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단부는 사면이 튀어나온 亞자 형으로 사자,서유기,나한등의 조각이 있다
5층부터 10층까지는 다섯 혹은 세명의 부처를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원래의 형태를 알수없어 박공형태의 지붕만 복원하였다
고려 충목왕4년(1348)에 세웠다. 고려 목조건축의 다포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당시 불교교리와 사상을 잘 표현했다.
1995년 김영삼정권은 역사바로세우기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건물을 폭파시켰다. 당시 이 건물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당장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위치인 용산이 확정되었지만 박물관설계지침을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원래 설계지침은 박물관 중앙의 메인로비 한가운데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전시하도록 못 박고 있었다. 그러자 역사바로세우기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매판과 사대의 상징을 세운다는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탑은 중앙로비에서 밀려났고, 외곽인 동관 중심부에서도 1m떨어진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탑은 수려한 아름다움과 이국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되돌아오는 등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1960년에 이르러 경복궁에 복원되었으나 산성비와 풍화작용에 의한 보존상의 문제점이 드러나 1995년 해체되었다. 2005년 탑은 새로 완공된 용산국립박물관 로비에 우뚝 섰다.이제 태생적 업보와 수난에서 벗어나 새둥지에 안착하기를 소망해본다.
13세기 초 중국북방에 새로운 제국이 태동했다. 몽골제국이었다. 제국의 기마대는 무적이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 죽은자가 내동뎅이 쳐진 곳은 풀 한 포기조차 타서 없어진 처참한 폐허였다. 1231년 몽골군은 고려로 향했다.30년간, 고려는 유린당했다.1261년 고려는 항복했다. 이후 100년간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어 온갖 수모를 당했다.
유목민족의 통치는 잔혹했다. 농경민족의 지배는 다음해의 재생산을 위해서 생존과 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곡물은 남겨주었다. 하지만 유목민족은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이는 모든 것을 빼앗았다. 그런 수탈이 100년을 이어갔다. 몽골이 득세하자, 그들에게 붙어사는 친원 모리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동생과 딸을 원의 고관대작들에게 바치고, 백성들에게 수탈한 재물을 헌납하면서 그들은 고려에서 부와 권력을 쥔 새로운 특권세력으로 자라났다. 고려왕은 무력했다.
어떤 왕은 울었다. 또 다른 왕은 그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다른 왕은 한숨만 쉬었다. 무신정변과 30년 전쟁에서 기개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저항도 없었다. 신음소리와 체념 속에. 어서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면서 사람들은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기약 없이 계속된 원통치 100여 년간 고려의 문화와 풍습은 엄청나게 변했다. 몽골말과 글이 지배층의 상용어가 됐고 머리와 복장을 몽골식으로 하는 변발호복이 대유행을 했다. 원의 공녀징발을 피하기 위해 열살도 안 되는 어린나이에 시집보내는 조혼과 유부남에게 시집보내는 일부다처제가 생겼다.
건축계 역시 새로운 문물의 유입과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고려건축은 남송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이제는 북부의 건축유형들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다포형식의 보편화는 이시기의 특징이다. 고려건축의 흔적이 워낙 미미해 물증을 잡기 어렵지만 막강했던 원의 영향 하에서 고려건축은 심한 변화를 겪었다. 이시기 건축의 흔적가운데 경천사지석탑은 거의 온전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고, 건립목적이 뚜렷이 명기된 유적이다. 탑의 모양이 정교하고 아름다운데다 공포부재의 첨차와 서까래, 부연까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어 한국석탑의 대표작중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이탑의 조성배경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탑의 조성을 주도한 이는 강융과 고룡봉이다. 미천한 출신인 강융은 몽골에 부역하여 출세가도를 달렸고 자신의 딸을 원의 승상인 탈탈에게 첩으로 주어 부원군의 직위까지 올랐다. 고룡봉은 원황실의 내시로 내정간섭으로 악명을 떨친자다. 이들이 작당하여 탈탈과 기황후의 복을 비는 원찰로 경천사를 지어 바쳤다. 경천사탑 1층 탑신에는 이탑을 만든 목적과 시주한 자들을 기록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조탑의 목적은 원의황제부부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이다. 몽골간섭기의 일반적축원문이 원황제와 고려 왕실을 함께 축원하는 것에 비해 이 탑은 오로지 원황제와 황후,황태자만을 축원하고 있다. 더욱이 원에서 직접 장인들을 모집하여 그들의 솜씨로 설계하고 시공한 완벽한 수입품이었다. 이 내용이 아니더라도 이탑에는 이국적 요소들이 너무 많다. 10층인지 13층인지 불분명한 구성양식, 亞자형의 평면양식,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정교한 조각, 완벽한 목조건축물의 외관 등 한국탑파사상 유일한 존재이며 돌연변이다.
후일 원각사탑이 이 탑을 모델로 만들어졌지만 일회적이고 한국 탑파사에 양식적계통을 만들지 못했다. 결국 이 수려한 탑은 원지배당시 물밀듯이 수입되어온 외래건축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비록 조성배경이 반민족적이더라도 이탑의 예술적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일찍이 이탑의 조형미는 높이 평가되어 왔고 그때문에 많은 수난과 오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대리석은 재질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정교한 조각에 최적이지만, 풍화 작용과 외부자극에 약해 쉽게 손상된다. 이런 탑이 일제강점기때 해체되어 두 번이나 바다를 건넜으니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련은 끝났는가, 탑은 국립박물관 외진 곳에서 말없이 서서 관람객들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