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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원문보기ㅣ 전주김의 영산기맥 종주기 http://user.chol.com/~park56eh
◈영산기맥 단독종주기◈
[내장산새재봉분기점⇒입압산⇒방장산⇒불갑산⇒목포유달산]
제 2구간
[장성갈재(1번국도)-방장산-양고살재-솔재(898지방도)]
2005. 10. 8(토) 날씨 : 흐린 후 맑음
☞산행(종주)거리
도상 약 10.3km
☞산행(종주)시간
11 : 05 - 17 : 27(총 6시간 22분 소요)
☞산행(종주)코스
전남 장성군 북하면 남창골 전남대 수련원→몽계폭포→몽계교→백암산상왕봉(741.2m)→순창새재→새재봉(영산기맥분기점)→암봉→마당바위→분기점→장성새재→능선안부→전망바위→입암산성(동쪽중앙)→입암산성(북쪽끝)→갓바위→시루봉→노령(호남고속도로 터널 위 능선)→철탑→장성갈재(1번국도)장성갈재→방장산동봉(720m)→720봉(헬기장)→방장산서봉(742.8m)→헹글라이더장→반등산(640m)→문넘어재→갈미봉→배넘어재→방장사→양고살재→솔재(898지방도)
☞위치 : 전북 정읍시 입암면, 고창군 신림면, 고창읍, 전남 장성군 북일면, 북이면 등 접경
10 : 00 전주출발
10 : 50 호남고속도로 서김제IC진입, 백양사IC경유 백양사역 도착, 개인택시로 이동(7천냥)
☞시간별 진행
11 : 05 장성갈재 출발
11 : 35 헬기장(500봉)(5분)
11 : 45 안부
12 : 10 고흥유씨묘지
12 : 20 방장산동봉(720m)(중식 20분)
12 : 40 중식 후 출발
12 : 58 전망바위
13 : 13 고개(1)
13 : 20 고개(2)(칡넝쿨)
13 : 38 암봉(1)
13 : 57 이정표3거리(용추폭포 1.8km, 방장산(고창밀알회)안부
14 : 02 720봉(헬기장)(5분)
14 : 23 방장산서봉(742.8m)(5분)
14 : 36 철탑(영고134번)
14 : 50 이정표(방장산자연휴양림 1,7km, 패러행글라이딩장300m,
방장산정상1.7km)
14 : 58 이정표(양고살재2km, 장성갈재8km)
15 : 00 반등산(640m)
15 : 14 문넘어재
15 : 20 갈미봉
15 : 21 배넘어재
15 : 30 방장사
15 : 45 양고살재(5분)
15 : 59 철탑(영고126번)
16 : 19 철탑(영고000번)
17 : 12 동중추부사 조항묘지
17 : 27 솔재(898지방도)
★산 행 후 기
≪호남의 삼신산인 방장산을 넘어 녹두장군(전봉준)의 고향 고창을찾아서≫
<장성갈재>
<방장산 입구 >
11시 05분 조국통일기원비가 와 통일공원이 있는 장성갈재에서 제 2구간 영산기맥을 이어간다. 왼쪽에는 광산이씨세천(光山李氏世阡)비석이 있고 굳게 잠긴 철제문 옆으로 오른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20m정도 올라 고개마루에서 우측으로 돌려 임도를 내기 위해 파헤친 곳을 따라 오른다.
간밤에 내린 가을비의 여운으로 하늘에는 아직도 먹구름이 흘러 다니고 있고 서늘한 바람은 산허리를 맴돌고 있다. 100여m정도 약간 오르다 직진하는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돌려 빼곡한 잡목터널을 치고 오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곳에도 조락의 계절이 찾아와 가벼운 소슬바람에도 낙옆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데 가을은 이래서 슬픈 계절인가보다.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며 잠시 후 빗물을 흠뻑 적신 산죽을 털며 오르는데 제법 고역스럽다.
11시 35분 한바탕 오름을 마치고 칡넝쿨과 잡목이 헬기장을 장악하고 있는 500봉에 올라선다. 동쪽으로 갓바위와 시루봉은 운무들의 기세에 눌려 아직도 무거운 구름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다.
다시 이어지는 잡목과 키 큰 잡목으로 무성한 숨가쁜 터널을 뚫고 나가는데 양쪽에서 산죽들이 털어내는 물방울이 벌써 가슴과 바지가랭이를 흠뻑 적셔 헤쳐 나가기가 아주 거북스럽기만 하다.
더군다나 거미줄까지 합세하여 초장부터 또 한바탕 수월한 산행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다.곧이어 석축으로 잘 쌓여진 군부대에서 만든 교통호를 지나면 저 앞에 육중한 방장산의 동봉이 굽어보며 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길가에 알밤 한 개가 떨어져 있어 아! 이게 무슨 횡재람? 하며 이빨로 껍질을 벗겨 보았더니 그 안에 벌레 한마리가 떡 버티고 앉아 꿈틀거리면서 쳐다보며 비웃고 있다. 이게 무슨 낭패냐며 몹시 불쾌한 심정으로 멀리 휙 던져버린다
11시 45분 잡목만이 무성한 안부를 지난다. 다시 이어지는 산죽 군락을 따라 침묵만이 흐르는 심오한 숲 속을 한동안 고도를 높이며 산정을 향해 가뿐 숨을 토하면서 오름을 계속한다.
12시 10분 동녘을 향해 안온하게 자리한 고흥유씨묘지에 서서 잠시 다리 쉼을 하며 뒤를 돌아다 본다.
왼쪽 바로 곁에는 봉수대같은 전망바위들이 한번쯤 다녀가라고 유혹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이제 서서히 베일이 벗겨지면서 입압산갓바위와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산군이 확연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뒤로는 호남정맥 내장산과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우람한 풍채의 산군이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방장산 동봉도착전에서 바라본 입암산군>
<입암산 시루봉>
다시 곧바로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군락을 통과하며 조금 더 나가면 방장산의 동쪽 봉이다
12시 20분 방장산동봉(720m)에 선다. 신선대같은 암봉에 올라 앉아 남쪽을 바라보면 장성군 북이면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해주는 수도저수지가 찬란한 햇살을 듬뿍 담고 일렁거리는 모습이 너무도 황홀하기만하고 그 뒤로는 어머니의 젖 같은 수도저수지의 물을 먹고 대 풍작을 이루어 황금물결 넘치는 너른 들녘이 너무도 아름답고 풍요롭게 다가온다.
여기서도 좌측은 입압산군이 우측은 방장산 군이 각각 좌청룡 우백호의 품세로 양쪽에서 받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저 무지한 산객은 아는 것이 없어 더 이상 풍수지리를 논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 좋은 곳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仙人)이라 자칭하고 바위에 앉아 허기를 채우고 일어난다
<방장산 동봉에서 내려다본 수도저수지>
<방장산 동봉>
<방장산 동봉에서본 서봉>
<위와 같음>
<방장산 동봉에서 본 입압산시루봉>
<동봉에서 본 호남고속도로 장성터널>
<동봉에서 본 고창군 신림면 들녘>
12시 40분 갈 길이 멀어 중식을 끝내자 마자 부리 나캐 봇짐을 챙겨지고 자리를 뜬다. 다시 능선을 점령하여 안내하는 산죽을 따라 진행하는데 바위능선이 자주 나오고 또한 우회하는 곳도 종종 나온다.
12시 58분 서쪽으로 우뚝 솟은 방장산의 서봉을 바라보며 전망바위를 지나 내림질 한다. 이제 방장산도 계절의 순환법칙에 순응하려는지 서서히 산정에서부터 불을 지피며 산하를 물들고 있다.
며칠 더 지나면 여기저기 불화살을 당기면 신나는 화염놀이를 하며 산객들을 흥분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겠지. 아쉽다 며칠 더 늦게 이곳을 찾아왔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 . .
13시 13분 00고개 안부를 가로질러 오른다. 잠시 후 서쪽으로는 철옹성같은 방장산군이, 그리고 우측으로는 고창군 신림면의 방대한 들녘이 시야에 넓게 펼쳐진다.
곧이어 밧줄도 없이 다소 위험한 대슬랩을 주의해서 내려오면 다시 홈통같이 빼곡한 산죽터널로 이어지고 잠시 후 또 다른 안부에 내리 선다.
13시 20분 칡넝쿨만이 무성한 00고개를 가로지른다. 양쪽으로 탈출로는 없고 다시 계속 뒤 쫒아 오는 산 죽을 따라 오름을 계속한다.
13시 38분 한차례 오름을 끝내고 또 다른 암봉에 올라본다. 뒤로는 지나온 방장산의 동봉이 우뚝솟아 있고 앞으로는 가야할 방장산의 서봉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남쪽으로는 수도저수지가 변함없이 햇살을 듬뿍 담아 눈부시게 일렁거리고 있다.
<뒤돌아본 방장산 동봉>
<가야할 방장산 서봉>
13시 57분 이정표3거리(용추폭포 1.8km, 방장산(고창밀알회)안부를 지난다. 우측으로 용추폭포로 내려가는 길이 잘 나있다. 가로질러 지척에서 고개를 쳐들며 굽어보고 있는 뽀쪽한 암봉을 바라보며 조금더 오른다.
14시 02분 헬기장과 20평정도의 잘 관리된 잔디평전으로 된 720봉에 올라선다. 사방으로 휘돌러 보는 조망은 오늘구간의 최고의 극치라 할까?
동쪽으로는 방장산동봉이 육중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뒷편에는 입암산 갓바위와 시루봉이, 그 뒤로는 내장산에서 백암산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연릉이 시야에 완연하다.
<전망대(헬기장)에서 본 방장산 동봉>
<입암산 시루봉:뒷쪽은 내장산>
<입압산 시루봉: 뒷쪽은 호남정맥 내장산-백암산 상왕봉>
서쪽에는 지척에 방장산의 서봉이 손에 잡힐듯하고 그 뒤로 헹글라이더장이 있는 방문산이 수줍은 듯 빼꼼이 쳐다보고 있다. 다시 양쪽에서 하늘거리는 억새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봉으로 향한다.
<방장산 서봉>
<헬기장에서 서봉방면 >
<방장산 헹글라이더장>
<방장산 서봉>
<방장산 서봉가는길>
<고창 신림면 들녘>
<방장산 서봉에서 뒤돌아본 동봉>
<방장산 서봉도착전 >
서쪽에는 지척에 방장산의 서봉이 손에 잡힐듯하고 그 뒤로 헹글라이더장이 있는 방문산이 수줍은 듯 빼꼼이 쳐다보고 있다. 다시 양쪽에서 하늘거리는 억새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봉으로 향한다.
곧이어 왼쪽에 만고풍상을 겪으며 독야청청하게 산정을 지키는 청송 한 그루가 반갑게 45도 고개 숙여 산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얌전하고 정숙한 숙녀처럼 가슴에 다가온다.
14시 23분 억새무리들이 가을 바람에 군무(群舞)하며 비추(悲秋)를 노래하고 있는 방장산서봉(742.8m)을 지난다.
<방장산 서봉 정상부 >
▲방장산(734m)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 정읍 경계에 솟은 방장산(734m)은 내장산 서쪽 줄기를 따라 뻗친 능선 중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이다.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주위의 내장산, 백암산, 선운산 등의 명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코 기세가 눌리지 않은 당당함을 보이고 있다.
지리산을 달리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신이 살 듯한 신비로운 산에만 붙이는 이 이름은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조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방등산이라고 불리웠으며 백제가요인 방등산가는 바로 이산을 무대로 해서 지어진 노래이다.
- 먼 옛날 방등산에 숨어든 도둑의 무리들이 한 여인을 납치해갔다. 남편이 구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남편이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울다가 지쳐서 부른 노래가 방등산가라는 것.
-자료인용(한국관광공사)-
▲방장산 개관
전라북도 고창군. 정읍시와 전라남도 북이면의 경계에 있는 방장산은 양고살재에서 벽오봉, 고창고개, 정상743m, 봉수대, 써래봉을 거쳐 갈재로 이어진다.
백제이후 방등산 또는 반등산이라 하다가 임진왜란이후 조선조 인조때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인 방장산과 비슷하다하여 방장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고창의 진산 방장산은 정읍 고부의 두승산, 부안의 변산과 더불어 전북의 삼신산이라 하며 지리산, 무등산과 더불어 호남의 삼신산이라 한다.
방등산은 삼국유사와 고려사악지에 방등산(方等山)으로 명기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반등산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방등이란 불가의 용어로써 방정하고 평등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등산이란 이름은 태산이 높고 장엄하여 산을 절반밖에 오를 수 없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사약지에 기록된 방등산가는 나주진관의 속현인 장성, 고창경계에 있는데 신라말에 도적이 반등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 양가집 자녀들을 많이 잡아다가 부렸는데 그중 장일현 여자가 그의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으매 이를 원망하며 부른 노래라고 하나 노랫말은 전해오지 않고 있다.
-자료인용(고창코리아신문)-
곧이어 삼각점(담양 21, 1999복구)을 지나 뒤에서 잘 가라고 손짓하는 방장산의 동봉을 뒤로한 채 앞에서 어서 오라 반기고 있는 반등산을 바라보며 고속도로로 된 너른 산책로를 따라 휘적휘적거리며 가벼운 걸음으로 여유로운 산행을 한다.
<방장산 서봉 삼각점>
<서봉에서 본 방장산 헹글라이더장>
<서봉에서 본 양고살재로 방장산휴양림 및 양고살재로 오르는 도로>
좌측에 양고살재로 이어지는 기맥의 연릉이 눈앞에 바짝 다가오고 남쪽으로는 방장산휴양림과 양고살재로 이어지는 지방도로도 내려다보인다.
14시 36분 영고134번 철탑을 지난다. 좌우로 깊은 골 아래 역삼각형 구도의 황금들녁이 너무도 보기 좋다. 다시 20여분정도 지나다보면 우측에는 빼곡한 전나무 숲이 나타나고 좌측에는 방장산휴양림메서 올라오는 시멘트도로가 바짝 따라오고 있다.
14시 50분 이정표(방장산자연휴양림 1,7km, 패러행글라이딩장300m, 방장산정상1.7km)를 지나 곧바로 도로를 좌측으로 보내고 헹글라이더장을 향해 한바탕 고도를 조금 높이며 오른다.
▲벽오봉(640m)
방장산이라 표기된 벽오봉은 옛날에 벽오봉이 바다였을 때 오동나무를 싣고 가던 배가 난파되자 그 자리에 오동나무가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벽오봉에 서면, 쾌청한 날에는 곰소만은 물론 경수산 너머 서해바다와 위도 구시포해수욕장의 가막도까지 조망권에 들어 온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방장산 패러글라이딩 진입로가 방장산 휴양림에서 628.4봉(억새군락지)까지 2.08km가 개설되어 패러글라이딩 레포츠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있다. 방장산 활공장은 지형과 기후 조건 등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1996년 공군 참모총장배 패러글라이딩 대회 이후 고창 모양성제 기간 중에 동호인들이 자주 이용하던 곳이다.
벽오봉과 연결되는 억새봉은 넓다란 공간에 갈대숲이 가을에는 장관을 이룬다. 전주이공 지묘 주변의 넓은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방향으로 311.4봉을 지나 성두리 산자락에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소가 있다. 판소리의 성두본과 연계성이 있는 선생께서는 사후에도 성두를 잊지 못하고 영원한 안식처로 삼은 것이다.
-자료인용(고창코리아신문)-
14시 58분 한차레 오름을 끝내고 이정표(양고살재2km, 장성갈재8km, 방장산자연휴양림 2km, 방장산정상2km)가 오가는 산객들에게 길 안내를 해주는 방장산 행글라이더장에 올라본다.
<방장산 헹글라이더장>
서쪽으로 고창군 신림면의 너른 벌판 위를 행글라이더 매니아들이 허공을 유영하며 낭만을 즐기고 있다. 밑에서는 비상할 준비를 갖추고 장비를 열심히 점검하고 있는 동호인들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며 좌측으로 돌려나간다.
<반등산(?)에서 본 헹글라이더장>
곧이어 길섶에서 길다란 손을 높이 흔들며 어서 오라 반기고 있는 억새무리들의 안내를 받으며 나가다보면 2분 후 반등산 정상에 도착한다.
<반등산 안내판>
15시 00분 안내판이 있는 반등산(半登山)(640m)을 지난다. 다시 중키의 진 푸른 참나무 숲 터널과 임도같이 너른 평지성의 산책로를 따라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한동안 호젓한 산행을 계속하다.
<반등산에서 양고살재 가는길>
위에서는 파아란 하늘에서 파란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창공이 너무도 보기 좋고 깊은 골에서 서늘한 바람이 올라와 수목을 흔들고 있고 바람에 나부끼는 잎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에 질세라 산새들도 몰려와 하모니를 이루어 어느새 숲은 교향악 연주회장으로 변하여 홀로 걷는 산객은 이 순간 무한한 행복감에 도취되어있어 감흥을 어찌 형언 할 수 가 없다!
15시 14분 우측(남서쪽)에 고창읍 월암리 공설운동장으로 탈출할 수 있는 문넘어재를 지난다.
<문넘어재 안내판>
이어지는 등로에는 많은 산객이 오가고 있는데 양고살재에서 급경사를 올라와야 되는 그들의 표정은 힘든 기색이 전혀 없고 오히려 밝은 미소로서 산객을 대하고 있다.
15시 20분 무명묘지 2기가 남녘을 향해 평온하게 누워있는 갈미봉(579m)에 올라선다. 남쪽으로 지척에 양고살재와 그 우측에 석정온천위락지구가 내려다보인다.
<갈미봉 안내판>
<갈미봉에서 내려다 본 양고살재 도로>
그 뒤로는 솔재를 지나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도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다시 조금 내려와 1분 후 배넘어재 3거리에서 직진하면 매봉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돌려 방장사를 향해 내림질한다.
<배넘어재>
15시 30분 거대한 바위를 뒤에 받히고 남향에 아담하게 자리한 산사(山寺)인 방장사를 지나 급경사의 돌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방장사>
<방장사입구 등산로 안내판>
곧이어 길섶에 밀알회에서 설치한 오석비와 돌탑이 잠시 걸음을 붙잡고 있는데 까만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음각되어 있다.
-밀알정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싹트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싹트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를 아 끼는 자는 잃는 것이요.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돌탑은 1993년 4월 5일 사단 법인밀알중앙회 고창밀알회에서 세웠다.’
<사단법인 밀알중앙회 고창밀알회>
15시 45분 다시 급비탈의 통나무계단 330개를 따라 후둘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내려와 방장산 등산안내도 안내도의 안내를 받으며 15번 국도상의 양고살재에 내리선다.
<양고살재에서 방장사로 오르는 통나무계단>
전북 고창군 고창읍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접경이며, 여기서 좌측(북쪽)으로 1km지점에 방장산 자연휴양림이 있고 우측(남쪽)으로 2km지점에 고창 석정온천지구가 있다. 고개마루에는 관광안내소와 그 뒤로 등나무쉼터가 있는데 오가는 객들에게 관광안내와 충분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양고살재 유래
고창읍에서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과 연결되는 국가지원 지방도 15호 선상,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양고살재가 있다.
양고살재는 병자호란때 고창 출신 박의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양고리(陽古利)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의(朴義)는 1599년(선조 32년)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고창 입향조인 관찰사 양오공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용기가 대단하고 말을 잘 타며 총을 잘 쏘아 박포수라 불렀다. 1624년(인조2년)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서울이 함락당하고 임금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수모를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근위병을 거느리고 수원근교 광교산에서 적을 만나 싸워 여러번 이기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내린 폭설을 만나 양군이 격전을 벌인 끝에 아군이 패하게 되었다.
박의는 적군의 이동로인 방장산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자 적의 대장을 초탄에 명중시켜 쓰러뜨렸다. 죽은 적의 상장은 양고리라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누루하치의 사위로서 창평전투에서 58회나 승리하여 청태종의 총애를 받던 명장이었다. 이때에 예친왕 다락을 따라 왔다가 박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청나라 사기에서 보듯 청태종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무훈왕을 봉하였다 한다. 양고리가 죽은 뒤에 산에서 조급히 몸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청군이 저 사람이 양부마를 쏜 사람이라 하니 활을 잘 쏘는 애륵을 시켜 잡아 목을 바치었다 고 한다. 박의의 묘소는 고수면 예지리 양정에 있으며 후손은 고수면 장두리와 아산면 중월리등에 살고 있다.
-자료인용(고창코리아신문)-
<양고살재 방장산 등산안내도>
<양고살재 15번국도>
<<惡魔의 소굴 양고살재 - 솔재>>
잠시 휴식을 끝내고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양고살재를 가로질러 숲을 파고 들어간다. 곧바로 억새무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군림하고 있는 영고 128번 철탑을 지나 장송 숲으로 빨려 들어가면 1분 후 임도가 기다리고 있다.
임도를 가운데 두고 좌측은 하늘을 향해 송곳을 들이대고 있는 장송군락이 우측은 키 큰 참나무 숲이 극명의 대립을 하고 있다.
5분 정도 임도를 따라 오르다 끝나는 지점에서 직진하여 오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빼곡한 잡목 숲이 기세를 꺾으며 진행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15시 59분 영고 126번 철탑을 왼쪽에 두고 오른다. 좌측으로 묵직한 방장산 서봉의 위용이 지척에서 준수한 용모를 뽐내고 있고 곧이어 가시덩굴 많은 고약한 잡목 길로 걸음을 더디게 하고 있다.
갈수록 진퇴양난의 가시밭길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뚜렷한 방책이 전혀 없고 그저 걱정만 앞서고 한숨만 계속 나온다.
16시 19분 우측에 철탑을 가까이 두고 장송가운데 가시덩굴 수북한 평지성능선을 치고 나간다. 곧이어 가시와 잡목에게 능선을 완전히 점령당하여 길이 전혀 없는 악몽 같은 아니 지옥의 가시밭길 같은 숲을 치고 나가는데 1분 동안 움직여도 채 1미터도 뚫을 수가 없다.
<잡목에게 점령당하여 형체가 없는 능선>
전신이 생 땀에 젖어 한여름 소낙비를 몽땅 맞은 것 같고 지난번 만난 멧돼지를 연상하면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온몸에는 수 십 개의 가시가 셀 수 없도록 박혀있다.
<진퇴양난의 잡목터널:낮은포복구간>
썩어 나둥구는 나무무더기들이 사방에서 성을 이루고 있어 아무리 돌아보아도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탈출구조차 전혀 없다.
원숭이가 나무 타는 것처럼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위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 해보기도 하고 군대생활시 터득한 낮은 포복을 이용하여 땅바닥에 바짝 붙어 조금씩 조금씩 진행해나가 보아도 그 자리에서만 빙빙 잡아 돌고 있다.
<사방으로 둘러싼 뚷고 나갈수 없는 썩은 나무더미>
숲은 금방 어두컴컴해지고 있어 정말로 큰일이다. 잠시 후 완전히 거미줄 속에 갇혀 왕거미의 먹이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체념하고 기다리는 것처럼 칡넝쿨 숲의 깊은 수렁덩이에 빠져 버리고 만다.
또한 가시와 잡목들로부터 난도질당한 상처로 인해 통증을 참을 수가 없다.
허벅지와 팔 등을 손바닥으로 훔치면 도축장에서 금방 잡은 가축의 붉은 핏덩이를 손에 쥔 것처럼 선혈이 낭자하다.
<뚫고 나가기가 전혀 불가능한 칡넝쿨 숲>
50m정도만 뚫고 나가면 저 앞의 작은 봉우리에 오를 것 같은데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살아야만 된다는 일념만으로 무조건 아래를 향해 잡목을 손으로 절단하고 입으로 끊어내며 지겹게 헤쳐나간다.
한동안 땅바닥에 엎드려 박박 기면서 내려와 보니 희미한 길 같은것이 보이는데 이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이제는 정말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고 우회하여 그 봉우리를 향해 올라보니 조금전보다 갈수록 등로가 뚜렷하고 잠시 후 가족묘지를 만난다.
17시 12분 동중추부사 조항묘지에 도착하여 다리 쉼을 한다. 내가 정말로 살아있는 걸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다시 조금전의 악몽 같은 지옥의 늪에서 촌각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예상대로 가문이 있는 묘지로 오르는 길은 잘나있다. 후손들이 잘 관리하여 묘지로 오르는 길은 잘 닦은 임도로 되어있어 정신 없이 뛰면서 솔재를 향해 내림질한다.
17시 27분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옆들이 고개마루에 나둥글며 슬픈가을을 더욱더 애잔케하는 솔재(898지방도)에 내리서서 꿈에서라도 상상하기 싫은 오늘의 여정을 여기서 끝내고자 한다.
<솔재:898지방도>
◆주변관광명소 소개
★고창읍성★
○전북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조선 초기의 성.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시대 : 조선 초기
○지정 : 사적 제145호
○규모 : 둘레 1,684m
○사적 제145호. 둘레 1,684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백제 때 모량부리였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있다.
계유년이 1453년, 1513년, 1573년, 1633년 중 어느 해인지 알 수 없으나, 성벽 형태로 보아 대략 1573년인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도움으로 8년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다.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 ·서 ·북의 3문과 치(雉) 6곳, 수구문(水口門) 2곳, 옹성(甕城)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육축(陸築)에 홍예문(虹門)을 열고 초루(樓)를 세우는 방식과 달라,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북문은 2층처럼 생긴 다락집이고, 아래층 어간(御間)에 문짝 둔테구멍이 있다.
서문터는 1976년 발굴되어 기둥초석과 문짝 달던 위치가 확인되고, 동문터도 기둥초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문 구성은 다른 유구(遺構)에서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성벽과 문루(門樓)와의 접합에대하여 밝히지 못하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썼는데, 초석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을 깨뜨려쓴 것도 있다. 고창의 성벽 밟는 놀이는 아마 성가퀴 뒤의 성로(城路)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인용(선운산관광호탤)-
★★★★전봉준장군★★★★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주도자였던 전봉준 장군은 1855년 전북 고창군 고창읍 당촌리 63번지에서 아버지 전창혁,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子)는 명숙(明淑), 호(號)는 해몽(海夢)이고, 관(貫)은 천안(天安)이다.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은 오척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어 일명 녹두장군으로 회자되었다.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 지도부는 1894년 3월 20일(음력)에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기포지(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 마을)에서 4,000여명의 농민군이 모인 가운데 무장창의 포고문을 선포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갔다.
또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농민군의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조직적으로 투쟁을 전개 했고 집강소를 세우는 등 농민자치를 실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봉준 장군은 동학농민군을 규합하여 최후 전투였던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 장군은 재기를 계획했으나 갑오년 12월 2일 밤에 체포되어 그의 나이 41살이었던 1895년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봉건체제의 모순이 심화된 가운데 농민층이 가혹한 수탈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항거한 농민전쟁이었고 당시 위정자의 각성은 물론 갑오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의 민중항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료인용(고창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