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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별 임태수 교수 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 편, 『제2종교개혁과 민중신학』(한들출판사, 2007), 421-437에 수록.
‘오직 행함으로(Sola Opera)’의 기독교 교육에 관한 소고
- 루터, 선교의 세기, 한국기독교의 모델을 중심으로 -
김동주
(호서대 교수)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동시적 위기를 모두가 이야기한다. 지난 1백년 동안 이 땅에 개신교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 빠르게 성장을 해온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세기말부터 한국 교회는 성장이 멈추고 정체에 들어가고 심지어 사회 전반에서 제기되는 도전으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많은 지표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마도 성장의 과정에서 초기 한국 교회가 가졌던 민족 사랑과 사회 속에서의 실천을 재현하지 못하는데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기독인들의 사회적 책임과 참여가 크게 격려되지 않는 신학적 분위기 또한 교계 내에 은연중 흘러왔다. 때문에 한국 사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책임도 한국 교회에 상당부분 있음을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혹자들은 한국 교회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구호를 너무 강조해서 행함이 결여되는 현상을 가져왔으며 아울러 사회적 참여가 부족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 한다. 또 종교개혁이란 중세교회만을 개혁시킨 신학적 종교적 사건인 것으로 국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사회의 위기는 결코 종교개혁자들의 구호 때문은 아니다. 종교개혁은 신학적 사건을 넘어선 실천적 사건이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구호는 결코 ”오직 믿음으로“의 수준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고 또 이것이 그들 사상의 전체가 아니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 만큼 철저히 “오직 행함으로(sola opera; deed alone)"을 구호를 강조한 인물들도 기독교 역사에서 드물다. 그들의 삶은 신앙과 실천 양자에 관해 교회의 역사의 최고 모델로 제시될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에 전래된 초기 개신교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초기 한국기독교는 육체와 정신, 영혼을 모두 구원키 위한 전인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와 민족의 개조를 위한 전방위적 실천들을 행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 교육에 있어 한국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본고는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개신교 신학의 원리들을 재 진술하고자 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집중하고자 한다: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형성한 마르틴 루터의 사상은 오직 은혜인가 오직 행함인가? 이 두 주제는 어떠한 신학적 상관성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루터의 실천적 사회참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 of Mission)"로 불리는 19세기 선교 사역에서의 ”오직 행함으로“의 구호는 어떻게 실천되었는가? 마지막으로, 한국 개신교 초기 전래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 양상과 동기는 어떠한 것들이었는가?
II. 잊혀진 종교개혁 구호: “오직 행함으로(sola opera)”
A. 중세의 선행과 루터의 선행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면죄부 게시로 개신교의 복음은 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만” 또는 “오직 은혜로만”의 구호는 개신교의 대표 구호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개신교는 거짓된 신앙을 참 신앙에로의 재 진술한 것 뿐 아니라, 참 생활의 변혁을 주고자한 사회 참여적 성격이 전제 되어 있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활동에 바로 이 두 가지 측면이 노정되어 있다. 이는 바로 마르틴 루터의 사상과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그의 가장 대표되는 사상인 ‘소명론’과 ‘두 왕국론’을 살펴보자. 루터는 1520년 발표한 “개혁을 위한 독일귀족에게 고함(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이라는 논문에서 ‘하나님의 일,’ 즉 소명에 대한 개념을 밝히고 있다.
이는 개혁사상의 근간이 이었으나 오늘날은 그 의미가 계승 전달되지 못하는 감이 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일이란 ‘교회에서의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주장하였다(LW 44:130). 예배나 전도, 교회 성장과 관련한 것들만이 "영적인(spiritual) 일“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에서 우리가 취하는 직업과 가정에서의 일들 역시 똑같은 영적 가치를 갖는 하나님의 일이다고 루터는 믿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는 사실 바로 이 루터의 신학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 자체가 루터에게 있어서는 이미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사회적 개선을 위해 여러 활동과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단순한 대 사회 봉사차원을 넘어 이미 루터에게는 신적 소명의 일로 분류된다.
한국 기독교의 신앙과 교육에 있어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개신교 신학의 근본을 형성한 이 부분에 대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수직 성직제 중심의 중세 사회에 대항하여 루터는 보통 사람들이 하는 사회에서의 일과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의 개선 노력이 바로 교황이 하는 일과 같은 영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보았다(LW 44: 252-261). 바로 이점에서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은 역사상 존재한 어느 시대의 기독교보다도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막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루터의 사상에서 개신교 신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두 왕국론(Idea of Two Kingdoms)'이다. 전통적인 중세의 이원론적 사고에서는 헬라의 플라톤 철학의 영향아래 성과 속을 구분하였다. 즉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영적 영역을 하나님께 속한 부분으로, 그리고 세상을 중심으로 한 가시적 영역을 육과 악에 속한 영역으로 중세인들은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루터에게 있어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이러한 관점과는 전혀 다른 두 왕국이론을 주장하였다. 영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이 모두 하나님의 양손이라고 보았다(LW45: 88). 즉, 하나님은 교회를 통한 복음의 왕국을 다스리고 주관하실 뿐 아니라 세속 왕국 역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고 사용하시는 영역이다.
영적인 왕국에서는 복음이 규범이고, 세속의 왕국에서는 율법이 규범이다. 영적 왕국의 최고 가치는 사랑이고 세속왕국에서는 정의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왕국의 시민이다. 그러나 동시에 세속 왕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루터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라는 주제 자체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이다. 더 정확히 진술 하자면, 기독교 복음 자체에 사회 참여가 있다고 하기 보다는 사회를 떠나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없으므로 이들이 하나님의 왼손 왕국인 세상 사회에 단순한 참여 이상의 책임적 존재로 살아가야 함을 루터는 역설하고 있다.
루터는 영적 왕국의 표제가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이지만, 세속 왕국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표제가 ”오직 행함으로(sola opera)"임을 주장한다. 수세기 동안 개신교는 그 자체의 기반이 되어온 루터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이 부분을 자주 망각하였다. 흔히 개신교가 “오직 은혜와 믿음”이라는 구호에만 세워진 것으로 단정하고 영적 왕국에서 적용되는 이 주제를 세속 왕국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까지 적용하여 “행함”을 배제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까지 영향을 끼쳐 종교개혁 신학에 대한 미숙한 오해를 갖게 하고 세상과 삶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시각을 초래하였다. 교회 지상주의아래 인간의 공로를 통한 구원을 신봉한 중세 교회의 신학에 대항하여 루터는 바로 그 인간의 선행의 위치가 영적 왕국이 아닌 세속 왕국에서 속한 절대 규범임을 주장하였다.
루터의 3대 논문 중 꽃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On Christian Liberty)"라는 논문에서 이 비텐베르크 개혁자는 바로 ”오직 은혜“와 ”오직 선행“을 수없이 주장한다. 그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우나, 육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의 종이라는 이중적 역설을 진술하였다(A Christian is a perfectly free lord of all, subject to none. A Christian is a perfectly dutiful servant of all, subject to all. LW 31: 344). 영적으로 ”오직 은혜“아래 모든 신앙인들이 자유함을 얻었으나 이것은 엄연히 영적 왕국에만 국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인들은 하나님의 왼손 왕국인 사회 속에서는 ”오직 행함“의 존재로만 살아야 함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존재 속에 갇혀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이웃 안에서 (in Christ and in his neighbor)사는 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LW 31: 371)."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루터와 중세 가톨릭은 선행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랐다는 것이다. 중세의 공로사상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선행(bona opera)"이라는 개념은 ‘좋은 일(good deed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 좋은 일들 (works that are good to your salvation)을 가리킨다. 구원의 성취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인간은 '초보의 믿음 (unformed faith)'에서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믿음인 '온전한 믿음 (formed faith)'의 수준으로 진보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행으로서의 믿음 (faith as a process)을 위해서는 선행(good works)의 실천이 구원의 필수적 조건이었다. 중세신학이 제공하였던 다양한 '선행' 프로그램들의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예배 (Mass), 자발적 가난 (voluntary poverty), 기도 (prayers), 묵상 (meditation), 금식 (fasting), 유물의 소유 (possessing of relics), 유적지 순례 (making of pilgrimage), 자선 (charitable works), 그리고 독신 서약 (celibacy) 등을 들 수 있다.
중세에는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과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Facere quod in se est: do your best to achieve your salvation)는 신념 속에 인간들은 항구적이고 순환적인 선행의 프로그램들 속에 놓여 있었다(Tentler 1977, 80-94). 루터는 이러한 중세의 선행 개념을 부정하였다. 선행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이웃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의 행위임을 강조하였다. 즉, 루터는 선행의 진정한 개념과 위치를 제시하였고, 자연적으로 개신교 신학은 출발점부터 세상에 대한 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속의 이웃이 바로 섬김과 선행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종교개혁 신학에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 명제가 자리하고 있다. 성과 속의 이원론적 구분의 패러다임을 바꿔 사회적 환경 속에서의 기독교적 삶이라는 관점에서의 신앙이 형성되어져야 함을 개혁자들은 주장하였다.
B. 공동금고: Sola Opera의 상징
1522년 종교개혁 초기에 이미 루터는 자신이 사역하던 비텐베르크 시에 사회 개혁을 위한 여러 규정을 마련하였다. 교육, 경제, 빈곤 등의 이슈에 대한 많은 그의 논문들이 쏟아졌다. 루터는 1524년 “기독교 학교를 설립 유지하는 모든 독일 도시 의원들에게 고함(To the Councilmen of All cities in Germany That They Establish and Maintain Christian Schools)”이라는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이 교육 개혁운동이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종교개혁의 산적한 현안들 가운데서 루터는 독일의 모든 도시에 학교를 설립해야 함을 가장 먼저 강조하였다.
실천적 사회 개혁을 위한 여러 노력 중에서 빈곤문제에 대한 루터의 대응을 살펴보자. 루터는 이에 대한 답 중 하나로서 공동금고를 제안하였다. 금고재정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줄 물품과 양식을 구입하였고, 가난한 노동자와 빈곤 계층의 소상인들에게는 싼 이자로 대출해 주었다. 고령자와 병약자들을 구호하기 위한 기금도 지출되었다. 새로운 이주자가 아무 재산 없이 마을로 오게 되었을 때 약간의 정착금도 금고에서 지불하였다. 가난한 집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때로는 지참금이 없는 저소득층 집의 딸의 혼인 행사를 위해서도 보조금을 금고에서 보조하였다. 만약 공동 금고의 재정이 떨어지게 되면, 즉시 마을 관리들은 주민들에게 재정 충당을 위한 세목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공동금고를 통해 빌린 돈으로 많은 빈곤 계층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거의 모든 마을이 이 공동금고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루터는 부유한 이들의 부정직한 축재 방법에 큰 비판을 하였고 빈곤을 야기 시킨 사회구조 또한 함께 공격하였다(Lindberg 1996, 112). 이 개혁자는 1519년 “고리대금업에 대한 짧은 설교(Short Sermon on Usury)”를, 1년 후 “고리대금업에 대한 긴 설교(The Long Sermon on Usury),”와 “선행에 대한 논문(Treatise on the Good Works),” 그리고 “독일 귀족에게 고함(To the German Nobility)” 등의 여러 저술을 통해 기독교의 대 사회 실천론을 전개하였다. 1524년에도 루터는 “상업과 고리대금업”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16세기 경제에 대한 자신의 사회적 인식과 윤리관을 밝혔다.
상업 경제의 등장으로 신흥 부유층이 생겨나고, 기존의 봉건 지주계층은 토지를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빈부의 격차는 극심히 증가 했다. 루터는 특정계층의 부를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이라는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극심한 부의 편중 현상은, 물질에 대한 끝없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파하였다(LW 45: 249).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회의 부적절한 현상을 질타해야 함을 자신의 논문들을 통해 여실히 보여 주었다.
III. 위대한 선교의 세기의 Sola Opera
19세기에 들어와 개신교는 비로소 세계적 규모의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이전 세기까지 파송된 모든 시대의 전체 선교사들의 숫자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선교사가 이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 한 세기에 파송되었다(Latourette 1953, 469). 이 시대의 선교 사역은 직접전도 전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후진국들의 사회 참여의 주역이었다. “이 시대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는 모든 나라들에서 민주적 정치체제를 수립, 학교와 병원의 설립, 기술과 문명 전파에 힘쓰는 등” 자신의 선교지가 새로운 국가가 되도록 노력하였다(Winter 1981, 154). 문맹개선, 신분제도 철폐, 미신타파 등은 기본적인 사업이었다. 즉, 적어도 위대한 선교의 세기에서는 기독교의 확장과 사회 참여는 불가분의 관계로 전개되었다. 아프리카에 보내진 2천명이 넘는 선교사들의 효시가 된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 1813-1873)의 사역 중 가장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바로 아랍과 백인들의 노예 무역을 고발한 것이다(Neill 1990, 267). 그는 노예무역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아프리카 흑인들과 유럽의 정당한 거래와 상업이 최선이라 판단하였고 이를 증진시키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우간다에 간 대표적인 선교사 알렉산더 맥케이 (Alexander Mackay: 1849-1870)는 순수 복음 전도의 열정으로 그 땅을 밟았으나 이내 원주민 납치매매, 부족간 상잔 등을 목도하였다. 그는 근본적인 우간다 사회의 개혁이 없이는 자신의 선교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Tucker, 157). 총과 옷감을 얻기 위해 우간다의 국왕 무테사(Mutesa)는 자신의 부족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있었다. 헤롯의 죄를 고발하여 목이 달아난 세례 요한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읽고 난후 왕을 대면한 맥케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국왕이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이자 당신의 백성을 총 몇자루를 얻기 위해 노예로 파시겠습니까? 사람이 며칠이면 짤 수 있는 곧 낡아질 옷감을 위해 이 어린이들을 넘기시겠습니까?"
맥케이의 진심어린 호소에 무테사 왕은 마음이 움직였고 곧 노예 무역을 금지시켰다. 맥케이의 사례는 선교사역에서 기독교적 사회개혁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의 인도에서의 사역 역시 사회개혁 사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Manschreck 1974, 475). 포트 윌리암(Port William) 대학과 세람포르(Serampore) 대학을 세워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유아살해와 매해 1만명의 여인들이 죽어가는 사티(satie) 제도 같은 전통악습 타파에 노력하였다(Tucker 1983, 114-120).
위에 언급된 사례들은 사실상 보편적으로 흔히 볼 수 있었던 19세기 선교 현장의 모습이었다. 위대한 세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자신들의 선교지의 사회악을 퇴치하였다. 남태평양에서 사역한 이들은 식인과 나체 생활 풍습을 타파하였다. 중국과 아시아에서는 아편중독, 어린이 유기, 다첩제 등의 폐습을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세계 도처에 학교, 병원, 보건소, 의과대학, 고아원, 나병 치료소등을 설립하였다. 1900년대 초반에는 전 세계적으로 약 2천명이 넘는 의료 선교사들이 병원을 설립하고 순회치료를 하는 등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빈민들에게는 도움과 원조의 손길을 연결시켜 주었다. 각 선교사들은 그들이 사역하는 지역에 닥친 기근과 역병, 재앙들과 싸웠다. 문서 활동을 통해 문맹을 깨우치게 하고, 버려진 아기들을 양육하고 소녀들을 교육하며 여성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신분제를 타파하고자 애쓴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다.
요약하면, 위대한 선교의 세기는 지구촌 전체의 사회정화와 개혁의 세기였다고 재 정의할 수 있다. 각 지역의 선교사들은 사랑과 용서의 기독교의 보편적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각 나라의 민족들이 복음을 중심으로 개화하며 자신들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는 태도를 견지하고자 힘썼다. 이 시대 선교는 사회참여와 개혁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성공적인 선교는 반드시 이러한 “행함”이 수반되었다. 이 같은 전인적 선교의 세계적 모델중 하나는 바로 한국의 개신교 전래와 그 사회적 사업들이다.
IV. 한국 기독교의 Sola Opera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 기독교는 구한 말 쇄국과 개화를 사이에 두고 민족이 고민하던 때에 전교되었다. 사실 상 한국사 최대의 혼란기에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이다. 때문에 한국기독교는 생래적으로 복음전도의 비젼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즉, “민족 신앙”의 형태로 시작한 것이다. 초대의 한국 교회는 그 시작부터 애국의 열의와 함께 나라를 상실한 백성의 유일한 소속처 의식을 갖게 하였다(민경배 1989, 305).
한국 기독교의 사회 참여는 19세기 위대한 시대의 사역의 양태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시작한 한국 교회는 민족의 구습을 타파하고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전래하였으며, 한국 사회 각 분야의 구조적 모순들을 개혁하고자 매진하였다. 개신교의 한국사회를 위한 노력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바로 개신교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에 의해 우리나라의 신식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이 세워져 민족 교육의 첫 발을 내딛은 이래 스크랜톤 선교사에 의해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구세학당과 연희전문학교[후일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고등교육기관이 한국 교회에 의해 세워졌다. 초등교육기관인 소학교도 다수가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909년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의 수는 950개교에 이르렀다. 이들 학교들은 일반교육기관은 몇 군데의 서당에 불과했던 한국사회에 영어와 수학, 지리, 천문, 과학 등을 성경과 함께 가르치며, 근현대 한국을 이끌어 간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을 개화시키고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양반과 상민의 자제를 가리지 않고 교육하여 평등의 가치를 고취시켰고 서구의 발전된 학문을 접하는 주요한 문화 통로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였다. 기독교인이자 구한국군 참령을 지낸바 있던 이동휘는 강화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100여개의 보창 학교명의 학교를 시작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89, 290).
초기 한국 교회는 민족을 정신적으로 계몽하는 교육 사업과 신체를 치유하는 병원 사업을 병행하였다. 1885년, 의사이자 선교사인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1908년까지 무려 20여개의 기독교계 종합 병원들이 설립되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병자들을 거의 무료로 치료하였다(한영제 1986, 101).
구호 기관도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어 설립되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복음전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전인적으로 계몽하고 문명화시키는 일과 실제적인 구호사업도 함께 병행되었다. 장애아동과 맹인들을 위한 자선 기관이 그 한 예이다. 1894년 홀(R.S. Hall) 선교사는 평양에 맹인 여성을 위한 최초의 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때로부터 수년이내에 수십 개의 기독교계 고아원과 양로원이 각지에 설립되었다. 한센씨병(나병)환자들을 위한 기관도 포사이트(Forsythe)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지중 하나는 바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다. 세상의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고귀한 존재라는 기독교 인간관은 반상과 빈부의 차별이 현저했던 구한말의 한국 사회에 큰 도전이 되었다. 반상의 귀천은 기독교인들의 타파 노력으로 갑오경장에서 그 열매를 보게 되었다. 백정 출신으로 장로가 된 박성춘은 상민계급 타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이덕주 2003, 45). 아편은 말할 것도 없고 음주와 흡연도 한국 교회는 철저히 반대하였다.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유흥을 즐기는 문화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이로 인한 경제적 절약과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청년 문화활동도 기독교에 의해 주도 되었다. 엡윗(Epworth)청년회, 기독교청년협의회(YMCA), 그리고 YWCA 등의 단체 등을 설립하여 민주적 정신을 고취시키고 항일운동과 농촌 계몽, 각종 문화 및 체육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전 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많은 운동 종목들이 바로 이들 기독교 청년 단체들에 의해 전래되었다. 1905년 YMCA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1907년에 농구를, 1908년에 스케이팅을 전해주었다. 반하트(Byron P. Barnhart)선교사는 배구를, 터너(Arthur B. Turner) 선교사는 축구를 보급하였다. 인쇄와 사진기술, 미용 등도 이 기관에 의해 교육되었다. 또한 농촌계몽운동에도 역점을 두고 사업을 펼쳐나갔다. 1922년 조직된 YWCA는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이 한국 교회 선교에 큰 이점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V. 오직 행함의 장: 나라와 민족
한국 교회는 그 시작부터 민족의 과제와 운명에 민감하였다. 특히 나라의 자주와 계몽 운동을 위해 가장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표출되었는데 첫째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민족사랑 고취이며 둘째는 3.1운동 등의 구체적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후원이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실종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초기 한국교회 내에 면면히 흐르던 ‘민족애’ 교육일 것이다. 일부 선교사들은 사회참여에 있어 정치적인 부분은 배제하려고 설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교인 개개인의 정치적 활동은 이해하나 교회자체를 정치운동의 장으로 만들지 말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이만열 1987, 137). 그러나 구한말의 정황에서는 결코 정치적 상황과 다른 사회적 요소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민족문제를 공동체적 시각에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한국 교회는 여러 교회와 단체에서 민족애 고취를 위해 애국가 즉, 나라사랑의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된다. 배재학당의 애국가, 달성교인들의 애국가, 새문안교회의 애국가, 윤치호의 애국가 등이 기독교내에서 지어져 부르게 된다. 특히 윤치호(1865-1945)는 1908년 그가 독자적으로 편술한 ‘찬미가’에 애국찬송가 3편을 지어 일반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여 부르게 하였다. 그중 10장의 “애국가”가사는 다음과 같다(윤치호 1908, 11):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애국 찬송시의 3절에는 “이천만인 오직 한맘 나라 사랑하야 사농공상 귀천 없이 직분만 다하세”라고 되어 있다. 신분의 차별과 불평등을 배척하는 사회적 교화 내용들이 찬송시가 되어 기독교 모임에서 많이 불렸다. 또한 이 찬미가 14장에는 “동해물과 백두산”으로 시작하는 지금의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영어를 배우고 미국의 밴더빌트(Vanderbilt)대학과 에모리(Emory)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윤치호는 개화기 최고의 지식인이고 개혁자였다(김영의 1934, 23). 평생을 영어로 일기를 쓴 그는 “무궁화”의 영어 표현이 “Rose of Sharon"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은유적 명칭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귀국 후 그가 지은 ‘나라사랑의 노래’ 후렴구에는 무궁화 가사가 들어가 있다. 구한말 최고의 영어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는 분명 이러한 후렴구를 통해 이중적인 복의를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한민족을 상징하는 무궁화 꽃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샤론의 꽃’이 함께 삼천리에 어우러지기를 바란 그의 소망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윤치호가 현 애국가 보다 십년 앞서 작사한 배재학당의 나라사랑의 노래(1896년) 후렴은 역시 이를 반영하고 있다: “성조 신성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수 고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선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비교를 위해 기독교 단체가 아닌 일반에 의해 지어진 나라 사랑노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8년의 무관학도들의 애국가
“놉흐신 상쥬(上帝)님 자비론 상쥬(上帝)님 궁휼보쇼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쥬여 이 나라 보우 하쇼서. (1절)
우리의 단군(檀君)쥬 폐하 만세 만만세 만세로다. 복되신 오늘 날,
은혜를 내리사 만수무강케 하야 주쇼서. (2절)“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위에 언급된 무관학도들이 부른 애국가가 약간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또한 1904년 5월 13일 황성 신문에서 “각급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보급한 애국가와 1905년 을사조약이후의 대한제국 애국가 수정본 등 에도 하느님과 무궁화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윤치호가 작사하고이후 도산 안창호, 탁사 최병헌 등의 가필로 이루어져 현 애국가가 된 나라 사랑의 노래에는 하느님의 보호와 무궁화의 만개를 언급하는 신앙과 애국이 합치되고 있다.
한민족과 기독교 신앙을 동시에 상징하는 무궁화 보급에 가장 앞장선 인물은 남궁억(1863-1939)이다. 강원도 홍천 고향에 가산을 팔아 예배당을 설립하고 그 앞 대지 5백여평밭에 무궁화 묘포를 심고 가꾸었다. 수만주를 재배하여 각 지방의 학교와 교회, 사회단체에 기증과 판매를 하며 대대적인 무궁화 보급에 앞장섰다. 그가 작사한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의 찬송가 가사처럼 삼천리에 무궁화 보급하는 일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민족애를 동시에 전하고자 했었다. 서재필, 안창호, 조만식 등의 지도자들도 모두 기독교계 학교에서 수학하여 기독교 신앙의 바탕위에 사회 참여와 민족의식을 공유한 기독인들이었다.
구한말 민족 운동을 이끌었던 가장 중요한 단체는 바로 1898년 조직된 독립협회였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기독교 인사들이 되었다(Brockman, 1911, 218). 이 협회의 해산이후 투옥된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이승인, 신흥우 등이 1903년말 한성감옥에서 대규모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이들은 이후에도 신앙에 기초한 민족운동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김인수 2003, 133). 당시 일본 공사관은 기독교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독립협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1907년 조직된 신민회역시 기독교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백낙준 1973, 22). 3.1 독립운동도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회개하고 신앙을 받아들인 후 가장 먼저 드린 기도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원하시며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옵소서(O, God, Save my country and Save my Soul. McKenzie, 1920, 75). 3.1 운동에 33인중 1인으로 참여하고 후일 천안에서 목회하였던 신석구 목사는 독립운동에의 참여를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다: “그 후 새벽마다 하느님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사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직후에 곧 뜻을 정하였다.”(이덕주 2003, 264-65).
상기한 예들을 통해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앙구조에는 개인의 영혼 구원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동시에 잘 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개신교 초기 발전과정에서 나라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상충되지 않으며 행함의 신앙으로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VI. 나가는 말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는 종교개혁의 시작부터 개신교의 기본적 특성이 되어 왔다. 결코 종교 개혁은 종교만을 개혁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 진리의 인식을 통해 세계를 변혁시킨 것이었다.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사상은 기독교인들이 영적왕국에서는 자유를 누리나 사회에 대하여는 매인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오직 믿음으로”의 구호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웃에 대하여는 반드시 “오직 행함으로”라는 구호로써 사회적 참여와 책임을 역설하였다.
위대한 선교의 세기에 전 세계 2백여 개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는 심령에 대한 영적 도전과 더불어 지구촌 각 선교지 곳곳의 사회적 이슈들에 수많은 사회갱신 프로그램들을 통해 실행하였다. 한국 땅에 120년 전에 들어온 개신교 역시 종교개혁자들의 사역과 19세기 실천적 선교 활동을 재현하였다. 한국 기독교 교육은 약화된 민족애를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가야하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조화시키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인 사회 참여와 책임성은 단지 시대적 요청에서 나와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의 근본 출발부터 전제되어 왔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독교 교육은 “오직 은혜”와 “오직 행함”을 동시에 강조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한국 교회가 역사적 모델들의 실천정신을 재 구현하여 한국 교회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킬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위기들을 극복하고자 적극적으로 응전하는 양육 원리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110년전 미국에서 고학하며 벌었던 거금 이백 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해 바쳤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한국기독인들이 품어야할 사회적인 책임을 성찰케 한다: “세월이 흐르면 조선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문명국이 될 것이다. 이천만 백성들도 언젠가는 자유에 대하여 말하며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세대가 당하는 노예적 예속을 웃으며 회고할 것이다. 마을마다 학교와 대학이 들어서고 아름다운 반도의 도읍에는 궁전 같은 집들과 깨끗한 거리 그리고 공중 기념물들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꼭 실현될 것이다...아! 300년 이후 이 달라진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날 내 다시 조선에 되돌아오고 싶구나 (감리교 동부연회사 편찬위 199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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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2006년도 호서대학교의 학술연구비로 수행된 연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