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동은) 지금 현재 세대수가 7천세대네요.
참가하시는 분들은 산신각에가 들어가서 그날 제를 지낼 때는 장소가 협소해가지고서는 한 50명, 그런데 인제 제를 지내고서는 끝나고서는 이 동사무소, 처음에는 동사무소가 아니라 가정집에서. 주로 저희 집에서 한 200명이 모두가 이제 관심을 갖고 치성금을 내신 분들,
또 지역 유지들 해서 통장들이나 관민단체장들 해서 우리 집에서 한 200명 같이 그날 저녁에 제 지내고 나서 음복을 하시고.
제주(祭酒), 그 당시만 해도 제가 저희 집에서 동네 분들을 그날 저녁에 제를 지내고 나서 음식을 나눠 먹을 때는 술을 담았었습니다.
곡주를 담아서 그걸로 해서 제를 지내다가 저희집에서 한 5년간을 저희 집에서 하다가. 그때만해도 참여한 우리 7천세대에서 우리가 그때만해도 통이 30개통이 있었는데, 지금은 23개 통으로 줄어졌습니다.
그래가지고서는 그때 참여 통이 한 15개통. 제가 그 처음 저희집에서 할 때는 하다가 동사무소에서 언제부터 이것을 했었냐면 소를 사놓고 제를 지내는데, 동에서 지방자치화가 됐을 때부터. 지방자치가 되고 나서 구에서 매년 우리가 그 제를 지내는데 5백만원씩 받았습니다.
그러고 주민들이 치성금 걷는 돈 해서 한 1500(만원)에서 1700(만원), 예산이. 그 돈으로 이제 소를 잡아서 제를 지내고서
그날 저녁에 우리 동사무소 2층 문화마당에서 각 지역 유지분들 주민들 한 3백명이 그날 저녁에 떡에다가 술에다가 뭐냐면 소 내장을 끓여서 같이 모두 동네 안일무사,
보문동 화합발전을 위해서 한 2~3시간 동안 2층에서 서로 한마음 뜻에서 하고서 그 나머지 고기는 과거에는 그것을 저 치성금 내신 분들한테 나눠줬지만은 구에서 지원받은 뒤로부터서는 그걸 가지고서는 그 이튿날 노인잔치, 노인잔치를 해드렸습니다.
이 보문동이 제1노인정, 제2노인정이 있었는데 그것을 해가지고서 여기서 그 이튿날 전부 국악인들,
그 여러 동신초등학교 또 대왕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와서 즐거운 장기자랑 같은 것을 해줘서 그날 노인분들하고 그 지역에 모두 관민단체 회원들하고 같이 그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제물 음식 준비는) 처음에는 전부 저희 집에서 다 했었죠.
저희 집사람이 그 누룩을 경동시장에서 사다가 항아리에다가 누룩하고 찹쌀하고 해서 곡주. 술이 보통 한 1주일. 저희 집에서 할 때는 전부 이 어디냐,
마장동 소, 우시장에서 잡는 사람을 그 사람을 데려다가 전부 부위를 (갈라서). 전부 첫 날, 예를 들어서 내일 제를 오후 5시에 지낸다면 전날, 오늘 소를 몰고서 지신밟기를, 뭐냐 하면 풍악을 울리면서 동네 무사안일,
태평성대를 기원하면서 동네를 돌면 또 그날 지신밟기를 동네 각 점포나 가게에서 와서 또 거기에다가 조금씩 다들 치성금들 내는. 지신밟기는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음식준비는 지금 부녀회, 여성단체에서 맡아서 지금 하고 있어요. 제가 맡았을 때는 제가 한 78년도나 그렇게 됐을거에요.
행정구역상 (넘어온 것)이고, 그때도 같이 노인네들이 참여를 했었죠.
바로 우리한테 넘겨준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면서 같이 우리 보문동 주민들하고서 뭐든 주관을 숭인동 노인들이 주관을 했는데,
행정개편이 되면서부터는 우리하고 같이 동참을 하자 해서 한 78년도까지 하다가 그 뒤에는 완전히 여기 주민들이 책임과정이나 준비를 우리 보문동 주민들한테 이관을 시켜준거죠.
부녀회에서 하는 것은 아마 한 90년도부터서. 공백이 한 5년이 있죠, 한 5년은 처음에 인자 뭐냐면 이 집에서도 한 1년 해보고 또 저 집에서도 한 1년 해보다가 제가 뭐냐면 한 5년 간을 계속해서.
그 당시 지역에서 덕망이 있고 좀 나이가 먹으신 분 해서 그게 또 이 산신각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시고 한 분 한테. 그 분이 새마을의 뭔가. 두 분 다 돌아가셨네. 한 분은 한병철. 이 두 집에서 도왔습니다.
이 집에서 한 두 번 했고, 이 집에서 한 세 번 했고 그랬을거네요.
(제보자가 주관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이 참여하신 분들?) 지금도 생존해계시죠. 지금 그 중에서 제일 관심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해서 하장홍씨라고. 그 분이 정기적으로 구청에서 지원을 해주기 전에는 개인적으로 돈 백만원씩 지원을 해주고 그 분이 항상 제를 지낼 때면 제주를 자기가. 오래 하신 분이죠.
저희가 처음 할 때는 3천원, 5천원 뭐 만원 좀 인저 각 단체에서는 5만원도 내고 10만원도 관민단체에서 이름으로 (내고). 제가 할 때는 쌀로는 안내고 전부 현금으로 (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지금은 소 값이 비싸서 소 한 마리 해서 우시장에서 직접 사가지고서 우리 잡는데까지 한 6백만원이 듭니다.
만약에 구청에서 지난 해는 예산이 부족해서 4백만원인가 지원이 받았는데, 나머지 금액은 전부 주민들이 그러면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노인잔치를 그 이튿날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 선물을 또 수건을 한다, 양말을 한다 해서 그날 해서 여러 가지 잡 비용이 거의 소 값보다 더 들어갑니다.
떡 값이니 뭐 해서, 밥 값이니 해서 한 700~800만원. 소는 분명히 우리가 고릅니다.
황소를 삽니다.
이 암소는 절대 안사고 황소에서도 소를 살 때는 거기 가서도 소가 예를 들어서 몇 십마리가 있어도 딱 우리가 제일 좋은 소로 잘 생기고 제일 좋은 소로 사면서도 가격은 단 돈 일원도 깎지를 않고. 소는 화천, 춘천, 작년에는 충청도에서 , 작년 재작년에는 충청도 홍성. 지방에까지 갑니다.
소는 우리가 빠르면 3일, 5일전에 가서, 현지에 가서 연락을 해서 표시를 해 놓고. (동망산신제가) 내일 저녁이라면 오늘 저녁에 지신밟기를 해야 하니까는. 소를, 소 싣고 다니는 차 있지 않습니까?
그 차를 가져와서 소를 실어오죠. (숭인동 때랑) 많이 달라졌죠. 어떤 면에서 달라졌냐면 그 당시에는 주관하시는 분들이 없없어요.
그 노인네들이 주로 통장님들이나 노인네들, 노인분들이 주관을 했는데, 지금은 모든 주민들이 다 아주 동참을 해서 어떻게 보면 우리 동민의 화합에 마당이 돼서 이 보문동 발전해서 모든 그런 뜻에서 그날이 어떻게 보면 보문동 문화행사로서 좀 격상이 되가지고서는.
(숭인동 주관 때는 노인잔치를) 안 했었죠
. 제를 지내고서 주관하신 분들 노인네들 해서 그 당시에는 도가집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제를 그날 모든 음식을 만들어서 그날 자기 집에서 참여한 사람들 술 한 잔씩, 도가집이라고 하는데, 고기만 해서 아까 제가 말씀대로 치성금 내신 분들한테 고기만 나눠드리는데 확대하게 하진 안했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인구가 많지 않았지 않았어요
, 70년대만 해도. 만약에 음력 10월 초하룻날 제를 지내는데, 고 일주일 전에 이 마을에, 이 주변 반경 한 5백미터 안에서 상(喪)을 당했을 때는 날짜를 연기를 했습니다.
삼오제 지내고 난 다음에 하기 때문에 한 1주일간 (산신제가) 연기가 됩니다.
그러고 해서 제가 할 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지켰었어요.
그런데 인제 너무 이거는 뭐 하루 뭐 매일 같이 동네일이고 상도 아니, 상도 돌아가신 분도 있고 이것은 동네일이다 해서 우리가 없애버리자 제에 참여하는 사람네는 한 달 동안은 우리가 일절 여자 곁에도 가지 않고, 목욕도 깨끗하게 참신, 참신한 마음으로 해서 정성껏 한 일주일 열흘 전에는 몇 미터 안에는 새끼, 짚 새끼 있지 않습니까,
쉽게 얘기해서 어린애를 낳으면 금줄을 한단 말이 있잖아요, 금줄을.
제상 음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제상에는 소머리하고 소 족, 발하고 과일하고 떡하고. 지금은 막걸리를 사다가.
(지신밟기) 지금도 문화행사로 해서 주민들이 그 뒤에 과거에는 통장님이나 새마을지도자나 우리 노인정의 사물놀이, 국악인도 있었고, 노인네들이 앞에서 사물놀이 하면서 주민들도 많이 참여를 하고. 다른 데는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서는 오래 전통문화행사로서 하니까 종교에서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기와가 좀 망가져서 금년에 그러지않아도 우리 동사무소에서 예산을 해서 구청에다 올렸더니 구청에서 수리비가 2천 나왔어요,
왜냐면 산신각이나 조선기와에다가 또, 단청 하니까는 생각에 우리는 한 5백만원만 가졌으면 그걸 좀 수리를 하겠는데, 견적을 전문가들이 보고 하니깐 얼마가 들어간다고 하니까 아직 보수를 못하고 있네요. 안에가 초상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초상화가 산신령, 도령을 초상을 하나 있습니다.
예전부터 처음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초상화가 지금도 그대로. 제관을 제주는 우리 지역에서 제일 덕망이 있고, 참 누가봐도 존경하고 나이가 좀 잡수신 분이 항상 제주가 됩니다.
그리고 제관은 우리 동장이 하고. 아헌, 초헌 그런 분들이 지역 덕망 있는 유지분들이. (작년에 제주) 마을문고 이사장 오영작 씨가. 그분이 38년생인가 될거예요.
그 앞서서는 하장홍 씨라고 그 분이. 뭐냐면 지금 제주는 오영작 씨가 하시고, 제관은 동장 안명우 씨가 하시고, 초헌은 우리 구의원 윤만환 씨가 하시고, 아헌은 하장홍 씨. 제가 이제 거기서 절차를 항상 거기서 집사를 주로.
그렇게 부정 탄 사람은 자기네들이 알면서 참석을 안하고 우리 지방의 성북신문이나 그런 여기자들도 와서. 이제는 여성분들도. 과거에 80년대나 90년대에는 여자분들을 일절 출입을 못하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자분들도 절만 못하게 하지 거기 와서 이런 것은 (괜찮다). 남자들만 (참석). 음식을 먹을 때는 지역에서 여성 관민단체 해서, 그런데 (여자분들은) 주로 안왔죠.
음식 장만 하는 것 이외에는 여성분들이 별로. 결산은 위원장이 모여서 총무가 있어요.
총무가 지금 뭐냐면 이성백씨라고. 그분이 전부 수입 결산해서 또 월례회의를 해서 보고를 하고, 나머지 금액은 적립을 해서 다음해에 쓰기 위해서.
과거에서 숭인동에서 할 때는 노인분들이 모여서 하기 때문에 내가 날짜를 모르는데, 지금은 우리가 우리 보문동으로 이전이 돼서 추진을 하는 것은 한달 전부터,
왜냐면 각 관민단체장님들 통장님들 해서 거기서 모든거 이런 우리 거기에 총 소요경비, 또 우리가 이 음식관계, 이튿날 노인네들 어떻게 접대해야하는 것을 한달 전에 같이 단체장이나 통장님들하고 논의해서 연석회의를 해서 결정을 해가지고서는. 산신제는 저녁입니다.
보통 5시, 오후 5시. 초저녁입니다.
왜냐면은 음력 10월 초하루면 5시면 해가 어둑어둑하니까.
몇 년도냐면 그 해가 80년도인가, 79년도인데, 나도 모르겠네요 그 햇수가. 그해에는 그때 이 정부에서 계엄령 하에서 그 전두환, 집회 자유가 일절 불허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여야 하는데 못해서 그해 한 해 딱 안 지낸 해가 있었어요.
제사지내고 나서는 축문은 태우죠. 소지 다 올리죠. 참여하신 분들은 다 그 자리에서. |