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따 워따 지가 국사봉이란 닉을 달으니 이산가족 찾는것보다 더 쉽게 고향분이 저를 알아 보드랑께요.
왜그냐구요?
국사봉은 영암에서 월출산 다음으로 산뽕다리가 높은께요.
원래 영암 금정이라 허는 곳은 칡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산중이라고 했는디 저 산디하고 백송님산디는 벨로
산중도 아닌디 안산중이라고 허는디가 있어서 그렇기도 허고 산으로 울을치고 있응께 그란지도 모르제롸우.
지는 국사봉에 도마비암이 있는지는 잘 모르고 설모초란 약초를 산중 애들이 갈차 줘서 국사봉허믄설모초하고 깔대밭
그리고 그 아래 남송 방죽이라고 어려서 볼 땐 목포 앞바다가 고롷코롬 너른가도 생각 했당께요.
아매도 백송님 동네에서 쪼까 나오면 봉덕이란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는디 항시 물이 흐르곤 했지요.
추우면 그 물레방아 옆탕구리에 옴팍하니 들어간 바위가 병풍처럼 쳐 있어서 거그서 추위도 녹이고 달고나란
뽑기가 있었는디 십원에 두개부터 다섯개를 줬당께요.
학교를 갈라치면 내를 건너야 허는디 징검다리가 있었는디 그래도 박완서님의 그여자네집 섭다리 이야그는
안일어 났당께요.
쫌 멀리 돌아가면 다리가 있었는디 지름길로 가니라고 돌다리를 건넜지요.
학교엔 교문도 없었고 야산을 깎아 교사 한동을 딸랑 지어 놓고 남녀유별이라는 명복아래 되도록이면 1층은
교무실과 교장실, 서무과가 가로 막어 불고 2층엔 체육실과 도서실로 가로 막었는디 2학년 선배들이 국사봉으로
놀러 갔다고 정학을 당허고 반성문을 쓰고 헝께 겁나게 큰일이 났는갑다 했는디 지금 생각해보니 별일도
아닌것 같고 선상님들이 쥐어 짜고 난리였당께요.
저의 대부이신 동창생은 여학생한테 편지를 보냈는디 즈그 아부지가 팬지를 들고 선생님한티 찾아왔으니
`또 야단 법석이 나불고 펜지해도 안되고 야그해도 안되고 남학생 보기를 돌같이 봐야한다는 인식이었당께요.
그라고 또 잊을 수 없는 일이 교복도 안 입을 때 여자 친구가 손톱에 메니큐어 칠을 했다고 야단 맞고 다음날까지
지우지 않응께 정학을 시켜 그 친구가 학교를 안댕게 붕께 중학교 법은 겁나게 무선지만 알았당께요.
춘향전서 볼작시면 다들 방년 16세 17세였고 시집도 가고 장개도 갈 나이인디 선생님들은 뭣땀시 그롷고도
야단이 낫으까요?
암튼 어지께 백송님을 뵈오니 요런 생각도 나부요.
그라고 백송님 종형은 지가 코를 찍찍 흘리고 1학년 입학 했는디 1반 선생님인디 울 담임이 안오셔가지고
우리 교실에 오셨는디 주먹쥐고 손을 펴서 손뼉치고 주먹쥐고 또다시 펴서 손뼉치고 이 손을 앞으로 자동차가 뽕뽕 자동차가 뽕뽕 자동차가 뽕뽕 지나갑니다.
이 장면에서 나선생님은 자전거 바람넣은 동작을 하시면서 율동을 가르쳐 주시니 울 선생님같이 해야 허는디 요상허게도 갈친다 허고 딥다 웃었당게요.
선생님들 교통수단이 자전거였는디 자전거만 타고 댕기셔도 겁나게 멋지게 봤당게요.
울 아부지하고는 다른 양복도 입으시고 점퍼를 입으시니 그 또한 멋지대요.
선생님이 지나가시면 볼세라 언능 보리밭이나 언덕배기 아래로 숨어 버리고 인사를 할려면 어찌나 여럽던지
숨어불고 지발 내 앞을 안 지나 가시길 간절히 바랬당께요.
그나저나 백송님 징허게 반가웠소.
마음을 열어 주시니 지가 울 고향 표준어로 주저리 주저리 열어 재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