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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
오늘은“감리교회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따르는 단체를 "기독교"라고 부르는데, 기독교단체에는 여러 교파로 나누어져 선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교단을 든다면 “감리교, 장로교, 순복음, 침례교, 성결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와 더불어 한국 기독교계를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교단이며, 이 땅에 복음을 심고 자라온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단입니다.
우리나라에 고종황제의 허락을 받아 정식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85년의 일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 북감리교회 소속 맥클레이 선교사님이 1884년 6월 24일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선교를 허락받고 일본으로 돌아가 미국에 있는 선교기관에 이를 보고함으로 "미국 북 감리교회에서 의료 선교사로 스크랜톤 부부와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 그리고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선교를 위해 아펜젤러 부부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북감리교회에서 파송받은 5명의 선교사는 일본을 걸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이미 한국선교에 뜻을 두고 일본에서 개인적으로 한국선교를 준비해 오던 미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게 되고 뜻을 같이하여 1885년 4월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에 배를 타고 도착함으로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는 감리교회의 2가정 5명의 선교사와 장로교회의 1가정 1명의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와 의료와 교육사업을 시작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장로교회는 미 북장로교 뿐만 아니라 미 남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가 동참하게 한국을 선교하게 되었고, 감리교회는 미 북감리교회에 이어 남감리교회가 10년 뒤늦게 1895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감리교회의 탄생과정과 감리교의 신앙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감리교회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⑴ 감리교회와 요한 웨슬레
감리교회는 영국 국교회(영국성공회) 목회자 가문의 자녀이며,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이었던 요한 웨슬레 목사님에 의해서 최초로 시작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1703년 6월 17일 영국의 링컨 주에 있는 엡윗교회의 목사 사무엘 웨슬레와 그의 아내 수산나 웨슬레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탄생하였습니다. 웨슬레는 근엄하고 경건하며 양심적인 아버지와 견고한 신앙과 근엄한 행동과 부드러운 자애를 겸비한 어머니 수산나 밑에서 엄격하고 규칙적인 가정교육과 성서를 중심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웨슬레는 10살까지 부모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17세까지는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하는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720년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의 크리이스트처지(신학대학)에 입학하여 5년 후에 졸업을 하게 된다.
웨슬레는 졸업과 동시에 대학 조교로 있으면서 2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엄격하고 규칙적인 종교생활을 하며 지내게 되는데,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 그리고 사회문제를 토의하였고, 빈민구제, 감옥전도, 문명퇴치운동 등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 종교에 무관심하고 타락한 많은 학생들은 요한 웨슬레를 중심한 그들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메소디스트(Mathodist, 규칙쟁이, 나중에는 감리교단의 정식 이름이 됨)" 혹은 "성서벌레"라는 별명을 지어 조롱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래도 웨슬레는 신앙의 동지인 "메소디스트"들을 영도해 나가면서 "절대봉헌", "내적순결", "자기부정"이라는 신조아래 공동체의 신앙훈련에 힘썼습니다.
⑵ 요한 웨슬레의 회심과 성령체험
1735년 요한 웨슬레는 그의 동생 챨스 웨슬레(찬송가 작곡가. 선교사, 6000여곡 작사, 그중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14곡이 실려있다[16,23,26,45,105,126, 154,161,269,280,338,372,441,527])와 함께 선교사로 미국에 파송받아 갔다가 1738년 다시 영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웨슬레는 미국에서의 선교활동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매우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후 웨슬레는 영적 패배자로서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새롭고 권능있는 은혜를 사모하여 왔습니다. 바로 그러한 신앙적 위기를 직면하였을 때 그의 신앙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감격스러운 경험을 체험하게 됩니다.
웨슬레는 그 경험을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날 저녁(1738. 5. 24)에 나는 친구의 손에 이끌리어 마지못해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어떤 이가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저녁 8시 45분경 그가 '예수 스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때 나는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해야 함을 확신하였으며, 그가(그리스도) 나의 죄를 온전히 없이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올더스케이트에서 얻은 영적 체험을 통하여 위대하고도 성공적인 생애가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⑶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웨슬레의 영적 체험은 그를 위대하고도 성공적인 전도자의 생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의와 낙담에서 일어나 새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음, 곧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할 것을 결심하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전도와 봉사를 향한 그의 열성과 실천은 그 당시 타락된 영국교회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특권의 행사와 부도덕한 향락을 즐기던 교회 지도자들은 웨슬레를 “열광주의자”, “전도광” 혹은 “죄인과 노동자의 친구”, “교회질서의 문란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런던, 옥스퍼드, 브리스톨 등 많은 교구에서 그에게 설교할 강단마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웨슬레는 좌절하지 않고 "온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며 모여드는 수 천만명에게 노천(길거리)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방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웨슬레의 "메스디스토(감리교)"운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수 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격하였고, 회개운동과 함께 하나님의 죄 사하심과 신생(거듭남, 영적 어린아이)의 기쁨을 경험하는 사건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이 영적운동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조직적인 영성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고 “메소디스트”들을 규합하여 "성도회(Society)"를 조직하였습니다.
바로 "메소디스트 성도회" 창설이 조직적인 감리교 운동의 시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2. 한국 감리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한국에 감리교회가 시작된 것은 1884년 6월 24일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주관하고 있던 맥클레이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여 최초의 감리교인이 된 윤치호의 통역으로 고종황제를 만나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선교를 허락 받습니다.
그리하여 미 북감리교회 선교부에서는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톤 부부, 그리고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한국에 파송받은 5명의 선교사들은 일본을 걸쳐 1885년 4월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옴으로써 최초의 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개신교 역사상 국왕의 허락을 받아 한국에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감리교 선교사들은 민족 계몽운동과 봉사에 강조를 둔 선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빛을 주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특히 3․1운동 당시 33명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으며, 16명의 기독교인 중 9명이 감리교인이었고, 서재필 박사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인 이희호 여사는 서울 신촌에 있는 창전감리교회 원로장로로 임직 중에 있으며, 신바람 건강법 강의로 유명한 황수관 박사는 잠실에 있는 강남중앙감리교회 장로로 임직중에 있습니다.
이와같이 일제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감리교회에서 배출한 훌륭한 인물들이 각 처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감리교회의 자랑입니다.
감리교 계통의 학교로는 감신대, 목원대, 협성대를 비롯하여 이화여대, 연세대(연합) 배재대 등 12개 대학과 60여개의 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영남지역이나 호남지역에 가면 감리교회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개신교 선교 초기 교파간의 선교과열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지역을 분할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1905년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부할 정책의 합의에 따라서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은 장로교회가 선교를 관할하는 지역으로, 강원도, 충청도 지역은 감리교회가 선교 관할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선교를 시작하다가 1950년 6․25 동란을 기점으로 이것이 철폐되면서 각 교단들이 어느 지역에서나 선교할 수 있도록 되었습니다.
따라서 감리교회가 호남이나 영남지역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6․25 동란이 끝난 후 피난 내려온 감리교인들에 의해서 1953년부터 시작되었기에 형제교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로교회에 비하여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감리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의도적으로 감리교회의 교리를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한 권이면 충분히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감리교의 교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구태여 교리(신앙생활의 기초적인 이론들)를 원한다면 감리교회의 모체인 영국교회를 보라”라 하였습니다. 또한 "감리교와 장로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감리교의 특징을 말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굳이 감리교의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개성이 있듯이 감리교 나름대로의 특징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웨슬레는 감리교회의 산앙은 다음 4가지 기초위에 서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성경, 전통, 이성, 경험입니다.
①“성경”은 모든 감리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표준적인 신앙생활의 잣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②"전통"은 사도적 전통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도들의 신앙과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한다는 말입니다.
③“이성"은 검증은 통하지 않은 신앙은 위험에 빠지기 쉬우므로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에 의해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경험"은 웨슬레의 올더스케이트 체험처럼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러한 영적인 체험이 있을 때만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감리교회는 위와 같은 4가지 신앙의 기초 위에 다음과 같은 7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⑴ 감리교회는 누구든지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음을 믿습니다.
감리교회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와 사람들 각자의 믿음의 응답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은혜는 믿음으로 응답할 때 효과가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⑵ 감리교회는 뜨거운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평생동안 말을 타고 40만 킬로를 전도여행을 다닐 정도로 뜨거운 전도의 열정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초기 감리교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⑶ 감리교회는 영감 넘치는 찬송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다.
감리교회는 성령의 감동으로 생명력 넘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통입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의 동생 챨스 웨슬레는 세계적인 찬송시 작아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챨스 웨슬레가 지은 찬송이 우리가 잘 아는 23장(만 입이 내게 있으면)을 비롯하여 16곡이 실려 있습니다.
⑷ 감리교회는 교회 안의 교회인 “속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부흥 원인은 속회의 활성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속회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서 지역별로, 연령별로 몇 가정씩 공동체를 이루어 돌아가면서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하고,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사랑공동체입니다.
타 교단에서는 구역예배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없었던 것이며, 감리교회가 속회를 통하여 부흥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 구역예배입니다.
⑸ 감리교회는 교육에 힘씁니다.
한국에 들어온 감리교회는 수많은 학교와 병원을 세워 민족의 정신을 계몽하고 발전시키는데 어느 교단보다도 가장 앞장 서 왔습니다. 오늘날까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감리교회 계통의 학교들과 병원들이 그 역사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교회학교(타 교단에서는 주일학교)를 창설한 “로버트 레익스”라는 사람도 감리교인이었음을 감안할 때 감리교회는 다른 어떤 교단보다 일찍부터 사회교육이나 교회교육에 눈을 뜨고 실천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⑹ 감리교회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개인구원은 자연스럽게 사회구원에까지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전도에 힘쓰는 한편 고아와 과부, 노인과 빈민, 노동자 복지에도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회제도와 구조의 개선을 위해 일해왔습니다.
노예제도 폐지운동, 절제운동, 감옥 개량운동, 미성년자 노동철폐운동, 고리대금업 폐지운동 등은 초기 감리교인들이 펼쳤던 유명한 사회운동이었습니다.
⑺ 감리교회는 교회의 일치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감리교회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을 가진 교단으로써 누구와도 손잡고 함께 일하는 교회입니다. 감리교회는 교파에 의지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라면 어느 교파와도 손을 잡고, 형제애로 사랑을 나누며, 주안에서 하나되도록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이상과 같은 특징은 감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