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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 초기―'내러티브'로 읽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구교뿐만 아니라 신교의 소수 평신도들, 선교사들, 또한 직접적으로 선교임무와 관련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사건 사고 등으로 한국 땅에 도착했던 이국인들에 의해 한국에 파종되었다. 이는 인간이 알게 혹은 모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섭리와 구속 사역의 큰 틀 속에서 선교의 기반을 위한 작은 틀들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세상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지니라"(마태복음28장18-20절).
교회역사에 대한 접근방법,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섭리와 구속의 사역을 조명하며 통시적으로 접근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섭리와 구속 사역이란 큰 틀 속에는 작은 국부적 틀들이 다양하게 포괄된다. 그 작은 틀들이란 곧 선교역사관, 민족교회사관, 민중교회사관, 실증주의적 입장 등의 관점들이다. 이러한 작은 틀들의 집합이 전체를 파악하게 한다.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 선교와 관련해 조선 말기 우리나라가 직시했던 국제관계 면에서의 상황은 이렇다.
1. 조선 말기
일본과의 관계: 1875년(고종1년) 일본은 군함 운양호(雲揚號) 등 3척을 몰고 강화도 앞까지 접근해 들어왔다. 아직도 조선과 일본은 공식적인 화친조약 같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까지 조선조정은 쇄국정책을 펴 청나라 외에는 대외적으로 어떤 나라에게도 철통문을 잠그고 있었다. 일본해병은 조선 병사들의 발포를 유도했고 이어지는 일본의 군함 3척에서 가격한 함포사격으로 강화도 해안의 여러 진지는 초토화되었다. 무수한 인명 사상자가 우리측에 발생했다. 결국 1876년 2월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에서 수교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는 근세조선사에 외국과 맺은 첫 번째 조약이었고 이로써 조선의 오랜 쇄국정책이 종말을 맞는다. (註. 韓佑根, 韓國通史,p.412).
미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조약은 다른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조약체결을 촉발케 했다. 구미제국들 중 미국이 조선과 맨 먼저 조약을 맺게 되었다. 미국은 1867년부터 순교자 영국 웨일즈 출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목사) Robert J. Thomas를 태우고 왔던 제네랄 셔먼호the General Sherman에 대한 조사 및 그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해안에 도착했다. 그해 1월 함장 슈펠트가 R.W. Shufeldt 이끄는 와추세트號가 the Wachusett 조선의 서해안에 이르러 셔먼호 최후에 대해 탐문하고 돌아갔다. 같은 해 셰난도號가 the U.S.S. Shenandoah 다시 나타나 대동강 입구까지 진입, 무력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마침내 1871년 5월 미국 동양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John Rodgers 동양함대 소속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출현해 포격을 가함으로써 조선과 미국 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최초이자 마지막 우리나라와 미국 간의 전투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된다. 그러나 로저스는 초기단계의 우세한 화력만으로는 사활을 건 듯해 보이는 조선병정들의 끈질긴 대항을 무찌를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의 로저스 군함은 퇴각하고 말았다. (註.Woman's Work for Woman XII-8. August 1896, p. 208.)
미국과의 통상조약은 1976년 한일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데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게 미국과 조약을 체결케 유도해 일본의 세력을 견제케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이 무렵 미국은 세계시장의 확보를 위해 티콘데로가 Ticonderoga호를 보내 세계일주를 하게 했는데 1878년 12월 미국을 출발해 여러 곳을 항해하고 1880년 4월에 일본 나가사키(長埼) 항에 입항했다. 청나라 원세계가 조선을 끈질기게 설득해 조선과 미국은 제물포 해안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우리측 대표 김홍집과 미국측 대표 슈펠트 간에 역사적인 한미수호통상조약 The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Corea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한국과 미국은 오랫동안 혈맹의 관계가 유지되어 오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선교도 이에 기초한 것이다. 한국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올 시점에 한미조약이 체결된 것은 하나님의 우리 민족구원에 대한 섭리와 구속의 사역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의의로는 한미조약으로 인해 그때까지 조선이 중국의 부속 국가로서 국가적인 혹은 국제적인 중요사는 중국 정부의 제가를 얻어야만 되었든 관행을 벗고 세계만방에 독립된 국가로서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의회는 이를 인준했고 아더 C.A. Arthur 대통령의 비준을 얻은 후 전권공사 푸트 L.H. Foote가 1883년 5월 우리나라에 와 비준을 교환하고 초대 주한 미국 공사로서 서울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답례사절단을 파송했는데 민영익을 특명전권공사, 홍영식을 대리공사, 그리고 수행원에 서광범, 유길준 등을 임명해 미국에 파견했다. 1883년 7월 미국 해군함정을 이용해 제물포를 출발, 요코하마를 경유 9월에 센프란스시코에 도착했다. 우리 대표단은 기차편으로 대륙을 횡단해 9월에 워싱턴에 도착 미국대통령을 접견하고 12월에 귀국하였다.
2. 선교사들의 내한
구교의 이승훈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영세를 받은 해인 1784년은 한국 개신교의 첫 선교사 미국인 알렌이 Horace N. Allen 입국한 해 1884년보다 100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 신자로서는 해외에서 1876년 만주에서 일어난 스코트랜드 선교회에 의해 파송된 매킨타이어 John McIntyre로부터 세례받은 네명의 청년들 즉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였으며(註.John Ross, "Manchuria Mission," United Presbyterian Magazine. October 1880, pp. 333-334), 두 번째로 1883년 4월 일본에서 미국인 선교사 녹스 G.W. Knox에 의해 노월정(露月町)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수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 쁨과 감격을 자기 혼자 누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속히 우리 민족이 복음화 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여 미국선교부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註.The Missionary Riview of the World, 1883년 크리스마스호 兒童란에 실림. 金良善, 「韓國基督敎史硏究」서울, 1971, p. 58). 이러한 이수정의 선교제의는 미국 교회에게 한국선교에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한국선교의 근거를 마련케 했다.
이수정의 개종은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선교사들에게 빅 뉴스였다. 그 중 주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H. Loomis였다. 그는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 성경번역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수정은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수정의 최대 관심은 수많은 성서를 자기 민족에게 주는 것입니다....그는 대단한 열심을 품고 이 일에 착수하였으며 어제 그를 방문해 보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상당량이 이미 번역 완성된 상태였습니다."(註. H. Loomis가 Gilman 박사에게 보냔 편지, 1883.5.30일자). 1885년 한국에 선교사로서 첫발을 디딘 호러스 언더우드 2세 Underwood, Horace Grant,원두우가 이 발간된 마가복음을 들고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수정의 일본에서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국내에서 1884년 12월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모자 중 하나인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조정에서는 그들 주모자들과 동조자들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하였다. 이수정은 김옥균, 민영익과의 관계도 있기에 일본에서 약 4년간의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런데 백락준박사는 그가 불행하게도 귀국 직전에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는 증거를 제시했다.(註.백락준, 「한국개신교사」 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pp.94-95). 불행한 일이지만 비록 그가 기독교를 배교했을지라도 그가 한국 기독교사에 남긴 업적은 컸다.
a. 알렌 선교사 Horace N. Allen, 헤론 선교사
무슨 일에나 얼굴이 드러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면에 감추인 얼굴들이 있기 마련이다. 1884년 봄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 의해 의료 선교사로 맨 먼저 임명을 받고도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라는 영예는 놓치고만 선교사는 헤론 John W. Heron 선교사이다. 헤론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맥윌리암스 David W. McWilliams라는 사람의 한국선교에 대한 특별한 관심으로 선발되었다. 맥윌리암스는 뉴욕 라파이에트 Lafayette 장로교회 교인이며 북장로교회 선교부원으로 프레드릭 마켄드 Fredrick Marquand의 유산 관리인이었는데 그는 만일 한국선교를 지금 시작한다면 두 사람의 선교사 2년간 생활비로 5천달러를 내어 놓겠다는 편지를 선교본부에 보냈던 것이다.
이에 격려되어 선교회는 한국선교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도 선교헌금을 보내와 선교사역이 구체화됨으로써 1884년 봄에 '의술이 훌륭하고 헌신적 정신을 가진 젊은 의사' 헤론을 한국선교를 위한 첫 선교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선교부는 아직 한국의 형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바로 입국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헤론에게 일단 일본에서 머물며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헤론은 1885년 6월에 비로소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1884년 9월 의료선교사로 입국한 알렌 선교사나 1885년 4월에 입국한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보다 헤론은 조금 늦게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러하여 1884년 9월 한국에 마침내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첫 번째로 입국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1884년은 개신교선교의 기점으로 잡는 해로서 개신교 첫 선교사의 영예를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 얻었다.
알렌은 미국 독립전쟁 영웅 이탄 알렌 Ithan Allen의 후손으로 1858년 4월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Delawa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과 신시내티의 마이매미 Miami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의사자격을 획득했다. 알렌이 대학을 다닌 때 미국 전역을 휩쓴 제2차 각성운동의 영향이 각 대학에 파급되어 많은 대학생들이 선교사로 지원 선교현장으로 잇달아 나갔을 때다. 알렌도 이 영향으로 선교사가 될 것을 다짐, 의과대학을 진학했다. 그는 졸업 후 미국 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 지원서를 보냈고 이것이 허락되어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된 것이다. 그는 곧이어 결혼하고 1883년 25세로 중국선교에 나섰다.
1883년 10월 상해에 알렌은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개인적으로 실망스런 경험과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아 좀더 기후가 따뜻한 곳으로 선교지를 옮겼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뉴욕 선교본부로 연락해 한국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국공관들과 세관에서는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함을 알리고 본부의 허락을 받아 한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다. 이로써 알렌은 4천년 한국역사에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의 자격으로--물론 그 당시는 선교사라는 신분을 밝힐 수 없었지만--한국에 도착, 마침내 개신교 선교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알렌은 한국에 도착 후 미국 공사관에서 공사 푸트 Foote를 만났고 당장 미국 공사관 의사로 임명 받았다. 미국 공사 푸트와 함께 고종을 알현했을 때도 푸트는 그를 공사관의 의사로 소개했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 영국 등 여러 공사관 외국 거류민들의 의사로 날마다 바쁘게 지냈다. 그가 극적으로 조선 왕실과 연결되는 사건이 1884년 12월 일어났다. 곧 갑신정변(甲申 政變)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 선교에 있어 중대한 고비가 된 사건으로 언더우드는 이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고 술회했다.(註. Horace G. Underwood, The Call of Korea, Political-Social-Religious. New York: Fleming H. Revell, 1908, p. 100.)
갑신정변은 수구파와 개화파 간 세력다툼이었다. 1884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시행할 우정국 건물완성의 낙성식을 하는 피로연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 때를 기해 개화파가 수구파를 모조리 없애고 개화파로 새 내각을 구성, 개방정치를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2월 4일 저녁 피로연이 한참 무르익을 때 잠복해 있던 자객들이 수구파를 무차별 칼로 난자했다. 이때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도 전센에 칼을 일곱 군데나 맞아 혈관이 끊기는 등 깊은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미국 공사 푸트와 세관 고문 묄렌도르프 S.A. Mo"llendorf 가 민영익을 응급처치하고 그를 묄렌도르프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즉시 알렌에게 통보해 그곳으로 오도록 조치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위급한 환자 민영익의 갈라진 몸을 명주실로 꿰매고 상처에 약을 발라 치료했다. 그런 후 민영익은 얼마 가지 않아서 완치가 되었다. 민영익은 후에 알렌에게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아메리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합니다."(註. H.N. Allen to F.F. Ellinwood, 4 February 1885, PHS.) 그후 알렌은 고종의 시의(侍醫)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註. 알렌에게 嘉善大夫(正二品) 벼슬이 하사됨. Allen's Diary, 김원모 역,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츌판부, 1991. 1886.10.25일자. 「承政院日記」,高宗 23년9월27일).
알렌은 미국 공사 폴크 G.c. Foulk를 통해 조선에 병원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논리정연한 편지를 1885년 봄 조선정부에 제출했다. 왕이나 관리들은 알렌의 의술과 한국민에 대한 사랑을 익히 아는 터라서 굳이 반대하지 않았으며 정부는 알렌의 청원을 순수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85년 4월14이레 알렌은 '광혜원 (廣惠院)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했다. 장소는 우정국 사건 때 맞아죽은 홍영식의 주택으로 정했다. 개원한지 열흘쯤 지나 4월 26일 이름을 '광혜원'에서 '제중원' (濟衆院)으로 바꾸었다.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언더우드가 입국하자마자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제중원이 후에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오늘의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이 되어 한국 의학계의 선두로서 공헌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산증거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b. 언더우드 선교사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元杜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에 발을 디딘 선교사다. 그는 1859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존 언더우드 John Underwood와 엘리자벳 Elizabeth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은 화학자, 발명가였으며(註. Lillias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New York: fleming H. Revell, 1918. p.25). 신앙이 독실해 그이 신앙이 자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언더우드도 아버지의 신앙에 많은 감화를 받고 자랐다. 언더우드가 6살 때 그이 어머니가 세상을 더났고 그후 계모 밑에서 자라났다. 한동안 그의 형 프레드 Fred와 함께 불란서에 가서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동업자와의 사업을 정리한 후 신대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때 아버지를 따라 신대륙으로 옮겼다.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해 1871년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주해 뉴저지의 뉴덜햄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화란 개혁교회에 출석했다.
언더우드는 어렸을 적부터 목사와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다. 그는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 약 12KM 되는 거리에 있는 대학까지 매일 걸어서 통학했다. 188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해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화란 개혁교회 계통의 뉴 부른스윅 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다닐 때도 그는 하루 5시간만 자고 나머지 19시간은 학업과 다른 종교적인 일에 투자했다.(註.Lillias Underwood, p. 27). 그런 그이 정열적인 활동은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도 계속되어 결국 건강을 상실케 되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가 신학교 2학년 때 한미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의 급우 중 하나가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오려 교실 벽에 붙여놓은 것을 언더우드가 읽게 되었다. 이것이 그가 전생애를 바쳐 일하게 될 한국에 대해 처음으로 안 순간이었다.
1883년, 언더우드는 코네티컷주 하트포드 Hartford에서 열린 미국 신학교 연맹대회에 참가, 그때 거기서 훌륭한 연사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고 선교사로서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곳에서 그는 아펜젤러를 만났는데 그는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온 그래서 일생동안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된다.
언더우드는 1884년 봄, 신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뉴욕대학교 문학석사학위도 수여받았다. 그는 또한 그해 11월에 화란 개혁교회의 뉴 부룬스윅 노회 The Classis of New Brunswick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가 신학교에 재학 중 당시에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올트만 Albert Altmann 목사가 방문해 한국에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없느냐, 그곳에 죽어가는 영혼 1,300만을 위해 일할 선교사 지원을 호소했다.(註.Lillias Underwood, p. 34).
당초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아직 한국에 지원자가 없어서 선교가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 속에 "왜 너는 못 하느냐?"는 내면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註. H.G Underwood, "Reminiscences," In Quarto Centennial Papaers, 1909, pp.98-99). 그는 화란 개혁교회에 찾아가 한국에 선교사로 가겠다는 의사표시를 두 번이나 했지만 그 교회 총회는 재정적 자원이 없어서 세로운 선교지 개척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북장로교회에 두 번 가서 한국에 선교사로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곳에서도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에 맥윌리암스가 한국에 두 사람의 선교헌금을 약속했으므로 북장로교회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공식 임명했다.
25세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센프란시스코를 출발, 이듬해 1885년 1월 요코하마에 도착, 그곳에 있던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화영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그해 4월 5일 부활절 주일에 한국의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 배에는 북감리교회 파송을 받고 한국으로 가기 위해 탑승한 아펜젤러 부부가 승선해 있어 그들은 동시에 한국땅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같은 날 도착한 셈이다.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 목사는 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註. The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5, p.237).
당시 주한 미국 대리공사 폴크 (註.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 Foote는 귀국하고 미국에 갔던 사절단을 호소해 온 폴크 G.C. Foulk가 대리공사로 있었음) 중위는 언더우드의 입국은 허락했으나 아펜젤러 부부의 입국은 만류했다. 그때 아펜젤러 부인은 임신 중이었으며 불과 몇 달 전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의 여진이 아직 남아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언더우드만 제물포에서 이틀을 보내고 나서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 첫 번 째로 개신교 목사가 상주하게 되었고 개신교 선교시대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언더우드 2세는 알렌의 영접을 받았고 갓 시작한 제중원에서 일하며 그의 한국에서의 첫 사역을 시작했다. 일본에 돌아간 아펜젤러는 근 두 달 후 다시 한국으로 왔는데 그가 들어오기 한 달 반전 1885년 5월 스크랜튼이 먼저 입국하였고 6월에 스크랜튼 부인과 아펜젤러 부부가 입국했다. 그들과 함께 그동안 일본에서 어학훈련을 받아왔던 헤론 J.W. Heron이 같이 입국해 역시 알렌의 제중원에서 같이 일을 시작했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복음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복음 선교를 직접 할 수 없는 시기였기에 의료선교를 통해 선교사역이 시작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의 구원을 위해 펴신 경륜, 섭리였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맘 속에 품고 꾸준히 기도하며 인내하며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노세노세 돈있고 힘있을 때 노세하는 사람들과는 삶의 유형이 다르다 .
*한국에 살았던 언더우드 家:
*호러스 언더우드 2세 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선교사(목사,신학,문학석사)
*호러스 언더우드 3세 Horace Hortan Underwood 원한경선교사(교육학박사)
*호러스 언더우드 4세 Horace Underwoood 4세; 원한광교수;연세대영문과;정년(영문학박사)
--[Underwood 2세, Horace Grant, 원두우]--미국선교사. 화학자, 발명가인 부친 존 언더우드 John Underwood와 엘리자벳 Elizabeth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59. 7. 19 영국 런던 출생-1916. 10. 12 미국 애틀랜틱시티 사망. 미국의 의학자, 장로교 선교사 교육자 성서번역가.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1881년 뉴욕대학교를 거쳐 1884년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했다. 1884년에 초대 주한(駐韓) 선교사로서 경신 학교를 설립하고(연희전문 전신), 1915년에는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저서에 《영한사전》,《한영사전》 등이 있다.
--[Underwood 3세, Horace Horton, 원한경]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원두우元杜尤)의 아들로 한국 이름은 원한경(元漢慶)이다. H.G. Underwood의 아들. 1890. 9. 6 서울태생~1951. 2. 20 부산피난. 16세에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교육학 및 심리학을 전공했다. 1912년(22세) 9월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신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1917년...조선신학대학 교수·학장을 지냈다.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저술가·교육가. 저서에 《영한사전》 따위가 있다.
--[Underwood 4세; 원한광] 미국인교수, 연세대 영문과 교수, 정년.
특히 4대손인 원한광은 1980년...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언더우드家 4대-원한광 편.
2002년 밴 플리트상 수상-한국어 위키백과 등에 기여가 인정됨, 호레이스 언더우드 4세
(원한광)는 연세대영문과 현대미국소설 교수로 정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