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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
문건명 |
수록 문헌 |
연도 |
안목 아들 형제 |
1 |
죽산안씨 족보 (복야공파) |
1848 |
원형 / 원숭 | |
2 |
신죽산안씨 가승 (필사본) |
1896 |
원형 / 원숭 | |
3 |
안씨구세동원보 |
죽산안씨 장단파보 (연창위파) |
1909 |
원숭 / 원화 / 원형 / 원린 |
4 |
죽산안씨 세보 (소감공파) |
1923 |
원숭 / 원화 / 원형 / 원린 | |
5 |
죽산안씨 족보 (사과공파) |
1931 |
원숭 / 원형 / 원린 | |
6 |
안씨동원보 |
죽산안씨대동보 |
1976 |
원숭 / 원화 / 원형 / 원린 |
7 |
안씨동원보 |
죽산안씨대동보 |
1999 |
원숭 / 원화 / 원형 / 원린 |
[동국안씨원파구보가 1776년(병신) 문헌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관련 인물 안윤채/안중력이 1900년대 초의 사람이므로 1896년(병신) 기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안명유(安命鰇) 친필과 비교하면 동국안씨원파구보는 후대에 추가된 것]
안씨동원보 류는 모두 고려말 족보에서 나온 것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위 표에 나온 안목의 아들들은 모두 고려말 당시 사람들로 후손도 벌어지기 전인데, 과연 죽성군, 탐진군으로 봉군 받았다고 해서 고려말에 본인 1명 또는 아들까지 3~4명이 따로 순흥에서 본관을 달리해서 분관(分貫)해 나오는 것이 가능했을까?
신죽산안씨와 탐진안씨가 순흥 분파인가 아닌가는 1800년 이후 계속 논란이 되어 왔지만, 1980년부터 이들 성씨들은 순흥안씨 족보에도 들어가고, 대종회에도 가입해 있다. 하지만 근래에 발견/발굴된 고려말과 조선초의 금석문에 의해 안목의 아들은 안원숭 한 사람 뿐인 것이 명백하게 확인되었으며, 안원형의 군호도 죽성군(竹城君) 아닌 광산군(光山君)으로 밝혀져, 죽성군에 이봉(移封)되어 순흥안씨에서 죽산안씨가 되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아래 두 자료를 참고하면 이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색(李穡) 찬, 김태현처 왕씨 묘지명(金台鉉妻 王氏 墓誌銘) : 사위 안목(安牧)의 아들은 안원숭(安元崇) 뿐이다.
순흥 안씨 병오보(1546년) 이래 전통적인 순흥 족보에 안목의 아들은 안원숭만 있었고, 이 묘지명으로 재차 확인됨.
1848년 죽산보의 "동국안씨사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글을 끌어와 고려말 족보 서문(麗末譜序)이라 조작하였다.
안복초(安復初, 1382-1457) 묘지명 : 증조부 안원형(安元衡)의 군호는 죽성군(竹城君) 아닌 광산군(光山君)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가 지은 것으로 삼탄집(三灘集)에 실려 있었으며, 실물 묘지명 출현으로 재차 확인됨.
유계(兪棨) 찬,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行狀)
유계(兪棨, 1607-1664)가 지은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에 10대조 안원형(安元衡)의 선대가 순흥안씨가 아니라 (구)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파 시조 안영의(安令儀)의 증손 안전(安戩, ?∼1298)이라 함.
위와 같은 근래에 새로 발굴된 문헌들이 안씨 동원보는 고려말 족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죽산, 탐진안씨가 순흥분파라는 설이 처음 제기된 1800년 이후에 만들어진 조작된 족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고려말 족보에서 나왔다는 안씨동원보는 고려말 당시 계보조차 실제가 아닌 조선말에 나온 잘못된 주장을 따르고 있는 위보(僞譜)이므로, 거기에 나온 신라말 고려초 계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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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 시조 동래설 / 안씨동원보가 근거 없다는 것을 죽산안씨들이 증명하고 있다.
안씨 시조 동래설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출처를 모른다. 출처도 모르고, 원본 기록이 없다보니 각자 나돌아다니는 풍문을 듣고 제나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용도 가지각색, 중구난방이고 어느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죽산안씨 자신들도 1848년 족보에서는 1805년 족보 서문의 기록을 부정하고, 1976년 대동보에서는 이전 어느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는 당나라 원정 출병의 공로로 안씨 사성을 받았다는 생경한 주장을 내세우고, 1999년 대동보에서는 1976년 대동보 내용을 또 부정하고 새로운 설을 내세웠으며, 2011년에 와서는 당나라 종실설을 파기하여 1999년 대동보의 내용을 또 부정한다. 위에 예로 든 안씨동원보가 실린 7개 문헌도 고려말 족보에서 나왔다면서도 내용이 서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죽산안씨들은 족보를 낼 때마다 시조에 대한 기록이 달라져 왔다. 자신들도 무슨 기록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자신들도 뒤죽박죽인 기록더미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도 알 수 없어 오락가락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면서 광주안씨나 고성이씨 등 관계없는 다른 성씨들에게 무슨 족사를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는가?
1200년 전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족보를 낼 때마다 새롭게 바뀌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어느 성씨나 시조는 오래 전의 분이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으니, 족보를 새로 간행하더라도 시조에 대해서는 첫 족보의 기록과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
뒤늦게 안씨동원보를 고증한다면서 찾아낸 수많은 서로 모순되는 기록들 중에 다음 죽산안씨 족보 간행에는 어느 것이 맞다고 택할지 판단이 서는가? 광주안씨 절첩보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죽산 을축보(1805) 서문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증정문헌비고(1809), 동국안씨 사실(1848), 순흥안씨 전의록(1957).....등등 서로 상충하는 기록들 중 어느 것이 맞으며,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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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죽산안씨 시조 안원형이 죽성군 봉군받아 순흥안씨에서 죽산안씨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것처럼, 죽산이나 광주안씨도 신라말 죽산군, 광주군으로 봉군받아 관향이 나뉘어 정해진 것이 아니다.
구죽산안씨 두 파도 동원이 맞다면 본관이 없던 신라말에 분파한 것이 아니라 본관이 정해지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1200년 이전에 분파한 것이다. 이 시기는 문헌의 부재로 지금에 와서 연결 계보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고려말에 분파한 신죽산 안씨는 구죽산안씨 복야공파와 연결 계보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유계(兪棨) 찬,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行狀)
유계(兪棨, 1607-1664)가 지은 위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에 10대조 안원형(安元衡)의 선대가 순흥안씨가 아니라 (구)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파 시조 안영의(安令儀)의 증손 안전(安戩, ?∼1298)이라고 하였다.
위 행장이 사실이라면 신죽산안씨 시조 안원형은 연대로 보아 안전의 손자 쯤 될 수 있으며, 죽산안씨 복야공파 족보에 나와 있는 안전의 세 아들 중 한 사람이 부친일 가능성이 높고, 조부가 될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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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安鼎福)의 변무(辨誣, 1790) : 안씨 시조가 동래했다는 설은 맹랑하고 근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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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동원보는 신라말, 고려초의 조상들 3대가 연속으로 고려 후기 관직인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고 주장한다. 신라말 고려 초에 양자를 주고받았다는 것도 시대를 수백년 앞서가는 일이다. 아들이 없는 사람이 친족 조카들 중에 양자를 들이는 풍습은 조선시대 1500년 전후부터 시작되었다. 1475년 간행 안동권씨 성화보에는 양자를 입양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다. 안씨동원보가 나오기 이전 죽산안씨 족보에도 고려~조선 초 기록에 양자을 입양한 경우는 한 건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 족보들도 마찬가지이다.
신라말 조상이 중서령(中書令)과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는 것은 안씨동원보가 조작인 증거
신라말 고려초에 계자(系子) 입양과 항렬 맞춘 작명이 가능한가?
조선말에 신라시대 조상의 일을 새로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옆집 왕륭(王隆)이 송악군을 궁예에게 바칠 때 판도판서께서는 뭘 하셨나?
변무(辨誣)와 관계없이 안씨동원보는 조선말에 조작한 위보(僞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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