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고랑 사람들①
"각 교시에 알립니다. 학생들은 전원 9시 20부까지 운동장으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통해 호동 왕자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오자 아이들은 벌떼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얘, 너 헌인능에 가본적 있니?"
"응, 전에 한번, 엄마와 아빠하고-."
"난 처음인데 그곳 좋아?"
"별로야, 차라리 올림픽 공원이 좋은데-."
정숙이와 나래가 손을 잡고 운동장으로 나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가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으며 사이에 끼여들었다. 얼마 전에 사이판에서 전학해온 영실이었다.
"너희들 둘은 꼭 사랑하는 연인 같더라. 항상 같이 다니고-."
"오우, 아이 러브 유! 이 사람 장영실 좋아해! 난 앞으로 과학자가 되고 싶거든-."
금방 혀꼬부라진 소리로 영실을 놀리고 있는 정수의 재치는 언제나 나래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렇게 놀리지 마. 난 겨우 3년밖에는 나가 있지 않았으니까. 그것도 아버지의 사업상 어쩔 수 없이-."
영실은 생김새부터 이국적이고 키도 후리후리하게 커서 매우 시원스러운 인상이었다. 더욱이 어깨 밑까지 내려온 긴 머리를 예쁜 리본으로 묶어놓는게 더욱 매력적이었다.
"너 그 머리를 하나로 묵지 말고 나처럼 양갈래로 땋아보지 그러니?"
정숙인 저 자신은 꼭 선머슴처럼 하고 다니면서도 다른 사람의 여성스러움에는 항상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머릴 묶지 않고 왔다가 담임 선생님한테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는걸! 당장 내일부터 머릴 자르고 오라는 거야. 남의 눈에 확뜨이는 건 별로 바람직하질 못하다면서-."
"그런데 용케도 잘 다니는 구나."
"응, 난 재즈 무용을 전공으로 살리려 하거든. 요즈음도 YMCA에 나가서 연습을 하고 와. 일주일에 두 번씩!"
"아, 그랬었니?"
정숙인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는 감격으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었다.
"무용반 회원이란 확인 서를 떼어다 드렸어, 대신 여고에 불합격되었을 땐 자르기로 약속하고-."
영실인 상냥스럽게도 물어보지 않은 말까지 다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곧잘 했다.
"어서 가서 줄을 서자."
이윽고 반별로 줄을 서서 출석 점호를 하였다.
"선생님, 진희하고 미진 이가 아직 안왔는 걸요."
나래가 선생님에게 보고를 하자 지선 이가 나서며 말했다.
"아까 그아이들 화장실 안에서 최대한으로 멋을 부리고 있던데? 마치 무대에 설 연극 배우처럼-."
긴 고랑 사람들②
"점호가 끝난 반은 차례차례로 출발해 주십시오."
조회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지시를 하고 있는 체육 선생님을 향하여 소연 이와 경아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우리 반은 조금 늦게 출발해야 되겠구나. 미진 이와 진희가 올때까지 기다려서 떠나야지-."
담임 선생님이 만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을 손으로 막으며 교실 쪽을 바라 보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 미진 이와 지연이는 벌써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걸요."
수원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반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교문 옆에 서서 미진 이와 진희가 이쪽을 보며 빨리 오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는 듯한 환한 얼굴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휴, 저 옷차림 좀 봐. 하하하, 어디서 저런 벙거지 모자를 빌려 썼지? 꼭 서부극에서 나오는 카우보이 같다. 드디어 반짝이는 조끼가 빛을 보는 날이군!"
수원인 미루어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됐다. 우리 반도 출발이다. 앞으로 가!"
담임선생님은 수원의 등을 살짝 밀며 아이들을 출발시켰다. 미진 이와 진희는 재빨리 줄서 가는 아이들 틈새로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그들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모르는 체 아무 소리도 안 했다.
이윽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은 한참동안 걸어서 소풍 지에 도착했다.
"어이구, 다리야. 저기 저 무덤 하나 보러 오느라 이 고생을 하다니."
현희는 잔디밭에 아예 두다리를 쭉 뻗고 앉아 이마의 땀을 씻어내며 말했다.
"저게 누구의 능인지 가까이 가서 안내문이나 읽어보고 오자!"
화연이는 학구 파답게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능 앞으로 몰려갔다.
"선생, 점심 안 먹어요?"
뒤뚱거리는 체격에 간신히 꼴지로 따라온 경아가 숨을 할딱 거리면서 벌써부터 점심타령이었다.
"각 반 반장들은 여기 본부석 앞으로 자기반 아이들을 10분 이내 집합 시킨다. 가장 느린 반은 저기 산꼭대기까지 뛰어갔다 오는 거다. 집합!"
호동왕자는 여기까지 엠프를 싣고와서 마이크를 잡고 박력있는 목소리로 호령을 했다.
"와아!"
부리나케 모여든 아이들이 금세 줄을 맞춰섰다.
"지금부터 한시간 반 동안 전체 놀이를 한 다음에 점심을 먹고 나서 각 반별로 자유시간을 갖도록 한다. 소풍도 학습의 연장이니 만큼 질서를 지키고 자연 보호에도 각별이…"
"학급 별 장기자랑이 있으려나 봐. 우리 반은 누굴 내세울까?"
아이들은 오늘 같은 날은 체육 선생님의 걸걸한 목소리도 아랑곳없었다.
저쪽 옆에 앉아 있는 남학생들에게 무언가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눈빛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긴 고랑 사람들③
"우리 반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니? 저렇게 준비를 하고 온 성의를 봐서라도-."
소연이가 미진과 진희를 가리키며 말하자 정숙이가 정색을 하고 나섰다.
"저 아이들을 우리반 대표로 내세운다? 학급 망신이다. 얘, 아는 아이들은 다 알텐데-. 그리고 저게 뭐니? 학생답지 않게 옷차림하며 얼굴에 화장품을 들어 부었잖니?"
"오늘 하루쯤이야 어떻니? 저런 아이들이야 이런 행사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겠니? 우리가 귀엽게 봐주면 되지-."
한솔이가 너그럽게 말하자 정숙은 도저히 안되는 말이라고 잡아뗐다.
"차라리 사이판에서 온 친구 연실 양의 재즈 무용을 보는게 어떨까?"
"재즈 무용? 그아이가 그런 춤을 추니?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다은이도 기대가 된다는 듯 찬성하며 나섰다.
"얘들아, 우리반의 명 가수 호수이는 어떻게 하고 2학년때도 호숙이의 인기가 최고였다고. 박남정의 노랠를 끝내주게 잘하잖니?"
서로들 자기주장을 하며 웅성거리고 있을 때 무대에서는 벌써 1반 아이들 세명이 나와 한사람은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두사람은 뒤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야! 잘한다."
"언니! 언니!"
마치 인기 가수라도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양 마이크를 이쪽 저쪽으로 바꿔가며 멋진 폼을 재고 있는 그 아이야말로 공부라는 학생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프로 가수라 고해도 과언은 아닐 성싶었다.
"빨리빨리 얘들아, 누가 나갈 거야? 호숙아, 너 노래 할 수 있지?"
나래가 서두르며 호숙이를 바라보자 호숙은 1반 아이에게 이미 KO 당한 것처럼 싫다고 도리질을 했다.
"그럼, 미진 이와 진희의 춤을?"
"안돼, 영실이의 무용이 낫겠다. 장영실, 할 수 있지? 테이프는 지선 이가 가져왔으니까-."
"그래 해볼게."
영실은 긴 머리를 묶은 리본을 잡아 뽑으며 흔쾌히 승낙을 하였다.
"오우, 박수!"
어느 새 5반 차례가 되어 영실이 요란스러운 박수를 받으며 임시 무대가 된 언덕빼기 위로 올라갔다.
"와아!"
남학생들 편에서 더욱 시끄러운 환호소리가 울려나왔다.
"저렇게 멋진 여자애가 우리 학교에 있었었니?"
"오우, 캡이다!"
정말이지 멋진 스텝과 손놀림 그리고 알맞게 흔드는 영실의 몸짓은 너무 지나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 전체를 매료시켰다.
남학생들은 이상한 휘파람 소리까지 내며 손뼉을 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기를 돋구는 등 야단 법석이었다.
긴 고랑 사람들④
"얘들아, 미진 이와 진희가 안보인다!"
어느 새 폭풍우가 개인 것 처럼 잔잔해진 분위기속에서 9반 남학생들이 벌이는 촌극에 아이들의 시선이 몰려있을 때 한솔이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렇지, 며칠 전부터 세웠던 계획이 무산되었는데 그 애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을 것 같니?"
수원이는 그들의 속셈을 다 알고 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1반의 혜정이와 3반의 영애가 어제 우리 교실 앞에서 미진 이를 찾았었어."
"내말이 맞지? 그 아이들도 오늘 똑같이 반짝이 조끼를 입고 왔다고-."
현희의 말에 수원인 더욱더 신이 나서 그들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오늘의 최고 인기상은 3학년 5반 장영실 양!"
사회를 맡아본 남학생이 영실의 이름을 부르다 나래네 반아이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하며 좋아했다.
"이상으로 단체놀이는 마치겠습니다. 지금부터 점심을 먹고 각 반별로 재미있게 놀다가 세시 정각에 이곳에 다시 집합하겠습니다. 모일 때는 의무적으로 비닐 봉지에 하나 가득 쓰레기나 휴지를 주워와야 합니다. 알겠죠?"
"예!"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우렁차게 온 산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치 젊은 혈기가 살아서 꿈틀거리며 산골짜기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 저쪽으로 가서 점심을 먹자"
"그래, 저 아래 편편한 곳이 좋겠어."
나래와 정숙이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따라 몇몇 아이들이 시끄럽게 제잘거리며 내려올 때였다.
"얘들아, 저할아버지 좀 보렴. 불쌍하지?"
나래가 가리키는 곳에는 예순 살은 훨씬 넘어보이는 할아버지가 빈병을 자루에 넣고 있었다.
"좋은 일을 하시는데, 무얼?"
정숙이가 말하자 기원 이가 대꾸했다.
"좋은 일인줄 누가 모르니? 그렇지만 저할아버니 용돈을 벌기 위해 저러시느 게 아니겠니?"
"그런 것 같다. 쯧쯧. 양로원에나 가시지 않고-."
수원인 어른들 흉내를 내듯 혀를 차며 안타까워 했다.
"양로원엔 누구나 갈 수 있는 줄아니? 요즈음엔 돈이 없으면 양로원 신세도 질수 었다던데?"
한속의 말을 들으며 나래는 갑자기 우울해지는 기분이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 할아버지는 긴 고랑에 사시는 분데?"
뒤에서 수다를 떨며 따라오던 은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놀라는 기색을 보이자 다른 아이들도 모두 제자리에 멈춰섰다.
긴 고랑 사람들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은주는 할아버지가 알아보던 말던 상관없이 반가운 얼굴을 하며 물어보는 것이었다.
"응, 넌 누구나?"
"네 네 저도 긴 고랑에 살거든요. 할아버지 그 동네에서 오셨지요?"
"응응, 그래, 넌 여길 뭣하러 왔어?"
할아버지는 그저 긴 고랑이라는 말에 거성으로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우린 봄소풍을 왔지요, 할아버지는요?"
"나도 소풍을 나왔단다, 어서들 가거라!"
할아버지는 매우 귀찮은 아이들이 모여들어 바쁜 일손을 놓고 있다는 듯 약간은 찡그린 얼굴을 하며 옆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희 동네 이름이 긴 고랑이야? 난 처음 듣는 이름인데?"
영실이보다는 할달 앞서서 전학해온 그러니까 2학년 말에 시골에서 유학(?)을 온 여옥이가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긴 고랑을 막아서 만든 동네라서 그런가봐, 우리도그 동네로 이사간지는 일년도 안되었어."
"그 동네 이름 참 마음에 든다야, 서울에서도 그런 소박한 이름미 붙은 동네가 있는 줄은 몰랐거든."
여옥이는 은주 옆에 바짝 다가가서 계속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소상으로는 001동으로 되어있단다. 그저 아는 사람들 끼리 그렇게 부르는 거지."
"어쨌든 그 동네에 한번 가보고 싶다. 지금도 긴 고랑이 있긴 있니?"
"됐어, 그 동네엔 할수 없이 이사해 온 사람들만 살고 있을 뿐이야, 나도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산 기억이 있는데 차라리 시골이 백번 낫지, 우리동네는 소위 달동네라고 부르는 곳이니까 신경을 뚝끊으시라고-."
은주와 여옥이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아이들이 뒤에서 불러 세웠다.
"너희들 여기까지 가는거야? 자, 여기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자구."
"우리 들이 정신없이 걸었구나, 다시 내려가자 그런데 은주야, 내가 살던 고향의 이름은 동화실이었어. 그 옆동네는 당산골이고 또 얼만큼 가면 개나리라는 마을도 있고 파랑리, 세터, 돼지터 란 마을도 있다네께."
"하하하하, 돼지터도 있어, 그 마을엔 돼지가 많은가 보구나!"
약간은 심각해지려 했던 은주가 아직도 시골티를 벗지 못한 여옥의 사투리 섞인 말솜씨에 그만 하하하 웃어버렸다.
"어서 잡수세요. 우리 엄마 김밥 솜씨는 알아주거든요. 자요, 여기 나무젓가락!"
아이들이 돗자리를 깔아놓고 동그랗게 모여 앉은 곳에 아까 그 할아버지가 함께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