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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눈꽃
이 전 오
1. 위기의 만남.
군산여고 교정은 월명산 아래에 자리했다. 산의 정상을 따라 이어진 긴 등줄기에 올라서면 수평선 멀리 넘실거리는 바다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고 일학년인 수련은, 토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단짝 경숙이와 월명산에 올랐다.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넓은 바다가, 영롱한 빛 반사를 일으키며 끝없이 출렁였다.
“와! 저 반짝이는 바다 좀 봐. 참말 멋지지.”
“우리 저 너머 수시탑 쪽으로 가 보자.”
산등줄기의 길을 따라, 멀리 보이는 수시탑 쪽을 향해 걸었다. 길은 한적했다. 산줄기 한 자락을 넘어 구부러진 길을 돌아서니, 넓죽한 공터가 나왔다. 잠시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아래에 우람한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 바위 멋지다. 한번 앉아보자.”
수련이 먼저 아랫길로 걸음을 옮겼다. 30여m을 조심조심 내려가 바위 위에 올라서니, 숲과 어울려 한가롭게 숨바꼭질하는 바다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와, 좋다!”
반짝이는 물빛을 쓸어안고 떠가는 작은 배들.
“야 호!”
바다를 향해 힘껏 외쳤다.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바위 위에 앉으니, 그냥 꿈속에 내려앉는 듯 했다. 수련은 어릴 때 왔었던 아련한 모습을 되새기며, 공원에 얽인 추억을 더듬어냈다. 경숙이도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 놓았다. 둘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추억이 널뛰는 시공 속을 이리저리 활보했다.
“야, 이거 정말 삼삼 쿠 먼.”
“죽여주네, 탱탱한데.”
별안간 뒤쪽에서 나는 사내아이들의 말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긴, 낭군이 오셨으면 좋아라 반겨야지.”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는 깡마른 사내아이가,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그 뒤로, 같은 또래로 보이는 세 아이가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섰다. 불현듯 엄습해오는 위기감을 의식하며, 재빨리 책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허, 어딜 이년들이.”
깡마른 놈이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럽니까?”
수련은 놈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경숙이 쪽을 보았다.
“왜 그래, 니들.”
의외로 경숙이가 놈의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따졌다.
“니들? 이 년이 서방님보고 하는 소리 좀 보소.”
뒤에 서있던, 키 작은 땅딸막한 녀석이, 거들면서 한걸음 나섰다.
“누가 서방이야, 너 미쳤어.”
경숙이가 땅딸막이를 노려보았다.
“뭐가 어째. 좆을 꽂으면 서방이지 별거야 이 년아.”
땅딸막이는 다짜고짜 경숙의 볼을 세차게 후려쳤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경숙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놈은 잽싸게 달려들며, 경숙의 목을 뒤로 감싸 잡았다. 그와 동시에 깡마른 놈도 수련의 목을 낚아채듯 잡아 들어왔다.
“이 년, 지랄하면 죽어.”
땅딸막이가 바동거리는 경숙을 옥죄였다. 수련도 거세게 몸부림쳤다.
“어딜 이 년이, 살고 싶으면 가만있어. 야, 바위 아래로 끌고 가.”
깡마른 놈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나머지 두 놈이 수련과 경숙에게 한 놈씩 달려들어, 허리춤을 잡아들었다. 발로 버둥거리자, 거세게 손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그대로 들리듯이 질질 끌려, 바위 밑으로 붙잡혀 내려갔다.
“사람 살려요!”
경숙이가 비명을 질렀다. 거친 주먹이 경숙의 얼굴을 난타했다. 놈들은 바위 아래 평평한 풀잎 검불 위로 내려오자, 목을 잡은 채로 뉘이고는 하얀 교복 상의를 거칠게 잡아챘다. 상의가 쭉 하고 찢겨졌다. 치마까지 순식간에 걷어 올려버렸다.
“야, 이거 잡아.”
목을 틀어쥔 깡마른 놈이 명령조로 말하자, 앞의 두 놈은 두말없이 뒤로 와, 수련과 경숙의 목을 대신 받아 잡았다. 앞으로 나온 깡마른 놈과 땅딸막이는, 거의 동시에 바지를 내리고는, 수련과 경숙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 어머니! 수련은 절망감에 눈을 감아 버렸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이 놈들, 꼼짝 마.”
별안간 바위 위에서, 웬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바위 위로 향했다. 바위 위에서 한 남자아이가, 분노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서 연이어, 다른 남자아이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 아저씨, 여기요 여기. 빨리 와요. 큰일 났어요. 여기요 여기, 경찰 아저씨.”
바위 위를 올려다보던 놈들은, 허겁지겁 일어났다.
“야, 튀어.”
깡마른 놈이 한마디 내 뱉자, 놈들은 하나같이 산 아래로 허둥지둥 도망쳐 내려갔다.
“서라 이 놈들. 못, 서.”
바위 위의 남자아이가 소리쳤다. 수련과 경숙은 얼른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수련은 웃옷 일부가, 찢겨져 있었다. 경숙의 입술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서로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바위 위에서 두 남자아이가 조심조심 내려왔다.
“괜찮으세요.”
걱정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네 덕분에.”
수련은 왠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려졌다.
“빨리 이곳을 피해야 합니다. 경찰이 없는 걸 놈들이 눈치 채면, 분명 다시 올라 올 겁니다.”
경찰을 부른 소리는, 위기의 돌파를 위해 순간적으로 그들이 꾸민 것이었다. 정신없이 뛰어, 시내로 내려서는 넓은 입구 길로 나왔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제야 천천히 걸으며, 책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후 4시 반이었다.
2. 첫 사랑.
며칠이지나 마음이 안정되어갈 무렵, 경숙이가 물어왔다.
“수련아, 지난번 우리를 구해준 그 오빠들 있자나, 그 오빠 중 한 오빠를 학교 오던 길에 우연히 만났는데, 이따 학교 끝나고 저녁 6시에 이성당에서 한번 만나자고 하던데, 너 나갈래?”
“어머, 그랬어. 그렇지 않아도 그 날 경황이 없어,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었는데, 잘 됐다 야.”
학교가 끝나고, 제과점 이성당으로 갔다. 막상 다시 마주대하자, 왠지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바로 들기가 쑥스러웠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나누다가, 이틀 후에 다시 만나기로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만남이 이어 지면서, 용감한 바위 위의 외침을 통해 위기에서 구출해주었던, 제일고 2년생인 문배오빠가, 수련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왔다. 수련도 오빠가 싫지 않았다.
만남이 잦아지면서 어느새, 하루만 보지 않아도 자꾸 보고 싶어졌다. 겨울 방학이 오자, 오빠는 무주의 덕유산을 한번 다녀오자고 했다. 집에는, 친구 집에 잠시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덕유산 길을 나셨다. 덕유산은, 겨울의 정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산의 정상은 그야말로, 하얀 눈 세상이었다.
간밤에 내린 폭설이 꾸며낸 설경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서로 손을 맞잡은 채,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눈꽃이 만발한 꿈속 같은 숲 앞에서, 오빠는 수련에게 눈을 감아 보라고 했다. 눈을 지그시 감자, 살며시 손에 작은 물건하나를 쥐어 주었다.
“이게 뭐야?”
수련은 놀라 쥐어 준 물건을 보았다. 아담한 손목시계였다.
“어머 이런!”
“지난번 아버님이 캐나다에서 휴가 오시면서 사다 주신 거야. 내 마음의 정성이니 받아 줘.”
“이렇게 귀한 걸, 나한테 주면 어떡해. 아버님께 혼나잖아?”
“혼나긴, 그런 걱정 마.”
오빠는 살며시 손목을 잡아 주었다. 오빠의 아버지는 해외공관에서 근무하셨다. 브라질 한국 대사관에 계시다가, 작년 말 캐나다 한국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가족 모두가 아버지를 따라 근무지인 캐나다로 갈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마치는 게 좋겠다하여, 이곳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오빠는 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가기 전, 수련과 가능한 한 여러 곳을 다녀보고 싶다면서, 틈만 나면 전국의 산과 들로 데리고 다녔다.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태백산, 속리산, 무등산, 운주사 절터까지, 곳곳을 훑고 다녔다. 떠나야할 예정된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오빠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수련을 찾아오겠다고 다짐했다.
떠나야할 날을 하루 앞두고, 장항행 연락선을 탔다. 배의 뒷전에서 흐린 바닷물이, 프로펠러에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이 탁류처럼 가슴을 스쳐지나갔다. 프로펠러에 솟구쳐 일어나는 물살 같은 슬픔이, 마음속을 휘저었다.
장항읍내를 벗어나 해안의 바닷가를 한없이 걸었다. 밀가루를 뿌려 놓은 듯 고운 모래사장 너머로, 어느새 노을이 붉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노을은 더할 수 없는 처연함을, 가슴가득 뿌려 주었다. 모래밭 가운데에 철썩 주저 않은 둘은, 어둠 속에 무쳐가는 갈대처럼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았다.
3. 시련의 날들.
오빠는 다음날, 캐나다로 떠나갔다. 다시 만날 약속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오빠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갑자기 폐암의 진단을 받고 입원하시었다. 아버지는 9개월 간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하시다가, 끝내 유명을 달리하셨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선구점은, 끝내 빚으로 넘어갔다. 살던 집마저 내어놓고, 사글세로 내려앉았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맏아들 진성오빠는,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입대해 버렸다. 당장, 중학생인 남동생 영성이와, 초등학생인 여동생 수경이의 뒤를 치르기도 막막했다. 대학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어머님은 어떻게든 집안을 꾸려가야 한다면서,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당장 취직하여 돈을 벌어야 했다. 여기저기를 알아보았다. 상고를 나온 것도 아니어서, 바로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아버지가 일하시던 분야인 선구점 쪽에 여사무원 자리가 생겨, 어렵사리 취직을 했다. 중년의 사장은 평소 아버지와 잘 알고 지내던 분이라 믿고 갔으나, 날이 갈수록 야릇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무실 아래 지하는 20여 평 남짓한 창고였다. 사장은 지하창고 안의 물건을 옮겨야 한다면서 수련을 데리고 들어가서는, 대뜸 수련을 끌어안더니 바닥에 뉘여 버렸다. 수련은 거세게 발버둥쳤지만, 계획적으로 달려드는 힘 좋은 40대의 사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행위가 끝나자 사장은 미안하다면서 봉투하나를 내 밀었다.
수련은 세차게 봉투를 허공에 집어 던지고, 창고를 뛰쳐나왔다. 나오긴 했으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창고에서 가까운 부둣가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방파제 너머로, 흐릿한 바닷물이 무심히 출렁거렸다. 미치게 보고픈 오빠의 얼굴이, 물결 속에서 어른거렸다.
“오빠, 나 어떡해야 돼?”
탁류는 말이 없었다.
“오빠 정말, 나 어떡해야 돼?”
흐르는 눈물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주저앉아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울다보니, 사람들이 주변에 둘러서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들 있었다. 부끄러운 생각에, 얼른 일어나, 시내 쪽을 향해 무작정 뛰었다. 지나는 차 속에라도 그냥 뛰어 들고 싶었다. 어디를 어떻게 헤매었을까? 저녁 무렵에야 집에 들어가, 그대로 몸져누워 버렸다.
다음날, 사장은 문병이라고 와서, 어머니 손에 약값으로 쓰라며 20만원을 쥐어 주고 갔다. 몸이 나아지면 꼭 연락 달라고 당부하고 갔다면서, 정말 좋은 사장이라고, 어머니는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울화통이 터졌지만,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몸을 추스르고 삼일 만에 일어나자, 어찌 알고 사장이 바로 데리러 왔다. 어머니가 전화한 것 같았다. 수련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사장을 따라 나섰다. 며칠이 지나자, 사장은 다시 추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지만, 집안을 위해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고 입을 악다물었다.
달이 바뀌면서, 왠지 자꾸 불안하여, 산부인과를 찾아 갔다. 임신 2개월째라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날로 직장을 옮기기로 결심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며칠을 헤맨 끝에, 겨우 구두공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어머니는 사장이 찾아와 다시 나오라고 한다며, 그 좋은 사무실을 왜 갑자기 그만 두었냐며 나무랐다.
더 좋은 일자리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했다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그 길로 사장을 찾아가, 다시 한 번만 집에 오는 일이 있으면, 그간의 일을 고발하여,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무섭게 경고했다. 그 후로 사장은, 다시 찾아오지 못했다. 남모르게 몸과 마음의 상처를, 겨우 겨우 추스르며, 어렵게 뱃속의 아이도 지웠다.
구두공장의 작업조건은 참으로 열악했다. 지하에 자리한 공장은, 각종 가죽과 접합용 본드에서 나오는 매캐한 냄새로, 구토가 날 정도로 역겨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익숙해져 갔지만, 반복되는 매일의 힘든 작업은, 더없이 고달팠다.
4. 결혼생활.
해가 바뀌다보니, 어느새 스물세 살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시집보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신랑감을 수소문했다. 여기저기에서 중매가 들어와, 마지못해 두어 번 선을 보았다. 배를 여러 척을 부린다는 선주 집의 중매가 들어왔다. 명산동에서 알부자로 소문난 집이라 했다.
선주의 아들이라는 장성봉을 만나보니, 풍채도 좋고 서글서글하니 꽤 걸 져 보였다. 나이는 스물일곱으로, 군산수산전문대학을 나와 대형 화물선 ‘남해호’의 항해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성봉은 첫눈에 반했는지, 매우 적극적으로 나왔다. 어머니도 적극 찬성이었다.
수년간, 소식도 모르는 오빠만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과 해야 할 결혼이라면, 다소나마 호감이가는 남자가 나타났을 때, 받아들이고 싶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음에 끌림이 있어 청혼을 받아들였다. 근무상의 여건이 있는 남자 쪽의 사정으로,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문배오빠에 대한 사랑은 영원한 추억 속에 묻기로 했다.
신혼여행은 남편의 뜻에 따라 유럽으로 떠났다. 독일의 베를린을 기점으로, 프랑크푸르트와 스위스의 루체른, 인터라켄, 융프라우를 거쳐 프랑스로 갔다. 말로만 듣던 유럽의 나라들에, 자기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남편과 함께 와 있다는 게, 정말 꿈같았다. 빠리와 베르사이유, 투르, 리옹과 아비농을 거쳐 마르세유에서, 스페인의 바로셀로나로 갔다.
빌렌시아와 토레도를 거쳐 마드리드에서, 귀국 행 비행기를 탔다. 25일 간의 바쁜 일정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근무지 사정으로 더 이상 시간을 낼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항해사로 여러 나라를 다녀본 남편은 영어도 잘했고,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를 잘 알고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여행을 마쳤다.
남편은 보통 삼, 사 개월이 지나야 집에 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도, 며칠이 지나면, 항선 일정에 따라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남편이 집을 비우는 동안은, 시아버지와 같이 지냈다. 시어머니는 수련이 시집오기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계시지 않았다. 시아버지 역시, 어선을 여러 척 거느리고 있어, 날마다 바빴다.
명산동의 집은 150여 평에 달하는 큰집이었다. 아래 위층을 쓸고 닦기만 해도, 반나절은 훌쩍 갔다. 시아버지는 가정부를 시켜 모든 일을 하도록 당부했지만, 가능한 한 집안 일은 자신이 직접 했다. 결혼 다음 해에 남편은, 35평 아파트를 마련하여, 장모님께 드렸다. 또한 군을 제대한 후, 복학을 못하고 있던 처남인 진성오빠가, 다시 학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봐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남편이었다. 친정동네에는, 수련이 시집을 잘 가 집안이 모두 잘 살게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히 퍼졌다. 고등학생이 된 영성이도, 중학생이 된 수경이도, 생활이 풀리면서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깊고, 자상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남편이 집을 비우는 긴긴 시간 동안은, 친정어머니가 수시로 집에 오셨다. 자신도 친정집에 자주 들리며, 생활 속에 무료함을 달랬다. 걱정은 아이였다. 결혼생활 2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시아버지와 친정어머니는 날마다 걱정했다. 불임여성의 원기를 돋운다는, 한약을 수시로 지어왔다.
수련은 시아버지가 혹시나,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해 보자고 하실 까봐 내심 걱정이었다. 산부인과 진찰에서 혹여, 그 누구도 모르게 몇 년 전, 약물로 유산 시켰던 일이 밝혀지면 큰일이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빨리 가져야 했다. 모든 면에 세심히 신경을 썼다. 그러한 노력의 덕분인지, 마침내 임신이 되었다. 남편은 물론 집안어른들도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5. 무정한 세상.
임신 7개월에 접어들자,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의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1등 항해사로 승진해 있었다. 며칠을 묶은 뒤,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 항을 다녀오기 위해 출항했다. 날로 무거워지는 몸 때문에 두어 달이 힘겹게 넘어갔다. 아침 일찍, 집안일을 해주려고 온 가정부에게, 빨래와 청소를 시켰다.
오후 3시 넘어 일이 끝나, 내일 다시 오라고한 뒤, 돌려보냈다. 시아버지마저 볼일이 계셔 일찍 나가셨기 때문에,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몸이 무거워 거실소파에서 앉아 쉬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살며시 눈을 뜨니, 복면을 한 웬 남자가 거실 화장대 서랍을 막 뒤지고 있었다.
“누, 누구야?”
수련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야, 깼어.”
놈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들어 빤히 처다 보았다.
“뭐예요, 당신? 뭐하는 거예요?”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보면 몰라 이년아, 아, 아, 앉아. 까불면 그냥 죽여 버려.”
놈은 불쑥 다가서며, 허리춤에서 과도 크기만 한 묵직한 칼을 꺼내 들었다.
“왜, 떡판이 벌써 깼어?”
복면을 한 또 한 놈이, 큰방 쪽에서 걸어 나왔다.
“뭐야, 계집이 벌써 꽂아 달라고 앙탈이야?”
이어 작은 방 쪽에서도, 또 한 놈이 나왔다. 순간, 아찔함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한 놈이 다가와, 주저앉은 수련의 머리채를 확 잡아 재꼈다.
“너 순순히 우리 말 들을 래, 아니면 죽을 래?”
놈은 묵직한 칼끝을 수련의 목에 갖다 댔다.
“살려 주세요.”
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애원이 터져 나왔다.
“좋아, 살려 주지. 순순히 말만 잘 들어. 돈과 패물은 모두 어디 써, 엉?”
놈은 칼끝에 힘을 주었다. 살을 파고드는 칼의 느낌이 섬뜩하고 뜨거웠다.
“저기 큰 방 옷장 밑 서랍에 모두 있어요.”
수련은 큰방을 가리켰다.
“야, 찾아봐?”
칼을 댄 놈이 말하자, 한 놈이 들어가 옷장 서랍을 뒤져댔다. 곧이어 봉투에 싸여진 현금 300만원과 통장을 가지고 나왔다.
“야 이 년아, 이게 전부야?”
놈은 돈뭉치를 들어 보이며, 눈알을 부라렸다.
“네, 현금은 집에 많이 두지 않아요. 필요할 때마다 은행에서 찾아다 써요.”
“이런 우라질 것들을 봤나.”
놈은 투덜거리며, 통장을 펼쳐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통장에는 제법 있구만.”
“얼마나 있어?”
칼을 든 놈이 물었다.
“3억 8천.”
“그래, 그것만 찾을 수 있으면 되겠는데. 야, 지금 몇 시지?”
“4시 20분. 오늘은 이미 늦었어. 이년이나 조지고 갔다가 다음에 보자 구.”
“그럴 수밖에 없지. 야, 이년아 어서 벗어.”
칼을 든 놈이 날카롭게 내 뱉으며, 노려보았다.
“아저씨 저 임신 9개월 이예요. 내일이면 애를 낳아요. 제발 봐 주세요.”
수련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 년이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야, 빨리 벗겨.”
칼을 든 놈이 말하자, 두 놈이 동시에 달려들어 옷을 마구 벗겼다. 놈들은 알몸과 차례로 삽입하는 광경까지 모두 카메라로 찍어댔다. 놈들은 현금과 패물을 모두 챙긴 뒤, 알몸으로 쓰러져 누운 수련을 거실에 그대로 둔 채, 유유히 사라졌다. 소파와 거실바닥 여기저기가 피와 음수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칼에 눌리며 찔린 오른쪽 목도, 피가 엉겨붙어있었다.
참으로 비참했다. 몸을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다가, 겨우 힘을 내, 엉금엉금 기어가 웃옷을 간신히 걸쳤다. 그때 시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시아버지를 본 순간, 수련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정신 좀 드니?”
친정어머니였다.
“아! 어머니.”
수련은 왈칵 목이 메어왔다. 딸의 손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침통히 서 계시던 시아버지가 애써 입을 여셨다.
“애야, 이만하기가 다행이다.”
말씀하시는 눈가에 글썽글썽 눈물이 맺히셨다.
“그래, 어떻게 된 거니?”
어머니 뒤에 서있던 진성오빠가 물어왔다. 그 물음에 힘없이 고개가 젖혀지며, 눈물만 쏟아져 나왔다.
“그래, 애야 네 마음 다 안다. 아무 걱정 말아라.”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손을 꼭 쥐며, 부르르 떠셨다. 잠시 후, 의사와 간호원이 와서,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면서, 모두 나가 있을 것을 요구했다. 간호원만이 지키는 가운데, 수련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6. 물방울 눈꽃.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고심하던 수련은, 그 몹쓸 강도들을 반드시 잡아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병실을 찾아온 수사관들에게, 사실대로 진술해 주었다. 시아버지는 아들이 근무를 마치고 돌아 올 때까지는, 이런 사실을 절대 알려선 안 된다 하셨다. 선상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크나큰 충격만 받게 된다는 것이다.
입원 닷새째 되는 날, 통증이 시작되면서, 출산의 징조가 나타났다. 예정일보다 빠른 것이었다. 오랫동안 사투를 벌였으나, 비통하게도 사산이었다. 너무도 분통하니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날을 새며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까닭 없이 그냥 병원이 싫어졌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담당의사도 마음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도록 퇴원을 허락했다. 당분간 친정어머니와 지내는 것이 안정에 도움이 되겠다는 어른들의 판단에 따라, 명산동 시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친정어머니의 아파트로 갔다.
친정어머니 집에 간지 열흘이 지났을 때, 졸업 후 까맣게 잊고 지내던 단짝 경숙이에게서, 별안간의 전화가 왔다. 졸업 후, 갑자기 소식이 끊겨 백방으로 찾았으나, 이사 간 집을 알 수 없어 연락을 못 했다며, 참으로 반가워했다. 군산경찰서 여경으로 근무하고 있는, 여고 때 한 반이었던 옥숙이가, 수련의 연락처를 엊그제 사 알게 되었다며, 자기에게 알려 주어, 이제야 전화를 했다고 했다.
짧은 통화였지만 경숙이로부터 캐나다로 간 문배오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캐나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여, 지지난해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백방으로 수련을 찾았다는 것이다. 끝내 못 찾고 캐나다로 돌아간 문배오빠는 작년에, 네팔의 히말출리산에 캐나다 친구들과 등반을 갔다가, 동료 3명과 함께 눈사태에 묻힌 뒤, 아직껏 그 시신조차도 못 찾고 있다고 했다.
경숙은 담담한 투로 말했지만, 수련은 수화기를 통해, 그 가슴 아픈 소식을 들으며, 다시 한번 비통에 빠졌다.
‘오빠, 오빠라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려니 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오빠와 거닐었던 덕유산의 하얀 눈밭과, 설악산의 풍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추억을 되새기며, 가슴 아픔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전화를 받으며 흐느끼시는 어머니의 슬픔에 찬 목소리에 놀라, 선뜻 잠에서 깨었다.
“아이고 이걸 어 째, 왜 이런 때 장서방마저 세상을 등져. 우리 수련이가 불쌍해서 어째.”
어머니는 흐느껴 울고 계셨다. 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거실로 뛰쳐나갔다.
“엄마, 장서방이 뭐가 어째. 세상을 등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미친 듯이 뛰쳐나와 다그치는 딸을 보고, 어머니는 눈물을 삼켰다.
“엊그제 대서양의 근해에서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되어 선원일부가 실종됐었는데, 어제 겨우 장서방과 다른 선원 한 구의 시신만 찾았다는 구나. 이 일을 어쩌니, 아이 구 이 일을 정말 어째.”
어머니는 수련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셨다.
“뭐요 엄니, 그이가? 아냐, 엄니. 이건 뭔가 잘못 전해진 거야. 새빨간 거짓말이야. 아냐 아냐.”
수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어머니가 놀라 바로 누이고, 얼음물에 적신 찬 수건을 이마에 대주었다. 겨우 정신이 돌아왔으나, 너무도 기가 막혀 말할 기력조차 생기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편과 유럽하늘을 누비던 즐거웠던 지난날들이, 손에 잡힐 듯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남편은 삼일 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주검으로 돌아온 그 날, 경찰은 범인 모두를 검거했다고 알려왔다. 찍은 사진으로 남편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려 했던 놈들은, 남편의 사망 사실을 모르고 남편 회사에 전화를 했다가, 이를 추적한 수사진에 의해 모두 붙잡혔다는 것이다.
남편의 장래는 회사장으로 치러졌다. 바다에서 살다 바다에서 산화했으므로 화장 후 남은 유골은, 고향 바다에 뿌려 주자 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태어난 곳인 선유도 망주봉 앞 바다에 뿌려주었다. 참으로 착하고 고왔던 남편, 저 바다 좋은 곳으로 가서, 편히 쉬시라고 가슴으로 빌고 빌며, 흐르는 눈물을 담아 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자꾸 사무쳐왔다. 더불어 오빠에 대한 그리움도 밀려왔다.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떠나버린 세상이, 자신에겐 날이 갈수록 차갑고 매섭게 느껴졌다. 그 해 겨울 찬바람을 안고 수련은, 기어히 선유도행 옥도훼리를 탔다. 남편이 잠들어 있는 선유도 망주봉 앞 바다라도, 꼭 다녀와야 살 것 같았다.
내년 여름, 날이 풀리면, 꼭 같이 다녀오자 시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고, 어머니 몰래 길을 나섰다. 찬바람이 휘날리는 겨울바다는, 참으로 매섭고 찼다. 한 겨울의 선유도 선착장 산기슭은, 더없이 으스스 했다. 산등성이에 막힌 바람이 허공을 맴돌며, 하얀 눈송이들을 티끌처럼 흩날리게 했다.
망주봉으로 나가는 길에 자리한 동네 길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해수욕 철이면 만원을 이룰 여관들에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선유도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가로지른 긴 방파제에 위에 서니, 바람은 더욱 거세였다. 파도는 추위에도 아량 곳 없이 무섭게 출렁거렸다.
‘당신이 있던 그곳 대서양의 파도는 이보다 더 지독했겠지. 여보!’
핑 솟아 떨어진 눈물방울이, 찬 바닷바람에 곤두박질쳤다. 걸음을 방파제 아래 모래사장으로 옮겨 놓으니, 바닥을 쓸어 핥던 파도가 한입에 삼킬 듯이 더욱 무섭게 요동쳐댔다. 눈발이 세차게 쏟아졌다. 멀리 보이는 망주봉의 소나무는, 그래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도도히 서 있었다.
초소 밑 바위로부터, 눈바람에 가물거리는 모래사장의 끝까지, 남편과 즐거웠던 날들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걸었다. 두툼한 털 코트와 검은 밍크목도리로 감 쌓은, 중무장한 몸속까지, 차디찬 겨울 바닷바람은 매섭게 파고들었다. 산의 정상에서 그 이의 품에 꼭 안겨 주위의 장관을 둘러보던 때의, 따스했던 남편의 가슴이 더없이 그리웠다.
‘여보, 나 좀 안아 줘, 나 지금 추워.’
중얼거리며 주위를 보아도 싸늘한 바람과 파도뿐, 어디에도 사랑하는 이의 모습은 없었다. 내 딛는 발걸음 마다 눈물방울로 적셔졌다. 하염없이 헤매다 어두워져서야 여관에 들었다. 불을 넣었으니 곧 따뜻해 질 거라며 방을 찾은 주인 여자는, 이리저리 살펴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다.
“이 추운 겨울에 어쩐 일로 곱디고운 아가씨 혼자 이런 섬 구석엘 다 왔댜?”
수련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수그렸다.
“낚시꾼들이야 더러 애인을 끼고 오는 경우도 있지만, 이리 예쁜 아가씨가 혼자 오는 것은 참말 별난 일이구먼 그랴. 그라니까? 혹여 지난번 수영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총각의 애인? 맞는 가?”
주인여자는 묻고 나서 이리저리 살폈다. 수련은 말없이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맞는 구 먼. 에그 내가 주책이지. 뭐가 좋은 일이라 구, 아가씨의 상처를 이리 건드릴까 잉. 걱정 말고 푹 쉬어 아가씨. 나가는 배는 내일 아침 11시에 있으니 께.”
주인여자는 총총히 사라졌다. 방 불을 끄고 쪼그리고 앉아 여관 앞의 외등이 켜진 밖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캄캄한 허공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유리창을 유심히 보니, 바람을 따라 흩날려온 눈송이가 유리면에 붙으려다가는, 그대로 쪼르르 밀려 떨어지는 게 보였다. 문득 그것이 어쩌면, 애절히 자신을 부르는 남편의 손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선뜻 스쳐지나갔다.
“여보, 잠깐만.”
수련은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장자도와 무녀도, 망주봉 사이의 까만 하늘이, 흩날리는 눈발 속에 부르르 떨고 있었다.
“여보 어디에 있어, 응?”
수련은 중얼거리며, 모래사장 쪽을 향해 걸었다. 속옷만 걸친 상태인데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속옷마저도 당장 벗어, 캄캄한 하늘 어디선가 떨고 있을, 남편과 오빠를 따스하게 덮어주고 싶었다.
“여보, 내가 갈게. 오빠, 내가 갈게. 조금만 참어.”
수련은 중얼거리며, 모래사장 쪽을 향해 걸었다.
“아이구, 아가씨 어딜 가? 이 밤에.”
언제 알고 쫒아 나왔는지 주인여자가 달려와, 수련을 와락 끌어안았다.
“저런, 쭈 쭈.”
아내 뒤를 따라 나온 주인남자가 둘을 지켜보며, 한없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련은 주인여자에게 잡혀, 여관방으로 이끌려 들어왔다. 주인여자는 한참을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달랜 뒤, 누워 자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방을 나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주인여자가 다시 와서, 수련이 방안에 잘 있는지 확인해 보고 갔다.
여관집 사람들이 이래저래 수련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 모래사장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싶었으나, 지켜보는 눈 때문에 나갈 수조차 없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아예 파출소에서 순경이 데리러 왔다. 주인여자가 전화한 게 틀림없었다. 순경을 따라 선착장으로 나서는데, 주인여자가 문밖까지 따라 나서며 당부했다.
“아가씨, 세상엔 좋고 좋은 남자들이 쎄이고 쎄였어. 이제 돌아가서 마음잡고,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아봐야지, 암 그래야지, 맘을 굳게 먹어.”
선착장에서 군산으로 나가는 여객선을 타는 손님은 2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선실 안으로 들어서자, 승객들은 이곳저곳에 편할 대로 눕거나 앉아 있었다. 배가 출발하고 시간이 좀 지나자 승객들이 출입문으로 자유로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수련은 부스스 일어나 배 뒷전으로 갔다.
뒷전의 난간에 기대여, 프로펠러에 밀리며 하얗게 일어나는 거친 물살을 바라보았다. 프로펠러에서 솟아오른 힘찬 물줄기가, 양옆에서 일어나 깊게 패인 물줄기와 합류되면서, 거대한 하얀 물거품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수도 없이 일어났다가 부서지는 하얀 물방울들, 맑은 바닷물이 거세게 몸부림치면서 토해 내는 하얀 물방울들은, 참으로 처연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설악산과 덕유산, 알프스에서 보았던 하얀 눈꽃 세상, 티 없이 맑고 순결했던 황홀한 눈꽃세상, 손잡고 같이 뛰어가 폴싹 안기고 싶다고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하얀 눈꽃 세상이, 바닷물을 가르며 달려 나가는 여객선의 뒷전에서 환상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수 천 수만의 물방울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하얀 물방울 눈꽃은 참으로 찬란하고 황홀했다.
하얀 물방울이 거대한 숲을 이룬 하얀 물방울 눈꽃 속에 불현듯, 남편과 오빠가 나란히 서서, 방긋 웃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여보! 오빠!”
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물방울 눈꽃을 향해 힘차게 내밀었다.
순간,
“오! 내 사랑!”
남편과 오빠가 동시에 수련을 반기며 달려오는 것 같았다. 수련은 그 품에 황홀히 안기고 싶었다. 주저할 것 없이 물방울 눈꽃 속으로 몸을 날렸다. 수련의 몸은 거센 물살에 휘감기다, 그대로 하얀 물방울 물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