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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61:1-11, 눅 4:16-19> 주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예수님의 사명,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1. 말씀배경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오늘 이사야 61장 말씀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 땅에 왜, 예수님께서 오시는지? 오셔서 무슨 사역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이므로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힘든 가운데 있습니까? 영혼육이 황폐한 가운데 있습니까? 수치와 능욕을 당하고 있습니까? 많은 것을 빼앗기고 강탈을 당했습니까? 오늘 말씀으로 소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고,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대로 병에서, 귀신의 눌림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미 오셨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동일하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주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으심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우리말로 “메시야” (요 1:41, 4:25)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메쉬아흐” 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1절을 보면 “기름을 부으사”의 히브리어 동사가 “마샤흐”입니다.
예수님은 주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은 곧 우리들이 말하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대단한 이름입니다. 세상을 바꾸어 놓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권세 앞에 모두 무릎은 꿇어야 하는 강력한 이름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름입니다 (마 28:18)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세세토록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리는 이름입니다 (계 5:13)
예수 그 이름은 창조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들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골 1:16).
이 권세가 우리들의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믿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더러운 귀신이 떠나갑니다. 병이 고쳐집니다.
[마가복음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 구약의 기름부으심은 실제로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 뿔병에 감람유를 채워 머리에 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기름을 부어서 기름부음 받지 않고 성령으로 기름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주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게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여호와의 영이 내린 이유가 기름을 붓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8절에 보면,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지 아니하고는 메시야의 사역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사람에게 제한적으로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성령이 부어지므로 믿는 자는 누구나 기름부으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로부터 받습니다 (요 14:26)
그러므로 성령님은 아버지의 영이며 또 예수의 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는 것이요, 예수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그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으심을 받은 후에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대표적인 예수님의 3대 사역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런 사역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신 받은 것입니다.
행 10:38절에서도,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니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시는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선한 일입니다. (요 10:32),
특별히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 (요 10:33)
그로므로 예수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이유는 병을 고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주에 자세히 구체적으로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 주신 이유를 한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고치는 것 그리고 선한일을 하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기 위함이라 했는데 지금 말씀을 드릴 이 한가지에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한가지가 무엇일까요?
▶ 1절 중반을 보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여 하심입니다.
“아름다운 소식” (영, good news)은 다른 말로 구원의 소식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 속에 치유, 축사와 같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면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가난한 자 (히, 아나우 / 가난한, 고통 받는, 겸손한, 온유한)는 돈이 없어서 가난한 자도 포함되지만 (눅 6:20)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만이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입니다.
마 5: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1) 실제로 부자들보다 가난한 자가 천국에 더 많이 들어간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실제 부자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마 19:24, 막 10:25, 눅 18:25)
지금 예수 믿는 부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분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가난할 때 예수를 믿고 부자가 된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돈이 많으면 예수를 믿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돈이 신이되어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고 믿습니다.
돈은 하나님과 비길 정도로 그 권세가 대단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마 6:24, 눅 16:13).
자신의 능력과 실력으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기 쉽습니다. 재물은 하나님 한번 입김을 불으면 다 날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를 데려가면 그 재물 남들의 것이 되고 맙니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믿는 자에게 복으로 재물을 주신 것은 예수님께 기름부으신 이유와 똑 같이 그 재물로 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재물을 많이 맡기셨다면 선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게 청지기의 삶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돈신에 이끌리어 더 좋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부자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돈 뿐만 아니라 지식과 지혜가 있다고 우쭐대는 자들도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지혜에 갇혀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래서 똑똑이가 예수를 믿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를 믿는 것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고전 1:18)
그런 자에게 전도해 보면, 자기의 지식에 갇혀 있고 이성적인 사고에 갇혀 있으므로 영적인 것으로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의 지혜를 폐하고, 총명을 폐하고, 미련하게 하신다 하셨습니다 (고전 1:19-20) 헛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빠지면 그래야 하나님 앞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들의 지혜와 총명은 영적인 것을 얻는 것에는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도리어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에 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고린도교회 구성원을 보면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적으로는 조금 부족한 자들이 모인 교회인 것입니다 (고전 1:26). 자기 지혜가 없는 자들이거나 자기 지혜를 내려 놓은 자들입니다.
능력이 많은 자도 믿기 어렵습니다. 자기 능력을 믿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그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코 마음이 가난하지 않습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하는 성경적인 가난한 자가 되어야 예수님을 주인으로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이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밤낮 눈물로 애를 태우며 기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이런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믿은 후에도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3)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에 그냥 잡히고 맙니다.
“너희들 나 잡으러 왔지 그러면 다른 이들은 다 돌려 보내고 나만 잡아가라” 이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무 변명도 없이 십자가에서 힘 없이 죽습니다. 이 모습을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힘 없는 나사렛에서 나온 인간 예수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보다 못한 자로 보였고 저주받은 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조롱하며 침을 뱉으며 혀를 차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더구나 갈릴리 나사렛 촌 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그들은 알고 있고, 그의 부모와 동생들을 뻔히 알고 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구원자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진 가난한 자가 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소경이나 문둥병자와 같이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며 다가왔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은 메시야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병자들, 소경과 문둥병자, 창녀, 세리, 예수님의 제자가 된 어부와 같은 이런 자들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그들은 바로처럼 강팍한 자들입니다. 그 외 다른 대다수 사람들도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정해도 그들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마 16:13-17, 막 8:27-30, 눅 9:18-21)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 아름소식이 그들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수준으로 알고 계신다면 크게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정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 16:15)
베드로가 정답을 말합니다.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나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대단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요 10:33]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두고 신성모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와 아버지가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예수님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네 지식도 지혜도 총명도 경험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의 지식으로 지혜로 능력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2:3절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자기 지혜로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헬라인이 아무리 지혜를 찾아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러므로 지혜가 있다고 지식이 있다고 능력이 있다고 돈이 많다고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직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이는 것입니다. 귀가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심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초기에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가난하고 못난 자들이 믿는 종교로 인식을 한 때도 있었습니다. 또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 대한 이런 평가가 어쩌면 정상적인 평가입니다.
실제로 가난해서 부자되고자 예수를 많이 믿었고 잘되고자 교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목적이 조금 빗나갔지만 그래서 부자가 많이 되었고 세상적으로 출세한 자들도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다는 것은 실제로 의지가 약한 자일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다리는 가난한 자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 없으면 그는 여전히 죄인이요, 비천한 자요 멸망받을 자요, 아무것도 아닌 자인 것을 안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능력도 지혜도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자 입니다.
▶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가 예수를 믿으면 어땋게 변화될까요?
바울은 고린도 후서 6장 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9-10]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가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오히려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여전히 무명한 자 같으나 그러나 그는 유명한 자인 것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면 이런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게 믿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가 어떤 자인지 이제 알겠습니까?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을 자이며 받은 자입니다. 가난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다 가진 자인 것입니다.
이런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늘 말씀대로라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아름다운 소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예수님이 아름다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오셔서 첫 번째 선포한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마 3:2)입니다. 회개는 가난한 자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아는 가난한 자가 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무슨 죄인이냐고 달라듭니다. 회개하는 자 곧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곧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결국 가난한 자에게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고, 가난한 자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 5:3절의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회개하는 자에게 곧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가까이 있듯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된 소식, 복음, 아름다운 소식이 나의 것이 됩니다. 그러면 천국이 저희 것이 됩니다. 이게 복인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