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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온조왕 13년.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백제왕기 시조온조왕 13년
十三年 乙卯 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末葛 侵軼疆境 少無(有)寧日 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劃定疆域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 (BC6년) 을묘 2월 서울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백제왕기 비류왕 13년.
十三年 乙卯 二月 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召西奴薨 六十一 五月 王弟溫祚出遊漢山下(狼林山) 謂其臣曰 “靺鞨樂浪連侵王都 妖祥累見 國母棄養 此地膏腴可居 而兄王無遷都之意 吾等分衆居此地 何如” 衆曰 諾 七月 溫祚立柵於漢山下 請分居 王許之 分慰禮城民戶 與之 八月 溫祚遣使馬韓告移居 而請借邊地.
13년(B.C.6) 을묘 2월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召西奴소서노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5월에 왕의 동생 溫祚온조가 한산 아래(낭림산)를 다녀오더니,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과 낙랑이 계속 王都를 침략하고,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돌아가시니, 이 땅이 기름져서 살 만하지만, 형 왕은 천도할 뜻이 없다. 우리들은 무리를 나누고 이 땅에서 살겠다. 어떠한가?” 무리들이 동의하였다. 7월 溫祚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分居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위례성의 백성들을 나누어 주었다. 8월 溫祚는 사신을 마한에 보내 移居를 알리고, 변두리땅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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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온조왕 14년.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 (BC5년) 봄 1월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기 시조온조왕 14년
十四年 丙辰 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 (BC5년) 병진 1월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기 비류왕 14년.
十四年 丙辰 正月 溫祚定新都於漢山下(似今寧遠德川地方 時馬韓衰弱 使溫祚居其邊地 以禦靺鞨樂浪者也) 二月 溫祚巡撫其新部落 以勸農事 七月 築城於漢水西北 分新都民往守之(漢水者大同江之出狼林山者也 此時築城 似今廣城岺妙香山也)
14년(BC5년) 병진 1월, 온조가 한산 아래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였다.(지금의 녕원,덕천 지방인 것 같다. 이때 마한은 쇠약하여 온조로 하여금 그 경계에 거주하면서 말갈과 낙랑을 막아주길 바랬던 것이다.) 2월, 온조가 새로운 부락을 순행하며 농사를 권하였다. 7월, 한수 서북에 성을 쌓고, 새로운 도읍의 백성들을 나눠서 가서 지키게 하였다.(漢水(한수)란 대동강이 나오는 狼林山(랑림산)을 일컫는다. 이 때 쌓은 성은 지금의 광성령, 묘향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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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온조왕 15년.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 (BC4년) 봄 1월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백제왕기 시조온조왕 15년
十五年 丁巳 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 (BC4년) 정사 1월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백제왕기 비류왕 15년.
十五年 丁巳 正月 溫祚作宮室 不儉不侈 請王宴樂 王見新都鼎足 而彌鄒忽凋殘 而有慚色 而歸
15년 (BC4년) 정사 1월 온조가 궁실을 지었는데 누추하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았다. 왕이 宴樂(연락)하기를 청하였다. (비류)왕이 새로운 도읍이 鼎足(정족)한 것을 보고, 彌鄒忽(미추홀)은 凋殘(조잔, 시들어 떨어짐)하다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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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온조왕 17년.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17년(BC2년, 己未)=> 多婁王 9년(AD36년, 丙申) 봄, 4월.
봄, 樂浪(낙랑)이 쳐들어 와서 慰禮城(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
백제왕기 시조온조왕 17년
十七年 己未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四月 立廟以祠國母
17년 己未(기미, BC2년) 봄, 樂浪(낙랑)이 쳐들어 와서 慰禮城(위례성)을 불질렀다. 4월,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지냈다.
*백제왕기 비류왕 17년.
十七年 己未 春樂浪來侵 焚慰禮城(彌鄒忽也) 王戰敗 憂懣以薨 王弟溫祚統其衆 而繼立爲王 以新都爲慰禮城
17년 己未(기미, BC2년) 봄, 樂浪(낙랑)이 쳐들어 와서 慰禮城(위례성, 彌鄒忽也)을 불 질렀다. (비류)왕이 전쟁에 패하여 걱정하고 번민하다 죽었다. 왕의 동생 溫祚(온조)가 그 무리를 통솔하였다.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새로운 도읍을 慰禮城(위례성)으로 삼았다.
*兄 비류의 죽음. BC2년, 己未 (AD36년, 丙申)
*兄 비류, 甲戌生=BC47年- BC2年= 45살+ 1살= 46살 사망.
우대왕 四年 丁丑 三月 次子溫祚生
4년 (BC44년) 정축 3월 둘째아들 溫祚(온조)가 태어났다.
*丁丑 = BC44년
추모대제기 5년 戊子(무자) (BC33년) 1월,
召后(소후)는 아들 溫祚(온조)를 낳았다. BC33년.
비류 수명 46살. 온조 수명 72살
백제의 의도는 온조를 우대왕의 아들로 주장하고 있고, 고구려측은 추모왕의 아들로 얘기함.
그래서 11년의 편차가 존재함.
백제측 72살- 44년= AD28년 온조 사망.
고구려측, 72살- 33년= AD39년 온조 사망.
○十年 丁酉 七月 冬 溫祚傳位多婁
대무신 10년 AD37 정유 겨울 온조는 다루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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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年 庚申 十月 末曷掩至 王帥兵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18년 (BC1년) 경신 10월 末曷(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七重河(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素牟(소모)를 사로잡아 馬韓(마한)으로 보내고 그 나머지 무리들은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 왕이 낙랑의 牛頭山城(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臼谷(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二年 庚申 十月 末曷掩至 王帥兵戰於七重河(狄踰岺北 禿魯江上流也) 虜酋長素牟 以送馬韓 而坑其餘衆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咸興草黃岺也) 至臼谷 遇大雪乃還
2년 (BC1년) 경신 10월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칠중하(적로령 북쪽, 독로강 상류)에서 싸워, 추장 素牟(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그 나머지 무리들을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함흥 초황령)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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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年 壬戌 二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異鳥五來翔
20년 (AD2년) 2월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맴돌았다.
四年 壬戌 二月 設大壇 祠天地 異鳥五來翔
4년 (AD2년) 임술 2월 큰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맴돌았다.
二十二年 甲子 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末曷賊一戰 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 (AD4년) 갑자 8월 석두성과 고목성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의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살아있는 채로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六年 甲子 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末曷賊一戰 破之 獲其生口 分賜將士
6년 (AD4년) 갑자 8월 석두성과 고목성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의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살아있는 채로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二十四年 丙寅 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24년 (AD6년) 병인 7월 왕이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생각건대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여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封疆(봉강)을 침범하니 그 뜻이 이러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八年 丙寅 七月 作熊川柵(似今三登 以能成江爲熊川也 古者 川之大者多作熊川 今之漢江臨津 亦稱 熊津者明矣) 馬韓王責之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百里之地安之 今以國完民聚 大設城池 侵封疆 其如義何?" 王慙而謝之
8년 (AD6년) 병인 7월 熊川柵(웅천책, 지금의 三登(삼등)이다. 能成江(능성강)을 熊川(웅천)이라고 하였다. 옛날에 ‘川’이큰 것을 熊川(웅천)이라 하였다. 지금의 漢江(한강)과 臨津(임진강) 역시 熊津(웅진)이라고 칭했음이 명백하다.)을 세웠다. 마한왕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더니,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封疆(봉강)을 침범하니 그 뜻이 이러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사죄하였다.
二十五年 丁卯 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竝隣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倂呑辰馬之心
25년 (AD7년) 정묘 2월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九年 丁卯 二月 王宮井水暴溢 馬生牛 二身一首 日者曰 "井溢者 大王勃興之兆也 馬生牛者 大王幷呑隣國之兆也. 二身者辰馬也(此時新羅來 與百濟相隣 而以爲辰馬者 以樂浪爲辰韓者也)" 王聞之大喜
9년 (AD7년) 정묘 2월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말이 소를 낳았는데 몸이 둘에 머리 하나였다. 일관(그때그때 점치는 사람의 관직)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말이 소를 낳은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두개의 몸이란 진마를 말합니다.(이때 신라가 와서 백제와 더불어 서로 이웃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마라고 하였고, 이 때문에 낙랑을 진한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二十六年 戊辰 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倂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倂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6년 (AD8년) 무진 7월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달라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과 금현성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十年 戊辰 七月 馬韓漸弱 上下離心 王知其不久 謂群臣曰 “儻爲他所幷 唇亡(원문은 본자)齒寒 不如先人取之 無至後悔” 乃命將士備之 十月 王陽言出獵 而潛師 襲馬韓倂 其國邑 唯圓山(似今北漢山)錦峴(似今開城) 二城固守 不下
10년 (AD8년) 무진 7월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나뉘어 왕이 마한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군신들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갑자기 다른 곳으로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되니 먼저 마한을 손에 넣으면 후회에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장졸들에게 명하여 준비하도록 하였다. 10월 왕이 사냥을 나간다고 소리 높여 말하고 몰래 출병하여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지금의 북한산)과 금현(지금의 개성) 두개의 성만은 굳게 지키어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백제왕기 시조온조왕 27년.
二十七年 己巳 四月 二城(圓山錦峴)降 移其民於漢山之北
27년 (AD9년) 기사 4월 두 성(원산성, 금현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겼다.
*마한이 멸망했다는 내용이 여기에는 없다.
*백제본기 온조왕 27년.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 (AD9년) 여름 4월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을 쌓았다.
*백제왕기 온조왕 11년.
十一年 四月 二城下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亡(按此所謂馬韓者 馬韓之南部也 其北部則尙不滅 故後見馬韓也) 七月 築大豆山城(似今成川也 大豆者大神也 所以置國之大社者也 時百濟自寧遠至成川江東 而移都于今平壤 此皆漢水流域也 平壤馬韓之都也)
11년 (AD9년) 4월,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살펴보건데, 이것은 소위 마한은 마한의 남부이다. 그 북부지역은 즉 아직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마한이 나타나는 것이다)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지금의 成川(성천)이다. 大豆(대두)라고 하는 것은 大神(대신)이라는 뜻이다. 나라의 大社을 세운 곳이다. 이때 백제는 寧遠(녕원)으로부터 成川江(성천강)의 동쪽까지이고, 지금의 平壤(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것 모두 漢水(한수)의 유역이다. 平壤(평양)은 馬韓(마한)의 도읍이였다.)
二十八年 庚午 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馬事 四月 隕霜害麥
28년 (AD10년) 경오 2월 맏아들 多婁(다루)를 太子(태자)로 삼았다. 內外兵馬(내외병마)의 업무가 맡겨졌다. 4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백제왕기 온조왕 12년.
十二年 庚午 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兵事
12년 (AD10년) 경오 2월 맏아들 多婁(다루)를 세워 太子(태자)로 삼았다. 兵馬(병마)의 업무가 맡겨졌다.
三十一年 癸酉 正月 分國內民戶爲南北部 四月 雹 五月 地震
31년 (AD13년) 계유 1월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와 북부로 삼았다. 4월, 우박이 내렸다. 5월, 지진이 일어났다.
*백제왕기 온조왕 15년.
十五年 癸酉 正月 分國內爲南北二部
15년 (AD13년) 계유 1월 나라 안을 나누어 남북의 2부로 나누었다.
三十三年 乙亥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 (AD15년) 을해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8월에 동부와 서부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백제왕기 온조왕 17년.
十七年 乙亥 春夏旱 民饑 王巡撫之 七月 加置東西二部
17년 (AD15년) 을해 봄과 가을에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이 순행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7월 동서 2부를 더 설치했다.
三十四年 丙子 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率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竝誅其妻子
34년 (AD16년) 병자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十八年 丙子 十月 馬韓舊將周勒 叛據牛谷城(似今孟山) 王躬率五千兵 討之 勒敗自經 王殺其妻子
18년 (AD16년) 병자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륵(근)이 우곡(지금의 맹산)성에 근거하여 반한을 일으키자 왕이 친히 병사 5천명을 거느리고 주근을 토벌하였다. 주륵이 패하여 목매어 죽자 왕이 그 처자를 죽였다.
三十六年 戊寅 七月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使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 (AD18년) 무인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민가들로 하여금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과 금현성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二十年 戊寅 七月 築湯井城(今平山) 分大豆城民守之 八月 修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今延安)
20년(AD18년) 무인 7월 탕정성(지금의 평산)을 쌓고 대두성의 백성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8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지금의 연안)을 쌓았다.
三十七年 己卯 三月 雹大如鷄子 鳥雀遇者死 四月 旱至 六月 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 (AD19년) 기묘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이나 되니, 패수와 대수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二十一年 己卯 三月 雹 四月 旱 漢水東北部饑 亡入高句麗者 一千餘戶 浿帶之間空 無居人
21년(AD19년) 을묘 3월 우박이 내렸다. 4월 가물어 한수의 동북쪽 부락의 (백성들이) 굶주렸다. 달아나 고구려로 들어간 자가 1천여 집이나 되니 패수와 대수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八年 庚辰 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十月 築大壇 祀天地
38년 (AD20년) 경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아랫사람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二十二年 庚辰 二月 王東巡至走壤(今安邊谷山之界) 北至浿河 五旬而還 三月 發使勸農事 命除不急之役 十月 築大壇祀天地
22년 (AD20년) 경진 2월 왕이 동쪽을 순행하여 주양(지금의 안변과 곡산의 경계)에 이르고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렀는데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 아랫사람을 보내어 농사짓기를 권하였고, 급하지 않은 일로 사람을 부리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10월 큰 단을 설치하여 천지에 제사지냈다.
四十年 壬午 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拒擊之
40년 (AD22년) 임오 9월에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二十四年 壬午 靺鞨來 攻述川城(今朱乙溫川) 十一月 靺鞨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擊退之
24년 (AD22년) 임오 말갈이 와서 술천성(지금의 주을온천)을 공격하였다. 11월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여 100여명을 죽이거나 노략질하였다. 왕이 굳센 기병 200명을 보내어 부딪쳐 싸워 말갈을 퇴각시켰다.
四十一年 癸未 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已上 修葺慰禮城
41년 (AD23년) 계미 정월에 우보 을음이 죽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다. (해루는) 나라 안의 아는 것이 깊었고 (사정에 밝았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모든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의 (지붕을 덮어) 수리하였다.
二十五年 癸未 正月 右補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補 解婁扶餘人(卒本) 年過七十 而有脅力神識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 年十五以上 修營慰禮城
25년 (AD23년) 계미 1월 우보 을음이 죽어 북부 해루에게 우보의 벼슬을 내렸다. 해루는 부여(졸본)인으로 나이가 70이 넘었지만 위협하는 힘이 있고, 신비스러운 지식이 있었다. 2월 한수의 동북 부락사람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과 위례성 관청을 고쳤다.
四十三年 乙酉 八月 王田牙山(咸從)之原五日 九月 鴻鴈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鴈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 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 (AD25년) 을유 8월에 왕이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그날그날의 운세를 보는 관직)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집이 부양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二十七年 乙酉 八月 田牙山(咸從)之原 五日 九月 鴻雁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雁者 民之象也 將有遠人 來投者乎” 十月 南沃沮(鴨綠江西 今大孤山之地 時爲北部馬韓) 仇顔(頗백제본기)解等二十餘家 至斧壤(平壤 斧山院也) 納款 命置漢山之西
27년 (AD25년) 을유 8월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日者일자가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장차 멀리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10월에 남옥저(압록강의 서쪽 지금의 大孤山대고산의 땅, 이때 북부 마한으로 간주된다) 구안(파)해 등 20여 가가 斧壤부양에 이르러 귀순해오니 명하여 한산의 서쪽에 살도록 하였다.
四十四年 丙戌 十月 高句麗王大武神親征盖馬國, 殺其王 慰安百姓母 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聞盖馬滅懼害 及己 擧國以降于高句麗
44년 (AD26년) 병술 10월 고구려왕 대무신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개마국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개마국왕)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고 노략질 했다. 무릇 이로써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고구려사략과 10년 차이가 난다.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9년.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9년 (AD26년) 겨울 10월에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고구려사략 대무신왕 9년.
◎九年 丙申 十月 蓋馬主小妻半乙殺< >而立子叔乙 < >子厚滿狗文等相爭厚滿先入城殺叔乙半乙與狗文潛通而納之 厚滿來奔 上親征誅狗文以其國爲蓋馬郡 十二月 勾茶王厚燐聞蓋馬滅 擧國來降 厚潾閃尼子也 以其那部讓於絡文 而陰有反意 反< >死 授<狗文>而約伐<西河><南口>, 事發而國除, 以其都爲南蘇(□□□), 西路皆拓.
太輔<松義>薨, <松>太后胞兄也. 其母<貫貝>氏, 勸<松讓>獻國, 或<義>以忠, <義>守其母訓, 爲國盡忠, 持身儉約, 歷事三世, 德望蘇然, 勝於父矣. 以其弟<屋句>爲左輔, <乙豆智>太輔, <麻勁>右輔. <勁>,<摩離>子也.
<蓋馬>反衆與<漢人>來侵<句麗城(林西)>, <玄 >太守<勾芻>往救, 疾作而薨, <松屋勾>代之而平之(劉秀使吳漢滅蜀□公□□夷其族).
◎9년 (AD36년) 병신 10월, 개마주인 소쾌>의 처 <반을>이 <쾌>를 죽이고 아들 <숙을>을 세웠다. <쾌>의 아들인 <후만>과 <구문>은 서로 다투었는데, <후만>이 먼저 입성하여 <숙을>을 죽이니, <반을>은, <구문>과 밀통하고는, <구문>을 받아들였다. <후만>이 도망하여 오자, 상은 친히 <구문>을 정벌하고, <개마국>을 <개마군>으로 삼았다. 12월, <구다>와 <후린>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후린>은 <섬니>의 아들이고, <연나부>를 <락문>에게 넘겼는데, 속으로는 뒤집을 생각이 있었고, <쾌>에 반하다 죽었다. <구문>에게 넘겨주면서 <서하>와 <남구>를 정벌하기로 약속하였었으나, 일이 생겨서 나라가 사라졌고, 그 도읍도 <남소>가 되어, 서쪽으로 길을 열었다.
태보 <송의>가 죽었는데, <송>태후의 동복 오라비였다. 그의 모친 <관패>씨는 <송양>에게 나라를 (고구리에) 바치라 권하였었고, <송의>가 충성스러워서, 모친의 훈계를 잘 지켜,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자신은 검약하여, 삼대가 벼슬을 하였고 덕망이 소연하여, 아비를 능가하였다. 그의 동생 <옥구>는 좌보가 되고, <을두지>는 태보가 되었으며, <마경>은 우보가 되었다. <마경>은 <마리>의 아들이다.
<개마>의 반중과 <한인>이 함께 <구려성(임서)>에 쳐들어 왔는데, <현토>태수 <구추>가 달려가서 구하다가, 병이 나서 죽으니, <송옥구>가 대신하여 싸워서 이를 평정하였다(유수사오한멸촉□공□□이기족).
四十五年 丁亥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月 地震 傾倒人屋
45년(AD27년) 정해, 봄과 여름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二十九年 丁亥 十月 地震 傾倒人家
29년(AD27년) 정해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집이 기울거나 넘어졌다.
四十六年 戊子 二月 王薨
46년(AD28년) 무자 2월 왕이 죽었다.
三十年 戊子 二月 王薨
30년(AD28년) 무자 2월 왕이 죽었다
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 馬韓王責百濟王曰 “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百里之地安之” 云 百濟之起於馬韓東北明矣 濟之爲字齊水也 溫祚沸流之名皆取於溫河今白頭山北溫河之地. 盖其鄕也. 南斗滿鴨綠而王於咸鏡平安之間鴨綠斗滿之間多水可稱百濟也 百字本非數而大之矣故伯字亦可矣 後人以多水解之故改以百也 十濟之說恐不當矣 齊水之義本非渡也 祭水之神也 百濟之義與太山相表裏矣 熊津大川皆與百濟義相同 此皆古陰陽家祕傳之說 而今人多不解故只取平易之義而己也
마한54개국을 누르고 있을 때에는 ‘伯濟’라는 나라가 있었다. 마한왕이 백제왕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 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중략)” 백제는 마한의 동북에서 일어남이 분명하다. ‘濟’를 바꾸면(파자하면) ‘齊水’이다. 온조와 비류라는 이름도 모두 ‘溫河’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溫河)는 지금의 백두산 북쪽 溫河의 땅이다. 모두 그 고향의 이름이다. 남쪽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많은 ‘水’(강, 하천 등)들을 왕이 백제라고 칭하였음이 옳다. ‘百’자는 본래 숫자가 아니라 크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으로 역시 ‘伯’자가 옳다. 후대의 사람들이 ‘多水’를 풀이 하면서 ‘百’으로 고쳐 풀이한 때문이다. ‘十濟’설은 추측하건데 부당한 것이다. ‘齊水’의 뜻은 본래 강을 건넌다는 뜻이 아니라, 제사 지내는 물의 신(祭水之神)이라는 뜻이다. ‘百濟’라는 뜻은 ‘太山’과 서로 겉과 속이다(‘百濟’는 ‘太山’과 의미가 다르다). ‘熊津大川(웅진대천)’은 모두 백제와 더불어 뜻이 같다. 이것은 모두 옛날 음양가(천문(天文), 역수(曆數), 풍수지리 따위를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사람)의 비전(비밀리에 전하여 내려오거나 또는 방법) 설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풀이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본래의 뜻을 쉽게 취한 까닭이다.
*비류 갑진생 수명 46살, 온조 정축생 수명 72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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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제서기 우대왕 10년
十年 癸未 二月 召西奴生朱蒙女甘兒
10년(BC38년) 계미 2월 소서노가 주몽의 딸 甘兒감아를 낳았다.
백제서기 비류왕 3년 BC16년
三年 乙巳 五月 甘兒生子多婁
3년(BC16년) 을사 5월 甘兒가 아들 多婁를 낳았다.
백제서기 비류왕 5년 BC14년
五年 丁未 十一月 甘兒生子馬婁
5년(BC14년) 정미 11월 甘兒가 아들 馬婁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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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는 37살에 죽음,
光明大帝紀 20년, AD1년, 5월,
五月 沸流薨 年三十七
5월, 沸流가 37살에 죽었다.
고구려사초 光明大帝紀 20년
二十年 辛酉 正月 都切太子自柵城皈 未幾薨 帶素自愧其失 而還都切 而留其女 故都切悲傷不起
五月 沸流薨 年三十七 上減食以慰皇后 以阿爾女真公主妻沸流子昜人 曼公主改嫁于都助 陜父太輔 太輔大房良薨 年八十二 賜其妻掩?公主年穀
20년 신유 (AD1년) 1월 都切太子(도절태자)는 柵城(책성)으로부터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帶素(대소)는 자신의 실수를 자괴하며 都切(도절)을 돌려 보냈으나, 그의 딸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都切(도절)은 슬퍼하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5월 沸流(비류)가 죽었다. 나이는 37살이였다. 상은 음식을 줄이며 황후를 위로하였다. 阿爾(아이)의 딸 真公主(진공주)
백제서기 優臺王(우대왕)
祀河神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使人迎皈遂以卒本之地 皈之時 漢元年 初元二年 甲戌歲也
하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비류라 하였다.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졸본의 땅에 맞이하였다. 돌아 온 해는 한 원년 초원2년 갑술년(BC4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