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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골 공소 → 대승리 교우촌 도보 순례
○ 순례 일자 : 2013. 05. 17. 금요일
○ 순례 인원 : 30 명 (이영춘 요한 지도신부, 이동수 안드레아 안내)
○ 순례 일정
1. 08:00 : 전주 교구청 출발
2. 09:15 : 동상면 수만리 단지(丹芝) 마을 도착
한대 공소
한대 공소 제대
소양 성당 한대 공소
한대 공소는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에 위치한다. “수만(水滿)이란 지명에 들어맞게 물이 가득 찬 동상 댐이 있다.
한대 공소는 전라도 최초인 되재 성당의 전신인 되재 공소와 함께 1891년에 설립되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고산 성당에 가기 위해 배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으나 시내버스가 다니고 거리도 가까운 소양성당으로 2003년 3월에 관할이 바뀌었다. 지금은 신자들도 줄고 소양성당으로 미사를 다니는 등 공소를 이용치 않아 폐쇄된 상태다. (2010. 10. 10 자 숲정이)
※ 한대골은 공소가 있는 단지 마을에서 더 위로 올라가서 있었다고 합니다.
수만리(水滿里)는 위봉폭포와 성불계곡, 학동골 계곡물이 동상 저수지로 흘러가는 도중 합류하는 곳이다. 운장산과 연석산 그 지맥들이 줄기줄기 뻗어내려 면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예전에는 전국 8대 오지 중의 한 곳이다.
수만리(水滿里)란 지명은 조선조 중엽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이 마을을 자나다 ‘이 마을은 장차 물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한 데서 그 때부터 마을 이름이 수만리(水滿里)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예언대로 1920년 일제강점기에 동상댐이 축조되었다.
3. 09:30 : 동상면 단지 마을 출발 - 단지동(丹芝洞)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뒷산에서 약초(藥草)인 지 초(芝草)가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4. 10:00 : 입석(立石) 마을 - 입석은 "선돌"의 한자 표기이다. 이 마을 동구 밖에 "선돌"이 있었다.
5. 10:20 : 학동(鶴洞) 마을 - 학동(鶴洞)은 이 마을 뒷산에 "비학소귀혈"의 명당이 있다는 데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아주 오래 전에 김해 김씨의 몇 분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이름 짓는 것을 고심하던 중, 어느 날 학이 계곡에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학동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특히 이 마을은 개신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옛날 미국 선교사가 말을 타고 교회 지을 장소를 물색하고 다니던 중 이곳을 발견하여 교회를 지었는데 그 교회가 바로 11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학동교회다. 마을의 오랜 역사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상징은 400여 년 정도 수령의 보호수 느티나무와 기타 여러 오래된 아름드리 나무들이다.
농촌진흥청으로부터 장수마을로 선정되었으며 고종시 곶감의 생산지다.
고종시(高宗柿)는 고종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6. 10:30 : 여산재(餘山齋)
여산재 설립자는 봉동에 있는 우신산업 주식회사의 CEO 국중하(79) 대표다.
국중하 대표는 1936년 2월15일 군산시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 고평에서 태어났다. 강경실업중학교와 이리공고 전북대학교 기계공학과를 다녔다. 대학교를 졸업한 1962년, 졸업과 동시에 전남 나주의 호남비료(주) 공채 시험에 합격해 입사했다. 그 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극동건설을 거쳐, 현대그룹에서 실시했던 중간간부 공채에 합격 현대건설 기계과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39세 나이로 현대그룹 이사의 직함을 달게 되는 등 그의 신화가 시작됐다. 이런 그는 1987년 3월 세상 부러울 것 없던 현대그룹의 이사 자리를 사임하고 나와 자기만의 회사(지금의 우신산업)를 설립하기에 이렀다. 현대, 대우 등 국내 굴지 대기업을 상대로 자동차 연료통 등을 생산해 납품하고 있으며, 지금의 우신산업은 세계 속의 우신산업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설립취지를 보면 우신산업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기업 이념에 따라 문화 공간 여산재를 마련하여 접대문화를 새롭게 개선하고, 많은 사람이 이 공간을 이용함으로써 예술 문화 혜택을 골고루 받아 예술 문화발전에 인프라가 구축되고, 우리나라 예술 문화 발전에기여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전시, 연수, 세미나, 수련회 등을 할 수 있다.
7. 10:40 : 다자미(多子美) 마을
"다다미"라고도 부른다. "다다미"는 "다자메"의 와전으로 보인다. 다자메는 아들을 많이 낳는 곳이란 의미이다.
옛날 손이 귀하고 특히 딸보다 아들 낳으면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다자미 마을에서는 손이 흔하고 아기를 낳으면 거의가 아들이라, 외부 마을 손이 귀한 사람들이 아들을 낳고 싶어서
일부러 이사를 올 정도로 유명해서 다자미(多子美)라는 지명으로 불리워졌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 이는 이 마을이 워낙 산세가 깊어 일찍 해가 지는 것이 다산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스개 소리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고종시 마실길 5번 이정표 : 시향정(柿香亭) 1.9km, 송곳재 3.1km
8. 12 시향정(柿香亭)
9. 12:15 : 성불 공소 - 上성불 - 성불굴
성불 공소에 숨은 선교사들
되재 본당 비에모(우) 신부와 전주 본당 보두네(윤) 신부는 관(官)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처지인데다가 농민군들이 분풀이 식으로 난폭해지자 7월 중순부터 본당을 떠나 고산 성불 공소로 피신하여 6주를 지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위봉산성과 성불 나무숲에서도 지냈는데 아주 위험한 경우에는 성불 공소 감나무골 큰 바위 굴속에서 보름 동안 굶주림과 악천후와 싸우며 지내기도 하였다. 신부들이 굴속에 숨어있는 동안 음식을 날라다 준 사람은 송군서(요한)였다. 그는 굴을 출입할 때마다 다니는 길을 매번 바꾸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다니던 길로만 계속 다닐 경우 사람 다닌 흔적이 나타날 것이고, 만약 농민군들이 수상한 흔적을 따라 굴에 오는 날에는 신부들이 꼼짝 못하고 잡힐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천주교 전주교구사 Ⅰ (554쪽))
성불굴로 추정되는 바위
박제원(朴齊元 요셉)의 전라도 전교 약기
전주에 가보니 신학생 김낙필(金樂弼) 도마 혼자 있는데 - 동학군에게 총 맞기 전 -, 신부 계신 곳을 물으니 “부지할 수 없어 두 분 신부가 고산 성불로 피난 갔다.”고 한다. 어찌할 수 없어 다시 고산을 찾아가는데, 위봉산성을 넘어 성불에 도달하여 밖에서 주인을 부르니, 이 회장이 나오기로 “신부 어디 계시냐?” 하니, “신부, 신부 모른다.” - 이는 신부 말을 듣지도 못한 외인의 모양을 꾸미는 것임.- 하여, 뚝 잡아떼기에 불쾌한 생각이 나서 큰소리로 “신부 계신 줄 알고 왔는데, 이게 무슨 말이오.” 하는데, 되재 복사 주양오가 쫒아 나와 (나를) 붙잡기에 같이 들어갔다.
두신부가 허청에 앉았다가 깜짝 놀라며 “이게 왠 일이여? 서울 간 사람이 어떻게 이 모양 오느냐?”고 했다. 나는 대단히 더워 “숨 좀 돌리고 차차 말하지요. 그런데 신부는 어째서 여기에 와 계십니까?” 윤 신부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여기, 여기, 엊그제는 여기보다도 더한 뒷 골짝 수목(樹木)속에 가서도 있었는걸. 그뿐인가? 작은 도랑에 긴 나무를 걸쳐 놓고 산죽(山竹)대로 깔고 밀방석을 위에 펴고, 우리는 쌍자리 위에 있고 7,8인 교우는 양편에 갈라 있었지. 밤이 깊었기에 자려고 하는데, 어디서 버석버석하는 소리가 나기에 성냥을 그어보니, 기둥 같은 구렁이가 머리를 들고 우리가 있는 밑으로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교우들을 깨워 함께 여기 왔는걸.” 하시었다. 이어서 내가 조 신부께서 돌아가신 사연을 말씀드리니 두 신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비에모(1869∼1950, 禹一模) 바오로 신부 편지
우리는 이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날 밤으로 길을 떠나, 전주서 한 80리 되는「성불」이라는 적은 공소로 갔습니다. 이곳은 큰길에서 아주 떨어진 산골이라 비교적 안전하지만, 교우들은 큰바위 동굴속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정도로 준비하여 놓고서는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 하므로, 우리는 공소에서 날라다 주는 밥을 먹으면서 그 굴속에서 약 15일 동안 지냈습니다.
上 성불 공소가 있던 집터로 추정되는 곳
10. 13:20 : 성불 공소 출발
11. 14:25 : 이정표 있는 무명봉 (원등산 0.77km)
12. 16:30 : 밤재[栗峙]
13. 17:15 : 대승리 (大勝里. 大中里) - 원앙골 대승리는 뒷산에 노승출동혈이 있어 대승(大僧)이라는 이 름이 생겼다고 한다. 원앙골은 대승리 서쪽에 있는 마을.
대승리 - 전동 성당이 세워지기 전 복음의 씨앗이 움튼 곳
대승리는 전주 전동 성당이 세워지기 전 복음의 씨앗이 움튼 곳이다.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전동 성당을 세우기 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889년 봄부터 1891년 6월 23일까지 2년여 간 이곳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보두네 신부가 고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 조선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85년 8월이었다. 불과 1년 전인 1884년 9월 사제품을 받고 불같은 신앙으로 고행의 길을 떠나 온 그는 입국 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갔다가 마침내 전라도 지방까지 발길을 옮겼다. 입국한지 무려 10년이 지나서야 조선에서 박해가 멎어 비 로소 그는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를 선교의 요지로 선정할 수 있었다.
1889년 봄, 경상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보두네 신부가 전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전주에는 감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주 부중에 신자가 한 명도 없어 배경집 베드로 회장의 안내로 우선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일명 대승리)에 정착하여 전주 이하 북쪽 지역을 관할하였다.
하지만 보두네 신부는 본당의 발전을 위해 인구가 많은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하기 위해 1891년 6월 23일에 전주 남문 밖에 있는 구례 영저리(營低吏) 집을 매입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매입한 집의 안방을 자신의 침실로 사용하고, 맞은 편 방을 개조하여 여자 교우청으로, 방과 방 사이의 마루인 어간에는 제대를 설치하였다. 대성동에서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한 보두네 신부는 연령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4년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임지로 내려온 그는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키로 하고 가지고 있던 말까지 모두 팔아 성당 건립에 충당했다. 전동 성당이 지금까지 사람들로부터 감탄의 눈길을 받는 것은 그 건축물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보두네 신부와 선조들이 쏟았던 정성에 기인하는 듯하다.
대승리 가는 길은 전주에서 진안 방면으로 가다가 화심에 있는 동양초등학교에서 좌회전하여 약 2km
가면 ‘대승가든’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 아랫길로 600m 정도 가면 좌측으로 몇 채 집이 보이고 그 끝집을 지나 좌측 개울 건너에 전동 성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비가 눈에 띈다.
비문에는 이곳 대승리의 역사와 부지를 매입하게 된 경위가 간단하게 적혀 있어 찾는 이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집 뒤편으로는 대나무 숲이 울창해 보두네 신부와 당시 신앙의 선조들이 지녔던 대쪽같이 굳건한 신앙을 전해 주고 있는 듯하다.
▒ 영저리(營邸吏)
조선 시대 감영에서 각 군·현의 연락 사무를 맡아 보던 지방의 향리를 말한다. 영주인(營主人)이라고도 하였다. 지방 수령의 사무는 중앙의 6조(六曹)를 그대로 옮겨, 이·호·예·병·형·공방의 6방(六房)이 지방 행정의 실무를 맡았는데, 그 가운데 이·호·형방의 사무가 기본적이기 때문에 이의 수리(首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여 그 밖의 향리와는 크게 차별하였다.
향리들은 중앙과 지방의 연락 사무를 위해 중앙에는 경주인(京主人 : 京邸吏라고도 함)을, 지방의 감영에는 영저리를 파견하였는데, 주로 지방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호방의 수석이 파견되었다. 영저리는 관찰사의 감영에 파견되어 행정 실무, 출신 고을과의 연락 업무 등을 맡는 외에 수령에 대한 정보를 관찰사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14. 18:10 : 교구청 도착, 해산
첫댓글 신앙선조들의 자취를 대신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30여 헝제자매님들은 은총 많이 받으셨을 것 입니다. 감사하고 완전 부럽습니다.
교우촌 순례자료를 잘 모아두셨다가 나중에 교우촌자료집으로 출간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가우덴시오 해설사님,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