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산성과 제단을 오르면서
3월은 기다림의 달이다. 겨울 내 얼어붙은 동토가 서서히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도 온기라곤 한낮에 감질날 정도로 짧을 뿐이다. 아직도 집밖을 나설 때 으스스한 냉기 때문에 온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그래서 3월은 산행하기에 멋진 계절이 아니다. 산불 탓에 입산금지로 가야할 산이 많지 않을뿐더러 설령 가더라도 설산을 밟는 기쁨도 없고, 그렇다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는 계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 함께한다는 마음에 설레는 것 보다 휴일 아침에 따뜻한 이부자리를 박차고 쌀쌀한 야지(野地)로 나서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이다.
흥사단 춘천지부에서 3월 등반행사로 한계산성으로 정하고, 지부장님의 개인적 후원으로 큰 버스를 빌렸기 때문에 간만에 많은 사람이 한차에서 편안하게 함께 할 수 있었다. 설악산 산성입구에 도착하자 꽃샘추위에다 바람이 몰아치는 옥녀탕 계곡은 출발 전부터 온몸이 움츠려 들게 하였다. 그러나 골짜기로 따라 올라가다보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고 햇살타고 내려온 따스함이 어느새 한기를 내 몰았다. 바위틈에 걸려있는 고드름에서 낙수소리가 이곳에도 봄이 멀지 않았다고 알리고 있었다. 계곡 바위를 비집고 굴곡굴곡 돌아 내려가는 물은 옥수이고 신선수이다. 물 흐르는 소리가 청아하다. 휘돌아가는 물소리를 들어봐도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옥녀탕라고 불렀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선녀가 옥녀탕에서 목욕하면 시샘하는 진해가 많았다는 전설이 있단다. 그 만큼 옥녀탕에는 시샘하고픈 자연과 매혹적인 선녀가 있는 곳이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아직도 바람소리가 휭휭 거리지만 계절의 위대한 변화에 순응할 태세이다. 생명이 움트고 성장하기 위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악산 서북능선의 끝자락에 안산이라는 큰 산이 있다. 대청에서 중청, 끝청, 귀때기청, 대승령을 거쳐 십이선녀탕으로 내려가기 전에 주능선 서쪽 끝에 있는 산이다. 한계산성은 안산 아래 옥녀탕 사이에 있다. 산성이란 피신하는 곳이다. 신라말경에 최초로 쌓았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 몽골족의 침략으로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하였는데, 그 전란을 피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도 있단다. 산성이라면 백성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세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왜 깊은 산중에 산성을 쌓았을까? 오늘날에도 강원도는 인구가 적다. 더군다나 먼 옛날 한강의 상류에 살았던 몇 되지 않았던 선조들이 더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산성을 쌓았으니 오죽하면 살기위해 심산에 숨어있어야만 했을까?
옥녀탕에서 약 30분간 골짜기를 따라 걷다보니 땀이 조금 나려고 할 때 능선을 가로질러 있는 산성이 나타났다. 인제군이 작년에 마지막으로 복원하였다는 성벽이다. 규모로 보아 대군을 막기 위한 전투형 성벽이 아니다. 그저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토끼 같은 새끼, 처와 함께 화전이나 일구면서 욕심 없이 살고자 했던 민초들이 쌓은 성벽이다. 여기에는 무슨 중앙정부의 지원이 있어서 영구적이고 체계적으로 쌓은 것도 아닌 것 같다. 힘없는 백성들이 죽기 싫어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쌓아올린 허름한 성 같아 보였다. 오늘날 민족의 혼을 기르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복원하였다지만, 단순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에는 하염없이 저미어 오는 슬픔 같은 전율을 느꼈다. 초라한 성문 기반석에는 대문을 여닫기 위해 파인 홈이 지나간 선조의 흔적으로 각인시켜주고 있을 뿐, 오랫동안 허물어져 방치된 것을 복원하였다는 느낌이었다. 성터안에 움막이라도 지을 변변한 평지도 보이지 않고 이어지는 경사지에 이름모를 수목만 무성하였다.
우리 일행은 제단을 가기 위해 다시 골짜기로 오르다가 이어서 능선가는 사로(斜路)로 방향을 바꾸었다. 제단가는 길은 그 옛날 선조들이 목욕 재개하고 올랐던 신성한 길이라 생각되지만, 선조의 발자취는 없고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의 급경사만 있을 뿐이었다. 미끄러지고 다시 오르다가 나무를 잡고 한발 한발 움직이면서 온몸에 긴장하며 네발짐승처럼 기다시피 오르기 시작하였다. 발을 디디다가 박힌 돌이 경사지 아래로 굴러갈 때면 행여 뒤따라 오는 사람이 다칠세라 소리를 지르며 긴장을 하였다. 예전에 충청도 사람들이 워낙 느려서 “돌 굴러가요”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돌에 맞았다는 우수개 소리가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작은 능선에 올랐다. 흥사단 본부의 신상우 원로 단우님, 등산 경험이 적은 듯 보이는 이종각 교수님, 등산 경험이 많지만 여성인지라 체력의 한계를 느꼈던 김용순 선생님도 전력투구로 올라와서 정상능선인줄 알았던 중간지대에 이르러 포기하고 말았다. 이미 동료 반절 이상이 위험한 등산이라고 혀를 차며 제단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갔다.
여기가 정상 능선이 아니다. 능선에서 이어진 얼음과 눈이 바닥에 깔려있는 음습한 얼음골자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산 안내원인 양정모씨가 큰 배낭에서 자일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흥사단 준 프로급 산꾼인 옥영수, 곽경현 단우도 배낭에서 자일 한 뭉치를 꺼내었다. 몇몇 동지들은 아이젠을 준비하였지만, 아이젠만으로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급경사지였다. 모두 자일에 몸을 맡기고 미끄러운 경사에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걱정되는 친구는 여흘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유학 온 무클리신이라는 학생이다. 왜소하면서 마른 체격으로 얼굴이 거무칙칙하고 눈이 큰 친구다. 그는 열대지방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추위에 약했고 더구나 한국에 흔히 있는 악산(嶽山) 등정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사전에 털옷, 장갑, 모자 등을 대신 준비하여 건네주었지만 자일에 매달린 모습이 영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내 자신보다 그 친구의 안전산행에 신경이 쓰여 곁을 떠나지 못하고 붙어 다녔다.
이렇게 험준하고 오르기 힘든 곳에 왜 신(神)을 모실 제단을 쌓았을까? 마치 잉카문명의 마추비추의 제단처럼 신이 다가가기 쉬운 따뜻한 곳이기 때문일까? 제사장이 아래 골짜기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이 가파른 길을 등산화도, 자일도 없이 어떻게 제물을 품고 올라왔을까? 깨끗하게 씻은 몸에 땀이 범벅이 되지 않았을까? 선조님들은 이 길이 아무리 험해도 가슴속 파고드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올랐으리라. 짚신이 헤어지고 발가락에 피가 맺혀도 제단에 올랐으리라. 상념과 망념이 꼬리를 물어 힘들다는 생각을 잊게 하였다. 힘이 든다는 것도 의식이 있기 때문이고 생각이 없으면 망각이다. 산을 오르는 자는 세상사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오르고, 또 다른 자는 많은 것을 생각하기 위해 오른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부질없는 인생사의 짐 때문에 행복한지 모른다. 자일을 붙들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능선 정상에 섰다. 능선 따라 조금 남쪽 방향으로 내려가니 드디어 제단이 나타났다.
설악산 서북능선의 끝자락의 정기가 모인 명당자리라는 것을 누가 봐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삼면이 급경사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안산에서 이어 내려온 니찌(능선) 중앙에 자연석 제단이 있고 제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사방 바람이 통하고 시야가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곳이다. 신과 가장 만나기 좋은 곳이 또한 경치가 가장 아름답던가? 좌측과 정면으로 알프스의 설산과 같이 눈 덮인 칼날 바위산이 우뚝서있고 깎아 지르는 절벽 아래로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에 국도가 보였다. 골짜기 건너 가리산 주봉이 보이고 이어서 주걱봉, 촛대봉, 삼형제봉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배낭에 넣어 둔 과일과 과자 몇 조각, 소주 한잔을 올려놓고 제배를 올렸다. 모두 춘천 흥사단의 발전을 위해 절을 하자고 말하였지만, 알 수 없는 자신을 위해 각자 절을 하였는지 모른다. 얼마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도 마지막까지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절하는 것이 신께 전하는 우리의 마음이기 보다는 우리 조상이 행하였던 간절한 마음을 알기 위함인지 모른다. 보일 듯 말듯 바위위에 쓰여 있는 희미한 한자들이 천년의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을 뿐 아무도 이야기해주는 이가 없었다.
명당자리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서설악의 풍경은 왜 우리가 산을 오르는지 이유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설악산 한계산성 제단에서 보는 파란 하늘은 냉랭한 공기 때문인지 더 맑고 높고 선명하였다. 저항할 수 없이 다가오는 봄의 빛, 지나간 그리움, 그리고 다시 재현할 수 없는 회상의 징표이기도 하였다. 잔잔한 기쁨이었다. 행복감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다녀갔고, 훗날 그 누구도 기억하려 들지 않겠지만 세월과 함께 제단은 명당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누가 있다고 보장할 이 있겠는가? 누가 없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이가 있는가? 오직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있을 뿐. 인간이 없는 세상에 어찌 신이 있으랴. 우리는 누군가를 기대지 않으면 불안하고, 의지하여 즐겁고 또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시간이 우리를 잡아두지 않고 흔적도 결국 욕심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삶이다. 살아야만 한다. 신이 허락하는 한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서 다음 이에게 물러주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면 하산을 하였다.
첫댓글 보람찬 산행이었습니다. 그 때의 감흥을 세밀히 묘사하여 새삼 감동이 되살아 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실존철학 같기도 하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주어진 복이고 기능일지. 아니면 부단한 트래이닝일지,,,,, 똑같이 겪은 체험을 가지고 다양한 관점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마음으로 조명한 글들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전주흥사단 박창순----
고맙습니다. 춘천 지부장님의 명(?)에 따라 산행기를 썼습니다. 동지님들 산에 자주 가셔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한 30년 전에 갔던 곳.. 십이선녀탕 계곡에서 며칠을 묵고는 서북주능으로 해서 오색에 되돌아 갔었다. 11월 이었는 데, 그 밤에 우리는 조난이란 것을 맞이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과 사'는 길을 몰라서 생기는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 !!! 안산에서 설악의 주능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다시 가고 싶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