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쓸한 풍경들의 원근법
1.
쓸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늦가을 때아니게 쏟아지는 비처럼 그것은 왔다가 슬며시 땅으로 숨어버리는가. 쓸쓸함은, 우리가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찾아왔다가 기약 없이 빠져나가는 바람 같은 것일까. 사랑하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업’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쓸쓸함을 견디는 일 또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기본 요소이다. ‘실존’이란 말이 내포하는 뜻도 바로 고독한 존재인 인간을 바탕에 두고, ‘실존주의’ 또한 쓸쓸한 존재로서 자리한 개인으로부터 그 철학의 출발점을 삼고 있다. 사람이 신의 본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나와 근원에 대한 기억이 거의 사라져버리거나 본바탕을 자각할 수 없게 된 오늘날, 이 ‘쓸쓸함’은 단지 개인의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나 집단의 차원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부분들 가운데 하나가 ‘고독’이란 말도 현대인들에게 집단의식을 이루는 소외감과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는 없다. 마음의 질병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측면이 크지만 세계와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완고한 벽을 스스로 허물지 못하고 이를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영원한 장막으로 설정, 제 안에 모시면서 섬길 때 일어난다. 이 병은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지칭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제 자신마저도 그 존재를 자각할 수 없는 형태로 웅크려 있다가 사라진다. 감정이나 이성의 작용이 아닌 스산한 느낌 같은 이 쓸쓸함이 자아내는 마음의 곤혹스러움을 우리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제가할 수만 있다면 삶의 풍만함만이 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열락의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질없는 바람에도, 황무지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들풀처럼 온전한 쓸쓸함에 제 몸을 허락하면서도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허공을 응시하며 서 있는 자세를 잃지 않는 자라면 한갓 생의 거름 정도로 이 쓸쓸함을 즐기지 않을까.
최장락 시인의 새로운 시들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의 시들에 깔려 있는 주된 정조인 쓸쓸함과 외로움은 더 이상 감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오랫동안 삭힌 응어리들이 시어로 육화(肉化)될 때, 비록 정갈한 말에 배어 든 씁쓸한 풍경 뒷면의 스산함이 시 전면에 서성거리다가도 이 ‘슬픈 주책’을 따돌려버리는 마음의 중심이 언뜻 드러난다. 그만큼 오랫동안 고독을 ‘즐기면서 이겨낸’ 시인의 넓은 품을 유추할 수 있거니와, 오히려 날을 세운 얼얼한 붓끝으로 자신의 응결된 정한(情恨)을 언어로 객관화시켜 버린다. 이 객관화는 자아의 내면에서 외롭게 소용돌이 쳐서 만들어낸 ‘오브제(objet)’이며 시인 자신에게조차 낯선 풍경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물스러움이다.
여인숙은 바다로 둥둥 떠내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섬이 되었다.
-「바닷가 여인숙」부분
만나지 못하는 사랑은
손금처럼 외로움이 자라나봅니다.
-「외로움」부분
인용한 시에서 ‘섬’과 ‘손금’이 이를 잘 나타낸다. 이들 시어는 자아의 쓸쓸함을 상징하는 기호이기도 하지만 궁극으로는 자아의 감정 범위에서 이미 벗어나 ‘저만치’ 홀로 자라난 물체들이다. 이들은 고립된 자기 조직을 이루어나가면서, 애초 시인이 불러내어 쓸쓸한 정조의 소재로 쓰인 일차 의미기능에서 전체 시가 자아내는 ‘시적 환기’의 중핵이 되어버린다. 그런 만큼 시의 화자의 외로움이 점점이 쌓여 격정의 풍랑에 내맡기는 것보다는 객관상관물을 제시하여 이제까지의 메마른 내면에서 촉발한 정서를 전이하고 변형하는 모습을 「바닷가 여인숙」과 「외로움」의 몇 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승화되지 못한 한스러움이고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고독이기도 하다. 그의 시들은 이런 점에서 정직하다. 한스러움을 드러내보이되, 이를 해소할 수 없는 지극한 마음의 병을 응시하고 어루만져서 다시 그것들이 생겨난 마음자리를 소박하게 인정한다. 실존의 한계가 세상을 뛰어넘어 자신을 초극할 수 없다는 정신의 간극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한다면, 최장락 시인은 한계가 지니는 모순을 안으로 감싸서 지워버린다. 그 상처는 쉽사리 보이지 않지만 상처가 밴 자리에 남아 있는 표정은 자못 쓸쓸한 법이다.
최근 ‘경박한’ 시들이 쏟아지는 때에 몇몇 시인들의 시에서 ‘서정’을 되살리는 노력은 의미 있다. 그러나 시인은 어쨌든 정서를 바탕으로 해서 시를 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서정’을 둘러싼 논의는 자칫 공염불에 그칠 우려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떤 서정이냐가 중요한 문제이고, 이 서정을 어떤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내비치느냐가 서정시의 품격을 가늠하는 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자아와 대상의 융합이 행복하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정서와 풍경이 아이러니하게 결합하여 새로운 감성을 빚어낼 때 서정시의 내용 요소의 한 측면이 연극처럼 두드러진다. 모순과 일그러짐은 서정의 결락이 아니라 빛나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최장락 시인은 이런 서정시의 한 요소를 자신의 시들에 가져다 놓는다. 쓸쓸함의 굴절로 그의 시를 이해하고자 한다.
2.
시인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거나 슬픈 대상을 보거나 떠올리면서 제 속에 있는 응어리를 만진다. 자신의 감성은 대상이 전하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와 하나가 되든지 배경이 된다. 이것은 서정시의 기본이다. 최장락 시인은 이런 서정시의 기본에 충실하다. 그런데 충만하고 여일(如一)한 경지에서 틈을 내고 고독한 여운을 남기는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화자가 객관상관물에 자신의 감정을 의탁하여 새롭게 시에서 긴장을 만들어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근본 감성의 하나인 쓸쓸함이 뒤틀리고 굴절된다.
선운사 동백꽃은 혼자서 피지 못하고 사람들 속에서 핀다. 가슴에 바람 부는 날에는 선운사 뒤뜰에서 북소리나 들을 일이다. 동백꽃이 댕강댕강 떨어지면 먼저 가슴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둥둥거리는 복소리가 선운사 뒤뜰 숲을 돌아 나와 사람들 가슴에서 서러운 집을 짓고 붉은 울음 운다. 선운사에 가서는 동백에 입 맞추지 말아야 한다. 붉디붉은 동백에 입 맞추면 헤어진 사람이 다시 돌아와 눈물짓게 한다. 선운사에 가서는 동백꽃을 줍지 말아야 한다. 목숨처럼 떨어져 나온 동백이 서러워 내내 가슴에 북소리를 내며 운다. 정말 동백꽃이 피는 날에는 선운사에 가지 말아야 한다. 눈물보다 아픈 동백이 가슴에 떨어져 멍들게 한다. 혹, 멍든 가슴 지우려고 다시 선운사에 가거들랑 꽃보다 햇살에 더 눈부신 이파리나 보고 올 일이다.
-「선운사」
「선운사」는 화자와 동백꽃 사이에 주고받는 동기감응을 잘 표현한 시이다. ‘선운사 동백꽃’이 지는 일과 화자의 감성이 ‘북소리’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화자는 ‘혼자서 피지 못하고 사람들 속에서’ 피는 동백꽃을 의인화하여 마치 사람들 사이에서 감정을 지닌 대상으로 격상해서 쓰고 있다. 유정(有情)한 식물인 동백꽃은 화자의 가슴에 ‘북소리’로 바뀌어 다가온다. 그런데 이 시는 ‘눈물’이 주된 정서이다. 꽃이 지는 일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상통한다. 즉, 꽃이 지고 북소리가 들리고 눈물을 흘리는 일련의 시상 전개 과정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고, 이런 시의 전개 과정에서 화자는 독자에게 ‘꽃보다 햇살에 더 눈부신 이파리나 보고’ 오라는 구절로 지금까지의 독자 기대지평을 흔들어놓는다. 동백꽃이 져서 울음을 쏟아내는 일은 화자 심리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정한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고, 이 정한이 사람들 사이에 쌓여 있는 고독과 외로움을 휘저어놓아 ‘동백꽃-화자-사람(들)’의 실제 관계망이 ‘낙화(동백이 짐)-북소리-눈물’이라는 이면 감정의 복합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심상의 변모와 이행 과정은 시적 자아의 고독과 울분이 ‘동백꽃’이라는 객관상관물로 전이되는 형태로 드러나고 ‘북소리’가 매개가 되어 전체 시의 효과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시인은 고독하고 쓸쓸하되 이를 직접 내세우지 않고 대상과 이들의 내면을 한번 휘돌아 나오는 여정에서 상흔을 남긴다. 서정시에서 자아와 대상이 합일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기법 가운데 하나가 ‘동화(同化)’이다. 주체와 객체는 동화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시에서 마지막 구절인 ‘멍든 가슴 지우려고 다시 선운사에 가거들랑 꽃보다 햇살에 더 눈부신 이파리나 보고 올 일이다’는 꽃잎이 떨어지고 나서 남겨진 ‘이파리’를 강조하여 동기감응하는 동백꽃의 흔적에 스며있는 생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지게 한다. 예민한 자신의 감성에 북소리를 울리게 했던 대상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은 이파리란 실상 시인의 감성을 사로잡고 끈덕지게 달라붙어 괴롭혔던 고독한 마음이 아니고 무엇일까. 동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허무의 바람에 녹이 슬고 바람이 불어오는 틈새의 스산함에 시인의 영혼이 머물러 있는 시이다.
이런 경향은 일본을 소재로 한 시들에서도 나타난다.
매일같이 대한해협의 물살을 가르며 배가 떠난다. 부산에서 후쿠오카 혹은 키타규슈로. 항구는 더 이상 쌍고동 울어주던 슬픈 이별의 장소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방을 들고 여행을 떠난다. 대한해협 멍든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사쿠라 꽃잎이 눈처럼 세상을 덮은 3월의 일본. -이 얼마나 아름답스므니까- 내 입 속에 들어 온 사쿠라 꽃잎이 녹아 내려 검은 물로 홍건히 고인다.
-「사쿠라 꽃잎」부분
일본에서
조선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흩어지지 않게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가진 자의 나팔수가 돼
내게 버림받은 조선일보의 모국어가
물때 절은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다.
-「하꼬네의 조선일보」부분
인용한 두 편의 시는 대한해협을 지나 일본으로 가는 배가 떠나는 곳인 부산항과 일본에 있는 ‘하꼬네의 선착장’이 배경으로 나온다. ‘일본’이란 나라가 지닌 의미가 우리나라와 벌어진 여러 역사의 사건으로 보나, 이에 생긴 정신의 상처로 보나 시인의 상상력에 불편함을 주는 대상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사쿠라 꽃잎」은 인용하지 않은 부분을 보면 ‘1936년 후쿠오카현 요시쿠마 갱도에서 화재가 발생’한 역사 사실이 나와 있다. 이 엄청난 비극으로 타 죽은 조선인들의 원혼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원귀로 떠도는 참혹한 사건은 오늘날 대한해협을 가로질러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는 그런 과거의 참사를 알 리가 없고, ‘대한해협의 멍든 바다’의 내력 또한 모른다. 시인은 과거의 비참한 역사와 오늘날의 풍경을 겹쳐본다. 그러므로 사쿠라 꽃잎이 화자의 ‘입 속에 들어’와 ‘검은 물’이 되어 ‘홍건히 고’이는 일은, 지난날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현재 두 나라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흐르는 검은 전류를 시인이 예민하게 알아채리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ㆍ일 양국 국민들에게 절망과 슬픔을 낳게 한 비극의 역사를 새삼 환기함으로써 시인 자신에 퇴적해 있는 실존의 두께에 크나큰 그늘을 드리우는 역사 현실에 몸서리를 쳤으리라. 이는 「하꼬네의 조선일보」에서 표현된 ‘조선일보’라는 이중 의미를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2003년 여름 하꼬네의 선착장 벤치에서’ 우연히 발견한 ‘내게 버림받은 조선일보’에 쓰여 있는 ‘자음과 모음’은 시인에게는 영락없이 반가운 ‘모국어’이다. 자칫 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민족의식으로만 여겨질 수 있을 시의 소재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까닭은, 시의 이면에 감싸고 있는 시인의 복잡한 심경이 흐릿한 채로 어른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은 채 나뒹구는 모국의 신문이란 한낱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로 귀결될 뿐이지만, 늘 지배층의 뜻만을 대변해 온 반민주 언론의 상징과도 같은 ‘조선일보’이기에 그 심정은 더욱 복잡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모국어가 조밀하게 박혀 있는 타국의 신문은 그래서 ‘물때 젖은 바람에/힘없이 흔들리고 있’으며 이는 시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이중의식, 그 잿빛 같은 심란함으로 더욱 흔들리며 허공에 표류하고 있는 것이리라. 차가운 공기가 바닷바람에 실려 화자의 마음에 불어 닥칠 때면 제 나라를 떠난 자리에 발 딛은 시인의 육신 또한 말과 의식과 고독의 회오리 속에 갇힌 마냥 이리저리 흔들린다.
외로움이 단지 개인의 감수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이 자체만 놓고 미적 판단을 내리는 일은 늘 미룰 수밖에 없다. 최장락 시인이 온몸으로 느끼는 고독과 쓸쓸함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緣)’의 작용까지 생각이 미쳐야 그 실상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 사회ㆍ역사의 관계에서 ‘절연’한 시인이 아니라면 최장락 시인과 같은 외로움의 밀도와 정체에 쉽사리 긍정할지언정 그 속을 가늠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타고난 감수성에 따라붙는 생의 역사 조건 속에 휘영청 흔들리면서 끝없는 혼돈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인의 감성이 왠지 불안한 듯 보이는 까닭도 이러한 자아의 내ㆍ외부를 가로지르는 소용돌이 같은 현실의 표정이 전혀 사라질 낌새가 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3.
결국 최장락 시인은 정직한 시인이라면 갖추게 마련인 미덕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지 않다. 허허로운 내면을 알록달록한 수사로 치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진술하는 시어들의 연결점과 그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허무를 가식이 아닌 솔직함으로 표현하는 점이다. 군소리가 길어지는 서정시가 긴장을 풀어놓듯이, ‘마음의 병’으로 켜켜이 쌓인 고독의 두께를 강조하지 않고 쉬운 언어로 갈무리하는 시인의 수더분함에 독자는 한 편의 사생화를 감상하듯 묵상에 빠져든다. 질그릇처럼 소박하지만 상감청자 같은 날카로운 정신의 맵시는 그의 시를 벼랑 끝에 선 몸뚱이처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을 마음의 곤경에 빠뜨리는 현실을 소화하는 태도가 아니라 암반 위로 송골송골 맺혀 한 방울씩 솟구쳐 올라오는 시인 혼의 드러냄이고 표징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고여 있는 어두운 공간에서 시인은 혼절하고 비통해 했으면서도 그 그늘은 빛나기 마련이다. 시 「하혈」에서 보여 주는 순혈의 내면 또한 이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겨울 한낮,
실핏줄 같은 햇살이
물기 없는 화분으로 떨어진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차가운 기운에
풍란이 더 시퍼렇게 날을 세운다.
엉켜있는 하얀 뿌리가 좁은 화분에서
답답한 숨을 쉬고 있다.
물을 주면 곧 하혈하고 마는 저 애처로움이
겨울햇살 속에서는 유난히 선명하다.
물은 화분의 사타구니를 따라 흘러가고
한때 맑은 피를 하혈했던 여자도
바람처럼 가고 없다.
조용한 겨울 한낮,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칼날 같은 풍란을 닦아낸다
내 손에서도 맑은 피가 흐른다.
-「하혈」
「하혈」은 어쩌면 최장락 시인에게 하나의 시론(詩論)과도 같은 전언으로 짜여 있는 시일 것이다. 결빙된 듯 얼얼한 정신의 깨끗한 결이란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다. ‘하혈’은 ‘풍란’과 ‘여자’에게만 있었던 고통이 아니다. 화자는 ‘칼날 같은 풍란을 닦아’내며 자신을 추스른다. 겨울 한낮에 풍란을 닦아내기란 실은 또렷한 정신으로 이 세상에 바로서려는 현실의식의 반추이며 바싹 메마른 계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수직으로 꼿꼿하겠다는 결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제 손에서도 ‘맑은 피가 흐른다’고 하여 ‘하혈’하는 모습을 자각하는 태도에서 식물에 전이된 시인 정신을 다시 전유하는 날선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물과 햇빛에 정화된 순혈은 풍란이나 화자 자신이나 제 고독을 스스로 견뎌내는 몸짓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굳건한 실존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절명(絶命)처럼 날카로운 의지이며 앞으로 쓰게 될 시들의 간명한 에피그램으로 남을 것이다.
최장락 시인의 몇몇 시들을 거칠게 살펴보았다. 그의 시들은 먼저 최근 시인들이 보여주는 최신 인문 담론의 어설픈 흉내 내기와 여기에서 비롯하는 소박한 시의 적용에서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믿음을 주고, 쓸데없는 말의 유희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범박하게 말해 결국 그의 시가 지향하는 세계가 개인과 공동체의 바람직한 결속이 이루어지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전통 서정시의 범주에 그의 시가 머물러 있지만 거기에서 속 편히 안주하려는 마음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의지가 시 곳곳에서 보였다. 기실 그는 타고난 허무주의자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마음 또한 몇 편의 시에서 보인다. 「三豚川」과 「출항」이 그러한데, 이 시들이 내보이는 형상들은 자연계와 인간계가 서로를 배척하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행복한 우주관을 가진 시인이라야만 가능한 세계의 그림이다. ‘나’와 ‘역사’와 ‘자연’이 각각 고립되어 있는 듯하나 실은 서로 서로 통한다는 생각은 모든 훌륭한 예술가들이 직관으로 터득하는 진실이다. 시인은 이 진실을 알고 있고 체득하고 있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고독한 감수성이 우세하여 자꾸 ‘내향(內向)’으로만 집중하는 경향 또한 전혀 없지는 않다. 삶의 본질 같은 고독은 이를 온몸으로 싸우는 자에게 단지 어겨내야만 하는 거추장스러움이 아니라 진실로 제 것으로 만들고 제 품 가득 안을 수 있을 때에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무늬들로 이루어진 이 쓸쓸함의 풍경들 속에 당당히 서 있는 눈빛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거기에서 잉태하여 나올 시들을 기대해 본다.
/<울산작가>2008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