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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는 어떤 법칙을 따르는가?
바이마시라오(白瑪喜饒)상사(上師)
불교경전 가운데서 이야기하는 인과보응이 따르는 것은 인과율이며, 대략 다섯 가지의 정해진 법칙을 포함한다.
1. 선악의 업에는 반드시 동류의 과보가 생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것과 같이 섞이거나 어지럽지 않으며, 또한 원인은 있는데 결과가 없거나, 결과는 있는데 원인은 없는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에 관계없이 인과보응의 철칙은 우주와 생명현상의 기본 규율이다. 중생이 지은 업은 반드시 이러한 불변의 법칙을 따르며, 동류의 원인은 반드시 동류의 과보를 낸다. 즉 선업은 반드시 선한 과보를 내고, 악업은 반드시 악한 과보를 내며, 선악이 섞인 업에는 반드시 선악이 섞인 과보를 내며, 유루의 업은 반드시 유루의 과보를 내며, 무루의 업은 반드시 무루의 과보를 낸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
선악의 인과는 주로 중생의 상호관계에 의하여 성립된다. 타인에 대한 자기의 손익은원(損益恩怨: 손해를 보고 이익을 얻으며 은혜를 입고 원한을 가지는 것)에서 보상을 하는 것이 본래의 성질이다. 이러한 본성은 “작용의 힘과 반작용의 힘”이 작용하는 물리법칙과 비슷하다. 업(業)에는 불가사의의 거대한 힘이 있으며, 이것을 업력이라 부른다.
불경에서 말하는 세간의 네 가지의 불가사의한 힘 가운데 하나이다. 즉 불력(佛力), 신통력(神通力), 용력(龍力), 업력(業力)이 있는데, 이 가운데 신통력과 용력은 업력보다 크지 않다. 즉 불가에서 말하기를 “신통은 업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업력 앞에서는 큰 신통력도 힘을 잃는다.
<남전미란타왕문경(南傳彌蘭陀王問經)>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미란타왕이 묻기를 “신통과 업력의 불가사의한 힘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큽니까?” 롱쥔 아라한이 답하기를 “이 불가사의한 가운데 업의 성숙력은 매우 맹렬하고 강력합니다.”
부처님의 힘(佛力)이라도 함부로 정해진 업은 소멸시킬 수 없다. 단지 몸이 중생의 생사계에서 선악의 업을 지으면, 곧 지은 업력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선악업의 과보의 따름을 벗어날 곳이 없다.
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네 명의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각각 신통이 자재하여 천안으로 보니 곧 악한 과보를 받아 죽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각각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속으로 들어가거나, 설산으로 숨거나 바다 밑으로 숨었지만, 결과적으로 몸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은 업보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선악의 업은 반드시 동류의 과보를 낸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만약 선을 행하고 또 악을 저지르면, 그 선과 악은 각각 과보를 내며, 서로 상쇄시킬 수 없으며, 선을 행하는 방법으로 악업의 과보를 소멸시킬 수 없으며, 악업이 아무리 크더라도 지은 선업의 과보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불설미증유인연경> 하권에서 이르기를 “무릇 사람이 복을 닦으면 죄와 화합시킬 수 없는 까닭으로 반드시 방편으로 죄를 소멸시켜야 한다.” 이것은 선악에는 각각의 과보가 있으며 서로 혼합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악업의 죄보를 소멸시키려고 하면, 반드시 악보를 소멸할 수 있는 방법(지혜를 닦는 등)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2. 자기가 지어 자기가 받는다(自作自受)
중생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업을 짓는 “속된 나(俗我)”가 있다. 그가 지은 업의 과보는 인과에 따라 어지럽게 섞이지 않는 같은 연기(緣起)를 결정하며, 단지 업을 짓는 주체의 상속변화가 과보를 받게 된다. 중생이 현재 받는 업보는 반드시 자기 전생과 숙세의 업력으로 느끼는 것이다. 마치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비록 부모와 자식이라도 서로 업보를 바꿀 수 없으며, 단지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아야 하는 것으로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니리경(泥犁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착하지 못한 일을 지으면, 자녀가 대신 받지 못하고, 자녀가 착하지 못한 일을 지으면, 아버지가 대신 받지 못한다. 선을 행하면 스스로 복을 얻고 악을 지으면 스스로 재앙을 받는다.”라고 하였으며,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사람에게 훈계하시기를 “천지간에 다섯 세계가 분명하여 선악의 보응으로 화(禍)와 복(福)을 서로 받으며, 자기의 몸이 스스로 그것을 받으며 아무도 대신할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3. 다섯 종류의 과보
중생이 지어서 필연적인 과보를 생하는 업은 지어서 과보를 생하는 각도에서 보면 두 가지의 인, 세 가지의 인, 여섯 가지의 인, 열 가지의 인 등 여러 종류이다.
(1) 두 가지의 인(二因) : 음욕을 많이 탐하면 음욕이 갈수록 증장하여 마치 짠 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마른 것과 같다. 이러한 업의 원인(業因)을 “습관의 원인(習因)” 혹은 “동류인(同類因)”이라고 한다. 선악의 업인은 후세의 과보를 발생하며, 이러한 업인을 “과보의 인(報因)” 혹은 “이숙인(異熟因)”(다른 시기와 다른 장소에서 성숙하는 것)이라고 한다.
(2) 세 가지 인(三因) : 생인(生因 : 이숙인), 습인(習因), 의인(依因 : 識 등이 의지하는 것)
(3) 여섯 가지의 인(六因) : <구사론(俱舍論)>을 보면, 조성하거나 장애하지 않는 과보를 내는 업인을 “능작인(能作因)”이라고 하며, 서로 의존하여 과보를 내는 업인을 “구유인(俱有因)”이라 하며, 동류의 업인을 내는 업인을 “동류인(同類因)”이라 하며, 동시에 상응하여 과보를 내는 업인을 상응인(相應因)이라 하며, 무명, 신견, 사견, 견취견, 의심(疑) 등이 두루 일체의 번뇌, 혹업을 내는 업인을 “편행인(遍行因)”이라 하며, 유루의 선․악․무기의 업이 내세에 다섯 세계에 성숙하는 과보를 내는 것을 “이숙인(異熟因)”이라고 한다.
(4) 열 가지의 인(十因) :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보면, 열 가지의 인이 나온다. 즉 수설인(隨說因), 관대인(觀待因), 견인인(牽引因), 생기인(生起因), 섭수인(攝受因), 인발인(引發因), 정이인(定異因), 동사인(同事因), 상위인(相違因), 불상위인(不相違因) 등이다.
이 가운데 주의할 만한 것은 인발, 상위, 불상위의 세 가지 인이다. 인발인은 삼계 유루의 선업은 자기 세계의 유루와 무루의 선업을 끌어당겨 발생시킬 뿐 아니라 또한 다른 나머지 두 세계의 유루와 무루의 선한 과보를 끌어와서 내는 것이다. 마치 좋은 일을 많이 행하면 좌선시 선정에 들어가기가 쉬운 것과 같이, 이것은 간접인발에 속한다.
따라서 많은 불교수행자들은 모두 선을 행하여 수행의 조행(助行: 돕는 행)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것은 도리가 있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사람은 장기간 정좌(靜坐)를 해도 선정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바로 착한 인(善因)의 인발(끌어당김)이 부족한 것이다.
상위인(相違因)과 불상위인을 설명하자면, 과보가 장래 나올 때 만약 장애하는 인연이 나타나서 막는다면, 곧 잠시 과보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업인이 내는 과보는 다섯 종류가 있다.
(1) 현법과(現法果: 혹은 士用果)
이것은 지금 현세에서 얻게 되는 실제의 과보를 가리킨다. 마치 세속의 학문과 경제활동 등과 같이 현세에서 곧 과보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유가사지론>9권에서는 두 종류의 극히 중한 선업과 다섯 종류의 극히 중한 악업은 반드시 현법의 과보를 얻게 된다고 말하였다. 극히 중한 선업이란 불법승 삼보를 바르게 믿고, 바르게 이해하여 불법으로써 큰 선행을 행하도록 지도하는 것을 가리키며, 현세에서 복락과 안락의 과보를 얻을 수 있다.
다섯 종류의 극히 중한 악업은 다섯 가지의 무간죄(五無間罪)를 가리킨다.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며,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며, 화합승을 파괴하는 것(이것은 절의 재산을 겁탈하거나 대승불법을 비방하는 것을 포함한다) 등으로서 현세에 바로 악한 과보를 받게 된다.
(2) 등류과(等流果)
이것은 같은 종류의 인과가 상속되는 것이다. 마치 강물이 서로 이어져서 흐르는 것과 같다. 살생자는 죽이는 것을 좋아하며, 선(禪)을 닦는 자는 청정함을 좋아하고, 보시자는 인자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3) 이숙과(異熟果)
과보가 내세와 후세에 성숙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육도에 윤회하게 하는 것이다. 불경에서는 사람은 하루에 팔만사천가지의 생각이 있으며, 매 하나의 생각은 모두 일생 내지 다생의 이숙과를 끌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일생에 무수한 업을 지으므로 죽은 후 어찌 이숙과를 받지 않겠는가?
<아비달마잡집론. 결택체품>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무거운 것이 먼저 성숙되며, 혹은 장차 죽을 때 앞에 나타나거나, 혹은 먼저 많이 습관이 된 것이거나, 혹은 최초로 끌어오는 것은 저 이숙과가 먼저 성숙한다.”
이것은 극히 중한 업과 죽으려고 할 때 현전하는 업(近死業, 臨終業), 일생 항상 행하여 습관을 이룬 업(習慣業), 숙세에 누적되어 쌓인 것이 아직 과보를 내지 않았지만 임종이나 죽은 후 가장 먼저 성숙하는 업(累計業, 儲備業)의 네 종류의 업은 죽은 후 가장 먼저 받을 이숙과를 결정하며, 또한 사후의 갈 곳을 결정한다.
네 가지의 업 가운데 극히 중한 업과 임종업은 사후 갈 곳을 결정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매우 중요한 작용을 일으킨다. <업도경(業道經)>에서 이르기를 “업도는 저울과 같아서, 무거운 것이 먼저 이끈다(業道如秤, 重者先牽)” 불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임종의 순간은 그 전의 많은 시간을 이길 수 있다.”
(4) 증상과(增上果)
각 중생의 업이 그 중생의 생존환경에 대하여 발생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불법은 중생의 생존환경(지역, 시대, 기후, 물산, 사람의 인연 등의 조건을 포함)은 모두 중생의 업력이 느끼는 것이며, 업보의 일부분으로서 주체(중생)의 정보(正報)와 상응하며, 의보(依報)라고 한다. 선을 행하면 좋은 생존환경을 느껴서 부강하고 문명적인 나라에 태어나며, 악업을 행하면 좋지 않은 생존환경을 초래한다. <업보차별경>에 이르기를 “만약 중생이 열 가지의 악업을 많이 지으면, 모든 바깥의 사물이 구족하지 못함을 느낀다.”
(5) 여타증상과(與他增上果)
중생이 지은 업은 그의 친족과 주변의 사람, 내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가리킨다. 마치 항상 “한 사람이 도를 얻으면, 닭과 개도 승천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전 집안사람의 얼굴에 광택이 없게 된다는 것과 같다.
중생, 특히 인류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회, 자연계 내지 동물계의 연기관계 속에서 서로 연관이 있으며, 증상과와 여타증상과의 이치에 따라 한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는 그의 생활환경(사회, 자연계)에까지 파급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짓는 공업(共業)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의지하여 누리는 생존환경을 느끼게 된다. 이에 따라 하나의 민족, 국가, 지역의 빈부와 강약, 선진하고 낙후됨, 문명의 정도, 사회질서, 사회심리 분위기, 생존환경 등은 사회전체가 공동으로 지은 업의 과보이며, 사회전체가 직접 받게 된다.
4. 과(果)는 여러 연을 의지하고, 보(報)는 삼세에 통한다
업의 원인은 비록 반드시 과보를 생하지만, 인(因)은 단지 연(緣)이 과보를 일으키는 모든 조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필요한 조건이 다 갖춰져야 비로소 과보를 생할 수 있다. <중론(中論)>에서 말하기를 연이 하나의 현상을 일으키는 조건에는 네 종류가 있다. 인연(因緣: 因), 소연연(所緣緣: 바깥의 경계), 증상연(增上緣: 중요한 작용을 일으키는 기타조건), 등무간연(等無間緣: 인과가 상속되는 중간에는 정지함이 없음)
윤리와 사회성을 갖춘 업인이 내는 과보는 업을 짓는 주체와 업이 작용하는 대상간의 인연이 만나는 것을 보고 결정된다. 하나의 조건이 구비되지 못하면 곧 결과를 생할 수 없다. 마치 식물의 종자는 반드시 바로 즉시 땅에 떨어져 싹이 발아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즉 일정한 시간이 지나 적당한 온도와 습도, 토양, 햇빛 등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발아하고 생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중생이 지은 업의 과보도 모두 반드시 현전에 혹은 금생에 곧 받게 되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나거나 혹은 내생, 내지 아주 먼 후세에 이르러야 비로소 성숙될 수도 있다. 업력의 과보는 전체의 생사윤회의 긴 과정에서 관찰해야 하며, 눈앞의 현상이나 금생의 현상에만 국한해서 보면 안 된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인간세상에서 비록 악을 지었지만 즉시 과보를 받지 않는 현상이 적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과보가 성숙될 날이 있다. 마치 불을 재로 덮어놓으면, 불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솔하게 밟고 지나가면 단지 발을 데이는 화를 초래할 수 있다. 단지 사회에서 착한 사람이 죄를 받고, 악한 사람이 복을 누리는 현상만을 보고 경솔하게 선악에 과보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착한 사람이 죄를 받는 것은 그의 전세에 지은 악업의 과보이며, 나쁜 사람이 복을 누리는 것은 그의 전세에 지은 선업의 과보 때문이다.
5. 업은 마음에서 나오며, 소멸시키는 길이 있다
이것은 인과율의 다섯 번째 규칙으로서 만약 불법에 따라 업의 본질을 간파하면 이미 지은 유루업을 바꿀 수 있으며, 업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인과설의 참된 진리(眞諦)가 있는 곳이다. 만약 단지 앞에서 언급한, 업은 반드시 과보를 낸다는 세속제(世俗諦)의 법칙만을 보면 불법의 정수를 잃게 될 것이다.
종카파대사의 <현밀수행차제과송>에서 이르시기를
“인과가 만약 반드시 정해진 것이라면, 중생은 성불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업력의 인과가 결정되어 바꾸어 소멸시킬 수 없으면, 일체 중생은 무시이래로 지은 무량한 업은 단지 업과가 상속되고 생사가 쉬지 않아서 업력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혜의 힘으로 지옥의 극중한 업을 현세에서 가볍게 받을 수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은 현세의 가벼운 업을 지옥의 중죄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일체 중생은 정해지지 않은 업이 많고 정해진 업이 적으므로 도를 수습(修習)하면 정해진 중한 업을 가볍게 받을 수 있으며, 정해지지 않은 업은 과보가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다.
업보는 어찌하여 지혜에 의지하여 소멸시킬 수 있는가? 우선 만약 지혜로써 인과의 법칙을 파악하고 인과율을 이용하여 과보의 발생을 막을 조건을 창조하면. 곧 업보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전세에 살생의 업보로 인하여 금생의 운명 가운데 교통사고로 요절할 사람이 만약 특별히 운전에 주의하고 불법에 따라 보리심을 발하고, 생명을 보호하는데 노력하고 방생을 많이 하면, 곧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며, 내지 장수할 수 있다.
다음은 불법의 지혜에 의지하여 업과 인과의 연기(緣起)가 자성이 없고 본성이 공함을 관찰하면, 공한 까닭으로 바꿀 수 있다. 마치 흰 종이위에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과 같다. 업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으며, 마음이라는 것은 세간에서 가장 영묘하고 불가사의하며, 역량이 가장 강한 것으로서 업력이 비록 크더라도 심력의 불가사의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마음은 무형무상(無形無相)으로 일체를 창조할 수 있는 기묘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불가사의한 공능과 지혜를 함장하고 있다.
중생이 경건한 신심의 청정한 인을 의지하여 예배, 공양, 송경, 지주, 염불, 참회 등의 수행을 통하고 불보살의 가피가 강력한 증상연이 되면, 악업의 과보를 바꿀 수 있고, 소멸시킬 수 있다. 불교에는 많은 참회법이 있다. 법화참법, 약사참법, 화엄참법, 예념미타도량참법, 양황보참, 자비수참, 대비참 등이 있으며, 이러한 참법을 통하여 업장을 참회하고 죄업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회에는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이 있다. 사참은 반드시 참회를 닦아 죄가 청정해지는 모습(꿈에 불보살이나 광명을 보고, 혹은 꿈에 불법을 듣거나, 나쁜 음식을 토하거나, 혹은 유락(乳酪)을 마시거나, 일월, 공행모, 맹렬한 불, 사자좌, 미묘한 궁전 등을 보거나, 공중으로 나는 모습 등)을 보아야 효과가 있으며, 이참은 마음을 밝혀 견성(見性)하여 공성과 진실하게 계합해야 한다.
비록 불교에 이러한 각종 참회법이 효과가 있을지라도, 사전에 주의하여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유가사지론>에서는 만약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의 네 가지 근본계(性戒)를 범하면, 비록 깊은 참회를 통하여 죄를 없앤 후 다시 계를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현생에서 보살의 초지를 증득하는 것을 장애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승니의 바라제목차에는 동성연애 등 중대한 악업은 참회를 할 수 없다고 한다.(즉 승단에서는 그 참회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래서 쫓아내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