받은 바 있다. 미당과 이근배 시인의 영향관계는 시인의 시작노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당 선생의 여러 시구들을 따서 재구성한 것"이라는 3수의 연시조 [未堂]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미당의 시 중에는 [志鬼와 善德女王의 艶史]와 [선덕여왕의 말씀]이 있는데, 이에 시인은 [지귀]로써 화답한다.
산과 물을 다 흔들어 봐/ 나만큼한 사랑 있나//
허드레 풀꽃만 줍는/ 청맹과니 눈으로는//
가슴속 달은 못 보고/ 히죽히죽 웃음만 보지
善德은 나더러/ 밤에만 오라고 했다//
밤에만 몰래 와서/몸의 불을 꺼 달라 했다//
살과 뼈 검정이 되어/ 나는 낮도 밤이었다
죽어서나 갖는 거/ 살아서는 못 갖는 거//
살아서도 죽어서도/ 불이 되어 만나고 있어//
한 세상 태우고 남을/ 해보다 큰 사랑으로
-[志鬼] 전문
"선덕여왕이 이뿐 데에 반해서/ 지귀라는 쌍사내가 말라 간단 말을 듣고/ 여왕께서 [절깐에서 만나자]([지귀와 선덕여왕의 염사])" 한다. 절깐에서 기다리던 지귀는 그만 돌탑에 기대어 잠이 들게 되는데, 여왕은 "살[肉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팔찌를 그 가슴 위에([선덕여왕의 말씀])" 올려 놓고 간다. 사람들은 지귀에게서 "가슴속 달은 못 보고/ 히죽히죽 웃음만 보지"만 {三國遺事} [紀異]편에 미래의 일을 예견했다는 [선덕왕의 知幾三事]가 전하는 것처럼 범상치 않은 여왕은 이 범상치 않은 사내 지귀에게 어떤 "大人氣質([지귀와 선덕여왕의 염사])"을 느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상상력은 "밤에만 몰래 와서/ 몸의 불을 꺼 달라"는 선덕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지귀는 "선덕이 준 금팔찌를 안고 죽어서 불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지귀는 사실 "살아서는 못 갖는", "죽어서나 갖"을 수 있는 짝사랑을 한 대가로 "불이 되어"서 역설적으로 "한 세상 태우고 남을/ 해보다 큰 사랑"을 갖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듯 미당과 같이 신라적 상상력에서 비롯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으로 또 [사뇌가]를 들 수 있다.
1.
피는 꽃 보는 일도/ 내게는 왜 슬픔인가//
눈 멀어 봄 놓치고/ 사랑도 다 놓치고//
강물만 휑하니 돌아가는/ 제 그림자도 놓치고
2.
어젯밤 만삭이던 달/ 오늘 저 몰골 좀 봐//
보름날밤 풀어헤친/ 저 산들 왜 휘청거려?//
봄 한 철 지나고나면/ 둥치 째 뽑히는 울음
3.
세상 건너는 길/ 어디 하나 뿐이겠나//
그렇듯이 사랑도/ 외길만은 아닌 것을//
불지펴 살 내리는 가슴/황사바람만 불고 있다.
-[사뇌가] 전문
"사뇌가는 향가의 딴 이름인데 어쩐지 그 뜻이 '사랑노래'로만 새겨져 아끼던 제목인데 한번 붙여 보았다"는 [사뇌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피는 꽃 보는 일"도 사랑 없이는 볼 수 없다. 그것에 가 우리의 "사랑"하는 눈이 머물지 않는 한 "눈" 먼 사람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놓"쳐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철없이 "만삭"의 "달"처럼 부풀어 가까이 있는 "사랑"을, 소중한 그 무엇을 깨닫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렇게 우리의 정신이 멀리 헤매는 동안 꽃피는 "사랑"의 "봄 한 철"이 "지나고나면", 마음을 "둥치 째 뽑히는" 회한의 "울음"을 울어야만 하리라. 그 "울음" 뒤에 슬픈 "몰골"이 되어 "세상 건너는" 또 다른 "길"을 마련해야 하리라. [사뇌가]는 "세상 건너는 길" 가운데 하나를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내 곁에 절로 "피는 꽃"도 내 "사랑"의 "눈" 없이는 결코 볼 수 없다고.
한세상 살다가
모두 버리고 가는 날
내게도 쓰던 것
주고 갈 사람 있을까
붓이나 벼루 같은 것
묵은 시집 몇 권이라도
다리를 찍으러 가서
남의 아내를 찍어온
나이든 떠돌이 사내
로버트 킨 케이트
사랑은 떠돌이가 아니던가
가슴에 붙박혀 사는
인사동 나갔다가
벼루 한 틀 지고 온다
글쓰는 일보다
헛것에 마음 뺏겨
붙박힌 사랑 하나쯤
건질 줄도 모르면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전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사랑을 소재로 한 최근의 작품이다. 사진작가 로버트 킨 케이트는 로즈먼즈 브리지를 찍으러 가서 프란체스카를 만난다. 남편과 아들 딸이 나흘간 집을 비운 동안 그들의 나흘간의 사랑은 이루어진다. "붙박힌 사랑", 무미건조한 일상의 반복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프란체스카는 로즈먼즈 브리지를 묻는 로버트를 위하여 그곳까지 동행하고, 다음날 '흰나방이 날개짓할 때쯤 저녁식사를 하러 오'라고 초대한다. 서로에게 이끌리는 감정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확실한 감정'이 되고 그들은 마침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머니, 프란체스카의 유서에서 어머니의 불륜을 알게 된 아들과 딸은 분노한다. 그러나 곧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로버트가 프란체스카에게 보낸 유품을 보고, 살아있는 동안은 가족을 위해 바쳤다면, 죽어서는 나흘간의 사랑, 로버트를 위하여 바치고 싶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받아들여 뼛가루를 로버트와의 추억, 로즈먼즈 다리에 뿌려준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슴에 붙박혀 사는" "사랑" 쯤으로 사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그 "사랑"이 "떠돌이"라니? 우리 "가슴"에는 "사랑"이 "붙박혀" 있어야 하는데, "사랑"을 "떠돌이"라 함은 "붙박힌 사랑"은 세월이 흐르면 시들어버린다는 말은 아닌가. 변한다는 것은 아닌가. 로버트 킨 케이트는 말한다. 변화를 받아들인다면 위안이 된다고.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프란체스카처럼 사랑을 시들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게 하기 위해서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말인가. 로버트처럼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그들의 사랑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사랑으로 추억되는 것은 보내고, 떠났기 때문이다. 시인은 로버트 킨 케이트처럼 "세상" "버리고 가는 날" "내게도 쓰던 것/ 주고 갈 사람 있을까" 마음으로 묻는다. 로버트 킨 케이트가 프란체스카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처럼 시인은 "벼루"라는 "헛것"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그는 "벼루의 황제"임을 자처한다. 시인에게 "글쓰는 일"이 "가슴"에 "붙박"힌 "사랑" 같은 본질적인 일이요, 본업이라면 "벼루" 수집 같은 고동서화 취미는 "헛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붙박힌 사랑 하나쯤/ 건질 줄도 모"른다는 말은 그래서 시다운 좋은 시 한편 쓰지 못했다는 내성의 목소리로도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스스로 "벼루 귀신에게 씌"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농부가 논밭에서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 듯, 문인은 벼루에 먹을 갈아 시문을 경작한다는 것이다. 벼루는 또한 좋은 돌에 뛰어난 조각이 있어 예로부터 궁실이거나 신분 높은 문사들이 안상에 놓고 귀하게 쓰던 것이었으니 문자향 서권기가 가득 넘쳐나며, 거기서 마음과 몸을 맑게 하는 기운이 샘솟고 결국 벼루는 시인에게 글감 찾기의 광맥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大靜에 가서/ 秋史를 만나고 싶다//
아홉 해 유배살이/ 벼루를 바닥내던//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그 먹빛에 젖고 싶다
획 하나 읽을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높은 神筆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
歲寒圖 지지 않는 슬픔/ 또 어찌 헤아리며
사랑도 스무 해쯤/ 破紙를 내다보면//
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을 찾아질까//
不作蘭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까
-[不作蘭-벼루읽기(4)] 전문
[부작란]은 벼루가 글감 찾기의 광맥임을 바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정"은 추사 김정희가 55세 되던 해 당쟁으로 귀양을 떠나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제주도는 유배지로서는 가장 험한 곳으로, 추사는 거기서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가둠을 당하는 圍籬安置라는 형벌을 받았다. 화자는 "획 하나 읽을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다. 그 "까막눈"이 "다시 대정에 가서/ 추사를 만나고 싶다" 함은 추사가 "유배살이" 중에도 "벼루를 바닥 내던" "신필"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 "신필"의 경지를 "헤아"려 화자도 그 경지에 다다르고자 함이다. "부작란"은 난을 아끼던 추사의 그림인데 화려한 추사의 서체와 여러 개의 낙관이 찍혀 있다. 추사는 이 "부작난"을 스무 해 만에 그렸다는데, 난 잎새는 무엇에 저항이라도 하듯 휘어져 있지만 힘차게 뻗쳐 있다. 이 그림의 기개는 "유배생활" 중의 추사의 심경을 표상한 "세한도"의 풍격과 함께 화자에게는 "넘겨"보고 싶은 "신필"의 경지인 것이다. 그리하여 추사가 "부작란"을 치듯 화자도 "스무 해쯤/ 파지를 내다보면" "사랑도" "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세속의 사랑 그것이 아니라, 대상에 천착하는 정신, 그 기개일 터이다.
3.
1960년대 벽두 문단의 기린아, 이근배 시인의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에 수록된 작품들, 그리고 최근에 발표한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는 은은한 文字香 그리고 風骨美를 느끼게 된다. 그의 수사는 화려하지 않으나 전아한 아름다움이 있고 예리하고 호쾌하지만 겸허하고 정직한 맛이 있다. {문심조룡} [풍골] 편은 이를 풍골미라 이른다. 이러한 시인의 풍격은 강골의 선비 기질을 지닌 가풍 속에서 형성되었다.
시인은 역사 속에서 事象을 추출해서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오늘의 삶의 인식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사상을 다루고 있는 그의 중량감 있는 작품세계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의 아픔이 겹쳐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적 사상이거나 청화백자 같은 유물이거나 고동서화이거나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거울이 된다. 이근배 시인은 스스로 "벼루의 황제"라 할만큼 벼루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데, 실제로 그의 많은 작품들이 벼루를 차용하고 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문자향 서권기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시인의 기개를 표상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벼루는 맑고 곧은 기개의 始原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를 감화시키는 풍골미와 은은한 문자향을 그의 작품세계에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근배 시조를 논하면서 그의 단 한편의 사설시조인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을 지나칠 수는 없다.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사설시조의 형식과 미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일찍이 그는 1970년대 초에 이른바 혼합 연형시조인 [착종]을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가볍지 않은 실험정신을 함께 엿볼 수 있다.
시력 40년이 넘는 그에게 단 한 권의 시조집만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작품에 신중을 기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의무방어처럼 가끔 발표하지만 시조집으로 묶어내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종국엔 시조로 돌아오겠다는 그는, 물론 시조를 쓸 때는 시조의 가락이 나오고 사설시조를 쓸 때는 사설시조의 가락이 나오지만, 자유시를 쓰되 한번 더 달여서 시조로 다듬는다 했다. 이제 우리는 그에게 진한 문자향, 풍골미가 넘치는 또 한 권의 시조집을 기대하는 것이다. ★
*** 원문에는 12개의 각주가 달려 있다.
<<유심>> 2002년 겨울호 <시조대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