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인의 장편소설 “가시고기”는 출간된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드라마, 애니매이션, 만화 등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와 아버지의 사랑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소설의 소재가 된 가시고기는 우리나라 토종 물고기이기 때문에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사랑이 식어져 가는 시대에 너무나 아름다운 가족 사랑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시편 103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시고기와 같은 진한 사랑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 먼저 가시고기의 사랑에 대한 영상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긍휼에서 시작됩니다.
시편 103편에서 말씀하시는 “긍휼”은 죄인으로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과 같은 긍휼입니다.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긍휼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긍휼”의 히브리어 원어가 “라함”인데 이것은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롭다”를 의미합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은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아니하시는 긍휼입니다”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시는 긍휼입니다 (시 103:10,12)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살리시는 긍휼인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잘못이 있어도 부족한 것이 있어도 많은 부분 못 본척 넘어가는 것입니다. 일일이 죄를 들추어내어 아들을 혼내지 않습니다. 아들의 죄값을 다 치루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가 새언약으로 맺어진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입니다.
[렘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 8:8]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으로는 죄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합니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잣대는 “의”만 있고 “용서”는 없습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이 새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사랑과 용서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을 주신 것은 우리들의 연약한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는 먼지와 같고 인생의 날이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시 103:14,15)
이렇게 약한 우리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가시고기의 내용과 비교하여 본다면 암컷에서 태어난 가시고기의 알들은 연약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연약함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시고기 수컷이 사투를 벌이면서 알들을 지켜내고 또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끊임없이 지느러미로 부채질을 하였기에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컷 가시고기가 알들을 지켜냄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지켜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알을 낳고 떠난 암컷 가시고기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남은 수컷 가시고기가 알들이 부화할 때가지 먹지도 않고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부화가 된 후에는 그만 기진하여 죽게 됩니다. 그리고 태어난 새끼들은 자신들을 돌아본 아버지 가시고기인줄도 모르고 그 시체를 띁어먹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한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결국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도 마치 십자가에서 달리심과 같은 고통을 겪으셨다고 봅니다. 이것은 사벨리우스가 주장한 “양태론”이나 “성부 수난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동일하신 성부께서도 성자의 죽음을 바라봄에 있어 동일하게 아픔을 경험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고기처럼 죽음에 이르도록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게되고 그 몸둥이 마저 자식에게 내어주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하여 피와 살과 물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은 마치 새롭게 태어난 가시고기 치어들이 아비의 시체를 먹고 사는 모습과 같습니다. 먹고 자라는 가시고기 새끼들은 살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새끼들은 죽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어 먹도록 하여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에서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소설 가시고기에서 자신의 아내가 떠나가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자신에게 암이 다가와 죽음이 다가와도 아들을 향한 그 사랑은 계속됩니다. 돈이 없어 수술비가 없어도 각막을 떼어주고 신장을 팔아서라도 그 사랑을 끊지 못합니다. 마지막 죽음이 임박해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에 그 아들을 돌보게 하기 위하여 그 아들의 엄마에게 보내게 하기 위하여 아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이 있어도 그 아들을 향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시고기의 사랑이며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며 곧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권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하지만 가시고기 새끼들처럼 우리들은 처음에는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시체를 띁어 먹기에 바쁩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육적으로 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주기보다는 취하기 바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가시고기가 자라서 때가 되면 그 아버지의 사랑처럼 자신도 그 새끼들을 위하여 그런 희생적인 사랑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장하면서 조금씩 영적인 눈을 뜨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온전히 깨달아 질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주여! 가시고기의 사랑을 우리가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들 또한 생명을 주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들의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자라고 있는 가시고기 새끼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랑 수준이지만 때가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여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동참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처럼 우리들 또한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영적인 가시고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